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우측에 앉아있는 좌파

2015-04-01     브누아 브레빌 & 피에르 렝베르

FN이 안착하고 정부 정당에 대한 불신이 크게 불거지면서, 정치적인 사고 지형이 다시 그려지고 있다. 이 거대한 변혁을 설명하는 사람들은 모두 서민계층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간주된 대중에게 더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접근법, 즉 ‘주변부 프랑스’ 대(對) 대도시의 보헤미안 부르주아, 서민 대(對) 엘리트라는 접근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계층들 사이의 알력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

 

정당들은 음악놀이를 하면서, 다문화주의, 국토불균형, 민족분리주의, 국민과 특권계급, 가치와 문화라는 몇 안 되는 이데올로기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음악이 멈추게 되면 상황은 혼란스러워진다. “좌파는 서민계층을 잊어버림으로써 이미 조레스를 배신했다”라고 ‘강한 우파’라 자임하는 UMP(대중운동연합)의 한 계파 지도자가 지적한다. “만약 우리가 잔 다르크를 계속해서 무시한다면 FN(국민전선)이 권력을 잡게 되는 것에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라고 결론짓는다(<르피가로>, 2015년 2월 12일).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회당의 지략가이면서 정치학자인 로랑 부베는 자신의 최근 저서의 주제인 ‘문화적 불안정’을 성찰의 핵심 주제로 삼으라고 동료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이 ‘문화적 불안정’이라는 불안감은 이슬람에 적대적인 ‘하층 백인들’과 ‘모두를 위한 결혼(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결혼법)’에 반대하는 무슬림들을 동시에 괴롭힐 것이다. 그러는 사이 두(Doubs) 데파르트망(한국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4번째 선거구의 FN 후보자인 소피 몽텔 여사는 자신이 장 조레스이면서 동시에 잔다르크라는 주장을 펼친다. “푸조가 조만간에 슬로바키아에서 C3 자동차 모델을 생산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모든 국경을 폐쇄해야 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프랑스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바로 회사의 최고경영자다. 왜냐하면 최고경영자의 관심은 프랑스가 아닌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르피가로>, 2015년 2월 6일).

‘서민에게 되돌아가기’라는 공통된 슬로건이 논란의 핵심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다. 그런데 ‘서민에게 되돌아가기’는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가? 1990년대부터 정권을 잡은 정당들이 서민계층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본다면, “서민계층들이 잠자코 있기만 한다면, 우리가 그들의 이름으로 말할 것이다”라는 문장일 것이다. 19세기에는 서민계층을 민주주의 절차에 참여시키는 것이 정치적 불안정의 해결책으로 생각됐다. 지금은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서민계층이 정치 책임자들과 논평가들에게는 근심거리일 뿐이고 때로는 골칫거리이다. ‘결정자들’의 눈에 훤히 보이는 무대 위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진 서민계층은 오직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비난을 견뎌내기 위해, 대중토론에서 투표를 통해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

1990년에서 2005년까지 주요 정당들은 서민 ‘문제’를 기권표를 중심으로 관리했다. 선거인 명부에 미등록된 표와 더불어 누적된 기권표는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곤 빈곤계층에 만연되어 있었다.(1) 시민들이 식어가는 활기를 가지고 기표소를 방문하는 모습을 논평하면서 당시 지역 자치장관이었던 파트릭 드브지앙은 2002년 어느날 자신의 동료들이 슬퍼하는 체하는 모습에 대해 즐거워하며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가 더 평화로워질수록, 쟁점들이 덜 격렬해지고, 사람들이 싸움을 덜 하려고 하고, 참여가 더 적어진다. 계속 이어지는 정권교체 때문에 우리 국민이 정치에 대해 좀 더 회의적으로 됐는데, 이는 지혜로움의 한 가지 형태다.”(2)

