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서 번역의 즐거움

2009-06-03     알베르토 망구엘 | 작가·번역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독자의 무한한 임무는, 번역가로서 자신의 자질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정의해주는 다양한 텍스트를 찾아 세계의 도서관을 헤매는 것이다.책을 읽으면서 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또 다른 창작 활동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문학적 활동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부분, 즉 텍스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번역 작업 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데 주력해왔다. 여기에 그가 생각하는 번역의 함정과 역설, 그리고 그 기적을 소개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번역이 글자 그대로를 옮기는 직역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언어는 세계를 느끼거나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잘못은 이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온다”(1)고 말한 바 있다. ‘번역’은 독서라는 우리들의 가장 내밀한 행위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든 독서 행위는 번역이다. 번역은 세계에 대한 형식적 비전이 세계를 느끼고 인식하는 특별한 방식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이며, 텍스트(문자로 쓰인)로 재현된 세계가 또 다른 재현(문자를 보고 들음으로써 이해된)으로 변하는 통로다.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직하는 뇌의 부위가 형태와 거리를 식별하는 부위라는 사실이 최근 연구로 밝혀졌다.

달리 말하면, 읽는 행위는 생리학적 관점에서, 세계의 물리적 형태를 상상에 의한 공간적 재현으로 옮기는 행위, 즉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의 현실 속에서 세계의 현실을 물질적으로 번역하는 행위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벌써 그것을 번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을 말로 옮기는 일이야말로 그 화려한 외모를 복잡한 의미체계 안에서 번역하는 것이고, 이 표현 안에 말하는 사람의 미학적·정치학적·사회학적·심리학적 내재 의미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히스패닉 아메리카”라고 말하는 것 역시 번역에 속한다. 이 말은 복잡한 지리와 기나긴 인디언의 역사, 식민지화, 독립, 새로운 식민지화, 그 마을들, 강들, 문학작품들, 공장들, 길들, 그리고 주민 개개인의 삶을 요약한 것이다. 그 모든 것, 혹은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로마의 문화적 풍토에 젖어 있는 이탈리아 탐험가(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이었다)의 단 두 단어에 집약돼 있는 것이다. 모든 번역은 정복이다!

아메리카 대륙이 가진 다수의 정체성과 하나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수많은 단계들 중의 한 단계는 스페인인들이 도착한 뒤에 일어났다. 아메리카 대륙 토착어와 새로 도착한 스페인어 사이에 만남, 대립, 대화, 말살 시도, 연구,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수용이 일어났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든, 상대와 대화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제거하기 위해서든 간에, 번역은 아메리카인들의 바벨탑 안에서 여러 방식으로 타인과 타인의 언어를 인정하려는 시도였다.

전설에서는, 히스패닉 아메리카 최초의 번역가가 여자였다고 한다. 도나 마리나 또는 말린체라 불린 그녀는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목테수마(또는 몬테수마) 황제 사이의 통역을 담당한 인디언이었다. 호세 카달소는 1774년 완성한 <모로코인의 편지> 제9권에서 “거룩하고 찬양될 목표를 갖고서, 타고난 섬세함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성(性)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유용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라고 적고 있다. 스페인 정복자의 입장에서는, 식민지 땅에서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남성들의 무기보다 더 ‘연약’하고, 성 제롬이나 알폰소 10세(2)의 남성적인 고전 번역보다 덜 위엄 있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

말린체라는 통역자·반역자(노라 카텔리의 표현)의 개입으로 인디언의 ‘바벨탑’이 기독교 언어로 변모하는 과정에는 마술과도 같은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탐험가들로 하여금 그 대륙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자신들의 구실이 무엇인지 판단하게 해주는 유럽의 미학적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연대기 작가 카달소는 그의 다섯 번째 편지에서 “마치 마술 지팡이로 두드린 것같이 발견, 정복, 소유, 지배 같은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쓴 뒤 “가장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외국 서적들 역시 참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복에 관해 그가 읽은 책은 모두 스페인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특별한 이야기를 읽는 일은 스페인 전체 역사에 필요한 보완”이라고 설명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알지 못하는 언어를 자기가 아는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문화에서 얻어내 보존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들이 하나둘 독립해감에 따라 세계를 다른 말로 고정시키려는 의지 역시 커진다. 고풍스런 표현을 축출하지 않고 그대로 옛 시대에 멈춰버리거나, 인디언 어휘들을 수용하거나, 자기들 용도에 맞는 신조어들을 만들어내거나 하는 식으로 아메리카 대륙 특유의 스페인어는 본토 스페인어와 구별된다.

