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적 지식인’ 로버트 제임스의 흑인 해방 투쟁
1935년 10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런던에서는 아프리카 이민자들과 카리브해 이민자들이 봉기하여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명칭) 국제아프리카총연대’를 결성한다. 이후 이 조직은 ‘국제아프리카사무국’으로 이어지며 아프리카 내 유럽의 제국주의 팽창을 견제한다. 또한 <인터내셔널 아프리칸 오피니언>이라는 시사지도 발간되는데,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의 편집장 시릴 라이어넬 로버트 제임스는 영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신진 인사였다. 그는 1976년에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노동당 및 다른 좌파 조직 당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의 회의에 참석했고, 우리도 이들의 회의 자리에 참석했다.”(1) 10년 후 한 인터뷰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나는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찬성하는 연설을 한 다음, 이어 흑인 운동 조직이 집결되어 있는 장소를 향해 100여 미터를 걸어갔다. 이를 두고 늘 우스갯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나는 이미 그런 상황에 익숙해진 터였다.”(2)
트로츠키주의자에서 아프리카 해방운동가로 전환
소수 이민자사회나 후기 식민지사회집단의 요구 사항이 ‘백인’ 운동 세력에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은 불과 최근 몇 십 년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근래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들이 좌파나 극좌 진영의 우선 과제 중 하나로 자신들의 투쟁 사유를 포함시켜 달라고 요구한다거나, 혹은 그 자신의 이름으로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주장하고 자주성을 지켜내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있었던 혁명적인 주요 사건 몇 가지만 보더라도 이는 사실과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프랑스혁명은 산토도밍고 노예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 사건으로 1804년 아이티는 독립을 쟁취한다. 이어 두 번째 혁명으로 볼 수 있는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제 폐지를 위한 투쟁과도 관계가 깊었지만, 노예들 스스로의 자유 수호 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이는 사회학자 윌리엄 에드워드 부르가르트 뒤 부아가 쓴 책 <흑인 재건>에도 잘 나타나 있다. 끝으로 1917년 볼셰비키혁명은 러시아 제국의 변방에서 ‘식민지 혁명’을 동반했다.(3)
반식민지 이론가이자 아프리카 해방운동가로서, 제일선에서 마르크스 사상을 주창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노동자 혁명주체로 나섰던 제임스는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혁명사의 중심인물이다. 이단적 지식인이었던 그는 크리켓 애호가이자 전문가이기도 했다.
1938년, 그는 아이티 혁명사를 다룬 저서 <흑인 자코뱅>을 펴낸다. 아이티혁명은 파리 쪽에서 먼저 혁명의 기운과 관련 사상이 터져 나왔기에 가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제임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아이티혁명이 그저 프랑스대혁명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이티혁명은 자유라는 관념이 유럽을 뛰어넘어 포괄적으로 확대됨으로써 심화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흑인노예제는 전 세계적인 계급관계 변화의 상징으로서 앞으로 다가올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노예들은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대규모 설탕제조소에서 일을 하며 살았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근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비슷하다. 그 시대의 다른 노동자보다도 가장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가까운 것이 바로 이 노예들이었다.”(4) 그러므로 프랑스대혁명과 아이티혁명은 혁명 사상이 중심에서 주변부로 전파한 모델로 본다거나, 복잡한 두 투쟁 사이에 분기점으로 연결된 모델로 보기보다 서로에 대해 독자적인 관계로 봐야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쓰고 있는 바와 같이 제임스에게 있어 “프랑스혁명과 아이티혁명은 푸가 음악에서처럼 하나의 주제를 놓고 각 성부가 독립적으로 그 주제를 모방 반복하면서 한데 뒤섞여 있는 구조였다.”(5)
미국의 흑인문제로까지 관심 확대
투쟁 상호 간의 조합과 확대에 관한 제임스의 이 같은 논제는 미국의 ‘흑인 문제’에 대한 시각으로까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제임스는 미국의 흑인 문제를 놓고 국가를 초월하는 범아프리카 저항사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흑인 혁명사는 내용도 풍부하고 고무적이나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순한 흑인이라는 건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거에 흑인들이 싸워 온 모습을 살펴보면 현재 진행 중인 투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미국의 흑인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가담할 때 (다소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바로 자신들의 요구 사항에 대한 독립성 유지를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즉, 자신들이 “독립적인 투쟁을 심화 확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6)
이론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투쟁과 투쟁 사이의 분기점은 이론과 그 실천 방식을 특정 맥락에 적용하거나 적응시키는 과정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양측을 이어주는 분기점이 된다. 제임스는 미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수출하는 문제에 대해 “미국을 볼셰비키화하려면 볼셰비키주의를 미국화할 필요가 있다. 볼셰비키주의를 미국식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러시아의 상황에 맞게 수정한 레닌 역시 “당대 최고의 국제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7) 그러므로 국가주의에 기반을 둔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성을 부정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이름값을 하는 국제주의를 가능하게 해준다.
