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 이끄는 북한 여성들

2015-03-04     필립 퐁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평양 여성들이 중국에서 유입된 패션을 따라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평양 거리에서는 단조로운 색상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옷차림 이외에도, 여성들은 정부의 감시가 느슨한 지하시장을 활성화하며 새로운 경제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2012년 봄, 지도자 김정은 곁에 우아한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이는 북한체제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 후 사람들은 이 여성이 김정은의 처, 이설주란 사실을 알았다. 이 여성의 등장은 배우자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어 온통 미스터리 투성이었던 그의 아버지 김정일(2011년 12월 사망)의 사생활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평양의 신흥특권층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장소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의 차림새가 그렇듯이, 절제된 이설주의 세련미는 특별한 게 전혀 없다.

젊은 여성들의 거리 옷차림은 다양해지고 보다 화려해졌다. 하이힐과 통굽이 흔하고, 심지어 휴가 나온 젊은 장병들도 구두를 신었다. 중국 패션의 영향은 국영상점의 진열장에서도 엿보인다. 북한의 최대 신발업체인 포통강은 현재 까다로운 고객을 겨냥해 새로운 신발 모델을 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군복, 거꾸로 쓴 야구모자, 몸에 꽉 끼는 짧은 스커트 복장을 한 인기 팝그룹 모란봉 가수들의 머리모양을 흉내 낸 단발머리나 살짝 염색한 머리도 무척 유행하고 있다. 보다 온화한 이미지를 선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RPDC)은 마치 스포츠 행사장에 치어리더들을 파견하듯, 중국, 캄보디아 등 해외에 운영 중인 북한식당에 젊고 예쁜 여성들을 파견한다. TV들이 여성 팝그룹의 공연 모습을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국영항공사인 고려항공도 기내에서 같은 공연을 방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방사람들이 가난의 경계선에서 허덕이고 있는 터에 평양의 모습은 환상이 아닐까? 과연 평양 여성의 외모는 변한 걸까? 국경의 폐쇄로 정보도 거의 없고, 방문객과 북한주민 간 접촉이 부재하기 때문에, 북한의 현실을 파악하려면 퍼즐을 맞춰야 한다. 북한 주민들과 일일이 접촉하고 방문하다보면, 덮개로 덮여 있는 채 변한 게 없을 것 같은 사회가 변화되고 있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평양 여성들의 옷차림과 액세서리 그리고 거동에서 어떤 변화가 읽힌다.

‘혁명적인 동시에 여성적인’ 여성들

1989년 김일성 국가주석이 잡지 <조선여성>에서 천명했던 것처럼, 1945년 해방 이후 등장한 북한의 ‘신여성’은 혁명적인 동시에 ‘여성적’이어야 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분석가로 근무한 헬렌 루이즈 헌터는 “북한 여성들이 중국이나 소련 여성들보다 더 매력적인 여성미를 갖추고 있다”(1)고 했다. 북한 여성들의 옷차림은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여성들, 즉 단발머리에 무스를 발라 머리를 고정시켜 ‘슈퍼맨’의 모습을 한 포스터 속 중국 여성들의 모습보다는 훨씬 다양했다. 북한 여성들은 이따금 활동에 편리한 발목을 드러내는 전통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1960년대 말부터, 북한 정부는 전통의상이 과거와 현재 간 연속성을 상징한다며 주요 행사에 여성들이 전통의상을 입도록 장려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 농부, 가정주부 등은 서양식으로 옷을 입고, 정갈하게 빗거나 파마머리 또는 스카프를 두르고 다닌다.(2)

1980년대 평양에서 거주한 적이 있는 서울 소재 국민대학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북한은 옷차림에 있어 단 한번도 ‘은둔의 왕국’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북한은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은 나라다. 20세기 전환기에 중국의 현대 패션이 조금씩 유입되자, 강경대응에 나섰던 북한은 최근 몇 년 사이 유연해졌다. 2002년 이후, 매년 봄마다 평양에서 패션쇼가 열리고 있다. 2014년 9월 패션쇼 때는 단색 전통의상에서부터 컬러풀한 전통의상까지, 그리고 1960년대의 고전적인 ‘샤넬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양장 등을 선보였다.