시민들을 지혜로워지게 만드세요! 애석하다. 2005년 유럽헌법조약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됐을 때 노동자·피고용인·실업자·학력이 낮은 사람들의 참여율이 제도에 대한 신뢰상실과 결합되어 상승한 사실은 형세관망주의의 위험을 잘 보여주었다. 서민들이 불참했다가 갑자기 발언을 하게 된 것은, 지도계층에게는 불안정의 시기가 활짝 열리게 됨을 의미한다. 드브지앙이 귀중히 여기는 정권교체라는 안락한 침대에서 엄청나게 불어나는 홍수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니콜라 사르코지가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당시에 그의 전략은 두 가지 담론, 두 가지 말투, 두 가지 표적을 병치시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프랑스 모델을 ‘국제적 규약들’에 맞추기 위해 임금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지도 계층의 이익에 일치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또 한편으로는 소위 말해 ‘1968년식 사고(思考)’로 과격화된 노동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엘리트들과 대비되는) 노동자·서민의 진정성·안전·보호·정체성의 가치들과 정치적 자원봉사 정신을 강조하는 수사학을 구사했다.(3) ‘공정한 질서’라는 슬로건을 내건 사회당의 여성 대통령 후보는 단음계 방식을 선택하면서 이와 유사한 도식을 거부했다.

테라노바에서 크리스토프 기이위까지 이데올로기의 재구성

상류계층의 이익에 호소하면서 없는 자들의 가치에 호소하는 보혁 조합방식은 이미 2004년 조지 부시의 대통령 선거운동에 사용됐다. 보혁 조합방식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찬가지로 성공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시 투표를 했을 뿐 아니라, 부자들의 후보에게 투표를 했던 것이다!

2011년 1월 FN의 대표직위에 마린 르펜이 등극하고 그 다음 해의 대통령 선거에 대한 전망이 교차하면서 ‘서민문제’라는 카드패가 다시 펼쳐진다. 그때까지 반항자들의 집합소 역할을 했던 극우파는 1990년대에 시작된 ‘우파도 좌파도 아닌’ 자신의 이론을 재정립하는 데 역점을 둔다. 그후 FN은 서민을 탈환하는 정당임을, 다시 말해 유럽주의(FN은 유럽주의에 반대하여 유로존에서의 탈퇴를 제안한다)·세계통합주의(FN은 세계통합주의에 반대하고 보호주의를 주장한다)‧이슬람주의(이슬람주의는 문화적 재무장을 불러일으킨다)라는 세 가지 사고에서 서민을 구출해 서민의 주권을 탈환하는 정당임을 자임한다. FN은 1차 투표에서 유효표의 17.9%를 획득한다.

