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신화, 타타 그룹

2015-04-01     조츠나 삭세나

프랑스 로렌주의 아양주 지역에서 강철 궤도를 생산하는 인도 기업 타타는 또 다른 인도계 기업인 미탈과는 달리 ‘관대한’ 이미지로 통한다. 미탈은 최근 갑작스럽게 제철소 두 곳을 폐쇄했고 그 여파로 철강 부문의 자회사를 매각한 바 있다. 본국인 인도에서 역시 타타는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가족경영, 민족주의,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조합시킨 케이스로 꼽힌다.

 

“철강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인도 최대의 철강 기업 타타가 내건 이 슬로건은 현재 인도 최고의 재벌그룹인 타타의 독특한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인 신뢰, 믿음, 사회적 책임은 타타 그룹의 창업자인 잠세트지 타타가 내걸었던 원칙들과 일맥상통한다.

인도 내에서 타타 가문의 신화를 모르는 이는 없다. 타타 가문이 세운 타타 그룹은 현재 농산물 가공에서부터 철강, 화학, 에너지, 자동차, 화장품, 그리고 IT에 이르기까지 우리생활 속 거의 모든 분야에 진출해 있다. 인도 국민들은 타타라고 하면 국가 건설을 떠올릴 정도이다. 타타는 19세기 말부터 인도 경제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하며 성장해왔다.

타타의 역사는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잠세트지 타타는 중국과의 아편 무역을 주로 하던 아버지의 무역 회사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는 방직업에 뛰어들었다.(1) 그리고 형인 도랍과 사촌인 라탄 다다바이와 함께 기업을 설립했는데, 바로 오늘날 타타 그룹의 지주 회사인 타타 선즈(Tata Sons)이다. 이후 잠세트지는 마하트마 간디를 주축으로 1884년에 창립된 인도 국민회의당과 가까이 하면서 단숨에 인도 독립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정치적인 자유는 경제적인 역량에서 비롯된다는 믿음 아래, 잠세트지는 철강, 에너지, 과학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국가 발전을 이끌었다. 인도의 네루 총리는 인도의 발전과 현대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잠세트지에게 타타 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1인 경제기획원”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잠세트지의 프로젝트는 그가 사망한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타타가 철강, 에너지, 시멘트, 오일, 보험, 화학, 항공, 자동차 부문에 진출해 처음으로 자회사들을 설립한 것은 영국 식민지 때였다. 1911년에는 그 유명한 인도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인도과학연구소가 위치한 방갈로르 지역은 첨단정보과학과 IT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인도 현대화의 상징이 됐다. 1944년에 봄베이에 설립된 타타 기초연구소는 원자력에너지 연구로 명성이 높다. 과학과 산업 분야의 대가들, 예를 들어 193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던 C.V. 라만과 인도 원자 폭탄의 아버지 호미 바바 교수도 이 연구소 출신이다.

1947년 인도의 독립 이후 타타 그룹은 새로운 정권이 추진하는 자립적 개발정책, 즉 계획 경제, 중공업 육성, ‘수입품 대체’를 위한 국가 산업 부흥, 내수 시장 보호에 기반한 정부 정책을 발판으로 삼아 성장세를 이어 나갔다. 경제와 정치의 결합을 주장한 네루 총리는 타타 그룹의 몇몇 수장들에게 내각의 주요 직책을 맡겼고, 그 일환으로 존 마타이는 1948년 경제부장관이 됐다.

보호무역주의 역시 타타 그룹이 인도 경제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는 데 일조했다. 타타는 이후 에어컨, 차, IT, 시계, 보석, 안경 등의 부문까지 진출했다. 인도 최초의 화장품 브랜드인 라크메(Lakmé)를 출시하기도 했는데, 네루 총리가 화장품 수입을 금지하면서 여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정부 측이 타타 그룹에게 화장품 브랜드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타타는 1953년 에어 인디아 인터내셔널이 국영화되고 보험 부문에서 부진이 계속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타 그룹은 잠세트지의 조카인 라탄 다다보이 타타(이니셜 JRD로 알려짐)의 진두지휘 하에서 계열사 수가 1938년 14개에서 1991년 95개까지 증가했다. 타타 그룹의 또 다른 ‘신화’라 불리는 JRD가 1993년 11월 사망했을 때, 인도 국회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개원을 연기했다. 인도 국회가 정치인이 아닌 사업가의 사망 소식에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도 경제의 자유화와 시장 개방이 있기 직전인 1992년, 타타 그룹의 매출액은 인도 GDP의 2%에 달했다. 타타는 해외 투자, 특히 영국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차(茶) 제조사 테틀리(Tetley), 철강업체 코러스(Corus), 자동차 제조업체 재규어-랜드로버(Jaguar-Land Rover)를 잇따라 사들였다. 인도에서는 구조조정과 다각화를 동시에 진행했다. 휴대폰 시장에도 진출했고, 인도 내 1위 IT 서버(인터넷, 디지털 티비, 무선 통신)를 인수했으며, 인도에서 100% 제작되는 최초의 자동차 인디카(Indica)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자동차 나노(Nano)를 생산했다. 2013년에는 싱가포르 항공과 합작하여 항공사 비스타라(Vistara)를 설립했다.

