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증오의 역사는 바뀌었나?

2015-04-01     트리타 파시

이란 핵협상 타결 전망으로 이란과 미국의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이란 왕조 시대 때의 오래된 우호관계의 르네상스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화해로 근동의 전략적 카드를 재구성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양측이 서로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내려놓아야 가능할 일이다.

최근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이 주요 6개국(P5+1,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과의 핵협상에 합의할 경우 “대단히 번영하는 지역 강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1). 미국대통령이 이란 핵협상이 단지 원심분리기와 우라늄 농축의 문제를 넘어서는 중요성을 가진 것임을 이처럼 명확하게 밝힌 적은 없었다. 이란의 근동무대로의 귀환은 이란과 미국 양국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멈추지 않고 이 지역의 지정학적인 지도를 완전히 다시 그려놓을 수도 있다.

 

이란 핵 프로그램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는 길 도처에 복병이 널려 있다. 양측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서 두 번에 걸쳐 협상시한을 연장해야만 했다. 미국과 이란 관계를 회복할 길은 길고 험난할 것이다. 양국이 서로에게 가한 고통과 모욕은 극복하기 힘든 것이다. 쌍방이 저지른 잘못을 늘어놓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양측이 느끼는 배신감과 경계심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양국 관계가 아주 좋았던 시절에 시작됐다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독립전쟁을 치르고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난 미합중국은 식민지화에 저항하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호의를 보였다. 때로는 호의 이상의 상황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란의 경우, 이란 민주화와 독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두 명의 미국인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인 하워드 배스커빌은 이란이 헌법을 가질 권리를 옹호하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했다.

샤의 야망

배스커빌은 카자르 왕조(2)의 군대에 대항해 페르시아에서 탄생하고 있던 입헌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학생 전투조직을 이끌다가 1909년 4월 19일 타브리즈에 매복해있던 저격수에게 저격당했다. 그는 이란 북서부에 위치한 타브리즈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 묘지에 묻혔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란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의 이름을 딴 수많은 학교와 거리가 있다.

또 다른 미국인은 윌리엄 모건 슈스터다. 슈스터는 입헌혁명으로 소란스러웠던 시기(1905∼1911년)에 페르시아 의회로부터 이란의 재정을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영국과 러시아가 페르시아를 재정 파탄 상태로 몰아넣으려 할 때 그는 페르시아를 열정적으로 방어했다. 영국과 러시아의 엄청난 압력에 처한 슈스터는 결국 사임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경험을 <페르시아 목조르기>라는 책 속에 털어놓으며 러시아와 영국의 내정간섭을 준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책을 ‘페르시아 국민’에 헌정했다.

미국의 반(反)식민주의정책과 배스커빌의 희생, 그리고 슈스터의 정치참여는 수많은 이란인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이 모든 상황은 1953년을 기점으로 변한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최초의 총리 모하메드 모사데크가 석유산업을 국영화하기로 결정하자 미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정보국이 힘을 합해 그를 권좌에서 밀어냈다. 1953년 8월 19일의 쿠데타로 모하메드 레자 샤 팔레비를 왕좌에 앉히며 애초에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른 것이다.(3) 다시 권력을 장악한 페르시아의 왕은 잠재적 반체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탄압을 강화했다.

많은 이란 사람들이 보기에 이 시기는 미국이 순수성을 상실한 때다. 이란과 이란의 자원을 통제하려는 영국의 노력을 초기에 저지한 이후 미국은 이란으로부터 민족자결권을 박탈하기 위해 식민강대국 영국과 결탁했다.

반체제 운동이 확산되면서 왕정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이 이란 내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 역시 커져갔다. 사람들은 팔레비 왕이 이란의 독립을 미국에 팔아넘겼다고 비난했는데, 틀린 말이기도 하고 맞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비난은 왕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결집의 외침이 되어갔다. 특히 1964년 팔레비 왕이 이란 주둔 미군에게 외교면책권을 부여하는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서명한 후에는 비난이 더욱 맹렬해졌다. 그로부터 15년 후 이란 혁명을 이끌게 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가장 가혹하게 팔레비를 비판하며 단호하게 SOFA를 항복조약으로 규정했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는 야심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는 이란을 지역 초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와 강력한 경제가 바탕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강대국들이 근동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1971년, 영국은 수에즈 동쪽에 주둔한 군대의 완전철수를 결정했다. 미국과 러시아는 영국이 남긴 빈자리를 메우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란은 동아시아에서 확실한 초강대국이 되기를 희망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열중하는 사이 팔레비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리처드 닉슨 정부와 체결한 협정으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을 떼어놓고 아랍-페르시아 만의 안전을 책임지게 된다. 이른바 ‘두 개의 기둥’ 정책은 사실 이란이라는 하나의 기둥 정책과 다름없었다.

