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 독립운동에 나선 소수민족 파푸아인

2015-04-01     필립 파토 셀레리에

2014년 10월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된 조코 위도도는 개방적인 인물로 소개됐고, 서부 파푸아에서 체포된 프랑스인 기자 두 명을 석방하면서 이 이미지는 고양됐다. 한편 그들이 취재했던 파푸아인은 종신형을 선고 받을 예정이며 그의 변호사는 살해 위협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네시아가 자행한 학살을 규탄하기 위해 파푸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단일화 의지가 형성된 일은 고무적이다.

 

옥토비아누스 모트는 런던에 도착해서야 파푸아 대기업 중 하나를 이끄는 친구 존 와무 할룩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룩의 시신은 2014년 11월 13일 티미카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티미카는 서부 파푸아주(州)(1) 남부에 있는 ‘웨스턴 시티’로 미국광산업체인 프리포트 맥머란 코퍼 앤 골드사가 그라스버그 광산에 매장된 엄청난 금과 구리를 채굴하면서 순식간에 이름을 알린 곳이다.(2) 부검은 하지 않았지만 모트는 할룩이 독살 당했다고 확신했다. 배후에는 인도네시아 비밀중앙정보국(Badan Intelijen Negara, BIN)이 있었다. 이 기관의 일처리는 조용하면서도 효율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프랑스 비정부기구(NGO)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 땅을 밟은 모트를 찾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인상도 좋았지만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할룩의 독살로 인해 제 두 다리가 묶여버렸습니다.” 모트에게 할룩은 단순한 친구 이상이었다. 그는 외국으로 몸을 피한 파푸아의 주요 지도자들을 돕던 자금책이었다. “그 친구 덕분에 제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경찰과 군부가 파푸아주민에게 보인 권력 남용을 비난하고 50년이 넘도록 서부 파푸아주를 갉아먹는 대학살을 언론에 알리는 임무 말입니다.” 모트가 덧붙였다.

 인도네시아에 대항하는 파푸아 독립운동단체들

대학살이라고? “1969년 식민지가 된 서부 파푸아주에서 파푸아 사람들은 자기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 신세가 됐어요. 1971년에는 전체 인구의 96%였는데, 2030년에는 15% 미만이 될 것 같습니다.” 전직 <콤파스> 기자다운 설명이었다.

인도네시아 최대 인쇄매체 <콤파스>의 편집국장을 맡았던 그는 당시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단, 서부 파푸아주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였다. 유난히 피바람이 불었던 30년(1967∼1998)에 걸친 독재를 끝내고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나면서야 파푸아인들은 희망을 걸어보기 시작했다. 파푸아 민족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100여명의 대표로 구성된 유명한 ‘팀100’이 신임 대통령 유숩 하비비(1998∼1999)에게 독립을 청했다. 존경 받는 지식인인 모트는 가장 적극적인 주동자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아주 온건한 성향의, 구스 두르로 더 유명한 압두라만 와힛(1999∼2001)이 문을 열었던 민주주의시대는 짧게 끝났다.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2001∼2004) 여사가 뒤를 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모토를 이어 받아 “서부 파푸아주가 없다면 인도네시아는 완전하지 않다”며 강하게 나갔다. ‘파푸아의 봄’은 피로써 진압됐다. 2001년 11월 인도네시아 특수군 꼬빠수스(Kopassus)가 가차 없이 제거한 데이스 엘루이 파푸아 최고의회의장처럼, 파푸아 지도자들은 살해되거나 독살됐다. 모트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미국으로 망명했다.

모트는 2011년부터 미국 여권을 이용해 파푸아로 돌아가 (자야푸라 외곽의) 아베푸라에서 넬레스 테베이 신부가 주최한 아베푸라 평화회담에 참석할 수도 있었다. 테베이 신부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파푸아 독립운동가 사이의 비폭력적 관계를 구축하고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단체인 ‘파푸아의 평화를 위한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협상할 능력이 있는 조직을 수립하고 싶었다.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파푸아 대표 800명이 모여 협상대표 5명을 선출했다. 모트, 리오니 탕가마, 베니 웬다, 렉스 루마키엑, 존 오토 온다웨이미 등 대표 5명 모두 해외로 망명한 상태였다. 이들은 몇 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수많은 파푸아 엘리트들이 살해당했고 형편없는 교육제도로 새로운 인재가 나올 가능성이 거의 차단된 상황에서 이는 보기 드문 자질이다.

