미 신보수주의적 정책에 반기를 들어야

2015-02-02     도미니크 드 빌팽

 

미 신보수주의적 정책에 반기를 들어야

 

 

이란, 시리아, 러시아, 가자지구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프랑스의 외교정책을 보면 미국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미디어의 집중 조명을 받는 사건들에 대해 프랑스는 중구난방으로 대응하며 그저 군사개입과 도덕적 설교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프랑스의 이라크전 참전 거부에 불을 댕긴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가 프랑스의 이런 총체적 외교 노선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해봤다.

 

도미니크 드 빌팽 | 전 프랑스 총리

 

프랑스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다. 점차 군국주의와 도덕주의, 서구주의 노선을 널리 표방하며, 과거 드골주의가 구현했던 자주독립, 대외적 영향력, 균형을 중시하던 외교정책에서 자꾸만 등을 돌리려 한다.

여기서 우리가 군국주의를 운운한 것은 그저 프랑스가 리비아나 말리, 중앙아프리카, 이라크 등에 이르기까지 군사적으로 다른 나라에 개입하는 빈도가 늘어나서만이 아니다. 사실 본능에 따른 즉각적인 최초의 반응은 정당화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군국주의를 논하는 것은 프랑스가 실질적인 전략도 없이 때로는 나 홀로 최전선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는 일이 점차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자주 애초 승산 없는 싸움이라 확신하던 이들마저도 정말 기이하게 수 시간 만에 전부 하나같이 승리의 망상에 빠져들곤 한다. 차마 참아내기 힘든 온갖 끔찍한 참상으로 얼룩진 영상은 어느새 미디어의 논리에 따라 스펙터클한 전쟁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하고 만다.

 

국가이성의 추락과 퇴조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명분은 바로 도덕이다. 위기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수많은 해법이 난무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 하나같이 비난·처벌·배제라는 세 가지 해법으로 환원된다. 도덕은 외교가 남긴 빈자리를 대신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권에서 외교의 위상은 한없이 약화되고 있다. 국가이성(reason of state, 자기목적적 존재로서의 국가를 유지·강화하기 위해 지켜야 할 법칙 또는 행동기준-역주)이나 기밀주의, 국익우선이라는 가치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탓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부류의 국가들하고만 대화를 할 뿐, 그 밖의 나라들은 모두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고립의 악순환과 독재 일탈의 위험을 부채질하면서까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도덕주의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서구주의다. 어느새 서구주의는 ‘프랑스적 예외’라는 가치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닐 정도로 우세해졌다. 많은 프랑스인이 쇠퇴 문명의 선봉장을 자처하며 기꺼이 ‘자유세계의 지도자’인 미국의 뒤에 줄을 선다. 때로는 그들의 욕망을 앞서가면서까지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 몰레, 수에즈 원정, 대서양주의 노선의 회귀를 목도하고 있다. 말하자면 파쇼다 사건을 일으켰던 제3공화국 시절과 멕시코 원정, 크림 전쟁을 벌였던 제2제정 시대를 추종하는 모습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1) 프랑스가 망상에 사로잡혔던 시기마다, 시끌벅적한 소란 뒤에는 언제나 깊은 침묵이 감춰져 있었다. 프랑스는 짐짓 과장된 몸짓을 지어 보였지만 정작 제 목소리를 내는 법은 결코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가 누구인지는 별로 상관없었다. 프랑스가 경쟁적으로 전쟁에 몰입하는 모습은 언제나 프랑스가 존재론적 회의에 빠져 있거나 혹은 잔뜩 수세에 몰려 방어태세로 몸을 움츠리고 있는 시기(1870년 알자스로렌 지역을 빼앗기는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고, 새로 들어선 공화정이 점차 약화되던 시기, 1940년 7월 전쟁에서 패배하고 독일 점령을 벗어나기까지 보낸 힘겨운 시간들)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일 뿐이었다. 예민한 감수성의 나라 프랑스는 언제나 세계의 고통을 자기 내부에서 풍겨져 나오는 퀴퀴한 곰팡내와 혼동하곤 했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집단적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계화에 대한 두려움이다. 프랑스도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다. 스스로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유럽통합은 강제적으로 민족국가의 주권을 약화시켰다. 세계화는 중상주의(콜베르티즘) 위에 세워진 한 나라의 모든 경제적 수단을 앗아가 버렸다. 미디어 민주주의도 나태함과 이익단체의 득세, 무의미한 정권교체를 활성화하는 토양이 되었다.

