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그것은 바로 당신이다!
어느 것도 이제 더 이상 다른 어느 것에 대해서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이른바 ‘진보한’ 우리사회, 특히 유럽사회는 정치적·사회적 쇼크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무능하고 부패해 보이는 권력과 대의정치를 우리사회가 이토록 강력하게 거부했던 적은 없었다. 같은 시기에 이러한 거부가, 즉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야기한 전체적 부당함에 대한 거부가 적극적이고도 결속된 방식으로 표현되지 못했던 적도 거의 없었다.
오늘날 저항운동에 변화를 불러오는 구성요소(1) 중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무정부주의적․환경론적 전통을 따르면서 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동일한 운동조직 내에서도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정치권력을 개인과 사회에 대한 압력의 두 양상으로 규탄한다. 이런 비판은, 정치권력을 쟁취해 국가를 장악한다는 원칙에 근거해 경제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동자운동의 조직형태와 전통적 전략마저 너그럽게 봐주지 않는다. 한편 역사적 운동의 상속자라 할 수 있는 노동자운동이 사회의 대변화에 맞서 이토록 속수무책인 적이 없었다.
금융권력 앞에서 ‘정치적 자율성’을 포기한 정치계
이런 상황에서, ‘좌파’와 사회적 저항운동가들 내부에서 여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의 공적이고 민주적인 삶에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과제인가? 정치권력은—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조건’으로서 확인되고 통제되는 권력을 말한다— 여전히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인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시스템—정치, 대표, 정당, 선거—을 정당화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 시스템이란 건 최소한의 경우에는 실망시키고, 최악의 경우에는 배신하며,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무능함과 비도덕성을 드러내는 시스템이다. 조금 더 나아가보자. 민주주의가 지배자의 이익과, 더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더 힘없는 사람들의 이익에 동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제도라고 한다고 해도, 금융자본의 포식자적 축적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장애물이 민주주의라고 옹호하는 것이 정당한가? 수의 법칙이 돈의 위력에 부과되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한가?
자주 듣게 되는 이런 질문들은 간단하게 무시해버리기 힘든 문제들이다. 우리 유럽 국가에서는—세계 전역, 특히 남미의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정당정치(2)와 일반적인 정치 시스템을 유리하게 변호해주는 것이 하나도 없다. 책임은 무겁고 정상참작의 여지는 거의 없다. 우리는 정치권력과 경제·금융권력 사이의 교묘하면서도 비난받아 마땅한 공모(여기에 미디어 권력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느낀다. 모든 사회계층에서, 그런 공모로 인한 부패한 정치계층을 집단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건 혐오감이 그만큼 중대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 들어서는, 국가 체제 안에서 사회의 이익과 요구를 ‘대표’할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위기’에 대처한다면서 긴축 충격요법을 내세운 주동자였음이 확인됐다. 대중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소수의 지배집단과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부패에 의해 결속한 내부구성원들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치부(致富)(3)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편, 시니컬하게 다수 개인의 일상적 희생을 요구함으로써 멸시받는 정계는 매일매일 금융 권력 앞에서 ‘정치적 자율성’을 포기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인식은 특히 1970년∼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예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더 많은 교육을 받았지만 집단 이데올로기와 조직의 위대한 서사에 재빨리 동참하지 못하는 이 세대는, 오로지 사회의 민주 정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환경과 기후라는 명분에 대해서만 동참하는 행태를 보인다.