한편 사회당은 아무런 전략도 없이 여러 명의 후보자와 더불어 2012년의 선거에 착수한다. 두 가지 여론 조사 때문에 성찰 공간이 제한된다. 사회당의 싱크탱크인 테라노바 재단이 보고서 형식으로 제출한 여론조사는 2011년 5월 엇박자를 내며 떠들썩하게 연주된다. 이 보고서는 “더 젊고, 더 다양하고, 더 여성적인 ‘미래의 프랑스’라는 새로운 연합이 출현한다”라고 단언한다.(4) 흑인·라틴계 주민·여성들이 결집한 덕택에 3년 전 오바마가 승리한 것에 도취된 리포트 작성자들은 ‘학위증 소지자’, ‘젊은이들’, ‘소수 집단과 서민 지역’, ‘여성’이라는 다양한 그룹의 관심을 끌기 위해 중산계층과 노동자계층 사이의 동맹이라는 전통적 전략을 포기하라고 사회당 지도자들에게 권고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계층이 더 이상 좌파 투표의 핵심 세력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권고는 연합의 구성원들을 바꿀 뿐 아니라 그 구성방식도 쇄신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의해 연합한 이전의 좌파 유권자들과는 달리 ‘미래의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문화적이고 진보주의적인 가치들에 의해 통합된다. 다시 말해 ‘미래의 프랑스’는 변화를 원하고, 관용적·개방적·연대적·낙관적·진취적 가치를 표방한다.” 일단 문화적 가치가 제시되고 나면, 그 다음 전략은 이 근원적 가치에서 저절로 따라 나온다. 다시 말해 다수는 아니지만 ‘진보주의’라는 디딤돌에서 출발하여 그 후에 중산 계층이나 서민 계층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 테라노바는 서민계층과 동맹을 맺는 선택이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서민계층은 FN에게 이미 넘어갔기 때문이다. “FN은 자신들이 특히 좋아하는 ‘문화 보호주의, 사회·경제적 보호주의’라는 주제를 가지고서 서민계층의 정당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앞으로 그 점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보고서가 공개된지 8일도 되지 않아, 또 다른 두 명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저서 󰡔승리하는 방정식󰡕(르보르드로 출판사)이 출간된다. 지역 의원이면서 사회당 국가위원회 위원들인 프랑수아 칼퐁과 로랑 보멜은 테라노바의 동료들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개진한다. 사회당이 이기고 싶다면, 사르코지에게 유혹 당했던 일부의 서민계층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 일부의 서민 계층은 ‘노동의 가치’와 세속성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일찍 일어나는 프랑스인들’이다. 또한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과 나이든 사람들에게도 다가가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몇 달 후 ‘서민 좌파를 옹호한다’라는(5) 선언문이 삽입된 유사한 저서가 다시 출간된다. 사회당과 친밀한 장 조레스 재단의 포퓰리즘에 대한 세미나에서 사회를 맡고 있고 동시에 정치과학대학 교수인 부베 같은 대학교수들과 고문들이 이 저서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문화적 차이와 정체성의 차이에 대한 찬미’에 동시에 빠져 있는 좌파 지식인들이 고질적인 ‘인종차별주의자·외국인 혐오자·성차별주의자·동성애 혐오자’로 묘사하는 ‘하층 백인들’에 대한 경멸을 그만두고, 사회당 후보는 ‘서민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임시직 노동자·안정된 전통적인 임금노동자·중년층을 함께 뭉뚱그려 놓은 ‘통합된 서민과 중산 계층’의 재정복은 좌파가 ‘자유주의적이고 순수한 자신의 입장’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좌파는 ‘노동환경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노력을 인정해주길 기대하는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의 깊은 감정’을 고려해야 하고, ‘지나친 주권주의와 보호주의 담론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정당의 구호(救護) 이미지에 스스로 갇히지 말아야 하고’, 영세 가구의 세금을 줄여줘야 한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서민 계층의 불안정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 책의 저자들이 볼 때는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경제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체성의 문제는 이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재정복은 사실상 “소위 ‘도덕적’ 혹은 ‘전통적’이라 불리는 가치들”을 고려함으로써, 특히 가족 층위의 가치들을 고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외국인들의 투표·반인종차별주의·‘모두를 위한 결혼’과 연관된 약속들을 완화시키고, ‘다문화주의’와 ‘집단주의’를 명백히 거부함으로써 달성될 것이다.

어떤 그룹의 동의를 얻기 위해 그 그룹의 사고를 미화하는 것은, 일종의 상업적인 마케팅 과정과 비슷하다. 그것은 다수의 이익에 일치하는 계획을 세우는 문제가 아니라, 선거 시장에서 나뉘어져 있는 표를 부분적으로 합산하는 문제다. “서민 계층을 배제하는 승리 방정식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칼퐁과 보멜은 그들의 ‘선거 운동 표적’ 속에 이 계층을 포함시키고 있고, ‘정치적 제안’을 조탁해 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테라노바가 만들어낸 ‘미래의 프랑스’ 연합은 2007년에 평균치 이상으로 사회당 후보에게 표를 준 여러 계층들의 영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중요 인물들이 여론조사를 자주 이용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요 인물들의 참모들이 여론 조사 전문가들, 의사소통 전문가들 혹은 컨설턴트들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이 논란의 당사자들은 프랑수아 올랑드의 선거운동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중토론의 범주 선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특히 󰡔서민 좌파를 옹호한다󰡕에 참여한, 강렬한 이데올로기 해석가이며 지리학자인 크리스토프 기이위(Christophe Guilluy)의 작업을 통해서였다. 다시 말해 대중토론의 범주가 좌우파의 정치 분열에서 ‘도시 대(對) 도시주변’이라는 공간적 대립으로 대체됐다.

