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전쟁 사이에 선 우크라이나

2015-04-01     이고르 들라노에

우크라이나는 드발체보에서의 패배로 인해 반군에게서 돈바스를 무력으로 재탈환하려는 희망을 잃었다. 이렇게 하며 서방 몇몇 국가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미숙함과 나약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1년여에 걸친 영토 재탈환 노력이 실패한 끝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민스크에서 새로운 협상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와의 대화와 다양한 소수파와의 협상이 남아 있어 평화적 해결책이 지속 가능할지는 불투명하다.

2차 민스크 조약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전투가 1월에 공세로 돌아선 이후 체결된 2차 민스크 조약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가까스로 얻어낸 정치적 노력의 결실로 보인다. 새로운 평화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는 독일과 프랑스의 확실한 공조가 필요했다. 2월 초에 워싱턴이 발표한 내용(1), 곧 우크라이나에 최첨단 무기를 인도할 수도 있다는 내용에 고무되어 파리와 베를린은 러시아 군대의 침략 위험성을 저지할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됐다.

이른바 ‘노르망디 회담’(2)에 참여한 각국 대표자들에게 16시간에 걸친 협상이 필요했고, 그 결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안젤라 메르켈 독일 총리, 페트로 포로센코 우크라이나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벨라루스의 수도에서 2월 12일 타협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이 협상에선 부가 조항 하나를 포함 총 13개 쟁점을 다루었다. 2차 민스크 조약은 그 골자에 있어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자칭 독립공화국의 책임자들이 2014년 9월 5일에 서명한 1차 민스크 조약과 유사하다.(3) 이 문서는 한편으로는 서명한 날 이후 정전을 실시하고, 그 실시 방식을 규정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국가의 행정서비스를 복원하고 지방 분권화를 내용으로 담은 헌법개정을 통해 우크라이나 영토의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크림반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원인들

유럽은 너무 오래 동안 무시해온 러시아와의 대화를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겪고 있는 어려움은 국경을 접하는 이웃나라들(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 라루스, 조지아, 몰다비아) 간의 도전에 대한 협의가 없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러는 사이 우크라이나의 위기는 심화되기만 했다. 2009년 5월, 유럽연합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폴란드와 스웨덴의 발의로 러시아의 이웃나라들과 제휴관계를 설정했다. 이 협력관계는 2015년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었다.(4) 문제는 러시아가 이 나라들과 긴밀한 교역관계 및 규제 제도를 공유하고 있는데도 모스크바와 어떤 형태의 합의도 없었다는 점이다.(5) 이에 대한 반발로 크렘린은 유라시아 경제공동체를 추진했다. 그 공동체 내에서 우크라이나는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한다.(6) 러시아는 공통의 역사를 공유한 이웃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너무 가까이 다가서고 유럽연합이라는 틀에 용해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는 소위 ‘특별지대’의 설치를 요구했지만, 유럽과 미국은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유럽연합의 동쪽 이웃이며 러시아의 ‘친밀한 이방인’인 우크라이나는 정치지형학적으로 갈등관계의 핵심에 놓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이 결국 동‧서 영토의 대립으로 치달은 원인이 됐다.

결국 러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너무 집착한 나머지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게 됐다. 하지만 러시아의 ‘행진’이 계속되기는 어려워졌다. 2014년 3월 18일, 러시아가 크리미아를 병합하자, 이에 대한 응징으로 미국과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대한 1차 제재를 결의했고 러시아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모스크바로서는 2014년 2월 23일에 친러파였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의회의 결의에 의해 실각한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고, 그것으로 우크라이나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 버렸다고 간주했다. 23일 사태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이틀 전인 2월 21일, 우크라이나 문제를 놓고 러시아 대표자를 포함하여, 유럽의 중재 아래 친러파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야당 당수들이 합의서를 조인했었다. 이 합의서에는 의회제도로 복귀하고 조기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담겼으며, 프란츠-발터 스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과 라도슬라브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이 공동 서명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어찌된 일인지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했고, 2월 23일 우크라이나 의회인 라다의 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가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됐다.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이 의회의 쿠데타를 부추겼고, 2월 21일자의 합의도 실행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7월 17일 이후 결정적인 전환점에 접어든다. 말레이시아 민간 항공기가 돈바스 상공에서 격추된 것이다. 이 비극이 발생하자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또 다시 대두됐다. 이번에는 경제적 조치도 포함 됐다. 8월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가 패배가 확실해 보이던 전투에서 돈바스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해 구해낸다.

