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푸코는 어디에 있는가
코스타 가브라스가 바라본 ‘연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보수적 경제정책에 대한 저항이, 군부독재에 대한 투쟁만큼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1967년 4월 21일 쿠데타 이후에, 좌파를 넘어서서 더 넓은 여론분야로까지 국제적 연대가 확장됐었다. 코스타 가브라스가 자신의 영화 <제트(Z)>가 어떻게 그 상징이 됐는지 이야기한다.
필립 데캉 │언론인
스릴러 영화 제트는 좌파 국회의원인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이브 몽땅 배역)의 살해사건을 밝히려다가 정부가 관여한 복잡한 미로에 빠진 한 판사(장 루이 트리티냥)와 기자(자크 페렝)의 이야기이다. 바실리스 바실리코스(1)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진실을 찾아가는 이 영화는 전쟁(1946∼1949년)의 소용돌이에서 막 벗어나 중도 좌파 의원들이 과반수로 선출됐던 1960년대 그리스의 실제 역사와 매우 닮았다. 관객들은 해피엔딩을 예상하며 군 책임자들(피에르 뒥스, 줄리앙 기오마르)이 수감되는 장면을 기다리지만 오히려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된다.
“<렉스프레스>에서는 ‘프랑스 최고의 정치영화’라고 평가했지만, 개봉 첫 주에는 극장에 관객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난 2월 10일 파리에서 만난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러다 차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유럽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군부독재가 충격을 가져다 준거죠. 그때가 1969년 2월이었는데 68년 5월 혁명이 일어난 몇 달 후였습니다. 매 상영시간마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이 박수를 쳤어요. 영화는 40주 동안 상영 됐고 파리에서만 8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다녀갔습니다. 영화의 장점은 어떤 상황을 구현하고 쉽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 영화는 우리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드롬이 됐어요.”
1967년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부터 문화계는 동요했지만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 같은 수많은 사람들에겐 피난처가 됐다. 오로포스에 수감 중이던 주네스 람브라키스의 설립자인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석방을 위한 청원운동은 지지자 그룹을 넘어서서 널리 퍼져나갔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자신의 형제를 통해 바실리코스의 소설을 접한 다음 조르주 상프랑과 각본을 썼고 어렵지 않게 배우들을 섭외했다. “배우들은 곧바로 섭외를 했습니다만 투자금을 모으는 데 1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수익금 투자위원회를 맡고 있던 에드가 모랭이 투자금을 얻는 데 도움을 줬어요. 트리티냥은 자크 페렝과 함께 해결책을 찾다가,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본인이 제작자가 됐어요. 그가 “알제리에서 합시다!” 라고 말했죠. 이브 몽땅도 출연료 없이 영화를 찍겠다고 했고, 코미디프랑세즈 가입 배우이자 드골파 성향의 피에르 뒥스마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무언가 하고 싶어 했어요.”
영화 촬영 중에 이루어진 트리티냥의 텔레비전 인터뷰는 당시의 분위기를 더욱 달구게 된다.(2) “어떤 배우들은 배우가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정치적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 비극이에요. 그런 영화는 거의 없죠. 저는 언제든 기꺼이 정치영화를 찍을 준비가 되어있어요.” 루이 아라공,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비공개 시사회에 참석했다. 감독과 배우들과 망명한 그리스 정치가들이 모여 토론을 했고, 영화관 입구에서 전단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한결 같은 방향으로만 향하지는 않았다. 우파 성향의 <르피가로>는 무장을 한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가난은 “서양세계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어렵게 만든다. 가난에는 무질서의 경향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선거는 “내전으로 귀착할 수밖에 없었다.(3)” 하지만 진보성향의 언론은 군부독재체재에 대한 적대감을 대대적으로 나타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프랑스 수와르>의 피에르 라자레프 사장이 저를 집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좌파는 아니었지만 그리스에 대해 연민을 갖고 있던 다른 인사들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어느 날 저녁에는, 에릭 룰로 기자가 좌파이자 드골파였던 레오 하몽 장관과의 저녁식사를 위해 우리를 불렀습니다. 장관은 젊은 그리스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그리스의 상황에 대해 공감했습니다. 또 다른 날 저녁에는 샹젤리제의 콩코드 영화관 사장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영화를 보러 왔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지 두 달 후인 1974년 7월, 데스탱 대통령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힘쓰며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그리스의 옛 총리인 콘스탄틴 카라만리스에게 자신의 비행기를 내어준다.