중요 목표에 도달하자 팔레비는 소련과 미국이 다시 골프 만에 군대를 주둔시킬 핑계를 찾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그때부터 소련 뿐 아니라 미국을 라이벌로, 그리고 잠재적 경쟁상대로 간주한다.

커져가는 갈등

1970년대 중반 미국의 책임자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이란 군주의 야심이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고 털어놓곤 했다. 하지만 이란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굳건한 우방으로 남아있는 한 팔레비의 지나친 야심은 소련이라는 더 심각한 위협에 가려져 버렸다.

1978년 이란혁명이 터지자 미국에 대한 이란의 호의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많은 미국인들에게 이란혁명은 왕에 반대하는 것이면서 미국에 반대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임스 카터 대통령이 팔레비에게 미국 내 망명지를 제공하고 병원 입원을 허가하자 이란 좌파학생들은 1979년 11월 4일 미 대사관을 공격했다. 그들은 52명의 미 외교관을 인질로 잡고 카터 대통령에게 팔레비의 이란 송환 및 재판을 요구했다.

이 학생들에게는 그저 며칠간의 사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 일로 440일 간의 위기가 시작됐다. 일은 복잡해졌고, 1980년에 진행된 인질구출작전은 완전실패로 끝났다. 작전에 동원된 8대의 헬리콥터 중에서 3대가 고장 나며 작전은 취소됐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철수하던 수송기 한 대와 헬리콥터 한 대가 충돌하면서 미군 8명이 이란 사막에서 사망했다.

미국인들은 매일저녁 인질이 된 외교관들의 앞날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인질위기는 재빨리 국가적 트라우마가 됐고,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이 상황을 바탕으로 카터에 손쉽게 승리했다. 근동의 개발도상국가가 미국에게 그와 같은 수모를 안겨준 것은 드문 일이었다. 쌍방의 적개심은 더 불타올랐다. 팔레비 통치 말년에 이미 예고됐던 지정학적 갈등에 격심한 감정적 차원이 덧입혀진 것이다.

혁명 이후 이란은 공개적으로 미국과 대립했지만 그렇다고 소련과 손을 잡지도 않았다. 호메이니 정권은 이란을 지역 리더로 만들려했던 팔레비의 야심을 나눠가졌다. 그런데 이란은 무슬림의 대중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이 목표에 도달하고자 했다. 미국 또는 이스라엘과의 동맹에 반대함으로써 이란은 미국과 대립하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레이건 정부는 이란 혁명가들을 응징하고 굴복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1980년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했을 때 미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눈물 흘리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이란지도자들은 이라크 대통령이 미국의 지령을 받고 이란을 공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거기까지는 아니어도 러시아와 프랑스의 무기로 무장한 후세인을 미국이 지원했던 것은 사실이다. 지원은 해가 갈수록 강화됐다. 1980년에 미국이 이라크에 극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최근 폭로된 CIA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많은 이란인들이 미국이 이라크의 군사공격을 지원하면서 저지른 잘못이 1953년의 쿠데타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이라크 사망자가 30만 명인 것에 비해 이란 사망자는 100만 명에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란게이트는 이런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모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미국과 이란의 갈등은 급격히 불안정의 요인이 되었다(박스기사 참조). 레바논에서 골프 만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전체가 미국과 이란의 경쟁관계가 드러나는 체스판이 됐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또 다른 길로 접어들 수 있는 순간도 있었다. 이라크-이란 전쟁이 끝난 후인 1988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사망한 다음 해에 이란은 혁명 초기에 품었던 지역 리더가 되려는 목표에서 더욱 멀어진 채 약화되고 고립되어 있었다. 8년간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란은 더 이상 동맹국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해외 투자도 잔인할 정도로 부족했다.

