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광란의 스펙타클은 없어야

2015-03-04     정용철

나는 지금 지난해 12월 8일 모나코에서 열린 제 127차 IOC총회 개막식 동영상을 보고 있다. IOC 미디어에서 공식 제작한 45분 51초짜리 분량이다. 모나코 대공 알베르 2세와 함께 등장한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왕년의 펜싱 금메달리스트답지 않게 좀 꾸부정한 자세로 IOC 회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입장하고 있다. 잠시 후 바흐 위원장은 근대올림픽 역사상 가장 전향적인 연설을 시작한다. ‘올림픽 어젠다 2020’이라고 불리는 IOC의 개혁안이다.

‘올림픽 어젠다 2020’의 숨겨진 맥락

‘올림픽 어젠다 2020’이 발표된 지 3개월이 지난 지금, 바흐 위원장의 연설영상을 꼼꼼히 살펴 본 이유는 간단하다. 이 개혁안이 근대올림픽사상 가장 전향적인 변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은 평창올림픽의 단독개최를 저지하고, 강원도를 환경파괴와 재정파탄의 재앙에서 구할 대의를 주고 있다. 그러나 IOC가 강원도 주민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덜어주고자 스스로 뼈를 깎는 개혁을 단행했을까? 나는 ‘올림픽 어젠다 2020’을 확인하기 위해 IOC 공식홈페이지(www.olympic.org/ioc)를 찾았다. 하지만 다운받은 내용은 바흐 위원장의 연설문을 포함해 고작 25쪽에 불과했다. 때론 종이 위에 적힌 문자보다 현장의 연설이 진실에 더 가까운 법. 온갖 수사로 가득 찬 내용이어서인지 현장 연설을 보고 진정성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바흐 위원장은 “‘올림픽 어젠다 2020’은 조각그림을 맞추는 퍼즐과도 같아 40개의 퍼즐 모두를 맞추고 나야 전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각 제안은 동일하게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각기 다른 40개의 제안들을 퍼즐로 비유해서 모두 맞춰야 전체적인 맥락이 보인다는 주장은 설득력은 있지만 상투적인 레토릭이다.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그냥 넘어갈 뻔했는데 각 제안 하나하나가 동등한 중요도를 담지하고 있다는 주장에 멈칫했다. 그가 매우 진지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나는 ‘올림픽 어젠다 2020’안에 숨겨진 어젠다(hidden agenda)가 존재하고 이를 추적해 다가올 올림픽 패러다임의 새얼굴을 그려보려고 한다.

세상을 향해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로서 나는 ‘좋은’ 레토릭을 사랑한다. 과하지 않게 그리고 진실에 기반을 둔 레토릭은 듣는 이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때때로 심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연설이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대통령 수락연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초기 선거캠페인 연설 등이 좋은 예다. 그러나 레토릭은 권력을 가진 집단이 힘없는 사람들을 속일 때에도 매우 효과적으로 쓰인다. 그래서 레토릭이 과하게 들어있는 연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꼼꼼히 들어야 한다. 특히 IOC라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집단이 행하는 레토릭일 경우 더 큰 거짓을 숨기기 위한 교묘한 수사학일 가능성이 크다.

넬슨 만델라의 ‘스포츠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라는 인용구로 시작하는 바흐 위원장의 연설은 여러 번의 탁월한 수사적 장치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중을 설득한다. 바흐 위원장은 과거 그가 했던 다른 연설에 비해 조금 더 경직된 표정으로 연설을 이어나갔고, 딱 두 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첫 번째는 셰익스피어 햄릿의 대사를 패러디해서 ‘변화할 것인가 변화당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To change or to be changed , that is the question)’라는 대사를 읊으며 청중의 웃음을 유도할 때였고, 다른 한 번은 (좀 뜬금없이) 깨끗한 운동선수(clean athletes)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였다. “세상을 변하게 하려면 변화시키려는 주체(IOC)부터 변해야 한다”며 변화에 대한 정당성 주장으로 시작한 바흐 위원장의 연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변화의 이유(why), 내용(what), 방법(how)이다.

올림픽 위기에 대한 자성

이번 올림픽 개혁의 출발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스펙터클 올림픽의 유치와 개최가 어렵다는 위기의식에 있었다. 이미 스포츠 인프라가 잘 구축된 유럽의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재정적자와 환경파괴의 이유로 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 이는 유럽중심의 IOC 귀족들에게 충격이었다. 특히 동계올림픽은 유럽 국가들이 주인공인데, 그들이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겠다고 줄줄이 떨어져 나가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중국의 베이징이 2022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에 나서고 있지만, 그 열기는 예전의 올림픽 유치전에 훨씬 미치치 못한다. 이 두 나라는 성평등(제11조 1항)이나 인권적(제14조) 쟁점을 놓고 국제 NGO들의 압력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을 치룬 나가노 현은 아직까지도 천문학적인 빚에 시달리고 있고, 50조가 넘는 돈을 쏟아 부은 소치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얼뜨기 학자들은 올림픽을 치르면 경제특수가 수 십 조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개최일이 다가오면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어떻게 손실을 줄일 수 것인지 가슴조리는 이들만 남는다. 평창올림픽은 지방재정의 파탄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평창은 ‘올림픽 어젠다 2020’을 앞세운 IOC와 함께 적자를 해소하거나 최소화하는 첫 사례의 주역이 될 수도 있다.

