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스즈키 자동차 회사의 노동자연대

2015-03-04     나이케 테크슨

나렌드라 모리 인도 총리는 해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동 유연성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011~2012년 마루티-스즈키 자동차 공장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업의 사례가 보여주듯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연대성, 노조의 부활 등, 젊은 근로자들은 공장파업 방식의 답습을 거부하며 저항하고 있다.

 

나이케 데크슨|언론인

 

인도는 2013년 자동차 생산대수 총 2백만 대를 기록해 세계 6위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인도정부는 오는 2016년까지 이 순위를 4위로 끌어올릴 것을 기대하고 있다.(1) 2014년 10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발표한 노동개혁조치는 2000년대의 성장세(10년간 연간 평균 성장률이 8%였다)를 되찾기 위한 정책으로서, 근로감독 감소, 일부 노동 관련법 ‘단순화’, 수습기간 연장 등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내용들은 필연적으로 무직급 저보수의 일용직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기 마련이다.(2) 또한 정부차원의 ‘메이드 인 인디아’ 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현 상황에서, 이런 개혁 조치들은 해외 투자자본를 유치한다는 목표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산업노동 분야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젊은 근로자들은 강한 반발심을 느끼며 행동에 나섰다. 2011년에서 2012년 사이, 인도의 자동차 제조사 마루티-스즈키에 큰 타격을 주었던 폭동 파업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후 이어진 강력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마루티-스즈키 노동조합은 지금까지도 계속 활동하고 있다.

뉴델리와 자이푸르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근방에는 21세기에 들어서며 조성된 마네사르 산업지구가 위치해 있다. 이 고속도로에는 먼지와 공해 물질로 가득한 안개 속에서 오토릭샤(인도의 삼륜택시)들이 거대한 대형 트럭들을 피해가며 길을 뚫고 달린다. 도로변 맥도날드와 개발되지 않은 누런 잔디밭 사이로는, 곧 아파트 단지가 조성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플랜카드와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럭셔리 아파트’라고 적힌 간판이 높게 걸려있다. 뉴델리 경제의 허파 역할을 하는 ‘구르가온 신도시’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들어서면 대형 쇼핑센터와 콜센터, 사택, 의류공장, 근로자기숙사 등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잘 느껴지지 않는 이 네모반듯한 마네사르 지구에서 마루티-스즈키의 신 공장을 찾아볼 수가 있다.

과거에 인디라 간디 전 총리의 아들 산제이 간디의 자동차회사 마루티가 파산한 바 있다. 마루티-스즈키는 1981년 당시 인도 땅에 발을 디딘 첫 해외 기업이던 일본 자동차회사 스즈키의 투자로 다시 세워진 합작회사이다. 결국 정부와 민간 간의 합작 회사이기도 한 마루티-스즈키는 네모진 작은 요새 같은 첫 공장을 구르가온에 세워 인기 모델 ‘마루티800’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거의 독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마루티-스즈키는 ‘사륜차 혁명’을 시작했다. 중하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저렴한 자동차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국내 도로들은 전부 마루티 마크를 단 자동차들로 가득 찼고, 마루티 자동차는 ‘현대 인도’의 일종의 상징이 됐다. 인도정부가 1990년대 초부터 경제 자유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마루티-스즈키는 점진적으로 민영화가 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2007년 전체 자본의 54.2%가 스즈키 자동차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해에 마네사르 지구에 추가로 생산공장이 설립됐다. 이 공장에는 그룹 최고의 공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이 부과됐다.

마루티-스즈키 경영진은 1980년대에 들어서며 인도산업계에 처음으로 ‘근로문화’, 즉 시간 엄수, 기한 엄수, 성과 추구 등을 골자로 하는 일련의 규칙들을 도입했다. 마루티-스즈키 경영진이 일본 토요타 자동차에서 만든 인적 관리방식 ‘토요티즘’을 자사 공장에 적용한 것이다. 곧이어 문마다 초침 시계가 내걸렸다. 마루티의 성공 신화를 주제로 책을 펴내기도 한 R. C. 바르가바 마루티-스즈키 회장은 “(이 규칙을) 임원진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했다”고 밝혔다.(3) 또한 근로자들은 기존 출근시간보다 15분 일찍 공장에 도착해 매일 아침마다 의무적으로 체조를 해야 한다. 한편 토요티즘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카이젠(개선)’ 원칙에 따라 오늘날 자동차 업계에 널리 퍼져있는 ‘QC서클’, 즉 품질관리 분임조 활동을 적용해 모든 근로자들이 매일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직접 제안하도록 했다. 가장 활발하게 참여한 직원들에게는 사장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또한 사내노조는 유서 깊은 구르가온 공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영진과 연계된 마루티 우디요그 캄가르 노조(MUKU) 하나만이 용인됐으며, 마네사르 공장에는 노조 대표가 한 명도 없었다.

