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놀음 통치의 허구

2015-03-04     알랭 쉬피오

예산적자, 부채비율, 투자수익률, 경제성장률……. 숫자의 홍수가 우리 삶에 범람하고 우리의 세계관을 규정한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수는 법에 종속되어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에 의한 통치가 법의 지배보다 앞서게 됐을까? 알랭 쉬피오는 최근 발표한 저서에서 이러한 주제를 다뤘다. 그 일부를 발췌, 게재한다.

 

알랭 쉬피오|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수(數)에 의한 통치가 발전한 일은 역사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다. 인류는 세상의 질서를 지배하는 최상의 원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물리학이나 수학을 통해 법과 수를 결부시켜왔다. 자연질서, 법, 경제, 사회질서 뿐만 아니라 종교질서에 있어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종교에서는 신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과 절대적 진리를 영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신의 섭리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라 여긴다.(1)

수에 의한 통치가 발달한다고 법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법의 내용이 유용성 계산 결과에 좌지우지된다. 즉 인간사회의 기능을 지배하는 ‘경제적 화합’을 도모하는 쪽으로 법의 내용이 정해진다.(2) 하지만 과연 법이 숫자로 환원될 수 있을까? 수학이 드러내는 완벽한 일치를 표현하는 것 말고도 법이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사회적 삶의 일부인 ‘불화의 해결’이라는 법 고유의 영역이 있지는 않을까? 오늘날 통치자들은 경제와 사회의 수치화된 표현과 피통치자들의 민주적 표현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매일같이 이러한 질문을 마주한다.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수의 역사를 훑어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 수에 의한 통치를 추진한 이유를 알고, 또 그런 계획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수의 상징적 가치에 관심 많아

사람들은 옛날부터 수에 대해, 그리고 수가 지니는 조직력에 대해 환상을 품어왔다. 이는 비단 서구문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의 상징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중국사상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3) 또한 인도, 아랍권, 페르시아권에서 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수에 대한 기대가 특히 서구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된 건 사실이다. 처음에 숙고의 대상이던 수는 지식의 수단이 됐고, 나아가 예측의 수단이 됐으며, 현대사회에서 수를 이용한 통치관행이 도입되면서 법적인 효력까지 지니게 되었다. 혹자는 수에 의한 통치의 기원을 성경에서 찾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지혜서(기독교와 유대교는 외경, 가톨릭교는 제2경전으로 간주-역주) 11장 20절을 보면 “신께서 모든 것을 잘 재고, 헤아리고, 다 알아서 처리하셨다”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은 기원전 2세기 들어서 헬레니즘 문화권의 유대인이 신피타고라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직접 그리스어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은 수에 의해 정리된다”고 말한 이는 바로 피타고라스(B.C. 580~B.C. 500)로 추정된다.

모든 것은 수에 의해 정리

수에 대한 숙고가 신의 섭리를 깨닫는 열쇠라는 생각은 피타고라스로부터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큰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플라톤 및 르네상스기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서들이 이에 기여했다.(4) 이러한 믿음은 지금도 우리의 상상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세상은 수학이다.” 이는 2010년 필즈상 수상자이자 앙리푸앵카레 연구소 소장인 세드리크 빌라니의 감수 하에 2013년 일간지 <르몽드>가 발간한 논문집의 제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수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이며, 따라서 세상을 지배하는 열쇠인 셈이다. 피타고라스의 후계자들은 철학, 과학, 신비학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모두 공통적으로 일종의 수적 ‘적법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했고, 이것이 우주학 뿐만 아니라 신학, 음악, 윤리학, 법학 등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과학자든 신비학자든 피타고라스학파 학자들은 모두 10이라는 수를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이 학파의 상징물은 10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도형이었는데, 이를 테트라크티스(tetractys)라고 불렀다. 이 비의적 상징 앞에서 피타고라스학파 학자들은 수학적 비밀을 비롯한 자신들의 어떤 비밀도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숫자 10을 상징하는 그 기하학적 도형은 점들로 이루어진 이등변 삼각형으로 세 변은 각각 네 개의 점으로 이루어져있다(꼭지점 3개와 각 선분 상에 점이 2개씩 있으므로 모두 10개의 점이 있게 된다-역주).