‘서민의 흔적을 되찾았다’는 이유로 에세이스트 자크 쥘리아르에게 찬양받고, 편집위원인 로랑 조프렝에게 ‘모든 좌파가 읽어야 하는 책’의 저자로 높이 평가받는 논쟁가 에릭 제무르가 ‘살아있는 신’(6)이라고 말하는 기이위는 2010년 <프랑스의 분열>(부렝 출판사), 2014년 <주변부 프랑스>(플라마리옹, 판매부수 2만 1천권)를 출간하면서 미디어의 관심을 받게 됐다. 그의 책들은 <마리안느>, <발뢰르 악튀엘>, <렉스프레스>, <르피가로>, <르 주르날 뒤 디망쉬> 뿐 아니라 <프랑스 퀼튀르>, <파리 프르미에르>, <LCI> 혹은 <BFM-TV>의 찬사를 받았다. ‘우상을 파괴하는’ 이 지리학자는 정치가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 기이위는 사르코지 대통령과 연이어 올랑드 대통령에게도 초대를 받는다. ‘FN의 담론을 먹히게 한’ 브뤼노 골니쉬(FN의 참모)도 기이위에 심취해 있고, 마뉘엘 발스 역시 기이위에게서 영감을 얻고 있다. 발스는 “일반정치에 대한 논고를 열심히 작성하다가 그의(기이위) 최근 저서 2권을 급히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마리안느>, 2014년 9월 17일).

한 눈에 보면, “진정한 분열은 도시와 시골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역동적인 지역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프랑스’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하고 있다.”라는 기이위의 말에는 독창성이 결여 되어 보인다. 장프랑수아 그라비에가 1954년 출간한 <파리와 프랑스의 사막>에서부터, 수십 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교육된 아르덴느(Ardennes, 프랑스 북동부 산림지대)에서 피레네(프랑스 남서부의 산맥)에 이르는 공허의 대각선 이론을 거쳐, 로랑 다브지의 <다가오는 위기. 새로운 영토의 분열>(쇠이유, 2012년)까지, 영토의 불균형은 수많은 연구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기이위 가설의 힘은 공간적·사회적·정치적 일관성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프랑스라는 국가는 ‘도시 프랑스’와 ‘주변부 프랑스’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 프랑스’에는 가장 큰 25개의 도시와 그 교외가 포함되는데, 이 ‘도시 프랑스’가 코뮌의 10%, 인구의 40%, 국내총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그 나머지 영토인 시골 마을들, 도시 주변부의 코뮌들, 중소 도시들을 합한 것이 ‘주변부 프랑스’다.

자본주의의 물적·재정적·인적 흐름이 관통하는 ‘도시 프랑스’는 세계 경제에 통합되어 있다. 질 높은 일자리와 질 낮은 일자리로 양극화된 고용시장은 거대 도시들의 특징적인 사회학을 낳는다. 거대 도시에는 간부, 자유직업, 지적 직업을 가진 상류 계층과 거의 자격증을 갖추지 못한 교외의 가난한 이민자들이 공존하고 있다. 상류 계층이란 이름으로 표현됐으나 이 계층은 ‘보헤미안 부르주아’와 ‘전통적인 가톨릭 부르주아’로 나누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상황이 일시적인 서민 계층이나 이민자들에게도 사회적 통합을 허용해 주기 때문에 가난한 이민자들이 아주 오랫동안 가난에 빠져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이위가 설명한다. 이처럼 기이위는 거대 도시의 주민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세계화의 승리자들’로 간주한다.

반면에 ‘잊힌 사람들’의 프랑스인, ‘주변부 프랑스’는 부의 창출 장소들과 고용 시장에서 소외되어 있다. ‘주변부 프랑스’에는 특히 ‘타고난’ 프랑스인들 혹은 ‘예전 이민자들에게서 태어난’ 프랑스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피고용인, 노동자, 장인, 상인, 공무원으로 살고 있다. 미디어에서 무시당하고, 부동산 가격으로 거대 도시로부터 거부당한 이들은 교외를 벗어나 더 멀리 도망친다. 자신들이 교외에서도 ‘소수’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에 의해 불안정해진 이 ‘새로운 서민 계층’이 세계화의 진정한 패배자들일 것이다.