바르가바 회장은 2007년 문을 연 마네사르 공장에 대해 “일본 코사이 시에 위치한 스즈키 자동차 공장을 모델로 삼고 있다”면서, “수준 높은 자동화 설비를 정착시키고, 최상의 생산 공정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이 공장에는 주변 농촌지역에서 온 4천여 명의 일용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실제로는 일용직 대부분이 농산물을 수확하러 농촌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들은 주 6일, 일일 7~8시간 반 동안 일을 하는데, 물론 여기에는 일반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긴 통근시간과 출근 전 체조시간 15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2012년 8월 좌천된 근로자 사티쉬 쿠마르와 쿠쉬 람은 “시골 출신 젊은이들에게 마루티 공장에 들어가는 건 아주 근사한 일이다. 하지만 환상은 금방 깨지고 만다. 공장 내 조립라인에서는 쉼 없이 압박이 몰려온다. 검증 단계에서도 자동차 한 대당 고작 40초가 주어질 뿐이다. 근로자들을 로봇 취급하는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교대 근무하는 동료가 출근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른 근무자가 계속 일을 해야만 하는데, 그럼에도 초과 근무수당은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라고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마네사르 공장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임금과 구르가온 공장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이 같지 않다는 사실, 나아가 그들에 비해 훨씬 더 적게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구르가온 공장의 경우 정규직에 대한 급여가 월 3만 루피(약 470달러) 수준이다. 물론 ‘노동 귀족’이라고까지 불리기도 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마네사르 공장은 2012년 이전 고정급이 5천 루피(약 75달러)로, 총 임금으로 계산 시 일용직은 월 8천 루피(약 125달러), 정규직은 월 1만7천 루피(약 260달러)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출근시간에 몇 분이라도 지각을 하면 경영진은 해당 근로자의 일당을 절반만 지급한다. 급한 집안사정일지라도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면 인정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거의 인정되는 예외사항이 대부분 사라졌다. 디젤엔진과 변속기를 생산하는 스즈키 파워트레인 소속 근로자 부디 프라카쉬는 “모든 실수가 경고장에 전부 기록되며, 두세 번 경고를 받게 되면 정규직 전환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업무 가중화, 그리고 정규직과 일용직 간의 지나친 차별 문제가 2011년 마루티-스즈키에서 일어난 갈등의 핵심 사항이었다. 2011년 6월, 마루티-스즈키 경영진이 마네사르 공장 전 직원 중 절반만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하자, 근로자들이 지역정부에 자체 노조 등록을 신청했다. 그러자 바로 이튿날, 경영진이 근로자들에게 어용노조에 가입하겠다는 진술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고 나섰다. 결국 전 직원 중 10%가 이 명령에 순응했지만, 나머지 직원들은 연좌데모를 시작했다. 바로 여기서부터 마루티-스즈키 파업 사태가 시작됐다.