제트, 미국에서의 성공
코스타 가브라스의 작품은 많은 이들의 신념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수많은 찬사를 받게 된다. 액션영화의 법칙을 지키며 많은 대중을 사로잡았고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칸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상과 함께 트리티냥이 남우주연상을 탔고, 할리우드 아카데미시상식에서는 최고외국어영화상과 최고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줄스 다신과 멜리다 메르쿠리는 그리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는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영국여왕의 여동생인 마가렛 공주까지 영화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그 당시를 아직까지 즐겁게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몇 년 후, 자크 페렝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런, 그런 나라에서 우리 영화를 샀어요.’라고 말했어요. 그건 체제가 전반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의미했죠.” 그런데 모스크바에서는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영화가 한 차례 상영됐으나, 영화가 사건 당시 그리스 고위층이 즐겨 찾던 볼쇼이 쇼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상영은 이뤄지지 못했다. 물론, 코스타 가브라스의 작품은 그렇게 빨리 소비에트 연합으로 파고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아서 런던의 실화를 바탕으로 1952년 프라하에서 있었던 스탈린의 숙청을 담은 영화 <고백(L’Aveu)>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민에 대한 연민은 그리스 군부에 대한 외교적 압박으로 나타나, 그리스 군부와 그들을 지지하는 미국을 고립시켰다. 지지자들의 구체적인 행동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젊은 화가였던 마리아 아마랄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예술가들은 모두 그리스의 군부에 반대했습니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정치 망명가들은 받아들였죠.” 국제주의자 앙리 쿠리엘이 설립한 연대협회에 의해 뽑힌 마리아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그들을 도왔다. “제가 처음에 했던 일 중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다시 그리스로 돌아가 저항활동을 할 수 있도록 위조신분증을 만들어 주는 일도 있었어요. 모든 사람을 도왔죠, 서로 경쟁관계에 있던 두 곳의 공산당까지요. 위조여권 도장을 만들 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어까지 배워야 했어요.”
“오늘날의 양심을 움직일 수 있는 사르트르와 푸코는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물건만을 팔고 있다.”라며 코스타 가브라스는 탄식했다. 그러나 지난 5월 알렉시스 치프라스를 만난 코스타 가브라스는 다시 정치에 대한 의욕을 되살렸다. “치프라스가 파리에 왔을 때 저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 그리스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죠. 치프라스가 계획한 문화프로그램은 깊은 성찰의 결과였어요. 매우 중요하고도 특별한 것을 제안했어요. 우리 둘 다 그리스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저는 1981년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당선 이후 특정한 정당을 지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치프라스의 국회해산 연설을 듣고 난 후, ‘당신이 이겼으면 좋겠어요.’라고 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지요.”
시리자당의 선거 승리는 코스타 가브라스에게, 1972년 영화 <계엄령(Etat de siège)>을 촬영했던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아옌데 대통령의 비극을 1982년 영화 <실종(Missing)>을 통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치프라스의 성공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폭력은 경제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칠레에서처럼 무기가 사용되지는 않을 겁니다. 치프라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람들은 애를 쓸 거예요. 치프라스가 성공하도록 두면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곳에 나쁜 전례를 남기는 게 될 테니까요.”
(1)
언론인, 철학박사. 파리정치대학(IEP), 파리 제6대학교, 파리 제4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인류에 대한 범죄? 복제된 아이들, 지옥에 간 아이들>(2004), <아이들을 낳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2007), <자궁, 기술과 사랑. 체외 발생된 아이들>(2008) 등의 책을 출간했고, <피히테의 가족법은 무엇인가?> (레제뛰드 필로조피크, 2007)를 비롯해 여러 잡지에 다양한 기고문을 게재했다.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