이런 사회적 간극이 결과적으로 정치적 분할을 야기한다. 기이위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심가의 부르주아들과 교외의 이민자들은 자유무역·세계화·‘다문화주의’에 대한 찬성과 같이 몇 가지 기본 가치를 공유한다. 이들은 이런 원칙들에 찬성하는 정부 정당들에게(PS, UMP와 이들의 파트너들) 투표한다. ‘주변부 프랑스’는 이와 반대로 ‘새로운 급진성’의 공간이 된다. ‘주변부 프랑스’ 거주자들은 대부분 지배적인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가치를 거부한다. ‘문화적 불안정’에 시달리는 이들은 주로 기권을 하는데, 점점 더 FN을 찍고 있다. “좌우파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점차적으로 사회·경제적 모델의 보호를 받거나 혜택을 받는 사람들과 그 사회·경제적 모델에서 피해를 받는 사람들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변하고 있다. 반면에 공간적 분할에 따른 재구성은 진정한 민주적 토론을 재(再)활성화시킬 수 있는 두 개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세력을 출현하게 할 것이다. 자유무역사회와 끝없는 변화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당과 중도 우파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선거기반을 강화해 나갈 것이다. 역으로 보호주의, 재배치, 강한 국가 유지를 강조하는 대안적 경제모델 옹호자들은 ‘주변부 프랑스’의 영역에 의존할 것이다”라고 기이위가 말한다.

이런 지리적·이데올로기적 힘이 이미 현장에 상당히 개입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지리학자 자크 레비(Jacques Lévy)가 ‘도시 구배(勾配)’ 이론을 제시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FN의 표는 도시적 밀도의 역순으로 달라진다. 그 후 엠마뉘엘 토드, 에르베 르 브라 혹은 로랑 다브지 같은 연구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영토적 해석을 시도했다. 이런 접근법이 성공하는 까닭은 선거 때에 미디어에 의해서 뿐 아니라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그 작업내용이 아주 명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이위는 스스로 지역공동체를 위한 사회·지리 컨설턴트로 행동한다.

주민들의 문제를 그들의 삶의 장소와 연관시킬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대학교수들이 기이위의 이론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교수들은 기이위의 이론에 드러나는 문화주의적 관점, 임의적인 단순화 혹은 극우파를 찍게 되는 동기들의 다양성이 무시되고 있는 경향을 비판했다.(7) 그런데 이 비판들은 기이위 저서들의 정치적 차원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프랑스를 역동적인 대도시들과 도시 주변부 공간으로 분할하는 것은, 서민 계층들의 두 가지 성분 즉 예전부터 존재했던 노동자들과 새로 편입된 노동자들을 지리적으로 대립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공공정책(도시의 공공정책)이 특히 노동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핑계를 대며, 이 지리학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국가가 ‘교외 지역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시들의 문제는 다문화 사회의 출현과 엄청난 이주자들의 관리와 연관된 것이지, 어떤 경우에도 세계화된 경제의 여파와 연관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교외 지역들은 세계화된 경제의 수익자들이다”라고 기이위가 적고 있다. 이런 단언은 사회 성공기회 지표인 ‘도시 민감지역(ZUS)’에서의 거주지 이동률에 근거하고 있다. 부자가 된 가구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는 가정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1990년과 1999년 사이 ZUS에서의 거주지 이동률은 61%에 이르렀다. “이것은 ZUS가 프랑스에서 거주이동이 가장 많은 지역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주민들과 이웃하기 싫어서 도시 주변부에 정착하려고 떠난 ‘하층 백인들’보다 이주민들이 성공을 더 많이 한다는 의미이고, 이주민들이 ‘서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007년에 이주자들 중 62%가 노동자이거나 피고용인이었다는 사실을(평균은 생산인구의 51%)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서민계층에서 이주자를 제외시키는 것은 방법론상으로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것이다.

민족적·지리학적 구분에 덜 집착하여 같은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 지리학자의 모든 결론은 허물어진다. 기이위가 ‘효율적’이라고 평가한 도시정책도 마찬가지다. 도시정책 자금은 본질적으로 도시 개조 작업에 투자된다. 그런데 이 도시 개조 작업은 주민들의 직업적 행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2014년 도시정책 자금은 5억 유로가 책정됐는데, 관련된 인구가 4백 4십만 명이기 때문에 일인당으로 계산하면 100유로가 약간 넘는 액수에 불과하다. 사유 재산 소유를 촉진시키려는 다양한 국가 보조금(제로 이자율 대출, 토지 소유 보조금, 로비엥·셀리에·보를루·피넬 조치들: 이 모든 조치들은 서민들의 부동산 소유를 돕는 정부 보조금 정책들임)에 비교해 볼 때 도시정책 자금은 너무 미미하다. 다양한 국가보조금은 도시 거주자들보다는 ‘주변부 프랑스’ 거주자들에게 더 많이 할당됐다.

