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국가에 반기든 우크라이나 노동자들

2009-06-03     마틸드 고아네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르포]경제위기로 신음하는 노동 현장을 가다- 우크라이나

산업도시 헤르손의 항의시위 빠르게 확산
금융자본에 넘어간 기업, 일자리 못 만들어


     
         
신자유주의가 낳은 경제적 위기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지구촌 곳곳에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국가별 개방 수준, 규제 및 사회보장제도 수준에 따라, 국민이 느끼는 경제위기의 체감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각 지역의 도시에 순회 특파원들을 긴급 파견해 산업과 관광, 교육의 실태는 물론, 주민의 삶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편집자


드네프르강이 흑해와 합류하기 전, 지류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 헤르손. 가벼운 옷차림으로 봄이 왔음을 알리며 길을 오가는 행인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헤르손은 휴양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공산정권 아래서 우크라이나의 각 도시는 경제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도시별 전담 기능이 정해져 있었다. 헤르손에는 조선소와 제지공장, 농업기계 제조원이 몰려 있었다. 군데군데 크레인이 솟아오른 장방형의 잿빛 도시에는 산업화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 지역은 원래 대부분 농경지였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경제위기의 직격타를 맞았고, 헤르손에 거주하는 35만 명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무모하게 진행된 민영화로 인해 이미 흔들리고 있던 노후한 산업기반 역시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외국인 주식투자가 미쳐 날뛰는 동안 우크라이나 은행들은 하나둘 쓰러지며 다른 경제 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한두 군데 산업기지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중소도시 또한 그로 인해 꼼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문을 받지 못해 공장 가동률도 40% 가까이 떨어졌다. 일찍이 헤르손의 블루칼라들은 위기의 전조를 느끼고 있었다. 기술적 실업이 나타났고, 권고 휴가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임금 체불 현상도 생겨났다. 가장 상황이 심각한 건 헤르손매시 농기계 생산 공장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꽤 유명한 이 공장은 아직까지 100% 우크라이나산 콤바인을 제조하는 유일한 곳이다. 한 근로자는 “우리 쪽 기계가 미국의 존디어 기계보다 성능이 더 우수할걸요”라며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존디어는 이 분야에서 업계 1위의 기업이다. 이 공장은 우크라매시인베스트(Ukramashinvest)라는 민간 투자그룹에 속해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 기업에 지난 몇 년간 40여 개 회사를 넘겨줬다.

2008년 9월, 경제위기를 이유로 공장 지도부는 직원 1050명의 급여 지급을 중단했다. 5개월간 공장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상황이 잠시나마 호전되기를 바라며 근근이 살아갔다. 콧수염 뒤로 포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호인형의 세르게이 아크레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돈 몇 푼이나마 쥐어보려고 낚시를 시작했어요.” 그는 헤르손매시 공장에서 17년째 선반공으로 일했다. 같은 공장에서 32년째 일한 아나톨리 마르센코는 더 암울한 분위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소일거리로 조그만 시장에서 야간 경비일을 구했네요. 그렇게 일해서 한 달에 800그리브나(약 80유로, 약 14만원)를 법니다.”



반기를 든 농기계 노동자들

지난 2월, 침묵으로 일관하는 지도부의 행태를 보다 못한 헤르손매시 노동자들이 드디어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건물을 점거한 이들은 550만 그리브나(50만 유로)에 달하는 체불 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이어 3월 2일 300명의 공장 직원과 조선소 및 제지공장 동료 노동자들이 지방 행정구인 ‘오블라스트’(자치주)를 향해 진군한다. 이들은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지사와의 대면을 요구했다. “이 시위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거의 사라진데다 시위를 하는 것도 일상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지금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반대운동을 전개하기에는 너무나도 취약한 상태입니다.” 헤르손 기술대학의 사회학자인 블라디미르 코로보프의 설명이다.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이런 노동운동은 옛 소련 시대처럼 친기업적 성격으로 잔존해 있는 ‘회사조합’을 벗어나서 조직된다. 노동자 진영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레오니드 멘세니우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공장 노조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도부 쪽은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했어요. 따라서 우리끼리 알아서 처리해야 했고,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우리가 먼저 나서야 했습니다.”

