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흑인 차별 50년 전과 달라졌을까

2015-03-04     아돌프 리드 2세

마틴 루터 킹 영화 <셀마>,
미 흑인 차별 50년 전과 달라졌을까

2015년 3월부터 프랑스 등 세계 각국에 개봉예정인 <셀마>(Selma)는 2014년 12월 미국에서 개봉 당시부터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된 영화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최근 경찰들이 자행한 폭력과 인종차별에 맞서 흑인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라고 간주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역사를 왜곡하고 가상의 ‘흑인공동체’를 과장해 묘사해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아돌프 리드 2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정치학과 교수

 

TV쇼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공동 제작자로 참여했고, 에바 듀버네이가 감독을 맡은 <셀마>는 지금은 전설적인 인물이 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남부에서 흑인들에게 취해진 투표권 금지에 항의하기 위해 앨라바머의 조그만 도시에서 캠페인을 조직하는 과정을 각색한 영화다. 이 영화는 1965년 3월 7일 선거권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셀마에서 주도인 몽고메리까지 이어진 흑인들의 ‘허가받지 않은’ 행진과 이에 대한 경찰의 가혹한 탄압으로 마감된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소위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으며, 공민권 획득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로부터 5개월 후, 미 의회는 흑인들이 투표소에 갈 수 있는 권리를 의결했다. 미국법에서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이 사라진 것이다.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되자 몇몇 기자들은 영화가 특히 당시 대통령인 린든 존슨(1963-1969)의 묘사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고 비난했다. 듀버네이는 자신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이 아니며, 영화인은 자신의 관점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평론가인 모린 다우드는 영화 논쟁에 자신의 견해를 더했다. “‘이것은 한 편의 영화일 뿐’이라는 전통적인 변명은 상투적인 문구 그 이상이다. 감독들은 자신들의 창조적 자유를 앞세우고 진정성(眞正性)을 내세우지만, 사실 그것은 아카데미상을 타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1)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다룬 최근의 다른 영화들처럼(2), 영화 <셀마>도 과거를 하나의 단순한 부대장식이나 도식적인 싸구려 이미지 목록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흑인 엘리트들의 마음에 들도록, 현대의 관념을 지난 시대의 낡은 옷으로 감싸서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과거의 역사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편견에 대해 정의가 승리하는 정도의 이야기로 단순화시키는 것이거나, 개인적인 성공이나 대중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 적들을 무찌르는 투쟁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 또는 인종차별주의를 모든 역사적 맥락에서 유리시켜 흑인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로 간주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공민권을 획득하려는 (흑인들의) 투쟁에서 존슨의 역할에 관한 듀버네이의 시각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의 최초 시나리오에서는 대통령은 흑인들이 주장하는 명분에 동조하는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감독은 “한 백인이 흑인들을 구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기를 바라지 않았다. 2015년 2월 8일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유색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백마 위에 올라탄 누군가로부터 구원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그녀는 존중받을 만한 원칙들을 준수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영화는 셀마의 행진을 같이한 ‘진정한 참여자’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백인 구원자들을 한 흑인으로 바꿔 놓는 것에 만족했다. 감독이 아무리 그 반대라고 주장해도 설득력이 없다. 영화 <셀마>는 마틴 루터 킹에 빠진 단순한 숭배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3) 이처럼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셀마 캠페인은 킹과 그의 동료들인 남부기독교지도자협회(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 사람들의 용감한 행위로 요약된다. 비폭력학생연합(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SNCC) 소속 학생들의 역할은 완전히 생략되어 버렸다. 가장 활동적인 투사였던 제임스 포먼 같은 투사들조차도 편협한 골통으로 묘사되고 말았다. 그 두 조직 간의 긴장관계도 학생연합의 일부 급진행동주의자들이 자신의 세력권을 지키고자 벌이는 유치하고도 하찮은 의욕으로 귀착시켜버렸다. 정치․전략적인 차이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킹 목사는 듀버네이가 영화 속에서 확인시켰듯이 “1968년 암살당할 때까지 공민권 운동을 지휘하지 않았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까지 진행된 행진의 주요 주최자도 아니었다. 이날 행진의 주 지휘부는 필립 랜돌프와 미국 흑인노동자전국연맹(Negro American Labor Council)이었다.

킹에 너무 매료된 감독의 편파성

“영화 <셀마>의 목표는 누구에게 교훈을 주거나 사람들을 결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감독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고 한다. 감독의 목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이고 생생한 차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라고 캘리포니아 대학의 제롬 크리스찬센 교수는 이 영화를 옹호한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서 2014년 한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퍼거슨 사건’의 반향 정도로 이해한 것이다. “존슨 전 대통령이 모두를 구한 백인 영웅은 아니다. 아무도 구원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는 명백하다”고 그는 결론내린다.(4)

반면에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존슨 전 대통령을 새로운 선거법제정을 망설이는 인물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을 두고, 단순히 작가의 자율성만으로는 그 정당성이 보장되기에는 힘들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공민권운동이 지닌 본래적 의미를 왜곡하며, 그 운동이 성공을 거둔 결과물에 대해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해방을 위한 현재 진행 중인 투쟁들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듀버네이의 영화는 미국 흑인사회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5년의 차별적인 법과 미국 남부 주에서 벌어진 흑인들의 투쟁결과를 살펴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공개적으로 스스로 나치라고 주장하는 ‘케이케이케이(Ku Klux Klan)’단의 일원인 데이빗 듀크(David Duke)의 사례는 의미가 깊다. 1990년에 루이지애나주 상원의원 후보, 1991년에 주지사후보였던 그는 대다수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얻었다. 물론 선거에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 결과는 생각해봐야 할 수 많은 문제를 낳았다. 미국 남부의 확고부동한 정치적 정서인가 ? 반대로 연이은 두 번의 패배는 1965년 선거법의 효과인가? 만일 25년 전이었다면 듀크가 잠재적인 백인의 표를 얻었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흑인 인구 비중의 결과와 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1991년 루이지에나 백인 유권자의 40%가 대다수의 흑인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선택했다.