제임스가 문화적·역사적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식민지 시절 자신의 경험에 기인한다. 대영제국이라는 환경 속에서 그의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아프리카와 카리브 제도의 독립 투쟁을 바라볼 때도 이러한 해석 메커니즘을 동원한다. 따라서 분리독립 운동가로 가나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콰메 은크루마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콰메 은크루마는 자신이 유럽과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흡수한 모든 것들을 취하여 ‘황금 해안(Gold Coast, 가나의 옛 지명)’ 쪽 용어로 번역하고, 아프리카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표현으로 바꾸었다.”(8) 1950년대 말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당시 국민국가운동당(PNM)의 기관지 <더 네이션> 주필로 있던 제임스는 마르크스식 사회주의 관련 주제들을 카니발이나 칼립소, 크리켓 등 대중의 문화적 전통과 결부시키며 현지 고유의 언어로 번역하려 노력한다(카니발은 아프리카의 전통 문화 중 하나이며, 크리켓은 영국의 식민지로 유입된 대표적인 구기 종목이고, 칼립소는 트리니다드토바고 지역의 민속 음악이다-역주). 제임스는 ‘마르크스 대중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과학적·철학적 언어의 번역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국가적-국민적’ 개념으로 지칭한 부분을 떠올려준다.
트로츠키 운동과 단절하고 미국에서 체류하던 첫 번째 시기(1938~1953년) 동안 제임스는 전위 정당 모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더 높여갔다.(사회당과 노동당이 전방에서 주도하는 식의 사회주의 개혁을 반대한 것이다) 제임스는 노동자 대중의 자발적 해방 원칙을 지지하고, 스스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이들의 역량을 내세웠다. 그의 이러한 논제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와의 공저로 1958년에 펴낸 에세이 <현실 대면>에 집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1956년 소비에트 연방이 강요한 권위적 질서에 대항하여 발발한 헝가리혁명에서 노동자들이 내놓은 의견들에 찬사를 보낸다. 그럼에도 제임스는 이러한 해방의 개념이 유럽 지역에 대해서만 통용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구 식민지 사회의 경우, 그는 여전히 ‘주요 인사’에 우선적 역할을 부여했다. 가나의 은크루마나 트리니다드의 에릭 윌리엄스,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예레레 등의 유력 인사를 우선시한 것이다. 또한 그는 식민지의 독립운동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국내 정당이 으레 맡아야 할 주요 업무들을 강조하며 그 자신도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정당 정치’에 참여한다. 아울러 선진국과 후진국(혹은 저개발국) 사이의 이분법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혁명과 반식민투쟁 사이의 개념적 차이를 분명히 했다.