 크레올 스페인어는, 인디언어도 아니고 스페인어도 아닌 그 무엇, 즉 중간 매개체의 특성을 가진 그 무엇이 되려는 의도처럼, 말하자면 아메리카 스페인어의 패러디가 된다. 1800년대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의미 있는 번역은 픽션 작품의 수입을 금지한(큰 성과는 없었다) 스페인의 검열의 결과라고 한다.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는 “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독자들의 취향이 문학 창작을 조정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번역은 더 이상 교양 있는 독자의 변덕을 맞춰주는 혼자만의 독서 연습이 아니라, 전체 언어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공식적인 행위가 되어간다.

이런 환경에서 베네수엘라의 안드레스 벨로는 히스패닉 아메리카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법서를 만들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나는 카탈루냐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쓸 생각이 없다. 내가 쓴 것들은 히스패닉 아메리카에 사는 내 형제들을 위한 것이다. 스페인어야말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수많은 스페인계 국가들 사이의 동질 의식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소중한 수단인 만큼, 가능한 한 우리 아버지 세대의 스페인어를 순수하게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광신적인 순수주의를 권장할 생각이 없다.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 최악은, 공통의 언어가 갖는 엄청난 장점을 박탈해버리는 일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적시에 그것을 고정시켜놓지 않으면, 신조어들이 나타나 아메리카에서 글로 쓰이는 상당 부분을 잠식·퇴색시킬 것이다”(3)라고 명료하게 적어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린다. “언어는 살아 있는 육신과 같다. 그 생명력은 구성 요소들의 항구적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태와 종류에 선행하는 실제 작동 기능들의 통일성과 관계가 있다.”

기능이 형태에 앞선다는, 대단히 루이스 캐럴답다고 할(4) 이 표현은 넓은 의미에서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의 문학 번역에 적용된다. 밀란체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누구를 위해 번역하는가?”가 대륙의 번역가들의 슬로건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 히스패닉 아메리카의 훌륭한 번역가들은 보르헤스의 충고에 따라 직역을 넘어선 번역 개념을 유지해왔다. 이제 더 이상 번역은 “불타는 양탄자를 뒤집어 들여다보는 것처럼 하라”는 세르반테스의 말처럼, 단순히 한 언어의 단어들을 다른 언어의 단어들로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가장 야심만만하고, 복잡하고, 기발한 임무는 원본을 다른 지도 제작법 속에서 재구성하는 것, 외국어로 된 텍스트를 가지고 풍경을 식민지화하는 것, 다른 기후에서 자란 나무를 다른 땅에 심는 일이다.
1974년, 보르헤스는 <창조자>(El Hacedor)라는 책에 ‘씨실’(La trama)이라는 짧은 글을 하나 썼다. 그 전문을 인용해보겠다.

“친구들이 조급히 칼을 휘둘러대자 카이사르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석상 받침대 쪽으로 밀려갔다. 칼날과 얼굴들이 뒤섞인 가운데 자신이 아끼던, 아들과도 같았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모습을 발견하자 그는 방어를 멈추고 소리쳤다. “내 아들 브루투스, 너마저!” 셰익스피어와 케베도는 이 장엄한 외침을 자신들의 작품에 사용했다.여기서 비롯된 반복, 변형, 유사 작품들은 성공을 거뒀다. 그로부터 1900년이 흐른 뒤,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부에서 한 신좌파가 다른 좌파들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면서 자신을 공격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영세 대자(代子)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서서히 놀라면서 낮은 목소리로 힐난하듯이(이 말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야 한다) ‘페로, 체’(¡Pero, che)!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를 죽이고, 죽는 자는 똑같은 장면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몰랐다.”(5)