 

세계화 파고 속에 프랑스 근간의 몰락

 

프랑스는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거센 변화의 바람에 휩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와 소비지상주의의 높은 파고 속에서 가족·종교·사회의 집단적 근간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불과 40년 만에 프랑스인의 생활방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이주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인구도 세계의 다양성을 구현하듯 바뀌고 있다. 심지어 인종 간 갈등 양상까지 고스란히 나타날 정도로 말이다.

프랑스는 깊은 회의감에 사로잡혀 있다. 지난 과거가 오늘의 세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유산은 치욕스러운 과거의 기억(노예제도, 식민지, 대독협력)으로 인해 스스로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번번이 프랑스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되고 만다.

더욱 더 비극적인 것은 세계의 변혁이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에 불씨를 댕기며 각국의 역할을 뒤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가 다극체제로 급격히 변화하면서 오늘날 신흥 강대국들은 그 위상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국가들이 대개는 오랜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나라로, 절대 그 무엇도 양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중국은 중국해에서 벌어지는 영토분쟁에서 단 한발짝도 물러서려 하지 않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구소련 국가들에 대해, 인도는 카슈미르 지역에 대해 절대로 양보하는 법이 없다.

디지털 문명과 결합된 세계화는 각 나라가 서로 더욱 긴밀한 영향을 미치고 의존적이 되도록 부추기면서 민족국가를 자연스레 해체하고 있다. 말하자면 각 민족국가들이 가령 이슬람주의나 유럽의 포퓰리즘, 중국·일본의 국수주의 또는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세력의 분리주의 운동과 같이, 일정 인종·종교·언어·파벌과 관련한 집단 히스테리의 포로가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리비아·이라크·시리아 등 오늘날 사헬지대에서 동남아시아 지역에 이르기까지, 내부 붕괴 위험에 처하거나 혹은 이미 파탄이 날 대로 난 국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정체성의 불길은 모든 위기의 진앙지를 서로 이어주며 서구적 질서에 반기를 든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한편 각 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와도 같은 주권이 한껏 약화되면서 국제법의 기초도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있다. 가령 2003년 미국은 정권의 보호나 혹은 정권의 개혁이라는 도덕적 명분을 앞세워 온갖 국제법을 무시하는 일방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권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크림 반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더욱이 오늘날 주권국가들은 혼자 힘만으로는 결코 사태를 제어할 수가 없다. 주권국가들은 인터넷이나 금융 부문에서 세계 표준을 선도하는 글로벌 공룡 기업들이나 혹은 위키리크스·그린피스 등을 위시한 각종 비정부기구(NGO)와 범죄조직, 혹은 국경을 초월한 다양한 활동가들로 인해 각종 도전과제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예측불허, 무법천지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는 이중 플레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음흉함 혹은 광기를 통해 언제든 판을 뒤엎을 수 있는 자들이 언제나 승리를 거머쥐기 마련이다.

먼저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폐쇄적이 되도록 부추기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의 위상(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위상, 핵 억제력 등)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자. 대신 대변자의 역할, 위기 발생 시 중재자의 역할, 대화 촉진자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나가도록 하자. 우리의 정체성은 기성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생명이 전부 존중받을 수 있는 보편사회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예리하게 자각하는 나라, 그것이 바로 우리 프랑스의 정체성이다.

 

지구촌 곳곳에 개방성의 가치 고양해야

 