자본주의와의 단절이라는 혁명적 전략을 내세우는 정당들은 현재 진행 중인 역사적 과정에서 더 이상 체제에 대한 저항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대중들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대중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파편화되고 분리되고 개별화되고, 사회적 신분 상승이라는 모호한 꿈과 사회적 계층하락이라는 구체적 과정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다. 요컨대 대중은 대량실업과 임금노동이 점점 불안정해지는 상황에 처해있고, 이것이 극우세력의 부상을 부추기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대의정치(제)와 제도권 정당에 대한 거부, 산업자본주의의 대장간에서 나오는 시뻘건 불길의 감소 등, 이제 그 어느 것도 저 높은 곳에 올라앉은 ‘그들’에 맞서 집결한 ‘우리’를 건설하기 위한 열광을 정당화해주는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중요한 때다.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가 우리사회 내에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단순하면서도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 모두와 관계가 있다. 우리시대의 시련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를 안내해 주어야 할 것은 바로, 다가오고 있는 불확실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존재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가 원한다면, 모든 차원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월스트리트를, 광장을, 또는 거리를 점거해야 하는 것처럼, 사회적·경제적 대안 협력 공간을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임무를 중심으로 집결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 임무란 지역적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권력을, 민주주의를, 선거를 점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수’가 아닌 다른 어느 누구가 민주주의와 정치를 ‘탈사유화’하고, 금융의 이해관계와 로비의 영향으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다수’가 아닌 다른 어느 누가 금융으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부분이다. 이전의 역사적 상황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중대한 위기의 시기에, “권력은 바로 당신이다, 권력을 잡아라!”라는 명백한 메시지에 근거한 제안들만이 사회의 전열을 지속적으로 움직이게 만들 폭넓은 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유럽국가에서 군대는 더 이상 정부를 전복시킬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국민은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 게다가 권력구조와 힘 관계가 허락할 때는 개인과 단체의 권리를 강화하고, 사회적 다수의 존재조건을 개선시키는 것은 위로부터의 제안이나 공동체의 시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집단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정치도구를 건설해 투쟁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도구들은 과거보다도 미래에, 혼란 속에 동요하고 있는 문화·사회·정치의 기준 틀을 넘어서서 끌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개인이 정치와 맺고 있는 관계는 사실, 우파냐 좌파냐 하는 이데올로기적․조직적 범주에 속하는 문제로 구조화될 수도 없고 엄격하게 이성적인 입장으로 요약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사항을 인정해야 한다. 이 파괴적 혼란을 멈추기 위해서는 40여 년 전부터 끈기 있게, 완강하게, 그리고 기술관료적 효율성과 함께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즉 ‘국가 문제에 있어서 국민의 주권’을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의 나라에서 기업의 절대적 지배력—기업의 세계, 기업의 환경, 기업의 스캔들—이 주인공이 되는 전체주의적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국제 금융 거물들은 “탈영토화된 초국가적 영역”을 지배한다. 이 영역은 지방, 국가, 세계의 제도, 협약 또는 ‘메가톤 급 자유무역 협약’, 생산 가치사슬, 국제법조항들이 서로 얽히고 짜이는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그려진다. 초국가적이고 야만적인 동시에 난해한 이 힘과 축재의 군도(群島)에서 지배자들은 살아가고, 정보통신—사용자들과 그들의 권리, 특히 인터넷의 중립성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들의 것으로 가로챈 도구—의 순간적 리듬에 맞춰 각각 은밀한 부분에서 대중을 공격하고, 숨고, 숨기고, 변화하고, 가치를 인상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 그들은 즐기며, 그들의 자식들도 파리에서 밀라노까지, 상파울루에서 봄베이까지, 런던에서 루안다(앙골라의 수도)까지 도시—비행기로 적당한 거리라면 어느 도시라도 상관없다—에 나타나 번화가에서 몇 시간 동안 기분전환을 하고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서 점심을 먹고 런던에서 저녁을 먹거나 하는 호사를 누리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토는 보통사람들이 알고 있는 땅의 저편에 있다. 현실적으로 보통사람들에게는 금지된, 그리고 다다를 수 없는 세상이다. 보통의 남녀들은 제도에 의해서, 그리고 결국 국가에 의해서 통치되는 영토화된 공간에서 공동으로 그들의 삶을 조직하고 생산과 노동의 과정에 통합된다(여기서 기업의 고위직 임원들은 제외된다). 이 지대는 각각의 개인이 밀접하게, 그리고 사회적으로—두 차원은 분리할 수 없다—자본주의의 피로한 모순과 병치하는 지대다.