멘세니우크가 ‘어둠의 노조’라고 이름 붙인 이 노조는 수도인 키예프에서까지 불안감을 조장한다.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노동계가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도네츠크의 미성년자에서부터 키예프의 정장 입은 은행 직원에 이르기까지, 경제위기는 우크라이나 국민 전 계층에게 걱정거리다.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오렌지 세력과 유셴코 대통령의 과거 오렌지혁명(1) 동지였던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는 몇 달째 공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위기를 막아내는 데 필요한 조처를 취하지 못하는 오렌지 세력은 이런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3월 4일, 카리스마 넘치는 티모셴코 총리는 임금 체불자의 체납 임금 지급을 위해 공장에 1200만 그리브나를 지급할 거라고 공표하며 호의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티모셴코 총리는 공장 사장들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직원들 월급도 주지 않는 ‘범죄자들’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으며 국민들의 호감을 샀다. 헤르손에서 긴장된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언론의 취재 열기는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런 약속에도 헤르손매시 공장의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5월 19일에 우리 모두가 해고될 거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집회를 열었기 때문에 이제 공장에서 우리는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됐습니다. 다시 업무로 복귀할 수도 없게 됐어요.” 32년째 공장에서 일한 타마라 바투라이에비치가 격분해 말했다. 따라서 3월 초부터 매일 아침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오블라스트 주정부 청사 앞에 가서 해명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레닌 동상을 뒷배경으로 “우리에게 돈 말고 일을 달라”고 외치는 헤르손의 남녀 노동자들은 주지사를 끈질기게 공격하며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해고 대상자들은 지금의 경제위기가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멘세니우크는 “옛 소련 시절, 이 공장에서는 1만2천 명이 일을 했습니다. 조선소와 더불어 우리 공장이 헤르손을 꽉 잡고 있었지요”라고 회고한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 뒤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2년 전에 이미 여러 차례 해고가 있었고, 당시에도 수개월간 돈을 못 받기 일쑤였습니다. 동료 하나가 작업장에서 목을 매달아 죽은 일도 있었지요. 2007년에는 직원 수가 1500명으로 줄었습니다. 앞으로의 추세는 볼 것도 없어요. 저들은 공장 문을 닫고 싶은 겁니다. 부지를 매각해서 돈을 만들려는 거죠. 위기는 그저 명분에 불과합니다.”

재앙을 부른 무모한 민영화

과거 공산권 도시였던 이곳에서, 주민들의 사회생활은 헤르손매시 공장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크레이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말이면 동료 직원들과 함께 인근 강가에서 미역을 감고 놀았습니다. 휴가철이 되면 흑해 근처의 공장 전용 게스트하우스로 떠나곤 했죠. 심지어 현지에 헤르손매시 근로자들을 위해 민간인이 운영하는 공장 전용 병원도 있었습니다. 공장이 사라지면 우리는 뭘 하고 살아야 하는 겁니까?”

지역 기득권자들은 해외 발주가 늘어난 덕에 조선소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음을 내세우며 이 문제를 최소화하려 하고 있다. “물론 공장이 그렇게 돼서 많은 가정이 영향을 입고 있고,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해고될 겁니다.” 보리스 실렌코프 주지사는 일단 이렇게 얘기하며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400명 가까이는 아직 공장에서 일하고 있고, 헤르손매시에 콤바인 10대를 사주기 위해 주정부 차원에서 그 계획을 진행시킨 바 있습니다. 주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은 잘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퇴직 연금도 제때 지급되고 있고, 헤르손 근처에 있는 옛 정유공장을 다시 가동할 준비가 된 쿠웨이트 투자자도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다시 취업 자격을 얻게 될 겁니다.”

주지사의 집무실 창문 아래에서는 마르센코가 구호를 선창하고, 이어 다른 시위대가 그 구호를 따라한다. 노동자 진영에서 이제 허울 좋은 약속 따위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들은 우리를 양파나 심으러 보내버리고 말 겁니다! 우리 같은 기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할 일은 없습니다. 다른 곳에는 헤르손매시 같은 공장이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우크라이나는 전통적인 농업국가예요. 우크라이나에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농기계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몇m 떨어진 곳에는 시청 건물이 우뚝 솟아올라 있다. 시장 보좌관인 비아체슬라프 야레멘코는 주지사보다는 조금 더 현실에 가까운 시각을 보여준다. “이번 일의 책임이 경제위기에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용자 쪽의 명분에 불과해요. 이는 무모한 민영화가 불러들인 결과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헤르손매시에 손을 대고 싶어했지만, 정말로 투자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겁니다. 임금 체불은 비단 헤르손매시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 헤르손시의 3대 공장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헤르손시의 경제활동인구 12만6천 명 가운데 4천 명이 일자리를 잃었어요.”