 

노동자에 투자하는 타타 그룹

타타는 가족경영정책을 고수하면서 ‘특별한 그룹’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19세기 말에 이미 잠세트지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 퇴직기금과 산재기금을 만들고 숙소와 운동 시설을 제공했다. “우리는 다른 기업들보다 더 이타주의적이고, 더 관대하고, 더 박애주의적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주주들의 이익이 곧 우리 회사의 것이며, 우리 직원들의 건강과 안위가 우리 회사의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라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칙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2) ‘우리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원칙에 따라, 잠세트지의 후계자인 도랍이 1907년에 세운 철강 기업 티스코(Tata Iron and Steel Company ltd.)에는 8시간 근로, 의료비 무상 지원, 유급 휴가가 도입됐다.

1908년에는 잠셰드푸르 도시 하나를 통째로 건설하다시피 했다. 타타의 도시라는 뜻에서 타타나가르로도 불리는 이 도시는 타타 그룹의 철강 공장 근로자들을 위해 조성된 도시로, 이 도시가 위치한 자르칸드주(州)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였다. 이곳에 살던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났고, 이들의 거센 저항은 무참히 짓밟혔다. 타타 그룹은 수원과 철광산에 인접한 최상의 조건을 갖춘 부지를 정부로부터 거의 무료로 임차했으며, 이 계약은 도시를 개발한다는 조건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동 갱신됐다. 인력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현재 이곳 직원들은 숙소, 학교, 의료기관, 운동시설, 물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푸른 언덕들로 둘러싸인 잠셰드푸르는 가로수가 즐비한 도로, 아름답게 조성된 녹지, 호수, 강, 회사 고위직을 위한 고급 빌라, 그리고 타타 그룹이 운영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연구소, 문화 센터, 스포츠 센터를 갖춘 성공적인 계획도시의 모델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부분은 아마도 식수의 훌륭한 수질과 식수와 전기를 24시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인도에서 이보다 더 호사스러운 일이 있을까. 게다가 타타 스틸(Tata Steel), 티스코(Tisco), 타타 모터스(Tata Motors), 타타 파워(Tata Power) 등 대규모 공장들이 위치해 있음에도 대기질 또한 양호하다.

그러나 모든 주민들이 이와 같은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잠셰드푸르는 면적이 꽤 넓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일된 행정 관리처가 없다. 잠셰드푸르 면적의 약 1/4을 차지하는 ‘철강 도시,’ 즉 타타가 임차한 부지는 티스코 자회사의 경영진들에 의해 관리된다. 인프라와 설비 측면에서 이 부지와 잠셰드푸르 나머지 구역 간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타타에서 일하지 않는 잠셰드푸르 주민의 3/4 가량은 이러한 혜택과는 전혀 별개로 살아간다.

이 다국적 기업의 또 다른 특이점은 자선기금 시스템을 통해 타타 가족 구성원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타 그룹의 경영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주회사인 타타 선즈(Tata Sons) 주식의 66%를 타타 가족 구성원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선 기금 덕분에 타타 그룹은 엄청난 세제 혜택을 받고 있으며 소득세는 사실상 면제받고 있다. 타타 그룹은 벌어들이는 수익의 평균 10%를 NGO와 건강 및 교육기관들이 주관하는 각종 사회 및 환경활동, 문화행사, 연구소 등을 지원하는 데 쓴다. 타타 그룹의 후한 인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타타 그룹에 속해 있는 모든 회사들은 각자의 기금을 이용해 박애주의적인 활동을 벌인다. 이는 세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회사가 현지 환경에 적응하고 녹아드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타타 스틸의 인사부와 사회서비스부에서 22년 동안 일한 아쇼크 쿠마르 마투의 설명이다. 또한 타타 스틸은 잠셰드푸르에 NGO를 만들었는데, 자르칸드주와 오디샤 주(예전의 오리사주)의 600여 마을에서 각종 활동을 진행하면서 지역 개발에 힘쓰고 있다.