우리의 자산은 개방성에 있다. 다시 말해 프랑스어권 지역과 해외영토, 유럽연합과 문화가 바로 프랑스를 풍요롭게 하는 자산이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외교정책을 재정립해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지역공동체나 학교, 싱크탱크, 시민단체 등을 통해 관계를 맺어나가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민족 대 민족의 외교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다 균형 잡힌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의 관계에 기초한 민주주의적인 외교를 지향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뻗칠 수 있는 외교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바로 지구촌 곳곳의 분쟁사태다. 단순히 위기 발생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제3차 인티파다 위기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각 국의 위기가 점차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너무도 자주 도외시하는 부문, 즉 그같은 위기가 일어나게 된 정치적 원인들에 집중해야 한다. 가령 말리 투아레그족이나 이라크 수니파의 위상에 관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흡사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예측가능하고 근시안적인 즉각적 대응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단과 원칙이 필요하다. 먼저 아무리 실망스러운 법일지라도 국제법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또한 무력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도록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주체들의 역할이 최우선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정치를 중요시할 때 비로소 대화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도 대화를 할 수 있다. 또한 정치를 중요시할 때 비로소 과정의 필요성도 인식할 수 있다. 요컨대 미리 계획된 일정에 따라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타협안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을 밟아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전 세계가 너무 현재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오늘날, 프랑스만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역사와 지리, 문화를 고려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파블로프의 개’의 즉각적 대응 벗어나야

 

가령 오늘날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이슬람국가조직(<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IS를 국가가 아닌 조직으로 보고 이슬람국가조직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역주)이 독재적이고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직은 시아파 민병대에 겁을 집어 먹은 수니파 세력들과 잠시 결탁해 약육강식이라는 해법으로 조직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을 도구 삼아 중동 일부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이제 ‘테러와의 전쟁’은 크나큰 과오임이 드러났다. 대터러전은 이슬람국가조직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존재감을 알리고 정당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수니파 세력들이 이 조직을 중심으로 한데 결집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터키·사우디아라비아 등 해당 지역의 국가들이 각자 검은 속내를 가지고 제 역할을 방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이들 조직의 숨통을 서서히 조이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먼저 석유 수출이나 밀매로 벌어들이는 수입과 걸프만 국가들의 후원금을 끊어 재정적인 면에서부터 숨통을 조여야 한다. 다음으로 영토 면에서도 숨통을 조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이라크·시리아의 쿠르드족이나 요르단인, 레바논인의 지원을 통해 이들이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해나가지 못하도록 저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바로 정치적인 면에서 숨통을 조이는 일이다. 요컨대 이슬람국가조직에 대한 모든 지원을 차단해야 한다. 이 말은 곧 이라크의 경우에는 통합정부를 구성하고, 특히 개헌을 통해 수니파 세력이 행정부나 군 조직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시리아의 경우에는 국제사회의 중재 능력을 통해 점진적인 정치 이양을 실현하며 괴물들의 대결로 전락한 내전 사태를 종식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위한 열쇠는 바로 이란과 걸프만 군주국들, 그리고 러시아가 모두 참여한 지역 차원의 협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란에 합당한 지위 인정해야

 

오늘날 이란의 핵 확산과 관련한 협상은 일대 전환점에 놓여 있다. 프랑스는 2003~05년 영국, 독일과 함께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현 수준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합의안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11월 잠정적 합의를 이룬 데 이어 핵 협상을 연장하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합의안을 작성하던 시기 최종 협상을 타결 짓는 데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랐다. 당시 공화당이 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데다, 중동 사태가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실패를 증명하듯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역시 병환 중에 있었다. 그래도 이미 협정 체결을 위한 기술적 토대는 마련해 놓은 상태다. 가령 아라크 중수로나 혹은 그 외 이란이 가동할 수 있는 원심분리기 수와 관련해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란과의 핵 협상 중단은 상당히 중대한 위험 요소로 보인다. 사실상 이란은 지역 균형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유구한 문명을 지닌 나라에 그에 합당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 즉 여러 세계를 이어주는 가교로서의 위상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세 번째 큰 위기는 우크라이나 사태다. 우크라이나는 거의 파탄 직전까지 간 분열된 나라로, 가스와 관련해서는 러시아에, 무역과 관련해서는 유럽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국가이다. 대체 ‘유로마이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2) 그것은 바로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와 경기침체, 무능한 행정부를 향한 대중의 염증을 의미한다. 애초 유럽연합과의 통합이 추구했던 목표는 우크라이나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었지, 결코 러시아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2004년 ‘오렌지혁명’과 2009년 ‘가스 전쟁’ 이후 서방과 러시아가 서로 불신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양측의 불신은 특히 미국의 독자적 행보와 유럽국의 분열로 인해 더욱 심화됐다. 소련 붕괴 이후 온갖 굴욕을 당하며 형식적으로나마 어떻게든 복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오던 한 제국에게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연합 협정 체결은 가뜩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확대로 인한 불안감이 큰 상황에서 더욱 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처럼 비쳐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동결분쟁’(전면적인 군사 대립은 종료됐으나, 평화조약이 맺어지지 않았거나 정치적 불안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역주)이 되기에는 너무도 중요성이 큰 나라다. 얼마 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도 말했지만, 오늘날 유일한 탈출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바이마르 3국(독일, 프랑스, 폴란드), 영국, 미국으로 구성된 접촉그룹을 만들어 대화를 재개하는 길뿐이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의 헌법 개정 문제는 물론, 군 중립성과 경제 부흥, 행정·사법부 재구성 등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도 점진적인 완전한 협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실체 인정해야