 사회학자 블라디미르 코로보프의 설명을 따르자면, 이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헤르손의 산업 부문 심장부가 가동을 멈췄습니다. 도처에서 생산 속도가 둔화되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만 그 누구도 정확한 수치를 제시할 수 없을 뿐입니다. 대통령에서부터 영세상인에 이르기까지 여기서는 이중회계가 관행이기 때문이죠.” 근로계약도 체결되지 않고 ‘묻지마’ 임금이 성행하는 우크라이나에서 통계를 낸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새로 지은 건물 안에는 ‘가짜’ 고용청 분위기가 풍기는 ‘헤르손 고용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꽉 끼는 검은색 버튼 원피스를 입은 고용청장 보좌관 스베트라나 시라예바는 이곳 고용청의 초현대식 시스템을 자랑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통계 수치 자료는 전혀 얻을 수 없었고, 이들은 그저 대략적인 윤곽만을 헤아려줄 뿐이었다. “지난 11월과 12월에 구직자가 많이 몰렸어요. 그 뒤로는 다소 안정세를 보이고 있죠. 하지만 위기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당황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돼 있어요. 급여는 나중에 지급되더라도 중요한 건 일단 일자리를 얻는 것이죠.” 시라예바의 말을 따르자면, 헤르손의 평균임금이 하락해, 4월에는 98유로(약 17만4천 원)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2008년 동기 대비 20%가 줄어든 것으로, 최저임금보다 간신히 40유로가 더 많은 수준이다. 게다가 대형 공장 외에도 이 파장에서 벗어나는 부문은 단 한 곳도 없다. 턱걸이로 중산층에 걸린 사람들은 이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32살의 나타샤 셰브센코는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고, 그의 사촌은 제지 공장에서 일을 한다. 두 사람 모두 임금이 체불됐지만, 일자리를 잃을까봐 진술을 꺼렸다. 지친 기색의 셰브센코는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얘기해줬다. 몇 주 전만 해도 그는 부동산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난해 몇몇 사람과 같이 사무실을 열었어요.” 당시 키예프 같은 지역에서는 대다수 국민의 수입과 전혀 상관없이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2008년 여름부터 팔리는 매물이 급격히 줄어들더니 가을이 지나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결국 사무실 문을 닫게 됐죠. 은행권도 대출을 중단한 상태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집을 살 수가 없게 된 거죠.”

경기 침체 및 해고 사태와 연동해 이 지역에서는 40%에 가까운 부동산 중개업체가 문을 닫았다. “1년 전에는 한창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금리 14% 언저리로 주택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2) 대출 선금은 전혀 요구되지 않았어요. 대출은 거의 달러로 체결됐죠. 지금은 대출 총액이 두세 배로 뛴 상태고, 사람들은 더 이상 상환할 수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셰브센코의 설명이다.

돈과 부동산 가치 대폭락

1990년대 말 그리브나 화폐가치가 아찔할 정도로 폭락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맨 처음 위기의 조짐이 보였을 때 은행으로 몰려가서 적금을 깨고 이를 외화로 바꾸었다. 이런 현상이 그리브나 화폐가치 하락 폭을 더 키웠고, 그리브나 화폐가치는 달러 대비 40% 가까이 하락했다. 셰브센코는 이어 이렇게 설명한다. “많은 사람이 ‘해고’를 당한 게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의원사직’을 한 것으로 처리됐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회사로서는 위로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거죠.” 돈 나갈 곳은 더 많아지고, 주택대출금 때문에 허리는 휘청하고, 자동차와 세탁기를 사느라 빌린 돈 때문에 어깨가 무거운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금세 정신이 혼미해져버렸다.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헤르손에서의 삶이 쉬워 보였어요. 모든 걸 빚을 내서 구입하긴 했지만 갚을 여력이 있었죠. 이젠 그게 다 꿈같은 일이 됐네요.”