공간적 분석의 취약점들

마찬가지로 ZUS에서의 거주지 이동률 상승은 주민들의 사회적 성공이라는 하나의 요인보다는 다른 요인들에 의해 설명된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 젊은이들과 주택 임차인들이 전국 평균보다 더 많이 살고 있고, ZUS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는(대략 이사의 3분의 1이 이에 해당됨) 경우가 많고, 도시 개조 작업이 벌어진 것 등의 여러 다른 요인들에 의해 설명된다. 이주민 가구의 일부가 성공을 하여 ZUS를 떠나는 경우에도, 흔히 도시 주변부에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2013년에 ZUS 거주민의 24%가 실업자였으며, 이들 중 44.3%가(전국 평균보다 2배 이상임) 아무런 자격증도 갖고 있지 않았는데, 이 점이 이들의 직업적 성공을 결정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세계화의 승리자들’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여기 사는 주민들이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주민들보다 더 나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2011년 평균 급여의 60%이하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64%가 대도시에 살고, 이들 중 반 이상이 교외에 사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의 17%가 도시 주변부의 코뮌에, 13.4%가 중소 도시에, 5.4%가 외딴 시골에 살고 있다.(8)

기이위의 저서에서 도시들의 미화된 모습 뒤에 ‘주변부 프랑스’의 어두운 단색 그림이 등장한다. 그런데 ‘주변부 프랑스’가 거대 도시들처럼 회색으로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흑백으로 표시되어 있다. 엄청난 불평등이 대토지 소유주와 소규모 농부, 기업경영주와 임금노동자, 중(中)도시의 유력 계층과 서민구역의 평민을 구분해 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로 극명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도시 주변부의 소도시인 크루아(Croix: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가 ‘가장 많은 재산세가 걷히는 20개 도시’ 순위표에서 파리의 7구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Latribune.fr, 2014년 1월 6일).

이 공간들이 특별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은 확실하다. 피니스테르 데파르트망의 샤토렝 코뮌에서 벌어지는 기업의 대량해고 조치는 파리 바로 위쪽의 센셍드니 지역에서의 공장 폐쇄보다 훨씬 더 많은 충격을 준다. 그곳에서 일자리를 다시 찾을 가능성은 더욱 어렵고, 실업자는 교통비 증가를 무릅쓰고 더 먼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아야만 한다. 대부분 엄청난 희생을 지불하고 주택 소유주가 되는데, 이 경우 주택소유가 커다란 제약이 돼버린다.

그런다고 해서 그 지역을 ‘세계화에서 배제된’ 땅들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거대 명품회사(루이뷔통, 보리오 쉬르 리옹, 쉬미에 코뮌), 농식품 회사(다논, 빌콩탈 쉬르 아로스·르몰레 리트리·바이욀 코뮌), 제약회사(사노피, 리지외·플로에르멜·무랑 코뮌), 온라인 회사(아마존, 로윈플랑크·사란 코뮌)는 자사들의 거처를 ‘주변부 파리’에 선택했다. 산업의 지방분권화, 강력한 노조를 회피하려는 경영주의 전략에 힘입어 1960년대부터 산업화된 ‘주변부 프랑스’는 규모가 축소된 생산 단위들, 미미한 노조비율, 대량의 하청, 계약직으로 특징지어진다.(9) 간단히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주변부 프랑스’에서 물속의 물고기처럼 활기를 치고 있으며, 세계화의 위기가 이 지역에서는 훨씬 심각한 여파를 주고 있다.