협상대표자들은 인도네시아 정부와 대화를 하기 어려워지자 새로운 지원군을 찾아야 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에 있는 멜라네시아 사람들을 대표하는 멜라네시아인선두그룹(Melanesian Spearhead Group, MSG)으로 눈을 돌렸다. 바누아투,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제도, 피지, 뉴칼레도니아 독립운동가의 정치단체인 ‘카낙사회주의민족해방전선(FLNKS)’이 MSG소속으로 오세아니아의 멜라네시아 인구 대부분이 MSG에 가입해 있는 셈이다. 파푸아 지도자들이 생각할 때 MSG에게 인정을 받으면 국제연합(UN)이나 MSG 회원국 중 일부가 속한 영국연방 같은 기구에 의견을 전할 수 있는 길을 보장받는 셈이다.

‘자유서부파푸아캠페인’(3)을 이끄는 웬다는 “우리의 명분이 지역에서 인정받지 못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MSG에 가입하려면 파푸아인들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려운 일이다. 이곳 파푸아 민족은 수많은 정치조직으로 나뉜 민족 집단 253개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네시아가 은밀하게 진행하는 막후공작도 무시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파푸아 민족연합을 지지하는 지도자는 살해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지원한다”고 모트는 개탄했다. 바누아투 포트빌라에서 MSG와 파푸아의 상황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조직하는데 앞장서던 온다웨이미가 2014년 9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회담은 결국 연기됐다.

파푸아 독립지원에 나선 바누아투

인도네시아는 바누아투가 계속해서 멜라네시아인 집회와 파푸아의 독립을 지원한다면 보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4) 1981년 UN에 가입한 작은 섬나라인 바누아투는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다. 바누아투의 이런 태도는 멜라네시아가 자유롭지 않다면 바누아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선언한 월터 리니 초대 총리(1942∼1999)가 세운 정치노선과 맥을 같이 한다. 인도네시아 인구가 2억5천만 명인데 반해 바누아투는 25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혈맹의 동지이다.

파푸아뉴기니의 수도인 포트모르즈비에서 파푸아 지도자 70명이 발이 묶였다. “인도네시아가 압력을 가했다.”고 한 외교관이 털어놨다. “인도네시아는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압력을 가하며 때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공조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군사경제적인 측면에서 인도네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신임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길 기대하기에는 힘들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조코위라고 불리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대선활동 당시 두 파푸아주를 주요 대선공약의 하나로 내세웠었다.(5)

그러나 파푸아 유권자에게 2014년 7월 대선 참여 보이콧을 요청했던 웬다는 “조코위는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임 대통령이 창당한 투쟁민주당(PDI-P) 소속이다. 수십 년간 자리를 지키던 기존 엘리트 집단이 당을 이끌고 있다. 유숩 칼라 좀 보라”고 했다. 유숩 칼라 신임 부통령도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칼라가 2009년 빤짜실라 청소년단체(쁘무다 빤짜실라)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2015)에 담았다.(6) 쁘무다 빤짜실라는 1965년 반공산당 학살에 깊이 개입된 준군사조직이다.