낡은 가죽 재킷에 오래된 백팩을 멘 안드리이 드멘트렌코는 확신에 찬 경영인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키예프에서는 이런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레닌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아직 젊은 나이의 그는 은행 계좌도 없고, 대출 경험도 전무하다. 신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 헤르손에서 작은 회사 하나를 운영하는 사장이다. 그의 회사는 키예프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PVC 창틀을 팔고 설치해주는 게 그의 일이다. 요새 드멘트렌코는 1천 그리브나(95유로) 정도를 간신히 벌고 있다. 직원들 월급은 챙겨줄 생각도 못한다.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PVC 창문도 꽤 잘나가는 사업 분야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 돈을 회수해가자 우크라이나 은행은 계좌를 동결했죠. 이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 집에 돈 들일 계획을 중단하게 됐고, 우리는 일이 없어진 겁니다.” 드멘트렌코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 “헤르손매시에서는 초강수를 둔 겁니다. 사장들을 움직일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이곳에서 있었던 시위가 다른 사업장의 본보기가 되고 있어요. 심지어 일부는 시위를 하기 위해 키예프로 떠났어요. 거기라면 자기네들 비중이 더 커지리라 생각한 거죠.” 하지만 키예프에서 이뤄지는 대규모 ‘노동자’ 집회는 현재 그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1야당인 지역당의 지원으로 전열이 정비된 이 집회는 지역당 당수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정치적으로 자주 활용하고 있다. 오는 10월 대선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 실업수당도 드물게 지급되고, 그나마도 지급 기간이 1년을 넘기지 못하는 이 나라에서 급여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헤르손에서는 이제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길거리에 좌판을 벌려놓고 절인 토마토나 오이를 파는 할머니들을 따라하고 있다. 마르센코는 “제 딸과 아내도 저와 같이 헤르손매시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 세 사람 모두 해고될 판입니다. 먹고살려면 밭을 일궈 채소라도 키워야죠”라고 말한다. 할부로 산 자동차 잔금을 갚기 위해 택시운전사로 업종 변경을 한 사람들도 있고, 싼값에 집을 빌려주고 부모님 댁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노령연금 금액이 낮기 때문에 이미 취약한 상태에 있던 퇴직자들은 안 그래도 적은 연금을 자식들과 나눠써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면서 이 소나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거다. 셰브센코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람들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장기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는 듯합니다. 휴가도 하루이틀 정도로 다녀올 뿐, 더 길게는 안 가요.”

젊은 근로자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볼로디미르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고통을 견뎌내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헤르손에는 이런 운명론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이전의 고통스러웠던 경험과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다른 경제위기들을 떠올려준다.

고통에 익숙해선지 희망 안 버려

우크라이나는 18년 전 옛 소련의 붕괴를 겪은 뒤, 독립으로 인해 상당한 홍역을 겪은 나라다. 그 뒤 10년간은 공산주의의 잔재가 빠르게 사라지고 서구식 자유주의로 대체되는 시기였다. 지금과는 다른 식의 경제위기가 닥쳤지만, 고도의 인플레이션과 임금 동결, 통화 가치 폭락 등 그 증상은 비슷했다. 그만큼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습관적인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코로보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번 위기로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약간의 돈을 갖고 무언가 소비를 시작하며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달라지는 게 별로 없어요. 헤르손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15년 전부터 만성 임금 체불에 시달리며 살아왔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죠. 사람들은 단지 이 위기가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인지, 아니면 90년대의 위기보다 더 약할 것인지 궁금할 뿐입니다.”

격분한 헤르손매시 노동자들은 이미 공장의 조속한 재국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게 공장의 재국유화는 정상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와 관련해, 지역당을 지지하는 시장 보좌관도 “기업이 다시 국가에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민영화와 자유주의만이 유일하게 국가 발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 것 같던 2000년대 초반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우크라이나에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발생함에 따라 좋든 싫든 과도기 내내 명맥을 유지해왔으나 세계화한 경제구조에서 제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부 재벌 기업들은 종말을 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식재료 가격 하락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헤르손은 이미 지역 농경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자원에 다시 눈을 돌리며 낙관적 전망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속담 가운데 “희망의 끈은 가장 마지막에 놓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온몸으로 위기를 버텨내고 있는 헤르손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어깨 위에 다시 구호를 내걸었다.


 


 

<각주>
(1) 오렌지혁명. 2004년 정부 주도의 부정선거에 분노한 국민들이 봉기해 부패한 정부를 실각시킨 사건. 한국의 4·19와 비교되는 반정부 대국민 시위였다.
(2) 당시 인플레이션 비율은 20%였으며, 오늘날은 18%에 이르렀다.
 

마틸드 고아네크 Mathilde Goanec

번역/ 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