집요한 원한

당시 대통령이던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했다. 양국 공동경제구역을 창설해 정치적 화해를 도모하려 했다. 그리하여 1994년 이란 혁명 이후 최초로 외국회사인 미국의 코노코(Conoco, 콘티넨탈 오일)와 이란 석유개발에 관한 계약이 체결됐다. 이 계약이 상징하는 바는 실로 컸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한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이스라엘이 이란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미국에 압력을 가했지만 이제 180도 방향을 바꿔 미국이 이란을 제재하고 고립시키도록 압력을 행했던 것이다. 코노코와의 계약이 이 방향전환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미 의회의 강압에 굴복한 빌 클린턴 대통령은 두 번의 행정명령(1995년 3월 15일과 1995년 5월 6일)을 통해 코노코와의 계약 이행을 금지했을 뿐 아니라, 이란이 테러를 지원하고 있다면서 이란과의 모든 무역을 금지했다.

라프산자니 정부는 아연실색했다. 미국이 손을 내밀었다가 거둬들인 것이다. 양국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그 다음해 미 의회는 이란 에너지 분야에 투자하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을 겨냥한 새로운 대 이란제재를 의결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말년에 양국관계가 일시적으로 호전되기는 했지만 쌍방의 경계심과 불신은 커져만 갔다.

나중에 조지 부시 정부는 이란이 경멸하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혐오감을 품고 이란과 정치적·군사적, 특히 첩보 분야에서 대폭 합의를 보았다. 9·11 테러 몇 달 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제임스 도빈스 대통령 특사는 탈레반 몰락 이후 새로운 헌법 채택을 보장하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많은 점에서 이란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그리고 이러한 도움이 미국-이란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데 기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과 이란이 협력해 2001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본 협정 체결에 이르렀을 때, 협정 체결 6주 후 부시대통령은 테러 지원과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이유로 이라크와 북한에 이어 이란을 ‘악의 축’ 리스트에 포함시켰다. 이란 입장에서는 미국의 배신과도 같았고, 이것은 미국을 향한 화해의 제스처에 동조하는 세력을 현격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인들을 신뢰하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은 큰 대가를 치렀다.

그렇지만 개혁적인 성향의 모하마드 카타미 이란 대통령(1997∼2005년)이 물러나기 전에 이란은 부시 정부에게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2003년, 부시대통령의 ‘악의 축’ 연설 1년 후, 이란은 이란 주재 스위스대사를 통해 전반적 협상 계획안을 제시했다. 이란 핵 프로그램을 투명하게 진행하고 이라크와 협력하며,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무장해제하고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대신에 대 이란제재를 해제하고 이 지역에서의 이란의 군사적 이해관계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부시정부는 이란과의 긴장 해소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란은 미국의 최종 목표가 이란정부를 전복하고 실질적 권력이 없는 고객국가로 만드는 것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됐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런 호의의 제스처는 신뢰를 실추시키고 더욱 대립하게 했다. 해결책은 더 어려워졌다.

자국이 다음 타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게 된 이란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지위를 최대한 힘들게 만들려고 했다. 미국이 이 수렁에서 허덕이는 한 이란을 겨냥할 여력이 없으리란 것이 이란 측의 추론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백 명의 미군을 사망케 한 폭발물에 대한 책임을 이란에게 전가했다. 이 폭탄은 이라크 저항세력과 탈레반이 효율적으로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미국 측의 분노와 악감정은 컸다. 특히 고위공직자들은 자기 동료들의 죽음이 이란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미 대사관 인질 위기로 야기됐던 원한은 오래된 것이지만 이러한 분노는 오래된 것이 아니다. 어쨌든 상처는 미국 군인들의 마음속에서 치유되지 않았던 것이다.

고통으로 점철된 복잡한 배경을 바탕으로 미국과 이란은 이제 공동의 미래를 건설해나가야 한다. 양측의 불신이 깊기는 하지만 이란의 불신이 더 클 것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미국과 이란 중에서 이란이 더 취약하다. 둘째, 양국 결정권자들이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서로간의 망설임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시기들을 모두 겪은 한 사람이 남는다. 바로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카메네이다. 미국과 이란의 어떤 지도자도 그 정도로 막중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어떤 지도자보다도 더 미국인들을 향해 불신을 느끼고 있다.