타타 신화에는 다른 에피소드들도 많다. 2002년 금융부문 자회사에서 공금횡령 사건이 발생하여 회사가 와해 직전까지 갔을 때, 라탄 타타는 전 재산을 날릴 위험에 처한 대다수의 개인을 위해 고객들이 투자한 금액 전액을 반환해 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서약했다. 이 서약을 지키기 위해 타타 그룹은 7억 유로의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덕분에 그룹 이미지에 독이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 오히려 득으로 작용했고, 타타 그룹의 인기는 더욱더 높아졌다.(3)

타타 그룹은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제품을 개발하는 데도 열심이다. 주요 발명품들을 나열해 보자면 우선 가정용 정수기가 있다. 가격은 단돈 1,000루피(약 14유로)로, 현재 인도의 수만여 가정들이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가격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2004년 쓰나미가 발생한 이후에는 어부들을 위한 기상경보 시스템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나노(Nano) 자동차일 것이다. 인도에서 가장 대중적인 동시에 위험한 교통수단인 스쿠터에 가족 4명이 힘겹게 몸을 싣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라탄 타타는, 2륜 구동차와 유사한 자동차 차체를 설계한 후 타타 모터스의 엔지니어들에게 이 자동차를 1,300유로에 맞추어 생산할 것을 지시했다.

타타 그룹의 가족경영 방식과 어용노조 시스템으로 인해 파업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각 회사는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이사회와 노조를 가지고 있다. 직원들(임원 불포함)의 노조 가입은 거의 의무에 가깝고, 그 덕분에 자문과 협의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근로조건과 임금에 관련된 사안들은 각 공장의 자문위원회에서 해결한다. 최근에 파업이 일어난 경우는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1988년 타타 모터스에서 임금 인상과 해고 노동자들의 복귀를 주장했던 시위(임금 인상 요구만 받아들여짐), 2003년 타이탄 인더스트리(Titan Industries : 손목시계, 안경 등을 생산함)에서 생산성과 임금을 연계시키려는 시도에 반발하여 일어난 시위가 있다.

그러나 관대한 가족에 의해 기업이 무리 없이 경영되던 시절은 이제 지난 것 같다.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은 기업 구조조정, 인건비 감축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때다. 회사 경영진들은 정규직 임금은 그대로 두고 임시직 채용을 늘리면서 ‘생산비용 절감’을 이루어 내야 하고, 또 그 와중에도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일례로, 인도 타타 스틸의 직원 수는 1994년 77,448명에서 2013년 36,199명으로 절반가량이나 줄었다. 퇴사와 퇴직도 권고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티스코(Tisco)의 한 직원에 의하면, 잠셰드푸르에서 있었던 첫 번째 구조조정 계획에 따라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월급을 1.2배 올려주는 대신 매년 12~15%에 이르는 물가인상률을 임금에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또한 과거에는 직원이 60세 이전에 사망할 경우 그 혜택은 남은 가족에게 돌아갔지만 최근 그 혜택을 축소하는 정책이 마련됐다. 게다가 1968년 JRD 타타가 도입했던 정년퇴직자 직계가족에 대한 의무채용 조항을 비롯하여 몇몇 특혜들은 아예 사라졌다. 이러한 계획들은 타타 노동조합(TWU) 지도자들과 협의된 내용이다. TWU는 타타 스틸 내 유일한 노조로, 노조 가입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상당량의 사회기금을 보유하고 있다.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TWU 본부의 책임자들은 이야기한다. TWU 본부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냉난방 시설이 완비된 멋진 2층 건물에 있었다.

노조원들과의 합의 하에 타타 스틸의 노조 지도부는 인도 철강 분야의 임금 조정을 담당하는 국립철강위원회에서 2008년 탈퇴했고 2010년에는 급여표 수정안을 내놓았다. 새로운 급여표에 의하면, 생계비 수당은 기본급에 포함되고 새로 고용되는 근로자, 관리자, 엔지니어들은 25% 삭감된 임금을 받게 된다. 생계비 수당은 높은 물가인상률(2014년 9.3%)에 따라 연동되지 않으며, 거주, 교통, 야근 등과 관련된 다른 수당들도 감소했다. 그리고 동일한 업무를 하더라도 입사일에 따라 다른 임금을 받게 된다. 노조지도부에게 왜 자발적으로 그러한 손해를 감수했는지를 묻자, 그 사안은 전 지도부가 진행했던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결정된 부분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받던 혜택의 ‘고작’ 20%를 줄였을 뿐이라는 것이 노조 측의 설명이다. 잠셰드푸르 티스코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그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일부 직원들이 이러한 결정에 반발한다 할지라도 또 다른 노조를 결성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입사와 동시에 이 노조에 가입한다. 그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그래서 모든 정규직들은 노조조합원이다.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공산당에 소속된 노조인 CITU(인도 노동조합 센터) 활동가들이 공장 출입구에서 유인물을 나누어줄 때도 있지만, 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발견되면 끝이다. 잘못하면 해고될 수도 있다. 경제자유화로 인해 기존에 우리가 누리던 특혜가 줄어든다 해도, 티스코는 수십년간 함께 해온 우리, 우리 가족, 우리 삶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어쨌거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다.

