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로 돌아선 샤반느 농촌 사람들

2015-04-01     로제 바이양

샤반느 쉬르 레수즈는 앵 데파르트망의 퐁드보(Pont-de-Vaux) 캉통[군(郡)이나 면소재지에 해당]에 위치한 마을이다. 가장 가까운 역인 플뢰르빌(Fleurville)이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전쟁 전에 마콩(Mâcon)과 부르그앙브레스(Bourg-en-Bresse)에 버스가 다녔으나, 일주일에 두 번만 운행됐다. 여관 하나, 레수즈에 방앗간 두 곳, 심지어 빵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것을 조금씩 파는 식료품점 세 곳, 대장간 하나, 우체국은 없고 전화 부스가 하나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작은 마을의 전형이다.

소유지의 평균 면적은 8헥타르로, 프랑스라는 국가 면적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주 작은 편이다. 농업 노동자는 거의 없다. 경작 소유주와 소작인의 수가 거의 비슷하고 생활수준도 거의 유사하다. 두 개의 신분이 자주 뒤섞인다. 사람들은 3∼4 헥타르의 소유지를 경작하면서 동시에 3∼4 헥타르의 임대토지도 경작한다. 밀, 귀리, 옥수수, 사과, 무, 약간의 포도나무 등의 여러 작물을 동시 재배하는 것이 일종의 절대적인 규칙이다. 경작을 위해 한 마리의 말(두 마리는 드물다), 한두 쌍의 수소, 몇 마리의 암소, 건초를 사지 않고 가축을 먹일 수 있는 정도의 목초지, 나뭇단을 만들기 위한 울타리 숲을 갖고 있다. ‘특화되지 않는 소규모 소유주’라는 표현이 전통적으로 프랑스 농부를 적절하게 묘사하는 말이다. 샤반느 쉬르 레수즈는 프랑스의 전형적인 작은 마을이다.

전쟁 전에 선출된 시장과 의원은 급진사회주의의 우측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입헌의회가(1) “프랑스를 모험의 길로 이끌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 사람들이 믿는 것은 바로 샤반느 쉬르 레수즈 주민들의 표였다. 샤반느 주민 한 명의 표가 파리 노동자 두 명의 표와 같은 효력을 내는 방식으로 선거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2)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시기에 나는 샤반느 쉬르 레수즈로 ‘이주했다.’ 해방된 이후에도 나는 그곳에 주기적으로 찾아 간다. 나의 공식 주소도 여전히 그곳이고, 투표도 그곳에서 할 것이다. 그곳에는 친구도 많이 있다.

파리에서 돌아올 때마다,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과 최근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나에게 “어때 여전히 변한 것은 없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해방 후 처음 몇 달 동안 그들은 놀라운 듯이 그 말을 했다. 그러다 그들은 분노를 드러내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샤반느가 변화를 기대하는 것인가? 어떤 변화일까? 왜 샤반느 사람들이 실망하고 분노를 드러낼까? 이런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란 복부의 사람들’과 가난의 악순환

샤반느 쉬르 레수즈가 브레스(Bresse)에 있다는 말을 나는 아직 하지 않았다. 이웃 인접 지역에서는 브레스 사람들을 두고 ‘노란 복부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옥수수가 브레스 사람들의 주식이기 때문이다. 브레스 사람들은 옥수수를 가지고, 사람들이 ‘고드(gaudes)’라고 부르는 일종의 노란 죽을 만든다. 고드를 먹는 노란 복부의 사람들은 특이하다. 왜 전통적으로 고드에 대해 편애를 갖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혹시 고드를 먹어보았는가? 고드는 별 맛이 없고, 입맛을 거의 당기지도 않는다. 고드의 영양학적 가치도 그리 크지 않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배를 채우는’ 음식에 불과하다니! 한 접시의 고드를 먹고 나면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지만, 사람들은 ‘뭔가 허전하다’고 느낀다. 나는 고드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려고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끼니마다 빵을 먹기에는 브레스 사람들이 너무 가난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알아냈다. 소작료, 나막신 혹은 징 박은 신발과 수의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밀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브레스 사람들은 복부가 노란색이 되도록 옥수수로 배를 채워야 했다.