결국 기이위가 서민 계층 내부에 그은 분할선은 경제적인 분할선도 문화적인 분할선도 아닌 것이다. 이 지리학자는 항상 이 두 가지 차원을 연결 짓고 있다. 말하자면 프랑스 사회가 ‘세계화되고 다문화적으로’ 될 것이고, FN 유권자들과 투표 기권자들은 ‘세계화와 다문화 사회’를 거부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이위가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일부의 주민들이 ‘이민자의 물결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 주변부에 정착한다면, 또 다른 주민들은 부동산 소유주가 되기 위해, 좀 더 나은 삶의 환경에서 더 넓은 주거지에 거주하거나 혹은 더 나은 학교시설을 찾기 위해 도시 주변부에 정착한다. 저자는 ‘문화적 불안정’을 상기시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사회적 이유들에 대해서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문화적 불안정’이란 주제가 유행을 타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2010년 그의 저서 <프랑스의 분열>에 등장한 ‘문화적 불안정’이란 개념이 당시에 지적인 분위기를 주도한다. 같은 해 <문화의 거부>라는 저서에서 사회학자 위그 라그랑주는 아프리카 이주민들의 학습실패와 청소년 범죄에 대한 분석에서 많은 부분을 문화적 요인들 탓으로 돌렸다. 동시에 인구통계학자 미셸 트리발라가 자신의 저서 <감아버린 눈>에서 ‘초국가적 진보주의 이데올로기’와 과소평가된 프랑스의 이민자 숫자를 규탄한다. 5년 후 문화적 불안정의 존재 여부와 그 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이 벌어지지 않는다. 지리학자 기이위는 문화적 불안정을 “다문화 사회의 출현이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많아지는 이주민 물결에 맞닥뜨린 서민 계층의 깊은 감정”으로 읽어내고, 반면에 정치학자 부베는 무정부주의적 자유주의 사상이라는 헤게모니에 부딪힌 서민 계층의 불안 감정으로 읽어낸다. 이런 문화적 불안정에는 ‘하층 백인들’이 갖고 있는 ‘소수자들에 의해 촉발된 정체성 문제’ 이외에도, 동성결혼이나 소위 말하는 ‘장르 이론’(이성간의 성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론)의 학교에서의 교육 같은 문제들에 대해 이주민들이 느끼는 ‘사회적 불안정’도 포함될 것이다.(10) 다시 말해 한 명은 서민적 가치들이 이주민들의 문화와 양립불가능하다고 간주하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분리주의’를 야기할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또 한 명은 풍속의 방탕함에 대한 공통의 혐오감을 이민자들과 ‘하층 백인들’ 양자가 갖고 있다고 말한다.

서민적 가치의 판매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이 상처받은 서민적 가치의 도덕적 의미는 진보적 지식인들과 대응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철학자 조지 오웰이 부여해준 ‘상식적인 예절(common decency)’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 상식적인 예절을 갖고 있지 않다. 철학자 장 클로드 미쉐아에 의해(11) 프랑스에 알려지게 된 ‘상식적인 예절’이란 개념은 정직·관대함·한계의 의미·공동체적 관계에 대한 애착·자유주의적 진보주의에 내재한 일탈의 거부 같은 타고난 도덕적 자질의 총체를 말한다. 파벌들이 경제적·사회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것을 포기한 비정치적 세계에서 ‘상식적인 예절’은 빈자 계층의 양심을 대변해 준다. ‘상식적인 예절’은 특권 계급과 대비되는 서민, 타락한 보헤미안적 부르주아 및 사장과 대비되는 ‘하층민의 프랑스’, 몽트뢰유의 여교사와 대비되는 로데 지역 주물 공장 노동자를 결합시키는 끈이다. 파리식 우아함으로 폼을 잡는 지배자들의 오만에 대항하는 박탈당한 자들의 저항 도구인 ‘상식적인 예절’은 또한 서민적 가치라는 가면을 쓰고 정치 지도자들이 행하는 반동적 정치를 서민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만드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서민 좌파, 기이위, 테라노바는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적인 사고를 드러내는데, 이 사고는 전형적으로 사회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 사고는 만질 수 없고 접근할 수 없으면서도 고정된 어떤 심리문화적 기질을 국민들에게 부여한다. “임금노동자와 피고용자 같은 서민 계층들은 좌파에 애착을 느끼도록 만드는 사회·경제적 가치들(보호해주는 강력한 국가, 공공서비스, 사회 안정), 보수적인 문화 가치들(질서와 안전, 이민과 이슬람에 대한 거부, 유럽 거부, 전통 수호 등)을 갖고 있다. 이와 반대로 중산층은(유통업자들과 상층 중산층) 좌파의 문화가치와 우파의 사회·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다”라고 테라노바의 보고서는 강변한다. 기이위는 지적 부르주아와 서민 사이의 이혼을 ‘결정적이고 구조적이다’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이런 가치들이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려면 한 걸음만 더 물러서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1848년 6월의 대량학살과 1871년 파리코뮌에 대한 진압이 발생한 이후, 노동자 운동은 오랫동안 국가에 적대적이었다. 중산계층의 한 분파는 풍속에 있어서의 보수주의와 공공안전의 절대적 권위를 중시하고, 또 다른 분파는 반(反)인종차별주의를 중시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도시 엘리트들은, ‘장르 이론’과 가깝기는커녕 노동자의 성적 방탕을 비난하였고, 식민지 인도에서는 동성애를 한 사람들을 형사재판에 회부했다(1860년). 여러 번의 대중 결집을 통해 주어진 여건을 바꾸기 전까지는 노예제도·식민지개발·아동의 노동·공공생활에서의 여성의 배제가 서민계층에 널리 퍼진 ‘가치들’이었다.