옷차림 이외에도, 북한 여성들은 기근기(1995∼1998년)를 거치면서 생존활동의 산물인 시장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사회의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여성들은 정권의 핵심에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2013년 12월, 남편 장성택이 숙청된 이후 정치무대에서 모습을 감춤)와 지난 11월 27세의 나이로 북한 노동당 부부장으로 승진한 김정은의 여동생만이 정권의 핵심에 있다. 최신 자료로 알려진 2002년 통계에 따르면, 여성들은 최고인민회의에서 4분의 1도 안 되는 의석과 노동당 중앙위원회 의석의 4.5%밖에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란코프는 2004년에 이미 “북한의 신자본주의는 확실히 여성의 얼굴을 지녔다”고 말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여성들은 기근의 주요 희생자였다. 이들은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며 성폭력과 강제 낙태 그리고 그밖의 학대까지 받았다.(3) 북한 전문가 박경애(4)는 이러한 시련 때문에, 여성들은 가정에서 보다 많은 독립성과 영향력을 확보했고,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진보적인 의식을 지니게 됐다고 평가한다.

빈사상태에 빠진 북한경제 속에서 종양처럼 번지는 다양한 형태의 지하경제활동은 이러한 압박(여권신장에 따른 압박)의 산물이다. 북한정부는 이같은 돈벌이(지하경제활동) 열풍을 잠재우긴 했지만, 과거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강경정책과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적절히 혼합하며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5) 그러나 자율경제 활동 부문(상업, 서비스, 생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것을 국민총생산(GNP)으로 정량화하기는 어렵다.(6)

이같은 지하경제가 등장시킨 ‘신흥특권층’(기업인, 중개인, 상인, 소매상)은 전통적인 엘리트(대부분이 노동당 간부들이며,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같이한 세력의 후손들이다)의 폭을 확장시키며, 예전에 상대적으로 평등하던 사회의 이해관계를 세분화시켰다. 지하경제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정확한 자료의 부재로 인해 휴대전화 보급 대수 같은 단편적인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2014년 250만 명이 휴대전화를 보유하고 있었고, 주민 10명당 1명은 휴대전화를 구입하기 위해 대략 200~300 달러를 썼다. 이러한 신(新)사회계층의 등장을 증명하는 건 평양의 상점들이다. 국영상점은 예전보다 물건들을 잘 갖춰 놓았는데, 중국, 싱가포르, 한국 등에서 건너온 식료품과 상품을 진열장에 내놓고 있다. 상점들마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려는 구매자들(능력이 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로 붐빈다. 명품매장에 진열된 술, 화장품, 해외브랜드 옷들을 보노라면 국제사회가 북한을 상대로 취한 이른바 ‘명품’ 수출 제제조치의 실효성에 의구심이 든다. 상품가격은 일반 대중에겐 천문학적이지만, 곧잘 팔려나간다. 이 모든 지하경제 부문에 여성들이 관여하고 있다.

만약 법적 조항만 고려한다면, 북한은 아시아에서 선구적인 국가이다.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 측면에서 보면, 북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무상교육, 배우자의 선택권, 이혼과 상속권 등)를 지녔다. 1946년 3월 토지개혁의 결과로, 가장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모든 농민 가정에 토지가 재분배됨으로써 가부장제의 물질적인 토대가 무너졌다. 당의 이익을 위해, 유교성향이 강한 사회의 전통적인 의무로부터 여성들이 해방된 셈이다. 당이 ‘당원들 간에’ 중매쟁이 역할을 하고 있어, 결혼은 이제 더 이상 가족 간의 대사가 아니다.