유익한 휴전을 향하여

이 불신의 장벽이 무너지고 핵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이 지역에서의 반향은 미국-이란의 적개심의 영향이 부정적이었던 만큼 긍정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역사가 험난했던 만큼 양국이 하루아침에 파트너나 동맹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리 샴하니 이란 국가 최고안보위원회 의장이 밝힌 대로 미국과 이란은 “양국이 에너지를 서로 허비하지 않게”(4)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이란이 훨씬 일찍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은 오늘날과 같은 처참한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같은 휴전이 이 지역에서의 모든 갈등의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심은 계속해서 불안정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분쟁을 고조시키는 반면 건설적이고 진정된 관계는 분쟁 완화에 기여할 것이다. 미국과 이란이 “양국이 에너지를 서로 허비”하기를 멈춘다면, 시리아 내전 또한 완화시킬 수 있으리란 생각도 가능하다. 수니파 지하드와 이슬람국가(IS), 다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주동자들이 이 지역의 안정 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의 이란과 미국의 이해관계에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는데, 공동협력의 절대적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이란과 미국은 가깝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상호불신을 극복하고 단순한 휴전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런 전망은 미국-이란이 이란 핵 문제라는 난관에 대해 수용할만한 해결책을 찾아낼 때에야 깊이 생각될 수 있다. 최선이든 최악이든, 그렇게 되어야 양국 관계의 다음 장이 열릴 것이다.

 

글‧트리타 파시Trita Parsi.

<주사위의 역할 : 오바마의 대(對) 이란 외교>(예일대 출판부, 뉴헤븐, 2012년)에서.

 

번역‧김계영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 <르몽드 세계사3>(2013),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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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영라디오방송과의 대담, 2014년 12월 29일.

(2) 카자르 왕조는 1786년부터 1925년까지 통치했다.

(3) 마크 가시오로프스키, ‘CIA가 이란에서 음모를 꾸몄을 때’,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00년 10월호.

(4) <파이낸셜 타임스>, 2014년 12월 22일.

 

<보충기사> 

이란게이트 스캔들

1984년, 미 의회는 “니카라과에서 진행되고 있는 군사작전에 대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 지원”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볼랜드 수정안을 채택했다. 국가안전보장회(NSC)의 책임자들—특히 윌리엄 케이시 CIA국장과 로버트 맥팔런 위원—은 이 수정안을 1979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소모사정권을 타도한 민족해방전선) 정권에 대항하던 반혁명세력인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기 위한 결정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의 ‘제2차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고, 미-소 양국은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니카라과 등지에서 간접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방법 중 하나가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니카라과 반혁명세력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호메이니 혁명에도 불구하고 이란을 미국의 잠재적 동맹으로 간주하는 미 행정부 내 일부의 전략과 맞아떨어졌다. 중앙아메리카 독재정권과 연결된 이스라엘은 이미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이란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1980년 이라크의 이란 침공으로 1988년까지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의 책임자로 이라크를 지목하고 주적으로 간주했다.

1985년 이스라엘을 통해 두 번에 걸쳐 미국의 무기가 이란에 넘겨졌다. 그 다음해 미국은 이스라엘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이란에 무기를 넘겼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속의 올리버 노스 중령은 1986년 5월 말에 로널르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성경을 가지고 이란 수도를 방문하며 무기를 인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런 사실을 부인하고 ‘잊어버리기’도 하면서 이 일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이란게이트 스캔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란게이트란 이름은 1974년 리처드 닉슨대통령을 사임하게 만든 워터게이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86년 10월 초, 콘트라에게 넘겨줄 군수품을 가득 실은 미국 비행기 한 대가 니카라과 상공에서 추락했다. 비행사 중 한 명이 살아남아 자신의 임무를 폭로했다. 11월 3일 레바논의 친 시리아계 주간지인 <알 시라>가 이 사건을 폭로했다. 그 결과 1986년 11월 25일, 레이건 대통령은 TV로 중계된 기자회견에서 - “이 사안과 관계된 기업의 활동이 어떤 것이었는지 완전히 보고받지 못했다”고 확언한 후, 이란 측에 - 이 사건에 연루된 정부관계자들을 면직시킨다고 발표해야만 했다.

타워 위원회는 이란게이트를 전모를 밝힐 임무를 맡았다. 수개월에 걸친 청문회와 보고서에서도 대단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실로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닉슨 대통령은 대단치 않은 불법침입으로 대통령직을 내놓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이 엄청난 청부계약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그리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198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글·알랭 그레쉬Alain Gresh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도미니크 비달Dominique Vidal
역사가이자 기자. 베르트랑 바디와 함께 <세계의 상황>(L'Etat du monde·라데쿠베르트 출판사·파리)을 출간했다.