몇 년 전, 보르헤스의 이 텍스트를 캐나다 동료들과 나눠 읽으며 영어로 번역해 보려고 했다.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이 있었다. 특히 아르헨티나적인 토양에 깊게 뿌리내린 “페로, 체!”라는 표현에 알맞은 번역을 찾을 수가 없었다. “페로, 체”는 지구상의 그 어느 곳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매우 간결한 탄식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페로, 체”라고 말하지 않고, 스페인이나 멕시코, 쿠바라고 해서 더 많이 사용되지도 않는다. “페로, 체”는 그 자체로 거의 크레올어 용법이다.
다행스럽게도 번역의 역사는 작은 기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공한 번역에는 미덕, 지성, 능수능란함, 경험, 연구, 우연, 이 모든 요소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적의 질이다. 문학 창작의 영역에서 기적 없는 승리란 없다.

나는 미완인 채로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비슷하지만 어색한 표현을 사용해 짧은 텍스트를 마저 번역하려고 했다. 기분 전환으로 보르헤스가 잘 알고 있는 체스터턴의 <영국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 책에서 문득 아래 문장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영국을 브루투스가 세웠던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매우 간단한 발견과 너무나도 환상적인 건국을 대조시키는 것에는 당연히 우스꽝스러운 무엇인가가 있다. 마치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말한 ‘브루투스여, 너마저’가 영어로 ‘뭐야, 네가 이곳에?’(What, you here)로 번역될 수 있는 것처럼.”(6)

체스터턴의 “뭐야, 네가 이곳에?”야말로 보르헤스의 “페로, 체!”를 완벽하게 번역한 것이라 하겠다. 아니면 보르헤스의 “페로, 체!”가 “What, you here?”의 완벽한 번역인지도 모른다. 번역은, 원본에서 독창적인 번역 텍스트로, 그리고 독창적인 번역 텍스트에서 원본으로, 원본과 독창적인 번역 텍스트가 서로 혼동되고 다시 정의되는, 양방향의 독서·여행이다. 누가 이 표현의 저자이고 누가 역자인가? 보르헤스인가 체스터턴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연대를 정확하게 알거나 잘못 아는 것은 번역과 그 원전을 평가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 아니다.

독자의 무한한 임무는 번역가로서 자신의 자질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정의해주는 다양한 텍스트를 찾아 세계의 도서관을 헤매는 것이다. 페이지에 간직된 모든 텍스트는 독자의 어휘로 변하고, 또 다른 맥락, 또 다른 경험, 또 다른 기억 속에서 다시 정의되고, 또 다른 책장에 정리되어 수많은 또 다른 텍스트가 된다. 페이지에 고정된 텍스트 대신 독자·번역가는 결코 한 곳에 정박하지 않는 유목적 텍스트를 제안한다. 이것이 바로 번역이라는 예술의 감동적인 역설이다. 끊임없는 이동과 탐사를 통해 문학작품은 문학작품이 가져야 하는 예술작품의 속성보다 덜 불확실하고 덜 우연적인 그 무엇이 될 수 있고, 기적적으로 일종의 내재적 불멸성을 획득한다.

알베르토 망구엘 Alberto Manguel / 작가·번역가*
* 아르헨티나 출신 캐나다 작가이자 번역가이며, 저서로 <독서의 역사> <말들의 도시>(2009)가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번역하기’, <La Opinion Cultural>, 1975년 9월 21일.
(2) 성 제롬(340~420)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토대로 라틴어 성서를 번역했다. 알폰소 10세(현명왕 알폰소라고도 함, 1221~1284)는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왕으로, 라틴어 대신 카스티야어를 행정과 학문어로 사용하게 했다.
(3) 안드레스 벨로, <아메리카인들을 위한 카스티야어 문법>, 1847, <문학 연구>, 페드로 그라세의 서문, 1985.
(4) “의미에 신경써. 그러면 소리는 저절로 신경쓰게 돼”,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94.
(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라 트라마>, 폴 & 실비아 베니슈 역 프랑스어판.
(6) G. K. Chesterton, <A Short History of England>, 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