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없이는 민주주의 없다

2009-06-03     알드레 벨롱 | 정치학자

  한 세기에 걸친 공세에 시달려, 이제 껍데기뿐
 ‘경제 법칙’이 지배하면서 흔적 없이 사라질 판


언론 플레이에 능한 철학자들이, ‘국민’이란 단어를 ‘포퓰리스트’로, ‘주권’을 ‘주권주의자’로, ‘국가’를 ‘국가주의자’로 바꿔놨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민주화 투쟁의 최우선 과제는 공격당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그 본래 의미를 복원시켜주는 것이다.


소설 <치타>(Gu?pard)(1)의 주인공인 살리나 왕자는 인생의 황혼기에서 “죽음, 그것은 절대적인 평온”이라고 중얼거린다. 문학 속에서는 이처럼 시간과 역사를 초월해 평화를 추구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다. 살리나 왕자나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 리>의 주인공인 네모 함장의 경우처럼, 사회생활을 저버린 채 타인과 동떨어져 지내면서 개인적인 ‘성취’를 도모하는 일이 문학작품 속에선 극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딱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평온’은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회조직 속에서 갈등이 사라지길 염원하는 이들은 흔히 삶에 저항할 줄을 모른다.

   
<여우놀이>,1989-샌디 스코글룬드

요즘의 민주주의에서는, 마치 합의를 이룬 것처럼, 어떠한 분노의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이른바 ‘현대적’이라는 정치권의 아첨꾼들은 심지어 ‘평온한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현실 문제를 이론화했다. 반면 주요 정치가들과 대부분의 정치 집단은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아이디어만 내놓고 있다.
이런 몽환적 정치 인식은 정파 간의 실제 간극을 지워버리는 동시에 사회운동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리는 시위 때마다 권력자들이 “정치는 거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2)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되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진지한 반론들을 제도의 틀 안에서 혹은 거리에서 표현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에 필요한 표현의 공간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민주주의는 합의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갈등을 줄이기 위한 제도다.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의 클레이스테네스가 보통선거 제도를 도입한 것은 당시 아테네에 퍼진 갈등을 부정하기보다는 평화적으로 그 해결책을 찾고,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임의 법칙을 모색하겠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하지만 투쟁과 민주주의가 화두가 되지 않았던 적은 결코 없었다.
19세기, 프랑스 공화당원들은 직접·보통 선거 제도를 지지했다. 그들은 국가가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의 참여를 통해서만 정당성을 갖는다고 인식했다. 1877년 8월 15일 급진 공화파인 레옹 강베타가 당시 프랑스의 파트리스 마크 마옹 전 대통령에게 일러준 유명한 훈수가 있다. “국민이 의사 표명을 했을 때는 따르거나 혹은 사임을 해야 한다.” 이어 강베타는 국민과의 정치적 충돌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집권자들은 만약 보통선거 제도가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우리가 그렇게 내려진 결정의 권위를 존중할 경우 모든 갈등이 평화적으로 종식되고, 모든 위기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3)

물론, 당대에는 직접·보통 선거 제도가 노동운동과 충돌을 낳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이 제도를 부르주아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내부 갈등을 해결하려는 수단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루동 지지자들은 정치 투쟁의 자율성을 전면 부정하고, 경제 상황의 변화에 부합하는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와 대립각을 세웠다. 장 조레스는 노동운동의 역사가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구축한 공적 영역의 역사인 동시에, 심지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구축한 그들의 자율성의 역사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를 해방과 투쟁의 도구라고 강조한다. “요즘도 여전히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비인간적인 독재’를 들먹이거나 혹은 갑작스런 권력 쟁취나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을 계획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아직 나약하던 시대,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승리를 가장하는 수단으로 여기던 당시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4) 물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각 진영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울 방편을 모색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에서는 공화파의 중재가 있었고, 드레퓌스 옹호 사건에서 공화파의 개입이 힘을 발휘하며 민주주의 원칙이 정착된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20세기 초반에 점점 더 보편적인 원칙처럼 소개됐다.(5) 그로부터 20년 뒤 이 생각들은 많이 달라졌다. 극우적인 성향들이 정당성을 확보한 요인도 있지만 소련 체제가 노동운동에 강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문을 제기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1차 세계대전(1914~18)을 계기로, 민주주의의 근간이 뒤흔들렸다. 전쟁으로 인해 어떠한 정치적 반대와 충돌도 허용되지 않았고, 전례 없는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극적인 합의를 도출할 때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가면처럼 이용됐다.전쟁이 끝나자 소련의 전체주의적 체제가 들어섰다. 그럼에도, 합리적인 일부 혁명가들은 여전히 민주주의가 계급 투쟁과 어떻게 보조를 맞출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언론의 무제한적인 자유, 즉 집회 및 결사의 절대적인 자유가 없이는 광범위한 대중의 지배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라며 가장 광대하고 무제한적인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나섰지만(6), 이미 때는 늦었다.