 

우리는 미래 핵심 지역으로 부상할 지역에 대해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중동 지역이다. 사실상 중동은 근 30년 가까이 역사적 근대화에 따른 위기로 시름하고 있다. 현재 식민 지배를 벗어난 나라들의 비종교적 성향을 지닌 민족주의자들과 서구식 근대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슬람주의자들, 그리고 민주주의 자유와 기회의 균등, 문호개방 등에 관심이 많은 중산층 출신의 젊은이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유럽과 중동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두 지역은 역사적으로 상대를 통해 스스로를 규정해왔으며, 상대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관계였다. 그럼에도 유럽은 온갖 변덕을 부리며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유럽은 때로는 ‘아랍의 봄’ 혁명가들을 스스로 대신하거나, 또 때로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득세할 것을 너무도 우려한 나머지 독재정권의 품에 기꺼이 안기기를 서슴지 않았다. 당연히 중동의 민주주의 이행은 지난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도빌 파트너십’을 넘어선 유럽차원의 경제·정치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3) 프랑스에게 중동은 너무도 중요성이 큰 지역이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인구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면서도, 정작 알제리 전쟁 이후 이 지역과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점점 악화일로로 치달으며, 지역 전체로 확산되는 현실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20년 동안 국제사회는 ‘두 개의 국가’라는 해법을 둘러싼 협상 가능성을 어떻게든 철석같이 믿어왔다. 그러나 끝없는 테러와 정착촌 건설이 이어지면서, 이제 이 같은 믿음은 현실 속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머릿속에서마저도 더 이상 실현하기 힘든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2014년 여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대해 집중 포격을 퍼부은 오늘날, 국제사회는 바야흐로 평화 안착을 강제해야 할 때가 되었다. 가령 팔레스타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가입을 정식으로 인정해주거나, 국제연합(UN) 내에서 팔레스타인의 국가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인정해주거나, 더 나아가 국제적인 행정·중재 능력을 동원해 양측에 오슬로 협정에 기초한 평화안을 강제해야만 한다.

다음으로 미래 프랑스에게 있어 중요한 두 번째 핵심지역은 바로 아프리카다. 비록 아프리카를 두 번째 핵심지역으로 꼽은 이유가 이 대륙이 청년층 인구 비율이 높고, 앞으로 프랑스어 사용자를 포함한 전체 인구가 무려 20억 명에 이르며, 미래 세계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대륙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전부일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역협력기구나 가장 탄탄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좀 더 효율적인 공동개발을 실현하는 데 온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강대국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경제적 발전을 지원하고 나설 것이고, 결국 일관성 없는 모호한 군사개입정책이나 펼치려고 할 터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정치 우선’을 외칠 줄 알아야 한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마르쿠시 협정’을 체결했을 때처럼 말이다. 당시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실질적인 지원, 재정적·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코트디부아르가 통합정부를 구성하고, 소수민족과 야당의 안전을 헌법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했다.