이 일화는 실제로 미국의 정치 풍토에 심층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대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촌지역, 특히 흑인이 다수인 선거구에서 1965년 법에 의해서 새로운 정치선거가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에는 남북전쟁(1861-1865) 이후의 국가재건기간(1865-1877) 이후 처음으로 흑인 후보자가 남부 주에서 치안담당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현상은 물론 북부 주에도 나타났다. 1969년 9명이었던 흑인 의원의 수는 2013년 43명으로 증가했다. 게다가 1980년대 중반, 로스엔젤리스의 톰 브레들리나 덴버의 웰링턴 웹처럼, 백인들이 지배하는 연정에 의해서 흑인 시장이 선출된 도시와는 달리, 확고한 다수의석을 가진 흑인이 지배하거나 통치하는 지자체 행정을 말하는 소위 ‘흑인 도시체제’가(5) 인구 10만 명이 넘는 13개 도시에 나타났다. 아프리카 미국인 출신 의원의 수도 1970년 1,500 명에서 2006년 9,000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변화는 공민권운동이 가져온 결과로 오래 동안 칭송되었다. 그렇지만 1960년 대 이후 등장한 흑인 관료 계층은 부의 불평등한 재분배를 그다지 문제시하지 않았고 또한 흑인 전체집단의 해방보다는 개인적인 성공을 더 중요시했다. 이 사실이 아프리카 미국인 노동자 계층 사이에 되풀이되는 균열을 가져왔다. ‘흑인학’ 연구의 많은 전문가들이 ‘흑인공동체’와 ‘흑인해방운동’이라는 두 개념을 마치 그것들이 동의어이고 유기적이며, 미국사회의 정치적 활력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세드릭 존슨과 딘 로빈슨 교수가 지적하듯이(6),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유행한 자연스러운 인종의 단일화를 전제로 한 블랙파워(Black Power)라는 이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담화는 당시에는 이해가 가능했다. 새로운 정치체제는 아직 미숙했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은 사상과 행동의 일치에 관해서 수사학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다. 오늘날, 흑인들은 인종의식을 갖고 있다는 걸 공공연히 드러내면서도 엉망이 되어버린 교육과 공공서비스, 부동산 투기, 호화주택 등이 생겨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경력과 이념을 신봉하고 있다. 그렇다면 흑인공동체라던가 흑인 대중의 힘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몇 년 전부터 연구자들은 인종 차별시대로부터 현재까지 흑인 인구 내의 계층 갈등과 차별화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1965년의 선거권 법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미국국내 정치의 정상적인 과정에 흑인들의 참여가 허용되면서 백인이나 라틴계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미국인 의원들의 관심도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과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국 흑인들의 긴 정치적 역사와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위한 긴 투쟁의 역사 속에 삽입해서, 복잡한 속성의 공민권운동을 분석하는 것이 차라리 더 유용할 것이다. 듀버네이의 영화는 1965년의 승리를 너무나 신성화해서 박물관에나 갈 물건으로 변모시켜버렸다.

 

(1) 모린 다우드, ‘단지 한 편의 영화만은 아니다 (Not just a movie)’, 〈뉴욕 타임스〉, 2015년 1월 17일.
(2) 테이트 테일러(Tate Taylor)의 <감정의 색깔>(2011),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풀려난 장고>(2012),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링컨>(2012)이 있다.
(3) 듀버네이는 목사의 선언문마저도 충실하게 영화에 수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스필버그의 지적 소유권에 속했기 때문이다.
(4) 참조. 카라 버클리(Cara Buckley), ‘영화와 사실이 충동해서 문제가 될 때( When films and facts collide in questions)’, 〈뉴욕 타임스〉, 2015년 1월 21일.
(5) 〈주전자속의 끓는 물- 인종차별시대 이후의 흑인 정치( Stirrings in the Jug : Black Politics in the Post-Segregation Era)〉,미네소타 대학 출판사, 미니아폴리스,1999.
(6) 세드릭 존슨, 〈인종 지도자들에게 혁명을- 블랙파워와 아프리카 미국인들의 정치 만들기 Revolutionaries to Race Leaders : Black Power and the Making of African American Politics)〉, 미네소타 대학 출판사, 2007 & 딘 로빈슨, 〈미국 정치와 사상에 있어서의 흑인 국수주의 (Black Nationalism in American Politics and Thought)〉,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 뉴욕과 케임브리지, 2001.

 

글·아돌프 리드(Adolph Reed) 2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정치학과 교수. 〈만일을 위한 정의, 신자유주의와 인종 간 평등의 관점에서의 재검토〉, 콜로라도 주 벌더, 웨스트 뷰 출판사(2001) 의 저자.

번역·이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