거기에서 국민의 주권 문제가 발생한다. 사용가능한 공적 공간을 (언젠가는 지리적으로 확장되기를 기다리면서) 되찾아오기, 정치권력과 경제·금융 권력의 근친교배 방지가 세계의 변화에 힘을 실어주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우선 과제가 된다. 물론 몹시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결정적인 일이다. 더구나 새로운 전략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국가의 중심부로 국민의 주권이 돌아오게 조직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집단적으로 조정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판매업자에게 도움이 되는 국가는 지배도구일 뿐이다. 국민이 개입하고 국민의 통제를 받는 국가는 지배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또한 공동이익 실현의 도구, 타협을 이끌어내고 유지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동시에 ‘공동의 규칙’을 재정비하고 초국가적 이해에 맞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운동에 새로운 형태의 국민주권의 표현을 실험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국민주권의 복원은 사실 국가의 문제로 요약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는 국가의 지배로 고통 받기도 하고, 국가를 벗어나서 그리고 국가에 반해서 변하기도 한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국가의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정당(좌파에 있어서는 노동자운동)의 일이었다. 앞서 대략 말했듯이, 이러한 전략은 이제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공장이라는 당시의 대규모 생산시스템과 원하는 국가 관리 형태를 조화롭게 결합시킨 제2차산업혁명의 유산으로 중앙집권화되고, 영토화되고, 표준화된) 정당과 정당 형태가 의문시되고 있다. 최소한 정당은 사회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수단이다. 정당은, 소수의 특권지배계급 내에 존재하는 경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종속돼 있는 국가 시스템과 경제시스템을 계속 관리한다. 아마 단절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미래에는, 당원 시스템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사회적 요구가 필연적으로 사회 외부에서 다른 표현 형태를 찾게 됨에 따라 사회 내에서 정당의 영향력은 감소할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혼란스런 상황이 생겨난다. 정치시스템과 정치계층은 혹독한 항의에 처해있다. 소수의 특권계층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동안 국민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국민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사회와 국제관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중대한 문제들—1차적으로 경제, 통화, 금융 문제—은 이제 정부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국민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문제들은 정치적 대표자들의 공동적이며 민주적인 표결의 영역을 벗어나 집권당과 제도권 내의 지지자들—여기에는 ‘좌파’ 지지자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다른 금융시스템 권력구조(국제금융제도, 유럽중앙은행, 유럽집행위원회, 에이전시, 로비 등)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 행정부들 사이의 불투명하고 간접적인 협상의 대상이 됐다.
제도권 정치정당은 점점 더 시스템을 지키는 충직한 경비견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스템 자체는 더 넓은 사회 분야들로부터 신용을 잃어가고 있다. 개인과 집단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사회·문화적 합의는 매일 조금씩 더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 시스템은 구대륙 국가들에서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시하지 못한다. 반대로 환멸과 폭력, 연속적인 불안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실제로 어떻게 자체적인 모순을 해결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공할 출구계획도 없이 마지막 프로파간다를 외칠 뿐이다. 곧 “오늘은 개혁, 내일은 성장의 귀환”이라고 강요한다. 소수의 특권계층은 이 마지막 환상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어쩌면 가장 약한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면, 제헌국회선거를 통해 체제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제안은 단순히 실마리를 잡아당기는 일일 뿐이다. 항구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추상적으로 국민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구체적 수단을 국민에게 부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국민의 주권을 회수하면서 창조적으로 복원하는 과정을 시작하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정치, 경제, 기후, 제도, 사회 문제에 관해 입장을 정하는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선거를 획득하는 것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선거를 얻어낸다고 해서 인류의 진보 체제가 기계적으로 도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선거는 사회 내에서 진보세력, 보수반동세력 그리고 무기력한 세력의 힘 사이에 중요한 대치 공간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이 전투는 국민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모두를 위한 동일한 게임의 규칙을 따라 전개될 것이다.
글‧크리스토프 방튀라 Christophe Ventura.
<대륙의 기상,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국가들의 지정학>(Armand colin, Paris, 2014)의 저자.
번역‧김계영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 <르몽드 세계사3>(2013),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현재의 전반적 저항운동은 계속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극단적 보수 세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가엘 브루스티에, <보수적 68년 5월 - 모두를 위한 시위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에디시옹 뒤 세르, 파리, 2014년 참조.
(2) 여기서 문제로 삼는 것은 정당정치 열성활동가들이라기보다 그 조직들이다.
(3) 2014년, 극빈자 구제 비정부기구인 옥스팜 인터내셔널의 계산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85명이 전 세계 빈곤층의 반이 보유한 것과 같은 양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옥스팜은 “극심한 불평등이 정치를 부패시키고 경제성장에 제동을 건다”, “최근 30년 간 전 세계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시련 중의 하나가 될 정도로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이 급증했다”고 간주하며 “금융위기 이래 백만장자의 수는 두 배 이상 늘어났고 이제는 1645명에 이른다”는 상상하기 힘든 사실을 폭로한다. “평등을! 극심한 불평등에 종지부를 찍을 때다” 참조. http://www.oxfam.org/fr/rapports/il-est-temps-de-mettre-fin-aux-inegalites-extre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