북한정부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지만, 남녀의 역할에 대한 개념에선 보수적이다. 성해방은 사회주의 구축에 일조한다. 또한 혁명적인 성향을 보이는 ‘신여성’은 ‘현모양처’여야 한다. 이러한 여성의 모습이 “혁명적인 시민의 모델”이다.(7)

한국전쟁(1950∼1953년) 이후, 북한 여성들도 국가를 재건하는 일에 나서야 했다. 상당수의 남성들이 전쟁 중에 전사해 이들의 일손부족을 여성들이 메꿔야 했다. 1950∼1960년대에 여성들은 생산에 기여하고, 주체사상을 교육 받고, 5호담당제를 책임지고, 가정도 건사하고, 자녀도 낳아야 했다. 이어서 중공업이 중시되고 여성들의 일자리가 희박해지면서, 여성들은 대수롭지 않은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1980년 중반의 경기 침체로, 많은 여성들은 결혼과 함께 일을 그만두고 자녀 교육과 가사에 전념한다. 정부 또한 보다 전통적인 여성상을 열성적으로 선전하고, 출산을 장려하기 시작한다. 선량함과 단순함과 애정을 구현하는 미덕, 즉 어머니상이 노동당의 이미지와 결부되며, 가족은 국가의 은유가 됐다. 어머니들이 북한체제의 주요 영웅들이 된 셈이다. 예를 들면, 김정일의 어머니, 이른바 “혁명의 어머니” 김정숙과,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을 비롯해 익명의 여성 노동자들과 공을 세운 어머니들이 영웅대접을 받았다. 기근이 오면서, 여성들은 북한의 생산활동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다. 기근의 혼란 속에서 여성들은 국가 생존의 톱니바퀴가 됐다. 반면에 남성들은 식량부족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서울에 거주하는 한 탈북여성은 “북한 남성들이 헛짚었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으며, 힘없는 일부 가장들은 체면을 구겼다. 가정주부들은 소매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직장여성들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2000년대 상반기 10년 동안에 출간된 소설들은 어머니의 책임감과 직장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을 잘 묘사했다.(8)

기근의 혼란에서 터득한 생존의 기술

거대 암시장으로 전락한 농민시장은 여성 활동의 주 무대가 됐다. 여성들은 가족이 보유한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시장으로 갖고 나와 팔거나 장비, 그릇, 가구, 옷 등과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 즉 주택가 사이나 도로가 바닥에 좌판을 펼쳐 놓고 장작, 약초, 텃밭을 일궈 얻은 야채, 직접 집에서 만든 작은 과자 등을 판매했다. 또 일부는 이발, 구두수선, 삯바느질 등과 같은 서비스업에 뛰어들었다. 새벽부터 여성농부들의 기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이들은 등이 휠 정도로 많은 짐을 지고 도시로 향한다. 일부 여성들은 먼 길을 걸어 다니거나 트럭 짐칸에 끼어 탄 채 돌아다닌다. 요즘도 여전히 여성들은 행상을 하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도시인 신의주 역 플랫폼에 들어서자, 커다란 봇짐을 진 여성들이 눈에 띈다. 신의주는 양국 간 합법이건 불법이건 간에 대부분의 무역거래가 이루어지는 ‘관문’이다. 여성들이 소매업(노점상)과 식당업과 서비스업을 관장한다.(9)

유교적 유산도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2011년 서울로 탈북한 40대의 한 여성은 “북한에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가 남아있다”고 말하며, “남한에서조차도 탈북여성들은 그런 관습에 익숙해져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북한 여성과 남한 남성을 짝 지워주는 결혼 전문업체가 돈을 벌고 있다. 오래된 속담처럼, 완벽한 조합은 “남남북녀” 커플이다. 간혹 일부 남한 남성들은 “남한 여성이 대가 세다”고 생각한 나머지, 탈북여성들과의 결혼을 선호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북한 여성들이 이같은 자신들의 위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건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그 방법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주로 가계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어 그 영향력도 커졌다.(10) 탈북여성들은 젊은 여성들이 결혼을 더 이상 의무로 여기지 않고, 되도록이면 이를 뒤로 미루고 있다고 전한다.