8헥타르의 땅을 가진 파리 근교의 채소 재배인은 커다란 사업장의 사장이다. 채소 재배인은 비료를 뿌리고 관개를 잘해 비옥해진 토양에 선별된 씨앗들을 뿌린다. 다시 말해, 파리 근교의 채소 재배인은 집중재배를 하기 위해 가장 최근의 농학기술을 사용한다. 또한 채소 재배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채소 산업을 번창시킬 무한정한 판로를 보유하고 있다. 역으로, 가족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사용해야 하고 또 의복, 농기구 등을 구매하기 위해 잉여분을 마련해야 하는 브레스 농부는 8헥타르의 땅으로 국면을 타개하기 힘들다. 그의 밀밭은 트랙터, 바인더 등을 구매하기에는 너무 좁다. 멋진 미국산 풀 베는 기계를 구매하기에는 목초지도 너무 좁다. 적절하게 과수원을 가꾸거나 양봉을 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비료의 과학적 사용을 배울 수 있는 농업학교에 아들을 보내기에는 아들의 도움이 너무나 필요하다. 사실상 그는 자신의 몇 대 선조들과 똑같은 기술 및 거의 똑같은 도구를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현대적 기술을 이용해 단작으로 키워낸 다른 지방의 생산물들과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노동과 가족의 노동을 전혀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살아간다. 만약 그가 일꾼 한 명의 시간당 급여비용으로 자신의 노동을 원가에 포함시켜서 ‘총원가’를 계산해 본다면, 그는 자신이 항상 밑지며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지어 오늘날의 암시장에서 판매한다 해도, 밑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브레스의 닭과 현대식 삶의 회로

1914년 전에는 브레스가 아주 가난했기 때문에 경작용 말을 소유한 농부들이 매우 드물었다. 한 쌍의 황소는 이미 부의 상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쟁기를 암소에 매달았다(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경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하는 암소들은 우유가 잘 나오지 않는다. 가난이 악순환 되고 있는 것이다.

-왜 당신들은, 내가 네덜란드나 덴마크에서 보았던 그런 선별된 젖소를 소유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유만큼이나 고기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고기를 원할 때와 우유를 원할 때 다른 소를 선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축은 이 두 가지 목적을 다 충족시켜야 합니다.

-왜 당신들의 가축은 그렇게 야위었습니까?

-우리 가축들은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브레스 사람들은 닭이라는 특화 상품을 구상해 냈다. 브레스 닭의 성공은 토양의 성분, 옥수수와 유장(乳漿)을 기반으로 한 먹이, 특이한 품종의 암탉 같은 아주 지역적인 몇 가지 요인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졌다. 어둠 속에서의 사육, 거세, 강제 사육 같은 적절한 기술이 점차 개발됐다. 브레스 병아리는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18년 이후 브레스의 닭사육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방문수거를 가능하게 해준 자동차의 발전, 파리와 런던의 도매업자들 눈을 거대 가금류 시장으로 향하게 한 농업 콩쿠르의 창설 같은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 병아리를 가장 많이 요구하는 시기가 크리스마스인데, 여름에 닭들을 생산해 내는 자연의 변덕을 무색케하는 냉장시설의 발명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이 현상에 기여했다.

브레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닭을 길렀다. 농가가 생산할 수 있는 옥수수보다 더 많은 옥수수를 병아리가 먹어치우는 날이 왔을 때, 그들은 외국에서 옥수수를 구매해야 했다. 그날은 엄청난 날이었다. 그날 그들은 현대식 삶의 회로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됐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땅을 경작하고 수확물의 ‘잉여분’만을 판매했던 그들은 예전에 농부였었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원료인 옥수수를 구매하여 최종생산물인 닭을 판매하는 기업가가 돼버렸다. 그들은 돈을 벌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항상 빵을 먹게 됐다. 자신들의 곡물용 토지 전체에 옥수수를 심어버렸기 때문에 심지어 자신들의 빵을 빵집에서 사먹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들은 말을,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동차까지 구입했다.

갑자기 새로운 문제들이 그들에게 생겼다. 1936년 무렵 자신들이 닭 장수에게 20프랑에 판매한 닭이 파리나 런던에서 50프랑에 재판매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캐나다 혹은 루마니아 미곡상에게 돈을 지불하고 나면, 그들은 닭 한 마리 당 겨우 2프랑이나 3프랑을 벌었다. 모든 수익은 닭 장수에게 돌아갔다. 왜냐하면 냉장시설을 건설하고, 빠른 운송을 조직하고, 홍보하는 등에 필요한 자본을 닭 장수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반느는 마침내 현대 세계가 노동자와 자본주의자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36년 300명의 유권자 중 30여 명이 사회주의 후보자에게 투표했다. 이 닭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복부가 노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냉혹한 하나님이 브레스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히 고드를 먹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들은 식사 때마다 빵을 먹고 있다. 언젠가는 고기를 먹지 않을까? 그렇지 못할 이유도 없다.

전쟁의 교훈

전쟁은 그들에게 다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선 암시장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도시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암시장에서의 벌이는 그리 크지 않다. 자기 남편의 작업복 한 벌을 암시장에서 구매하기 위해 전쟁 전의 시장에서보다 달걀 12개 정도를 더 팔아야 했다고 내 이웃 여자가 정확히 계산해서 말했다.