좌파의 관점에서 검토되는 정치란 것은 바로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정치라는 것은 사회질서가 강요하는 인식 범주들에 대항하여 싸우고,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내고, 가능한 한 관계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시리자라는 정치 동맹단체의 대변인이 ‘가치들’의 주식시장에서 투기를 하려고 결정했다면, 그리스 유권자들이 갖고 있는 외국인 혐오 기질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고, 이민자들에게 유리한 조치들을 그가 발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리자 대변인보다 4반세기 전에 프랑수아 미테랑은 자신의 정치프로그램에서 인기 없는 사형제 폐지를 삭제해야 했을 것이다. 토마 산카라 같은 아프리카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권위에 굴복했을 것이고, 할례 제도와 싸우는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슬림 국가인 튀니지에서 하빕 부르기바가 프랑스보다 먼저 이혼과 낙태를 자유화하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소부르주아를 비난하는 것은, 가난한 자를 비난하는 트렌디한 방법이다”라고 피에르 칼퐁이 의미 있는 지적을 한다.(<르몽드>, 2012년 11월 14일). 결론적으로 ‘가난한 자’를 유혹하기 위해, 좌파가 소부르주아임을 밝혀야만 한다는 것인가?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피에르 렝베르 Pierre Rimbert

번역·고광식

 

(1) 셀린 브라코니에, 장 이브 도르마장, ‘기권표가 말하고자 하는 것,’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4년 5월.(2) <르몽드>, 2002년 12월 4일. 세르주 알리미의 <거대한 후퇴>(아곤느, 마르세이유, 2012년)에서 인용함.
(3) 세르주 알리미, ‘사르코지 대통령의 이데올로기 비법’,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07년 6월.
(4) 브뤼노 장바르, 올리비에 페랑, 로멩 푸뤼당, ‘좌파는 2012년 선거에서 어떤 유권자를 겨냥해야 하는가’, 2011년 5월. 알렉상드르 즈벵, ‘스스로를 싱크탱크로 간주하는 테라노바,’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1년 2월.
(5) 로랑 보멜, 프랑수아 칼퐁, <서민 좌파를 옹호한다. 자신들의 유권자들과 마주한 좌파>, 르보르드로, 로르몽, 2011년.
(6) 기이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파트너인 에릭 놀로(Eric Naulleau)의 표현임.
(7) 세실 젱트락, 사라 메크지안, ‘국민과 ‘주변부 프랑스’: 서민 계층들을 본질주의적이고 문화주의적 방식으로 해석하는데 사용되는 지리학,’ <공간과 사회>, 156-157호, 파리, 2014년. 비올렌 지라르, ‘백인 서민 계층들의 도시 주변부,’ <사회과학연구 논문집>, 204호, 파리, 2014년 9월.
(8) Insee(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 <프랑스, 사회의 초상화>, 2014년 11월.
(9) 문서 ‘서민의 시골과 부르주아의 시골,’ <아곤느>, 51호, 마르세유, 2013년.
(10) 로랑 부베, 󰡔문화적 불안정󰡕, 파이아르, 파리, 2015년.
(11) <오르페우스 콤플렉스. 좌파, 보통사람들과 진보의 종교>, 클리마, 파리, 2011년. 더 최근 저서로 자크 줄리아르와 장클로드 미쉐아 사이의 편지 교환 형식의 책인 <좌파와 서민>(플라마리옹, 파리, 2014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