더군다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혼란은 남녀 간 관계의 상대적인 자유화를 낳게 된다. 이는 소설들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과거에, 작가들은 커플 간 이데올로기적 교감을 강조했다. 이후, 이들은 로맨스와 감정을 거론하더니 한발 더 나아가 암암리에 욕망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이 반한 남자와 결혼하는 열정적이고 과단성 있는 여성들이 등장했다.(11)

197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존재하지 않던 이혼이 등장하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합의 이혼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가장 흔하게 내세우는 이혼사유는 배우자의 “반동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이혼 여성은 여전히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파트릭 모뤼스는 자신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한 백남영의 소설 <친구들(Des amis)> (Actes Sud, 2011) 서문에서 “이혼은 사적인 행동이 아닌 사회적 행동”이라고 강조한다. 탈북 여성들 또한 가정 폭력의 증가로 인해 이혼이 생기고 있다고 증언한다.

또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사소한 잘못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경찰이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한다. 남한으로 탈출한 한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공장이나 군대 내의 성폭행과 성희롱이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기근으로 인한 인명 손실 이후, 북한정부는 출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홍보를 시작했다. 이 여파로 피임약을 구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병원들이 (공식적으로 법이 허가한) 낙태를 꺼리며 불법 낙태시술이 증가했고, 덩달아 그에 대한 위험부담도 생겼다. 성병 또한 우연한 기회에 갖는 매춘 행위로 말미암아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여성들은 1990년대의 후반부와 그 이후의 혼란을 틈타 자신들만의 자율공간을 관리하는 데 신경을 썼다.(12) 여성들은 북한정부가 시장상인의 연령 제한을 50세 이상으로 못 박자 저항했다. 2007년 10월과 2008년 3월, 여성들은 회령과 청진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제한적이긴 했지만, 적어도 집단행동에 주저 없이 참여한 여성들 간 연대를 보여줬다. 전통과 혁명에 사로잡혀 굴종하던 여성들이 해방되고 가족의 수호신으로 거듭나며, 자신들의 멍에(전통과 혁명)를 서서히 벗어 던지고 있다.

 

글·필립 퐁스 Philippe Pons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독해 강의

 

(1) Helen-Louise Hunter, ‘Kim Il-sung’s North Korea,’ Praeger Publisher, Santa Barbara (Canada), 1998년.
(2) Cf. Koen De Ceuster, ‘On representation of women in North Korean propaganda posters’, International Convention of Asia Scholars, Adélaïde(Australie), 2009년.
(3) Lucia Jang et Suzan McClelland, ‘Stars between the sun and moon. One woman’s life in North Korea and escape to freedom’, Douglas &McIntyre, Madeira Park (Canada), 2014년.
(4) ‘Economic crisis, Women’s changing economic roles, and their implications for women’s status in North Korea‘ Pacific Review, San Diego (Canada), 2011년 5월.
(5) Patrick Maurus, ‘미래의 용을 꿈꾸는 북한(La Corée du Nord se rêve en futur drag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2월.
(6) 2013년, 기업은행경제연구소(IBK Economic Research Institute)는 북한의 지하경제 규모를 10억에서 30억 달러로 추정했다.
(7) Suzi Kim, ‘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 Cornell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3년.
(8) Cf. Patrick Maurus, ‘북한의 여성 영웅들(Héroïnes de Corée du nord)’, dans Béatrice Didier, Antoinette Fouque et Mireille Calle-Gruber, ‘창의적인 여성들의 사전(Le Dictionnaires des femmes créatrices)’, éd. Des Femmes, vol. 3, 파리, 2013년.
(9) Cf. Stephan Haggard et Marcus Noland, ‘Gender in transition, The case of North Korea’,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2012년 6월.
(10) Jin Woong Kang, ‘The patriarchal state and women’s status in socialist North Korea’, Graduate Journal of Asia-Pacific Studies, vol. VI, n° 2, 2008년.
(11) Lim Soon-hee, ‘Value changes of the North Korean New generation and prospects’, Korea I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2007년.
(12) Lee Mikyong et Ku Su-mi, ‘The life and consciousness of North Korean urban women after the economic crisis’, North Korean Studies Review, vol. VIII, n° 2, Detroit (Etats-Unis),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