세 번째 중대한 미래 핵심지역은 아시아다. 비록 상호간에 경제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다소 약화되긴 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범대서양자유무역지대(TAFTA)와 중국을 주축으로 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아세안(ASEAN)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인도, 뉴질랜드 등 총 16개국이 지역경제 통합을 위해 추진하는 일종의 자유무역협정(FTA)-역주) 간의 통상 대립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과 더 나아가 전 세계 무역의 절반이 걸려 있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4) 두 강대국은 봉쇄전략과 회피전략을 통해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가령 시진핑이 제시한 해상 실크로드(해상교통로를 장악하고 남중국해, 인도양, 아프리카에 이르는 바닷길 복원 사업-역주) 구상에 대해 미국판 ‘진주목걸이’(중국은 남중국해에 이어 인도양의 해상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한 목적에서 파키스탄, 버마, 방글라데시 등에 대규모 항만을 건설하는 이른바 ‘진주목걸이’ 전략을 펴고 있다. 반면 중국의 해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하와이(미국)·호주·인도가 연계해 중국을 에워싸며 이른바 다이아몬드 대열을 이루는 해양안보전략을 구상하였다-역주)가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기에 성장 침체에 직면하여 여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국민 통합을 위해 나날이 민족주의로 치닫는 한 정권의 행태와 일본 침략이라는 과거의 뼈아픈 역사가 빚어낸 해묵은 지역 갈등 역시 이 지역에 풀기 힘든 숙제로 남아 있다. 1964년 드골 장군이 과감하게 중국과 수교를 맺은 덕에 프랑스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다른 나라로서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 언제까지 그런 일이 가능할까? 부디 아시아 지역에서 우리는 미국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변화를 새로운 기회로 잘 활용해야 한다. 현재 중국은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고, 에볼라 사태·기후변화대책·대테러협력 등에 있어 더욱 책임감 있는 모습을 다 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떤 프랑스만의 외교정책을 보여주어야 할까? 개인의 삶도 그렇겠지만, 국가의 운명도 마찬가지로, 실상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더욱 고통스러운 고민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회의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법이다.

과거에 대한 환상은 벗어던지고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하자.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더 이상(혹은 예전에 비해) 자명한 진리로 통하지 않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점점 더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유럽연합 내에서도 유럽연합국으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보편성의 열쇠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보편주의적 가치를 간직한 문화권으로 남는 일 역시 중요하다. 프랑스 역사의 중심에는 진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2세기에 걸쳐 프랑스는 무수한 발명과 발견을 이루었고, 수많은 프랑스 기업을 배출했으며, 레지스탕스전국평의회(CNR)가 전후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한 이래 부단히도 사회복지모델을 발전시켜왔다. 진보는 콩도르세, 위고, 말로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문화관의 정수를 이루어왔다. 프랑스는 언제나 예술과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인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 나라였다. 사실상 우리 유서 깊은 희망의 나라 프랑스에게 있어 진보에 대한 믿음은 물론 기성질서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허한 무질서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프랑스가 깊은 회의감에 빠져든 것은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사실상 기술의 진보가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진보를 사물의 진보로 대체된 지 오래다. 문화는 이미 유산 내지는 상품이 되어버렸고, 안락함은 경제적 제약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지평”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다시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진보의 길을 향해야 한다.

 

진보의 가치 되살려야

 