암시장의 효과는 특히 심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이 이웃여자는 전쟁 전에 자신이 매주 수요일 퐁드보 시장에서 자신의 버터를 어떻게 팔았는지를 나에게 수백 번 이야기했다. 교외 주변의 모든 농가 아낙네들이 광장 주변에서 자신들 앞에 버터 덩어리를 놓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조그만 도시의 중산층 여성들이 그리로 왔다. 중산층 여성들이 이것도 맛보고 저것도 맛본 후에 입을 삐죽거리면서 “지난주 버터가 더 하얬어. 다음에는 다른 곳에서 사야겠어”, 혹은 “2수(1수는 5상팀)는 더 깍아야 하겠는데!”라는 말을 했다.

- 나는 정말 그 여자들의 귀싸대기를 때리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버터를 꼭 팔아야 했기 때문에 웃음을 지었다. 가난 때문에 모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3년 전부터 퐁드보 중산층 여성들이 그녀의 농장에 와 그녀의 버터를 애원해가면서 구매하고 있다. 그녀가 “차라리 내 버터를 팔지 않을래요.”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매몰차게 말하면 중산층 여성들이 미소까지 지으며 아양을 떨면서 버터를 사간다.

암시장은 도시 사람들이 ‘복부가 노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기막힌 우연으로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날, 독일로 유배 갈 사람들의 최초 명단이 마을에 도착했고, 동시에 대량의 가축 징발이 예고됐다. 마침내 샤반느 사람들은 자신들이 독일사람들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과 독일사람들이 패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같은 날 동시에 알게 됐다. 첫 번째 유배 대상자들은 마콩 산악지대의 손강(Sâone) 건너편에 형성되고 있던 무장 항독지하단체에 들어갔다. 레지스탕스가 탄생한 것이었다.

샤반느 사람들은 아주 서서히 대담해졌다. 그들을 소심하게 만들고 권력을 소유한 모든 것을 존중하게 만들었던 건 빈곤 때문이었다. 고드를 먹는 사람들은 무력한 1,000여 년간의 기억을 털어내고 마침내 공개적 폭동을 일으키게 됐다. 처음으로 은밀하게 송아지를 살해 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1944년 6월 10일 샤반느의 각 농가는 폭동 기도가 실패한 후 마을을 떠나 도망가야 했던 퐁드보의 애국자들을 숨겨주었다. 이 애국자들은 무기를 가지고 피난했었다. 상당수 농가들은 가택수색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할 준비를 했다. 참 먼 길을 헤쳐 온 것이다!

해방이 됐을 때, ‘복부가 노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도 뭔가 존재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상의 면모를 바꾸고자 하는’ 욕망 앞에서, 정치적 민감성은 약간 무시된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같은 목적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서로 합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옆 코뮌인 세르무아이에르(Sermoyer)에서는 52명의 사회당 당원들이 도시에서 내려온 명령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합병을 했다. 전쟁 전에는 샤반느에 공산당 조직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만들어진 공산당 조직이 벌써 당원 42명을 모집했다.

페탱(Pétain)은 현혹되지 않았다. “공산당이 우리를 봉건주의 시대로 되돌리고 싶어 한다.”라고 1942년부터 내게 말했다.

샤반느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두 가지로만 구별한다. ‘봉건영주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나아가길’ 바라는, 다시 말해 발전을 추구하는 ‘진보정당들’에 찬성하는 사람들이라는 두 부류만 존재한다. 샤반느 사람들은 좌파에 투표했다. 왜냐하면 ‘복부가 노란 사람들은’ ‘나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것과 ‘진보된’ 국가의 시골 수준으로 프랑스의 시골 수준을 높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들의 후보자들이 그들에게 말해주길 원했다. 그들 역시 수돗물, 전기, 목욕탕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전쟁이 그들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그들은 기대하고 있다.

 

글·로제 바이앙Roger Vaillant 
1907-1965. 기자이자 소설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한 그는 젊은 시절에는 당대의 이념인 초현실주의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고, 제2차세계대전 시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고 참여문학을 집필했다. 작품으로 <좋은 발, 좋은 눈>, <엘로이즈와 아벨라르>, <혁명 때의 민중의 인간> 등이 있다.

 * 이 글은 바이양이 1945년 9월 28일 <악시옹>지에 발표한 것으로 최근 좌파의 실현성 있는 현실정치 목표와 관련하여 많은 점을 시사한다.

번역·고광식

 

 

(1) NDLR(노트르담 라 리시 연구소), 해방된 후 프랑스 임시정부는 1945년 10월 21일 입법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유권자들은 동시에 국민투표에 의해, 새로 선출된 의회가 입헌의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결정해야 했다. 찬성표가 96%로 반대표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새로운 국민투표를 통하여 1946년 10월 27일 제 4공화국 헌법이 공포됐다.
(2) NDLR, 제3공화국이 지속된 대부분의 시기 동안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구군(區郡)투표는 다른 지역을 희생하여 사람이 가장 적은 지역들에게 특혜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