미카엘 스톨라이스는 ‘법의 눈’의 은유에 대한 연구에서 테트라크티스가 서구역사를 어떻게 관통했는지를 보여주었다. 테크라크티스의 흔적은 프리메이슨과 신비주의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기독교는 원래 이를 이교도적 도형이라며 거부했지만 다시 삼위일체의 형태(5)로, 그리고 신의 눈 모양으로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테트라크티스의 사용은 계속되었고, 세속화하여 법의 눈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6) 이렇듯 종교적, 법률적, 수학적 상징성을 지니게 된 테크라크티스는 오늘날 미국의 1달러 지폐 뒷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폐에는 미국 국장의 양면이 찍혀 있는데 1776년이라는 숫자가 하단에 기입된 피라미드가 국장의 후면을 장식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신생국가를 살피는 ‘섭리의 눈(Eye of Providence)’ 즉 신의 눈이 그려져 있다.

혼돈에서 구해낸 우주, 즉 코스모스를 상징하는 테크라크티스는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7) 전쟁의 신 아레스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딸인 하르모니아는 고대 그리스시대로부터 상반되는 것의 결합, 불화와 불일치의 해결을 의미한다. 유럽연합 법에서도 화합(harmonization, 표준화)은 조약이 보장하는 경제적 자유의 법적 실현을 뜻하기도 하고, 이러한 자유 행사의 결과로 생겨나는 자발적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유럽연합 기능에 관한 조약(로마 조약) 제151조는 회원국 간 “사회시스템의 화합”이 “역내 시장의 기능”, 즉 사업자들의 이해관계 계산에 따른 자유로운 활동의 결과로 발생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각국 법규를 통일한 데 따른 부수적 기능은 바로 이러한 자발적 과정을 지원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마치 7세기 전 편찬된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처럼 유럽연합(EU) 조약도 ‘불일치하는 법령들의 일치’를 구현함으로써 각국 법규의 다양성과 경쟁의 조건을 극복하여 “진보 가운데 평등”을 구현하고자 했다.(8) 그러나 그라티아누스 교령집과는 달리 유럽연합이 구상하는 일치는 법률적 작업물이 아니라 경제적 계산의 부산물이며, 오직 경제적 계산을 지원하고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각국 법규를 통일하는 것이다.

EU 법규 통일은 경제적 계산이 목적

그러나 조약 문구에 따르면 이러한 계산에 의한 화합 생성은 ‘역내시장’, 즉 유럽연합법’이 수립하고 구획한 시장에만 해당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마 조약의 작성자들은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모든 제약이 철폐된 세계시장까지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전지구적인 화합이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완전한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는 초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승리와 함께 수십 년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르네상스기로부터 지금까지 화합의 개념은 법사상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마리 테레스 푀겐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바티칸 서명실에 그려진 라파텔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학파>를 날카롭게 분석한 바 있다.(9) 푀겐은 이 그림을 언급하며 고대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가 남긴 12표법 편찬 관련 기록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들려주었다. 푀겐은 로마의 초창기 성문법이 왜 12개의 표로 이루어졌는지 질문을 던졌다. 피타고라스학파가 신성시하던 수, 모세의 십계명을 이루는 수인 10이 아니라 12를 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티투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457년 10인 위원회는 법을 편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 위원회는 테크라크티스와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즉, 전년도 집정관 1인, 당해년도 집정관 2인, 그리스에서 돌아온 사신 3인, 그리고 4명의 노인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수를 완성하기 위해서”(10)라고 티투스 리비우스는 적고 있다. 여기서 ‘수’는 물론 신성한 수 10을 뜻한다. 10명의 위원이 편찬한 법전은 10개의 표에 옮겨졌고, 이는 로마 시민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시민집회에서 채택됐다. 그때 “완벽한 로마법 체계를 이루기 위해서” 두 개의 표가 추가돼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이에 10인 위원회가 다시 구성된다. 이미 10표법 편찬에 참여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이번 위원회에도 함께하게 된다. 그런데 새로 선정된 10인 위원회는 폭군 같은 행동을 일삼았다. 특히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이 정한 법마저 위반했으며, 한 재판에서는 법관으로서 의무를 저버리고 비르기니아라는 젊고 아름다운 평민 처녀를 자기 부하에게 노예로 넘긴다. 비르기니아의 아버지는 딸을 죽이는 것이 굴종과 능욕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생각하며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불의 앞에서 민중은 항거했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감옥 독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기원전 449년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장)에서 12표법이 공표되면서 로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법의 기원을 다룬 이 기록은 그 중심에 수 10과 12, 그리고 법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푀겐은 로마인들이 ‘치외법권’을 경험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법질서가 수립되었고 사회가 화합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치외법권’을 언급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착각이다.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길 수도 없다. 그런데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자기가 정한 법을 어겼고 그래서 죄인이 되었다. 법의 기원에 관한 이 기록이 시사하는 바는 오직 계산적 이유에만 근거를 둔 법질서는 헛되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수 10에서 화합의 수 12로