웬다는 “파푸아 여성인 요하나 S. 얌비스가 여성 자립과 아동 보호를 책임지는 신임 장관이 됐지만 어떻게 바라겠냐”고 비꼬았다. 주요 직책은 정치노선이 확실한 인물이 차지했다. 메가와티 전 대통령의 측근인 리야미자드 리야쿠두 국방장관은 급진적 민족주의자로 엘루이 최고의회장을 살해한 꼬빠수스(인도네시아 특수군) 군인들을 영웅으로 대접했었다. 신임 내무부장관은 서부 파푸아주의 행정구역을 늘려 파푸아 주민을 분열시키고 인도네시아 관료주의를 강화하려고 한다. 이미 논의된 행정구역 수만 10여 개나 된다. 낙후지역발전및이주부 장관은 이주프로그램(7)을 촉진해 파푸아인들을 가혹하고 회복이 불가능하게 소외시키려고 계획 중이다. 리오니 탕가마는 “불에 기름을 붓고 싶지 않았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조코위는 군대의 앞잡이다. 아닌 게 아니라 파푸아에 주둔하는 군인을 증강했다”고 덧붙였다. 이미 파푸아인 99명당 경찰 1명이 상주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본국은 인구 296명당 경찰 1명꼴이다. 위도도 대통령은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인권을 침해하는 사람들이 모두 경찰 아니면 군인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탕가마는 덧붙였다. 가장 최근에는 부패로 악명 높은 부디 구나완 장군이 경찰총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위도도 대통령이 취재 비자를 받지 않고 파푸아를 취재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프랑스 기자 토마 당도와 발렌틴 부랏을 석방하기는 했지만 이를 개방의 신호로 봐도 될까? 아니면 최소한의 노력으로 국제적 환심을 살 기회로 삼은 걸까? 후자가 조금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반면 두 기자를 만난 이후로 반역죄로 고소당해 종신형을 선고 받을 가능성이 높은 아레키 와님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법정에서 와님보 체포와 구류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는 아눔 시레가르 변호사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두 기자는 석방의 조건으로 침묵을 약속했고 2014년 10월 마침내 두 기자가 석방된 이래로 서부 파푸아주 이야기는 언론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2014년 12월 6일 포트빌라 회담이 열려 역사적인 협의를 이끌어 냈다. 주요 파푸아독립운동단체 세 곳(8)이 처음으로 새로운 하나의 조직인 ‘서부 파푸아 독립을 위한 단일 운동(ULMWP)’을 만들어 단결하기로 했다. 이 새 조직을 통해 파푸아인들은 솔로몬제도에서 개최될 예정인 올해 MSG정상회담에 가입희망서를 제출할 수 있게 됐다. “인도네시아가 방해할 수 있는 역량을 고려해서 신중해야 한다”고 웬다 ULMWP 대변인과 모트 ULMWP 사무총장 모두 말을 아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12년부터 MSG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해 파푸아인이 아닌 다른 멜라네시아인들을 대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MSG회담에 참석한다는 점은 인도네시아의 지역 영향력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UN에서 서부 파푸아에 대한 관심을 접고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인들의 자결과 독립에 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운운하는 2013년 5월 7일 결의안을 마련하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를 독립지원국가 목록에 올린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인이 파푸아인보다 훨씬 위험한 걸까? UN에서 프랑스가 인도네시아보다 영향력이 없지 않다면 말이다. 아니면 미국이 UN에서 자국의 광산업 분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서부 파푸아주에서 벌이는 채금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다국적기업인 프리포트 맥머란은 막강한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의 설립회원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1973∼1977)을 고용하기도 했다. 삼각위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이 가입된 비정부조직으로 급진적 정치인이자 정치학자이며 현재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 부사무총장인 유숩 아닌디도 회원이다.

모트는 “UN이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파푸아인의 동의 없이 파푸아인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 일어나는 건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9년에 우리는 총구 앞에서 파푸아가 인도네시아로 통합되는 안에 찬성한다고 투표해야만 했다. UN은 이를 받아줬다. 그때부터 우리는 많은 연구자들이 점진적 학살(9)이라고 부르는 일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그 증거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족한 것은 돈밖에 없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에 살지만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기에는 턱없이 가난하다.”

2014년 12월 8일 또 다시 학살이 일어나 이 지역을 피로 물들였다. 군사용 자동차가 파푸아 어린이를 칠 뻔한 사건이 있은 후 집회가 열렸고, 경찰과 군은 이 집회를 강경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 다섯 명이 사망했다. 위도도 대통령은 이 사건의 전말을 투명하게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답보 상태였던 진상 조사는 다시 뒷전으로 밀렸다. 프리포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인도네시아 경찰 두 명이 살해됐는데,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파푸아인 백여 명이 바로 체포돼 구타당했고 집 십여 채가 불탔다. “저게 그 투명하게 밝히겠다던 불”이냐고 한 파푸아인이 중얼거렸다.

 

글·필립 파토 셀레리에 Philippe Pataud Célérier.

 

번역·서희정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있다.

 

 

(1) 뉴기니 섬은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인도네시아 영토인 파푸아주와 서부 파푸아주로 이루어진 서부 뉴기니인 이리안자야가 서쪽에 있고, 동쪽에는 독립국가인 파푸아뉴기니가 있다.
(2) ‘서부 파푸아 주의 파업, 억압, 배후조작’, 2012년 3월 1일, 아시아 플래닛, htttp://blog.mondediplo.net.
(3) www.freewestpapua.org.
(4) ‘Indonesia warns Vanuatu’, 2014년 12월 2일, www.dailypost.vu.
(5) ‘Jokowi to open access to Papua for foreign journalists’, <The Jakarta Post>, 2014년 6월 5일.
(6) 유투브 웹사이트에서 조회할 수 있다.
(7) ‘이리안자야의 빼앗긴 파푸아인들’ 참고, 1996년 10월.
(8) 자유를 위한 서부 파푸아 민족연합, 서부 파푸아 민족위원회, 서부 파푸아 연방공화국.
(9) ‘A slow-motion genocide : Indonesian rule in West Papua’, <Griffith Journal of Law and Human Dignity>, vol. 1, n° 2, 2013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