“혁명이란 일단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 있어 정작 제임스 본인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복합적인 불균형 성장에 대한 트로츠키의 논제를 연장하여 혁명적 ‘비약’의 개념을 발전시킨 그는 경제적·정치적으로 뒤처져 있던 상태에서 전위주의로 갑작스레 비약적인 변이가 이뤄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프랑스도 ‘후진적’ 상태에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도 ‘후진적’ 상태에서 “위대한 러시아 문학과 볼셰비키주의”(9)를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제임스는 독립 직후 아프리카 및 앤틸리스 제도 국가들의 상황을 20세기 초 러시아의 상황과 자주 비교했는데, 그러면서 한 사회가 뒤처져 있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일어난 저항운동 역시 뒤처진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외려 그 반대의 경우가 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며, 이는 가나의 사례로 입증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가나는 해방투쟁의 전위부대로 나섰으며, 비단 아프리카 지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나는 이 투쟁의 전방에 나선 국가였다. “가나혁명에서 후진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다. 이는 우리 시대의 한 혁명이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후진적이고 야만적이며 미개한 건 식민지 사무국과 총독부 쪽이다.”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다른 사례에서도 맨 처음 길을 열어준 건 바로 대중이었고, 이는 가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이란 일단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10) 따라서 제임스의 시각에서는 사회주의 혁명과 반식민주의 혁명을 구분한다는 것이 꼭 이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우는 걸 의미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노동자의 투쟁과 억압 받던 나라들의 싸움이 어떤 조건 하에서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지 정의하려던 것이었다. 양측이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제국주의의 종말은 요원한 꿈으로만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1989년 5월 31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작품은 영미권 비판 사상계에서 주요 참고 자료에 속한다. 다만 그의 학술적 유산은 두 개의 계파로 나뉘는데, 이들 계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호 대립관계에 있다. 한쪽에서는 마르크스 이론 부분을 부각시키며 제임스식 혁명 이론의 급진성과 통일성에 역점을 두는 반면, 문화 및 후기 식민지 연구 쪽에서 태동한 또 다른 진영에서는 서구권 지역 및 비서구권 지역에서 하부계급-민족-인종이 보여주는 수많은 저항 형태가 서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이 같은 갈등이 제임스 본인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긴 하나, 제임스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이렇듯 갈등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고착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이는 그저 하나의 개방적인 문제이자 중요한 일차적 과제에 해당했다. 프랑스에서든 그외 지역에서든 진보세력이 자신들의 반인종주의와 반제국주의를 재고함에 있어 어느 때보다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만큼, 이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1) C.L.R. James,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미주 자료는 제임스의 출간물에 해당한다.
(2) ‘CLR James and British trotskyism’, www.marxists.org, 2014년 11월 14일.
(3) 알랭 그레쉬, ‘제3세계 민족주의자, ‘반동적’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5월호. 베르나르 페롱, ‘러시아의 회귀’ 중 ‘레닌, 스탈린, 그리고 국가’, <마니에르 드 부아> 138호, 2014년 12월 – 2015년 1월.
(4) <흑인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와 산토도밍고 혁명>, ed. Amsterdam, Paris, 2008.
(5)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Arthème Fay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Paris, 2000. (6) <미국 내 흑인 문제에 관하여>, Syllepse, Paris, 2012.
(7)
(8)
(9)
(10)
*시릴 라이어넬 로버트 제임스 (Cyril Lionel Robert James, 1901~1989)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어나 영국과 미국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제임스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좌파의 상징적 인물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미국 공산주의 트로츠키파의 대표적 이론가였으며, 또한 트리니다드 토바고 민족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1958~1960년에 주요 이론적 지도자이자 좌익 사상가였다. 그는 또한 아이티 독립전쟁에 관한 매우 영향력 있는 역사 연구서로서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로 번역된 <흑인 자코뱅(The Black Jacobins)>의 저자이기도 하다. 나아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범아프리카 운동에 앞장섰다. 좌파 미국 흑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영향력이 컸다. 지적 관심의 폭이 넓었던 제임스는 또 영국의 옛 제국에 소개되었던 스포츠 크리켓에 관한 독창적인 작품 <경계를 넘어(Beyond a Boundary)>도 저술했다.
글·마티유 르노 Mathieu Renault
파리13대학 연구원. 저서로 <존 로크의 미국: 유럽 철학의 식민지 확대(L’Amérique de John Locke. L’expansion coloniale de la philosophie européenne)>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