티스코는 점점 더 많은 인력을 외부 용역 업체를 통해 고용하고 있다. 이러한 임시직들은 노조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정규직이 누리는 혜택도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티스코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공장 출입구에서 만난 30세 남짓의 한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정년까지 일하고 퇴직했다며, 티스코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쨌거나 매월 말에 월급을 받을 수 있고, 공장 내 식당도 이용할 수 있고, 의료 보험 혜택도 누릴 수 있다. 공장에서의 인간관계도 다른 곳들에 비해 편한 편이다.” 대부분의 임시직들은 인도 정부가 정한 최저 임금이 얼마인지, 그리고 그 최저 임금이 정규직들에 비해 1/4~1/5이나 적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임시직 종사자들은 해고와 관련해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보면 임시직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 오늘날 잠셰드푸르 내의 임시직 종사자가 12,000명에 육박한다는 사실도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세계화시대의 타타 그룹

1968년 설립된 타타 컨설턴시 서비스의 경우 타타 그룹 직원의 60%가 이곳에서 일하고 있고, 그룹 내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정규직들조차 해고의 위험에서 안전하지 않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직원들은 고작 1개월의 예고 기간을 두고 해고될 수 있다.

 

타타 그룹을 겨냥한 가장 큰 비판은 풍부한 광물이 보존된 삼림지역 개발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지역들에는 토착 부족과 달리트 계급으로 구성된 극빈층이 살고 있다. 타타 그룹에 속한 또 다른 회사인 APPL(Amalgamated Plantations Private Limited)은 아삼주와 서벵갈주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근로자 권리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한 상태이다. 노동 인력의 대부분은 토착 부족과 달리트 계급 출신의 여성들이다. 세계은행 산하의 국제금융공사(IFC)가 주주로 있는 APPL은 노동법을 준수하지 않았고, 보호 장비를 제공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고발됐다. NGO의 제소로 이루어진 공식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4)

그러나 각종 활동 단체들과 대학 서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란과 사건은 인도 내 주요 언론매체들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Jaago Re!"(깨어나라!)라는 광고로 유명한 타타 티(Tata Tea)의 경우도 인도 국민들에게 플랜테이션 농장의 인권문제를 상기시키는 일 없이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어 있다.

타타 그룹에게 더 큰 위협은 바로 타타 그룹이 만모한 싱(2009∼2014) 전 정부의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스캔들의 주요 골자는 이동통신 사업권 분배 과정의 불공정성과 ‘라디아 테이프’의 공개로, 라디아 테이프는 로비스트 라디아가 정·재계 및 언론의 주요 인사들과 통화한 내용을 도청한 기록이다. 여기서 타타 모터스는 타밀 나두 지역의 버스 입찰 비리, 타타 스틸은 자르칸드주의 광산개발 사업권 비리와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다.(5) 조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기에 덧붙여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모리셔스 섬에 설립된 아펙스 인베스트먼트(Apex Investments)를 비롯하여 타타 그룹의 일부 회사들이 세금 당국과 소송 중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타 그룹은 아직까지는 대중들의 신용을 잃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2012년 12월 28일을 기점으로 타타 가문은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역사상 처음으로 타타 가문 출신이 아닌 사이러스 팔론지 미스트리가 타타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이 라탄 타타의 이복 형제인 노엘 타타와 결혼하면서 라탄 타타가 그에게 타타 그룹의 CEO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의 아버지는 현재 타타 선즈(Tata Sons)의 주식을 18%나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타타 가문과 완전히 인연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한편 사이러스 미스트리는 2014년 7월에 있었던 2025년 비전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타타 왕국을 “공고히 하고 확장”시키는 데 향후 3년 동안 35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1) Cf. 아말야 바그치, <JRD 타타, 1904-1993>, Economic and Political Weekly, 제28권 52호, 봄베이, 1993년 12월 25일
(2) 러시 M. 라라, <부의 창조>, Penguin Books India, New Delhi, 2004.
(3) 모겐 위첼, <브랜드의 진화>, Penguin Books India, 2010.
(4) 맥스 비락, <차 플랜테이션 농장이 앗아간 희망, 집>, The Hindu, New Delhi, 2014년 2월 17일.
(5) <2G scam>, 2014년 8월 13일, www.business-standard.com ; "Radia tapes", 2014년 8월 29일, www.firstpost.com.

 

 

글·조츠나 삭세나Jyotsna Saksena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통번역대학원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