그럼에도 서구 법사상이 계산에 의한 화합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다면 이는 우리가 법과 법의 위반, 질서와 무질서 간의 심오한 일관성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을 때 우리는 가당치 않은 ‘치외법권’을 이야기하는 대신 민주적 의사결정과정(그 결과 10표법이 채택)과 불의에 대한 집단적 저항(2개의 표를 추가로 채택)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법치체제의 구축은 합리적 계산이 아닌 불의와 열정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로마법 수립에 관한 이 이야기에서는 인간적 열정이 지나쳐 법을 위반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수의 왕국이 지배하는 완벽한 법에 대한 휴브리스(hubris, 오만) 역시 지나쳤다. 이런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석해보면 완벽한 수 10에서 화합의 열쇠 12로 넘어간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12표법은 이성적 의사결정의 결과인 동시에, 부당하다는 감정이 야기한 투쟁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투쟁은 그리스에서처럼 만인에게 평등한 법을 수립하려는 로마 평민들의 투쟁이었으며, 아울러 지도자들부터 법의 적용을 받기 원한 모든 로마 시민들의 투쟁이었다. 즉 로마법의 초창기는 수에 기초한 이상적 질서는 덧없으며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경험에 기반을 둔 질서가 필요하다는 자각의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도 이와 같은 로마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좋은 법은 투쟁의 경험에 뿌리내린 법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공화국에는 두 개의 당이 있다. 하나는 귀족들의 당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의 당이다. 그리고 자유를 지지하는 모든 법은 이 둘의 대립관계에서 탄생한다. 이토록 많은 덕목이 빛나는 공화국(로마 공화국)을 무질서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들 덕목을 싹 틔우는 것은 좋은 교육이며, 좋은 교육은 좋은 법이 있을 때 가능하다. 또한 좋은 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솔하게 비난하는 혼란의 산물이다.”(11) 클로드 르포르가 보여주었듯 마키아벨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진실을 발견한다. 자유로운 도시국가에서 법은 냉철한 이성의 소산이 아니라 두 가지 무한한 욕망, 즉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귀족의 욕망과 압제를 거부하는 민중의 욕망이 충돌하여 탄생한 열매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법은 영구불변의 것이 아니다. 법은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언제든 개혁될 수 있다.(12)

 


글 • 알랭 쉬피오 Alain Supiot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저서 (Fayard, Paris, 2015년 2월 18일 출간) 번역 번역 • 최서연 qqndebien@naver.com

(1) 이슬람교의 경우 Ibn Khaldûn, (해설 및 설명 René Perez), Sindbad, Paris, 1995 참고.
(2) 계산에 의한 화합은 피에르 르장드르가 소개한 개념이다. (Pierre Legendre, , Mille et une nuits, Paris, 1996). 그 역시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았다(Frédéric Bastiat, , Guillaumin, Paris, 1851).
(3) Marcel Granet, , Albin Michel, Paris, 1968 (초판 1934)에서 수(數)에 대한 장 참고.
(4) Ernst Cassirer, , Editions de Minuit, Paris, 1983 및 Frédéric Patras, ,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2014 참고.
(5) Dany-Robert Dufour, , Gallimard, Paris, 1990 참고.

(6) Michael Stolle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