먼저 유럽연합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유럽연합은 진보하지 않는 순간 바로 추락하고 만다. 오늘날 유럽은 예전보다 더 넓어지지도 그렇다고 더 깊어지지도 않았다. 유럽은 유로존 위기와 함께 해체의 길을 걷고 있다. 각 국은 불안정하거나 혹은 독재적인 이웃국들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국경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잔뜩 움츠려 있다. 각 회원국들은 민주주의 원칙에 근거한 법적 유효성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어 온갖 유럽연합 규정을 거부하곤 한다. 전후 자그마한 분단국가에 불과했던 독일과, 오늘날 경제적 위상이 강화되고 동쪽으로 유럽연합이 확대된 데 힘입어 더욱 강성한 나라로 성장한 통일 독일은 결코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독일은 오늘날 자연스럽게 유럽경제권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정작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 어떤 책임자의 역할을 맡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프랑스-독일 연합의 토대가 될 조약을 맺어 양국의 정치·제도·법률을 통합할 것을 제안해왔다. 일단 두 나라가 고용 및 교육 분야에서 단일시장을 구성하는 것을 시작하여, 훗날 다른 나라들도 이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지닌 수많은 원들(유로존, 유럽연합, 유럽·러시아·터키·북아프리카를 주축으로 한 범유럽거대거점)로 구성된 유럽의 중핵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다극화된 오늘날의 세계 안에서 서로 함께 더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은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쥐고 있다. 단, 유럽중앙은행(ECB)의 적극적인 개입과 독일의 임금 인상, 인프라 건설 및 혁신에 대한 유럽연합 차원의 생산적 투자가 선행된다면 말이다. 우리는 반드시 회원국 간에 조세제도(특히 법인세)와 사회복지제도(청년 활동인구를 위한 유럽연합 차원의 실업보험제도)를 통합해야만 한다. 또한 각 회원국마다 유럽 대학을 설립해 각 국의 대학 시스템을 단일화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유럽의회에 유럽연합집행위원회에 대한 온전한 감사권을 부여하고, 유럽이사회 의장을 보통·직접선거로 선출하게 한다면, 유럽연합의 민주주의를 더욱 확실히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이 없이는 결코 여러 강대국들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제대로 된 발언권을 누리기가 힘들다. 가령 국방안보 분야에서는 유럽 공동의 군수조달체계 및 참모체계를 구축하는 등 실질적인 진전을 이뤄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미국은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전략을 구사하며 우리와는 점점 더 이해관계를 달리 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장애물처럼 걸리적거리는 문제다. 물론 나는 이전에 프랑스가 나토 통합지휘체계로 복귀하는 데 반대했다.(5) 그러나 이제 와서 우리가 나토 통합지휘체계를 재탈퇴한다면 프랑스라는 나라는 그저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줏대 없이 행동한다는 인상만 남길 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요구사항을 더 반영하여 새로운 체계를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 요컨대 유럽과 북미의 비중이 더욱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서로 관직을 형평성 있게 안배하거나 나토의 활동을 오로지 방어적 차원에만 국한할 것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시 민주주의로!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숙제가 남아 있다. 바로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외교를 구상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자주 무시를 당하거나 혹은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민주주의는 무시를 당하고 있다. 러시아나 중국, 혹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집권한 터키에서처럼, 개인의 사인화된 독재 정권들이 부상하고, 탈민족적 성격의 글로벌 과두체제가 등장하면서, 민주주의가 널리 무시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한편 민주주의는 무력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령 민주주의는 외부적으로 무력하다. 왜냐하면 정권교체는 민주주의 정권을 근시안적으로 만들고, 여론을 도덕주의만을 앞세우는 변덕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내적으로도 무력하다. 왜냐하면 대개 오늘날 민주주의 정부들은 돈과 사회적 계급의 지배를 받으며 결코 활기에 넘치지도, 관대한 태도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두 가지 오판을 했다. 먼저 내부적으로 최종 승리를 거머쥔 것은 정작 반정부세력들임에도, 서구 민주주의 정권들은 스스로가 냉전의 승리자라고 오인했다. 다음으로 자신들에게 대적할 적수가 사라진 현실 속에서 서구 민주주의 정권들은 자신들을 무적의 정권이라고 착각하며 승리의 월계관을 쓴 채 잠이 드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외교는 먼저 우리 민주주의 정부들, 특히 유럽 민주주의 정부들의 매력을 오롯이 품을 수 있는 외교여야 한다. 최근 몇 년 간의 상황을 잠시 복기해보자. 중산층이 부상하고, 경제위기로 인한 어려움이 더해지면서, ‘분노한 사람들’, ‘점령하라’, ‘봄’ 등의 이름을 단 저항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설령 이런 저항 운동이 정권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을지라도, 결코 유럽의 이웃이라는 프레임은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설령 본인의 의지는 아닐지라도 유럽의 대외영향력이 어디까지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였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대문 밖에 닥친 민주주의 변화를 지지하고 강화하는 데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대체 유럽은 다른 나라를 위해서는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왜 정작 유럽의 민주주의 요구에는 그토록 무심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기보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미국의 국익에만 복무하는 냉전 논리에 의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민주주의 정부들이 직접 모범을 보이고, 개방과 대화에 기초한 동방정책(ostpolitiks, 통일 전 서독이 추진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제국과의 관계정상화정책)을 펼 때, 동유럽의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외교를 위해서는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다. 바야흐로 이제는 기밀과 국익 논리에만 기댄 외교는 불가능한 시대다. 따라서 외교의 힘이 약화된 오늘날에는 여론의 압력을 추동력으로 삼은 새로운 외교를 펼쳐야 한다. 민족 대 민족의 외교를 강화하고, 대통령의 취미 정도로 전락한 외교정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모든 주체가 참여해 서로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민족 대 민족의 외교에 더욱 큰 힘을 실어주고 외교 정책에 통일성을 부여해야 한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의 미래가 걸려 있는 만큼, 국가 차원의 지속적이고 다원적인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오늘날 프랑스는 경제적 동력과 경쟁력, 신뢰를 모두 상실한 끝에 ‘재세계화’와 경제 부양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프랑스의 생존은 이제 세계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어디로 기수를 향할 것인지를 정하고, 이제 이를 위해 우리가 갖추고 있는 모든 장점들, 가령 우수한 외교 인력과 고등학교·대학교·그랑제콜에 이르는 우수한 교육기관, 우수한 사회복지모델 등을 총동원하여야 한다. 프랑스만이 지닌 탁월성, 프랑스만이 지닌 전매특허와도 같은 특성들에 충실하자. 다시 말해 위기 때든, 평화 때든, 언제나 중재자이자 대화 촉진자이자 조정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도록 하자. 또한 경제적 혁신의 나라, 교육·보건 등의 분야에서 사회적·인적 개발에 매진하는 나라, 문화의 나라, 열린 나라로서의 본연의 정체성에 충실하도록 하자.