바흐 위원장이 꼽은 ‘올림픽 어젠다 2020’의 핵심 키워드는 지속가능성, 진실성, 그리고 젊은이들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실성과 젊은이들은 첫 번째인 지속가능성의 실현에 불가피한 키워드들이다. IOC 내부통치 방식의 정상화와 투명성의 증대, 그리고 윤리성으로 강화되는 신뢰성의 제고와 미래의 운동선수 육성은 모두 지속가능한 올림픽을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이번 어젠다에서는 올림픽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유치국의 비용절감을 위한 방안들, 예를 들면 최대한 기존 시설의 이용과 임시시설이나 철거가능시설을 권장했고(제1조 2항, 제2조 2항), 유치도시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도 경기를 진행할 수 있도록 했으며(제1조 3항, 4항), 심지어 유치경쟁에 뛰어든 도시들이 감당해야 할 비용을 줄이고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안(제3조 1항, 2항, 3항)까지 담고 있다.

이렇듯, ‘올림픽 어젠다 2020’의 골자는 IOC가 꺼져가는 올림픽 유치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올림픽 유치도시들의 위험부담을 줄이는 데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변화에는 실천이 우선돼야

마지막으로 바흐 위원장은 올림픽 개혁의 방법으로 협력(cooperation)을 제시했다. 좋은 말이다. 함께 힘을 합쳐 변화를 만들어 가자는 데 뭐라고 토를 달 수 있겠나? 그것도 “창문만 살짝 여는 게 아니라 대문을 활짝 열고 다양한 민간공익단체, 정치 지도자, 문화단체 그리고 사업가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만나겠다”고 한다. 체육시민연대를 돕고 있는 내가 NGO라는 단어에 귀를 쫑긋 세웠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바흐 위원장은 지난 10개월 동안 TV중계권 계약으로 100억불의 수익을 얻었다고 하면서 IOC 문호개방의 주요 고객이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업가들임을 시사했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좀 민망했는지 100억 달러라는 언급 바로 다음에 그 돈은 “즉시 스포츠와 선수들에게 재분배되었다”고 덧붙인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바흐 위원장이 말을 더듬었다는 점이다. 26분 5초 동안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발표를 하다가 딱 한 번 말을 더듬는데 그 단어가 ‘재분배(redistributed)’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동영상 39분 44초 부분). 내러티브 연구를 수행했던 연구자로서 이러한 말더듬기(slippage)는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겉으로 꺼내는 말과 진실과의 부조화로 해석된다.

올림픽 패러다임의 변화 기대

처음 ‘올림픽 어젠다 2020’을 접한 것은 12월 초 한 방송사로부터 평창동계올림픽 분산개최에 대한 질문을 받는 자리에서다. 더 이상의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평창동계올림픽의 분산개최라는 이슈가 IOC의 1국가 1도시 개최 원칙의 포기선언을 계기로 다시 점화되었고, 뒤이은 박근혜 대통령의 분산개최불가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올림픽 어젠다 2020’는 평창이라는 재앙을 멈추거나 줄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당장 앞에 닥친 재앙을 막는 방패로 이용은 하되 그 레토릭에 숨어있는 IOC의 스포츠에 대한 전지구적 영구집권플랜이라는 속내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위기란 낡은 것이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럴 때 매우 다양한 병적인 징후들이 출현한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그의 옥중 노트의 한 구석에 적어 놓았다는 글이다. 그람시의 말대로 올림픽의 진정한 위기는 올림픽 유치도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비지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펙터클 올림픽이라는 낡은 것이 병들어가는 데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못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왕이 세상을 뜨고 다음 왕이 즉위하기까지의 기간, 즉 공위시대에는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나타나는데 이미 근대올림픽을 둘러싼 수많은 병적인 징후들(예를 들면 3일의 활강경기를 위해 500년 된 가리왕산의 고목들을 베어내는 것과 같은)은 넘쳐난다.

올림픽 패러다임의 변화를 상상하면서 ‘성장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던 이반 일리치를 떠올린다. 그는 한 시대를 날려 보내려면 그 시대를 관통하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지난 낡은 시대를 관통하는 이름을 나는 ‘광란의 스펙터클 올림픽’이라고 부르겠다. 그렇다면 새로 다가오는 올림픽 패러다임의 이름은 무엇일까?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함께하는 어울림의 올림픽이 아닐까?

 

글․정용철
서강대에서 스포츠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스포츠 NGO 체육시민연대의 집행위원장이며, 평창올림픽 분산개최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