번역· 김계영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보충기사> 

결정적 핵협상

2013년 11월 24일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에 독일이 더해진 이른바 주요 6개국(P5+1)과 이란은 제네바에서 1년 내에 이란 핵문제와 관련해 장기적인 합의를 도출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2014년 11월이라는 잠정합의한 시한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협상국들은 새로운 시한에 합의했다. 2015년 3월 말까지 대략적인 내용에 합의하고, 2015년 6월 30일까지 모든 기술적 문제를 포함하는 최종 문안을 체결한다는 것이다. 토론은 ‘대 이란 제재와 핵을 맞바꾸는’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이란은 핵개발을 평화적으로 진행한다는 조건으로 대 이란제재를 완전히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에 서명한 이란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란은 민간용도 이외에 군사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비난받아왔다. 협상은 우선 순전히 민간용도로 사용될 농도로 우라늄을 농축할 원심분리기를 몇 대 남겨둘 건가에 모아지고 있다. 이미 농축된 우라늄은 러시아로 보내기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핵 연료봉으로 변환된 우라늄은 러시아가 건설한 부셰르 원전에서 사용될 것이다. 이란은 20%로 고농축한 우라늄 저장량을 줄이는 제안을 수용했다. 서방측은 이제부터는 이란이 5%의 저농축 우라늄만 생산해내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란은 나탄즈와 포르도 두 곳에 우라늄 농축시설을 건설했다. 나탄즈가 가장 큰 시설이고 콤(Qom) 가까이에 위치한 포르도는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하에 건설했다. 서방측은 포르도 농축시설 폐쇄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란은 이 시설을 의료센터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란은 또한 아라크에 중수로를 건설했지만 연간 플루토늄 생산량 제한은 받아들일 것이다.

핵시설 감찰체제 강화는 또 다른 쟁점이다. 서방측은 특히 이란에게 국제원자력기구(AIEA) 추가의정서 비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란은 2003년 이 추가의정서에 서명했지만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서방측은 이란 핵시설에 대한 예외적 감찰 기한을 20년으로 정하려 하고 이란은 5년의 기한만을 인정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란은 2006년에 처음 채택된 국제연합 결의안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모든 경제제재의 조속한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국제연합 결의안과는 별개로 각기 다른 경제제재를 가해왔다. 미국에서는, 일부 제재는 대통령이, 다른 제재는 의회가 해제할 수 있는데, 미 의회는 이란과의 화해에 완전히 적대적인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다. 1년 전에 체결된 잠정협약의 일환으로 서방측은 2014년 1월 20일 일부 제재를 완화한 바 있다.

 

글· 알랭 그레쉬 Alain Gresh

 

<보충기사> 

외세의 개입으로 점철된 이란의 역사

1856년 - 영국, 페르시아에게 아프가니스탄 승인과 헤라트주(州) 양도 요구.

1871년 - 나시르앗딘 샤, 일련의 개혁 착수.

1906년 - 입헌 혁명. 의회(Majlis) 창설, 최초의 헌법 채택, 왕정 폐지.

1907년 - 러시아와 영국, 페르시아를 세 영향권으로 분할. 북부는 러시아, 남동부는 영국, ‘중립지대’는 정치·무역 경쟁세력에 개방.

1909년 - 이란의 석유탐사개발 및 판매를 담당할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 창설

1914∼1918년 - 영국, 1934년에 이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페르시아 일부 점령.

1941년 8월 25일 - 영국군, 이란 남부와 서부 침공. 러시아는 이란 북부 점령. 레자 샤가 아들 모하마드 레자에게 양위.

1953년 8월 19일 - CIA와 영국첩보기관이 선동한 군사쿠데타로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를 국유화한 모하마드 모사데그 정권 전복.

1964년 11월 - 이란 내 미국인에 대한 면책권을 부여하는 법안 통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체포, 추방.

1979년 4월 1일 - 이란이슬람공화국 선포

1980∼1988년 - 사담 후세인 이란-이라크 전쟁 개시

1995년 - 빌 클린턴 대통령, 미국의 코노코 사의 이란 석유 개발을 위해 1994년 체결된 계약 이행 금지와 이란과의 모든 무역 거래 금지 명령.

2006년 9월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737호 가결. 이란에 모든 핵탄도 설비 및 기술 판매를 금지하고 “확산으로 간주될 수 있는 모든 핵 활동 중단”을 위해 60일의 기한을 줌. 이 결의안 이후 대 이란 제재를 강화하는 일련의 결의안이 이어짐.

2013년 11월 24일 - 이란과 주요 6개국 사이에 이란 핵 프로그램에 관해 잠정 합의.

2014년 11월 24일 - 잠정 합의 연장. 2015년 7월 1일 최종 합의문 도출을 목표로 2015년 3월 31일까지 중요 정치 쟁점에 대한 합의를 위한 협상 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