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화의 두려움… 유전학이 우생학에 기여한 것들
인간의 유전을 연구하는 학문의 근간을 마련한 이는 찰스 다윈의 사촌으로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활동한 프랜시스 골턴(1822∼1911)이다. 수학자로는 실패했지만 과학자로서 다방면에 손을 댔던 골턴은 유전을 통계적으로 측정한 선구자다. 먼저 그는 유명 인사들이 등재된 인명사전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지능이 유전됨을 증명하려 애썼다. 현장 연구를 기반으로 삼은 그는 표본 인구 집단에서 변이를 관찰하고 이에 대한 측정을 시도함으로써 생물측정학을 탄생시켰다.(1)
그가 세운 유전 법칙들은 훗날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1883년 그는 여기에서 새로운 학설을 도출해냈다. 뛰어난 유전자를 타고난 인간들을 우대함으로써 인간 종(種)을 개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우생학이 바로 그것이다. 전염병, 알코올중독, 매춘이 산업혁명을 타고 기승을 부리던 당시 상류 계층은 ‘퇴화’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생학은 이에 대한 호응이었다.
20세기 초 생물학자들은 수도사이자 식물학자였던 그레고어 멘델(1822∼1884)이 식물의 유전자 전달에 대해 세운 법칙들을 재발견했고 이것이 유전학의 시초가 된다. 유전학은 생물측정학의 통계 방식들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생물측정학은 과학계 내부에서도 문제가 제기되는 학문이었음에도 역량 있는 계승자를 두게 된다. 그가 바로 미국 유전학의 선구자인 찰스 대븐포트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우생학 옹호자였던 그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세운 자선기관인 카네기재단을 설득해 첨단 유전학 연구소의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리하여 1904년 탄생한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에는 미국 대학들의 연구비 총액보다도 많은 예산이 편성됐다. 연구소를 이끈 대븐포트는 ‘광기 수준으로 접어든 멘델주의’를 몸소 구현했다. 그는 멘델의 법칙을 인간의 행동에까지 확대 적용하면서 놀랄 만한 연구들을 발표했다. 이를테면 남성에게는 ‘유목성’(遊牧性)이라는 열성 형질이 있다는 주장 같은 것이었다.
수치를 조작하기도 했던 이 연구들은 전문가들을 신뢰한 정치권 덕분에 강제불임법에 근거를 제공했고 이후 이민제한법을 정당화했다.(2) 1907년 인디애나주는 처음으로 강제불임법을 채택했고, 30여 개 주가 그 뒤를 이었다. 강제불임법이 확산된 것은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의 파급효과가 나타나던 1930년대였다. 그러나 우생학은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대표적인 반대자는 인류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지능검사에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데 안간힘을 썼다.
바로 이 무렵 유럽도 미국의 또 다른 자선기관인 록펠러재단의 후원하에 우생학으로 전향한다. 역사가 대니얼 J. 케블스는 우생학이 유럽으로 넘어오게 된 것은 “미국에서 정신박약에 관한 유전학이 더 이상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3) 스위스가 1928년 처음으로 우생법을 채택했고 그 뒤를 덴마크가 이었다. 1933년에는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가 차례로 대열에 합류했다. 정신병, ‘정신적 취약성’, 매춘, 알코올 중독, 범죄 성향, 간질 등 각국 법령이 규정한 다양한 ‘유전병’을 이유로 강제 불임을 시술받은 사람의 수는 독일에 40만 명, 스웨덴 6만 명, 미국은 5만 명에 달했다.
그러다 나치의 잔혹성이 드러나고 1950년대 들어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우생학의 신뢰도는 떨어졌다. 앞서 언급한 국가들도 1960~70년대에 점차적으로 우생법을 포기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강제불임법을 채택한 적도 없던 영국에서 우생학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국 우생학 연구센터인 골턴연구소는 전후 유전학의 세계적 기준이 됐다. 1930∼45년에 발표된 유전학 관련 영미권 연구의 40%가 이 연구소가 발간하는 <우생학지>에 실렸다. 이 학술지는 1953년 <유전학지>로 개명한다.
록펠러재단은 골턴연구소에 대대적인 재정 지원을 했고 1938년부터는 연구 방향을 분자생물학 분야로 돌렸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인식론 및 과학역사 연구자인 앙드레 피쇼는 “록펠러재단이 생물학 연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여했던지 현대생물학은 이 재단의 창조물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강조한다.(4)
프랑스 국립보건의학연구소 연구국장인 장폴 고딜리에르의 말을 따르자면 록펠러재단은 영국식 의학적 우생학을 수입함으로써 1950년대에 프랑스가 유전학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5) 당시 파리 네케르 병원의 로베르 드브레 과장은 아동환자 전문인 네케르 병원을 사회적 아동학의 본산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을뿐더러 자신이 잘 알던 록펠러재단식 모델을 따라 생명의학 연구의 터전으로 삼으려 했다.
오늘날에는 다른 양상의 로비가 벌어진다. 역사가 켈브스는 “유전병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야말로 의학적 유전학의 연구 발전과 치료법 개발을 위해 가장 큰 압력을 행사하는 근원”이라고 말한다.(6) 프랑스는 난치병 지원을 위해 텔레비전으로 생방송되는 모금 행사인 <텔레통>을 통해 매년 1억 유로가량의 기금을 조성한다. 국립보건의학연구소의 예산(2008년의 경우 6억5200만 유로)이 그 6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연구·보건 문제 자문이자 네케르 병원 유전학과 과장인 아르놀 뮈니크가 오죽하면 “<텔레통>이 없었다면 전 아직도 누추한 곳에서 일하고 있었을 겁니다”라고 말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과학 연구 과정을 자금 조달 수단이 주도하는 것을 보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7)
그렇다면 뮈니크의 자문 활동은 무엇일까? 그는 왜소증을 비롯한 20여 종류의 비정상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식별해냈다. 그는 말한다. “여러분이나 저와 같은 인간들은 유전 질환을 내포하고 있는 거대한 저장고들입니다. 우리는 유전 질환 증세를 내보이지는 않지만 모두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뮈니크의 자문 활동은 그 저장고 속의 “예방을 개선하기 위하여” 이러한 유전자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도록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8) 그러면 <텔레통>에 깃든 정신은 무엇일까? <텔레통>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유전학자 다니엘 코엔은 저서 <희망의 유전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미래의 인간은 유전 법칙을 완전히 통달하게 될 것이며 퇴화가 아닌, 스스로의 생물학적 변화를 만들어가는 장인이 될 수 있다. …두려움을 갖지 말자.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우생학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에밀리 귀요네 Emilie Guyonnet
번역 최서연
<각주>
(1) 현대적 의미로는 생물학적 특성(지문, 얼굴 윤곽 등)에 의한 인간 식별 방식을 말한다.
(2) 다니엘 J. 케블스, <유전학의 이름으로>, 1985, 7장 참조.
(3) 같은 책.
(4) 앙드레 피쇼, <순수한 사회, 다윈에서 히틀러까지>, 2000.
(5) <우생학의 영원한 회귀> 중 기고문, 장 가이옹 및 다니엘 자코비, 2006.
(6) <유전학의 이름으로>, op.cit.
(7) 장프랑수아 피카르와의 인터뷰, 2003년 3월 1일.
(8) ‘치료에 대한 유전학의 영향’, 모든 지식의 대학, 2004년 1월 14일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