물론,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마치 민주주의의 승리처럼 환영받았다. 하지만 시민들은 몰개성화한 인간, 이를테면 기준이나 뿌리가 없이 권위적인 성향에 쉽게 먹잇감이 되는, 미세 분열된 개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로 인해 1940년부터 1950년까지 매카시즘이 스탈린주의와 보조를 맞추게 됐다. 미국은 1954년 과테말라에, 소련은 1956년 헝가리에 각각 개입하며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을 드러냈다.
가장 최근의 사건들, 특히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같은 사건들 또한 이런 과정을 전혀 종식시켜주지 못했다. 반대로 이 사건들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최종 승리한 유일한 시스템처럼 정당화한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원칙은 반대 의견이 부재할 때 그 의미를 잃게 된다. 민주주의와 사회계급 투쟁이 이율배반적이 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사회적 투쟁의 기반인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민주주의 체제의 원칙은 자유다. ‘자유’의 가장 중요한 징표는 피지배자와 지배자가 서로 위치를 바꿔간다는 점이다.”(7)

최근 경제위기로 인해 많은 시민이 민주화 투쟁을 소소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화 투쟁의 최우선적 가치는, 공격에 맞서 싸우고 있는 민주주의에 그 본래 의미를 복원시켜주는 일에 있다.
보통선거 제도는 민권의 필수적인 도구다. 그러나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초기 단계에는 보통선거 제도를 정착시키지 않았다. 프랑스의 첫 국회는 참정권을 오로지 납세자들에게만 부여해, 부자들만 정치적인 표현을 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대중은 봉기했고, 1792년 8월 10일 보통선거 제도가 탄생하며 군주제가 타도됐다.

혁명 후, 원칙적으로 유지되었던 보통선거 제도는 19세기 말까지 왜곡되어 사용됐다. 그래서 나폴레옹 시대에는 보통선거 제도가 국민투표 참정권으로 변신해, 유권자의 자격을 주택 소유 여건에 따라 제한했고, 제2공화국 때는 이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을 투표에서 배제했다. 당시 여성들은 투표권조차 없었다. 분명 사람들은 이제 보통선거 제도가 잘 복원돼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더 교활하게 왜곡돼 있다. 대표적인 예로 대통령 선거와 같은 특별한 선거를 들 수 있다. 이는 종종 20~25%밖에 득표하지 못한 후보에게 거의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논쟁의 본질적인 차이를 없애버린다. 이러한 제도는 의회 활동을 제약한다. 그것은 또한 경제적인 이유나 유럽의 지침 같은 제약들을 구실로 민주적 토론을 위축시키기도 한다.

