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무릎 꿇은 미디어들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던 그리스의 언론과 돈. 시리자가 주창한 ‘민주주의의 회복’은 미디어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2014년 11월에 미국에서 벌어진 일은 그리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약 1,500개의 헤르츠 주파수 할당을 위한 경매에서 경매 금액이 450억 달러에 달했던 것이다.(1) 반면 그리스를 보자면, 민영 TV 및 라디오 방송사들이 1989년 이래로 주파수에 대한 ‘임시’ 허가권을 보유하고 있지만 정부에 단 한 푼의 돈도 내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언론인 파스초스 만드라벨리스는 그리스 미디어는 정보시장의 기능이 아닌 ‘정치 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2) 언론과 정치권의 인접성은 2011년 11월에도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일간지 <타 네아>의 판텔리스 카프시스 사장이 신문사를 떠나, 은행가 출신 루카스 파파디모스 총리의 정부에 합류한 것이다. 당시 언론인 니코스 스미르나이오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카프시스 가문은 언론에 깊숙이 몸담고 있으면서도, 판텔리스의 형제인 마놀리스는 매일 저녁 메가 채널 TV의 뉴스에 정치해설자로 나와 정부를 지지했었다.(3)
온갖 특혜를 누리는 미디어그룹
현재, 약 1,100만 명의 그리스 국민들은 30개 이상의 국내 일간지 및 주간지, 십여 개의 일간 스포츠지, 각각 6개와 2개의 민영 텔레비전 채널과 국영 채널, 150여개의 지역 채널, 천개에 달하는 라디오 방송국 등 미디어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이 모든 언론 기관들이 동시에 독자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이들 언론사 재원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는 광고시장의 경우도 끝없이 하락하고 있는 그리스와 길을 함께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언론이 몰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일간지 중 하나이자 친(親) 그리스 사회민주주의당(Pasok) 성향의 <네아>의 경우 하루 판매 부수가 1만 8,000여 부에 그치고, 또 다른 오랜 역사의 주간지인 <엘레테로티피아>는 경제 위기 초 사라지고 말았다. 주간지 배급부수도 약 150만부에서 약 60만부까지로 급락했다. 대부분의 언론기업들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고, 일간지 판매의 절반이 할인쿠폰이나 당첨금이 수천 유로에 달하는 복권 같은 판매촉진 이벤트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기업의 주인들, 즉 세금을 내지 않는 국내 굴지의 자산가들은 자신들의 투자에서 이윤이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해 언론그룹을 소유한다는 건 공공계약을 따낼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져다준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일간지 <에트노스>와 <프로토 테마>를 발행하는 보볼라스 가문의 페가수스 그룹은 건축과 공공토목사업 전문 기업으로, 지난 20년간 공공 건설사업 계약의 주요 수혜자였다.
경제 위기 초부터, 미디어 기업들은 정치계의 엘리트들과 결탁해 국가경제가 위기를 맞고 부패가 심화되는 데 기여했다(골드만삭스 투자은행도 이런 국면에 일조했다). 그들은 또한 유럽중앙은행, 국제금융기구, 유럽위원회로 이뤄진 ‘트로이카’가 강제한 긴축프로그램을 지지해 왔는데, 트로이카가 취한 조치의 대부분이 이들 미디어의 특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미르나이오스에 따르면, DOL 그룹은 트로이카가 강제한 주요 조치들 중 하나를 실행한 최초의 기업이다. DOL 그룹은 회사 이익을 위해 계열사 별로 노사 간 단체협약을 없애 직원 임금을 22% 삭감하는 데 성공했다.
또 미디어에선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이 추진하는 정책의 가치를 떨어뜨릴 모든 일이 동원되곤 했다. 일례로, 2013년 대형 TV방송국들은 긴축정책을 반대하는 시리자당의 대표가 “우리는 유로 존을 탈퇴할 것”이라고 말하는 영상을 방송했다. 하지만 그가 뒤이어 “만약에, 정말 만약에, 독일 총리 안젤라 메르켈이 우리를 쫓아낸다면 말이다”라고 말한 부분은 삭제됐다. 시리자 측은 이 방송을 막기 위해 방송국들을 상대로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그리스 국민들의 대다수가 단일통화를 포기하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시리자당의 집권에 긴장하는 미디어 그룹
시리자의 정책에는 국가의 경제 회복 이외에 ‘민주주의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의 다른 정당들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방만한) 미디어 분야에 대한 규제를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시리자 측은 방송사들이 임시허가권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기업 자본구성, 자본 출처, 자본 지속성, 기타 투자금의 쓰임새 등에 대해서 심층적인 감독이 이뤄지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조치로 미디어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 그동안 대부분의 방송국이 은행에서 낮은 금리로 빌려준 돈과 정부의 비호 아래 살아남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리자당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가 총선에 승리한 이후, 대형 방송국들은 태도를 바꿔 새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줄였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안토니스 사마라스정부가 2013년 6월 11일 폐쇄한 국영 라디오텔레비전(ERT)이다. 노동조합을 주축으로 시리자당의 승리를 기대해온 강경 근로자그룹은, 직원 수를 3분의 1 감축하여 방송을 재개하자는 구(舊) 정권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2013년 12월 공권력에 의해 방송국에서 쫓겨난 이들은 ‘진정한 ERT’라 주장하는 자주관리 조직을 창설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기자와 기술자들은 조합장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자금의 불투명한 운영방식에 항의하며 조직을 떠났다. 정작 ERT의 옛 근로자들 대부분은 이런 분열에 책임이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트로이카’의 (실업수당 삭감) 피해자이자, 자신들의 동료들과 정치권 사이에서 힘겨루기의 희생양이 됐다.
시리자당은 ERT를 다시 개국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다지 서두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옛날 국가가 관리하던 성격과는 전혀 다르고, 기금에 기반을 둔 기구 창설에 더욱 호의적인 동일한 조직을 재구성하자는 노조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 Fabienne Schmit. ‘통신 주파수 : 미국정부, 450억 잭팟을 터뜨리다.’ 파리, 2015년 1월 30-31일자 레제코.
(2) <그리스 미디어기업들의 적자>(그리스어로 출간됨), 2009년 7월 2일.
(3) Niκος Smyrnaios ‘그리스: 미디어를 통한 동의 날조’, 2012년 2월 26일, www.ephemeron.eu (스미르나이오스의 인용문은 모두 해당 글에서 발췌).
글․ 발리아 카이마키 Valia Kaimaki
프랑스와 그리스 신문방송사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며,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및 문화를 전공하고, Open University of Cyprus에서 저널리즘과 뉴미디어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