 

글·도미니크 드 빌팽 Dominique de Villepin

2002~04년 프랑스 외무장관과 2005~07년 프랑스 총리직을 역임했다.

 

(1) 1853~56년, 크림전쟁 때,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프랑스는 동맹국(오스만제국, 영국, 사르데냐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어 프랑스는 1861년 멕시코에 친프랑스 정권을 세우기 위해 군사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는 1867년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마지막으로 1898년 프랑스는 영국군에게 파쇼다(수단)에서 패배했다.

이 사건은 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망에 찬물을 끼얹었다(역주).

(2) Sébastien Gobert, ‘우크라이나, 유럽이냐 러시아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2월호

(3) Ibrahim Warde, ‘공염불이 된 ‘도빌 파트너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0월호

(4) Marine Bulard, 미국의 ‘자유무역’ vs 중국의 ‘실크로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1월호

(5) 프랑스는 1966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통합지휘체제를 탈퇴했다가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집권기에 다시 복귀했다.

 

 

<상자기사>

집단안보를 위한 세 가지 선결과제

 

평화란 집단안보를 의미한다. 프랑스는 아리스티드 브리앙, 드골, 자크 시라크 등의 목소리를 빌려 오랫동안 집단안보를 위한 지난한 투쟁을 벌여왔다. 프랑스는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의 중심축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사항을 선결과제로 제시한다.

첫째, 국제연합(UN)의 대표성을 제고해야 한다. 국제연합은 1945년 설립된 기구로 오늘의 현실에는 잘 부합하지 않는다. 신규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더 선정해 대륙 간 균형을 고려한 상임이사국 안배가 이뤄져야 한다.

둘째, 효율적인 재정 거버넌스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G8과 G20은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실패했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함께 참여하는 ‘경제·재정 안전보장이사회’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

셋째, 더 효율적인 기후온난화 방지대책을 시행할 수 있도록 환경 거버넌스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가령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TIP) 등 무역협정 체결 시 온실가스 관련 조항을 삽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고집불통 국가들이 온실가스 저감 노력에 더욱 협조하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사실 프랑스는 기후온난화 방지 부문에 있어 선구자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령 200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제4회 지구정상회의 총회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했던 연설(‘우리는 우리 집이 불타는데 정작 다른 곳만 보고 있다’)만 봐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한편 세계환경기구(WEO)를 만들어 꾸준히 전문성을 쌓고 더욱 체계적인 규제 및 감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는 특히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적절한 수단이 필요하다. 사실상 UN지원단(평화유지군)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임무 수행이 더딘 데다, 임무에 맞는 제대로 된 훈련도 부족하고, 주둔 기간도 불확실하다. 따라서 우리는 유럽 파트너국들에게 치안이 급격히 악화된 지역에 대해 평화유지 목적으로 급파할 수 있는 UN 산하 ‘신속대응군’을 창설할 것을 제안해볼 수 있다. 또, 취약한 국가를 상대로 법치국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단을 구성할 것 역시 함께 제안해볼 수 있다. 이러한 평화안은 사실상 아픈 전쟁의 상처를 지닌 우리 유럽 대륙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