변화의 옹호자들조차도, 이런 상황이 권력을 안정시키고 심각한 사회 위기 속에서도 권력을 살아남게 했다고 말하면서도, 정치적 표현의 부재가 자주 거리의 충돌을 확산시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19세기로 회귀해버린 것이다. 납세자들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하던 시기와 거의 유사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와 사회 체제에 정말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은, 자유주의 투쟁뿐만 아니라 민주화 투쟁에도 맞서는 권력을 정당화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첫 국회 때 ‘샤플리에법’(8)이 이미 제안했던 것인데, 그때 이 법은 투표권을 최고 특권층으로 제한함으로써 모든 ‘연합’을 금지했다. 요컨대 사람들은 한 세기 동안 발전시켜온 사회 및 정치 민주주의를 폐기처분해버린 셈이다.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국민·주권·공화국·시민권(이 단어는 그렇게 많이 짓밟히지 않았다. 그 반대다) 등의 단어들이 집중적으로 짓밟히며, 그 의미를 잃거나 경멸적인 뜻으로 덧칠되었을 때, 이미 민주주의는 철학적으로 대단히 퇴보해버리지 않았던가! 주권이 무엇인가? 프랑스 헌법에는 직접 또는 대리인을 통해 민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또 세계인권선언 21조를 따르자면 주권은 국가의 토대가 된다.
주권을 논하는 원칙은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2001년 브뤼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의장 로마노 프로디가 “유럽은 오직 유럽 당국에 의해서만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지역, 지방자치단체와 시민사회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선언했을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국민의 주권은 어디서 행사되는 것일까? 로비단체들의 영향력을 조심스럽게 은폐하는 시민사회의 정당성은 무엇일까? 많은 정파들이 혼재한 가운데, 사회에 깔린 실제 기류가 어떻게 표출될 수 있을까?

국민이 여타 로비단체 중 하나일 뿐인 이런 복합적인 정치 현장에서 사회 투쟁은 극히 제한적인 정당성만을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 2005년 5월 29일에 치러진 프랑스의 유럽헌법조약 국민투표 결과(조약이 부결됨)가 강제 폐기처분되고, 더 나아가 유럽의회가 프랑스의 국민투표 결과를 개의치 않겠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못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투쟁에 그 어떤 정치적 해석이 가해질 가능성이 더는 없다.
민주주의가 완벽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장 조레스의 표현처럼, 민주주의는 “계층들이 움직이는 복판이며, 거대한 사회 충돌 속에서 중재하는 힘이다”.(9)

날이 갈수록, 민주주의 기반에 대한 공략들이 깊이 있는 반론을 담은 정치적 표현들을 막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민주주의 시스템의 토대가 좋다 나쁘다가 아니다. 언론 플레이에 능한 철학자들이 주도하는 작업들은 심지어 민주주의 이념의 원칙을 침식시키고 있다.(10) 이들의 이념 작업은 ‘국민’이란 단어를 ‘포퓰리스트’로, ‘주권’을 ‘주권주의자’로, ‘국가’를 ‘국가주의자’로 바꿔놨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이처럼 책무의 본말이 전도돼 있기 때문에, 통치권자들은 즉시 방어하는 입장이 되고, 사회 투쟁이 표출될 수 있는 정치 터전이 심한 공격을 받고 있다. 또 개인은 자신의 자유와 투쟁에 대한 흥미를 동시에 잃어버렸다. 그래서 순응주의가 득세 할 수 있었고, 순응주의는 사회 투쟁의 의미가 분명히 규명되는 터전인 민주주의 토론의 중요성을 단숨에 부정한 채, 충돌의 해결책을 ‘경제의 법칙’이라고 일컫는 무소불위의 표현에 떠맡기고 있다.



앙드레 벨롱(André Bellon) / 정치학자*
*<새로운 예속> <1980년대 정치사> <천일야화> 등의 저자.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 7대학 불문학박사로 알리랑스 프랑세즈에서 강의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이탈리아 국민작가인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가 쓴 소설.
(2) 전 프랑스 총리 장피에르 라파랭이 2003년 퇴직연금법 반대시위 때 썼던 말인데, 2009년 과들루프 봉기 때 많은 장관들이 다시 써먹었다.
(3) 레옹 강베타가 1877년 10월 9일 파리의 샤토도 경기장에서 한 연설.
(4) 장 조레스가 1901년 11월 17일 <방식의 문제> 서문에 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에 대한 기사.
(5) 민주주의에 타격을 가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냉소적으로나마 자신들이 규칙을 준수한다는 것을 주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6) 로자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7)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1317b.
(8) 1791년 6월 14일의 법은 농조와 파업권을 금지한다.
(9) 장 조레스, <민감한 세계의 현실>.
(10) 에블린 피에예, ‘시장을 넘어 민주주의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