쿠마르와 람은 “처음 이곳에 와보니 모든 근로자들이 같은 기술학교들 출신들이었다. 공장에서도 다함께 견습공으로 있었기 때문에 서로 돈독한 관계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중 몇몇은 정규직으로 전환이 됐고, 나머지는 그대로 일용직으로 남게 됐다. 같은 일을 하고도 월급이 두 배 차이가 나는 상황이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규직과 일용직 간의 격차는 임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용직 근로자들은 회사버스로 통근할 수 없었고, (인도 최대 명절인) 디왈리 때 상여금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시골의 가난한 농가 출신인 20~25세의 이 젊은 일용직 근로자들은 구르가온의 도심지와 상업중심지에서의 생활 모습들, 그리고 그런 삶을 누릴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하며 부러움과 반발심을 모두 느꼈다. 민주적 권리를 위한 인민연맹(PUDR) 소속 란자나 파디는 마루티-스즈키 폭동 사태에 대해 “1980년대 전체 직원 중 80%가 정규직이었던 데 반해, 이제는 고용 불안정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폭동 사태는) 노동착취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강력하게 자각한 결실이다. 정규직과 일용직 간의 전례 없는 유대관계가 생겨난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마네사르에서는 공장 점거파업이 거의 행해지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 공장에 들어가지 않은 채 철책 앞에서 모일 뿐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열기 넘치는 파업이 이어졌다. 그러자 마루티-스즈키 경영진은 이러한 불법 파업에 대해 30일간 공장폐쇄 조치를 취했고, 상황 복구를 위해서는 ‘바른 품행’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의무조건을 내걸었다. 인도의 경우 1927년 이후 노조는 법적으로 허가가 됐지만 파업의 권리는 인정받지 않았으며, 국제노동기구(ILO)의 단체협상에 대한 협약에도 비준하지 않고 있다. 결국 장장 9개월에 걸친 대립 끝에 2012년 3월, 근로자들의 자체 노조인 마루티-스즈키노동자연맹(MSWU)이 마침내 인정받았다. 2005년 히로 혼다사의 고용 불안정에 대한 시위 이래로, 이렇게 치열한 완력싸움이 일어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경영진은 근로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에 대해서 꿈쩍도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2년 7월 18일 공장감독이 카스트의 최하층에 속하는 한 근로자에게 욕설을 하고 해고시키면서 노사간 대립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게 됐다. 이때부터 파업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근로자들은 공장건물에 불을 붙였고, 사측 인사담당자인 아브니쉬 쿠마르 데브가 불타는 건물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이 일로 총 180명의 근로자들이 체포됐는데, 그 중에서 12명은 새로 설립한 노조의 대표들이었다. 한 달 후, 마루티-스즈키 경영진은 전체 직원 중 절반을 아무런 예고 없이 해고했다. 노동운동 전문가인 잘랄 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이 근로자들을 살인자라고 볼 수는 없다. 부당함에 대한 억울함이 너무 커져 폭발하게 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다른 방법으로는 그러한 심정을 표현할 수 없다면 폭력이 하나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체포된 노조 대표 12명이 수감되자, 그들을 지지하고 독립 노조의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특별 위원회가 생겨났다. 이에 경영진은 한 발 물러나 일용근로자를 위한 통근버스 신설, 일용직 임금 25% 인상, 정규직 임금 75% 인상 등 근로자들의 주장에 응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용직 수를 점진적으로 줄여가고 그 자리를 회사가 직접 뽑은 기간제 근로자들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이 ‘일회용’ 근로자들에 대한 임금은 일용직보다는 아주 약간 높은 수준인 월 1만 2천 루피(약 185달러)이다. 하지만 기간제 근로직은 매 7개월마다 다른 사람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자리였다. 특히 모두 먼 지역 출신들만이 그 자리에 뽑혔는데, 이는 그들이 해고당한 이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걸 방지하고, 시골 출신들 간의 연대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그리고 2013년 봄, 일본 스즈키 본사에서는 인도 마루티-스즈키의 경영진을 개편하고 그 중간간부와 인적자원관리 고문 자리에 일본인을 세울 것을 강요했다. 마루티-스즈키의 한 간부는 인도의 경제전문지 <민트>를 통해 “일본의 경우 지난 58년 동안 단 한 번도 파업이 일어나지 않았다. 요컨대 일본의 인적자원관리 방법을 인도로 가져오겠다는 생각인 것이다.”라고 밝혔다.(4) 스즈키 본사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스즈키는 아시아 전역에 진출해있는 다국적 기업이었고, 그 중에서도 인도 공장이 전 계열사 중 늘 가장 큰 수입을 기록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루티-스즈키 공장이 위치한 하리아나주(州)의 입장에서도 이 공장은 경제적인 허파와도 같은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루티-스즈키의 하도급업체에 구르가온의 하층 빈민가 출신 근로자들이 약 3,000명 일하고 있어, 마루티-스즈키가 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루티-스즈키는 주 정부와의 권력관계를 잘 활용하고 나섰다. 마루티-스즈키 공장이 수차례 다른 여러 주로부터 공장 이전 제안을 받고 있다며 이전하겠다고 위협을 가하자, 하리아나주 정부는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법기관과 정부, 그리고 다국적 기업인 스즈키가 이렇게 신성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공장 근로자들은 의견을 굽히지 않고 기존의 거대한 중심 노조를 대신할 독립적 대표 노조를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인도공산당(CPI)과 연계되어 1920년 처음으로 창립된 전인도노동조합회의(AITUC)는 오래전부터 구르가온과 마네사르 공장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쳐온 조직이다. 잘랄 외제는 “전인도노동조합회의는 많은 부분이 제도화됐으며,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해당 노조의 간부들은 ‘영국화’되었으며, 갈등을 재판소에서 해결하도록 훈련받은 이들이다.”라고 말했다. 연합노조들도 인도의 경제가 자유화되고 해외 기업들이 도래하면서 공무원 노조와 일부 국영기업에만 남아 있으며, 민간기업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설사 연합노조가 있다고 해도 정규직들만이 입회가 허용되고, 오늘날 인도 노동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용직은 언제나 논외인 상황이다. 학생이자 조합운동가이면서 반자본주의 청년 단체 ‘크란티카리 노자완 사바’의 회원이기도 한 나얀 지요티는 일용근로자들이 전인도노동조합회의에 가입을 시도해본 다음 이를 포기하고 ‘무지원 활동’을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어떠한 외부적 지원 없이, 공장근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자체적인 연수시간표를 만들었고 고유의 의사결정방식을 고안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조 활동은 헛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4월, 마루티-스즈키 노동자연맹이 마침내 마네사르 공장과 구르가온 공장 모두의 노조로 선정된 것이다.

 

(1) 세계자동차공업협회(OICA) 발표 자료, www.oica.net.
(2) ‘Shramev Jayate : MOdi govt plucks some key low-hanging fruit for labour reforms’, <인디언 익스프레스>, 뉴델리, 2014년 10월 17일.
(3) R.C.Barghava, Seetha,, HarperCollins, 뉴델리, 2010년.
(4) Amrit Raj, ‘Maruti Manesar's fallout : A management shuffle’, <민트>, 뉴델리, 2013년 4월 9일.

글․나이케 데크슨 Naïké Desquesnes
언론인.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한국외대통번역대학원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