2차 민스크 조약은 유럽국가들이 대륙에서 커다란 분쟁을 겪고, 우크라이나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붕괴 직전으로 몰리는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조인된다. 협상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군과 대치한 드발체보에서 6,000∼8,000명의 자국 군인들이 포위당한 채 패배가 거의 확실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승산 없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협상서류에 서명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그 이후 우크라아나 정국이 안정되자, 국제통화기금(IMF)은 175억 달러의 원조를 새로 풀어주었다. 러시아에 대해 2차 민스크 조약은 돈바스에서의 휴전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얼마나 갈등이 심각한가를 세계에 인식시키고, 오직 러시아만이 반군들에게 합의를 강요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힘의 균형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나 조지아같은 ‘갈등잠복지역’에서처럼,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 대한 특별한 위상을 갖고서) 만약에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합류할 경우에 언제든지 입김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조약은 준수될 것인가?

조약의 첫 번째 목표는 물론 지극히 회의적이기 하지만,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다. 전투 중지의 효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중화기 부대가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크라이나 군대가 2015년 2월 10일의 전선으로, 반군은 9월 19일의 전선으로 쌍방 모두 후퇴해서 안전지대를 창설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하에서만 전투 중지는 지속될 것이다. 유럽안보협력기구가 파견단을 보내 화기부대의 철수와 정전협정 사항이 잘 준수되는지 감시임무를 수행하기로 되어 있다. 감시단의 인력은 약 250명에서 300명 수준에 달한다. 조약의 내용을 준수하려면 교전 당사자들이 원래 그들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2차 민스크 조약이 성공할 확률은 이미 제한적이다. 키예프는 분리주의자들의 손에서 영토에 대한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며, 반군은 반군대로 자신들이 독립을 선언할 당시 요구했던 도네스크와 루간스크 오블라스트(불가라이 행정 구역 명칭)에 달하는 충분한 영토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점이 바로 마리우폴 근처에서 격렬한 전투가 또 다시 일어날 위험성이 높은 이유이다. 조약은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조치가 미흡하고 감시 구조가 취약하다는 약점도 있다. 천 제곱킬로미터도 안 되는 땅을 지키기 위해 지난 9월부터 싸워왔던 군인들로서는 그 동안 흘린 피의 대가를 잊어버리기가 쉽지 않다.

정전이 지속될지는 휴전협정문에 어떤 비무장지대도 명시되지 않은 만큼 불확실하다. 중간 지대에 투입될 감시군의 전개에 관한 어떤 조치를 취할지 언급도 없다. 감시군의 구성에 관해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 유럽이 다시 줄다리기를 해야 할 판이다.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서 외국군대, 용병, ‘불법적인 집단’을 철수시키는 작업도 어려울 것이고 아무런 일정조차 없는 형편이다. 유럽안보협력기구의 감시원이 도네스크 반군과 러시아 민병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둘 다 러시아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데 말이다. 게다가 크로아티아, 폴란드, 발트족 민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사병집단들이 우크라이나 군대와 함께 작전을 벌이는데 이들은 키예프의 명령을 거의 따르지도 않는다. 이들은 이념적 취향에 따라 복종하거나 드니프로페트로브스크의 거물인 이고르 콜로모이스키(Igor Kolomoïsky) 같은 과두 정치가들의 돈을 받고 싸우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의회가 2차 민스크 조약을 비준해 줄 가능성도 많지 않다. 의원들은 3월 14일까지 특별 위상을 부여 받은 돈바스의 영토를 획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 2014년에 이런 결의안이 채택된 적은 있었으나 그 결의안이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었다. 지방분권화도 문제다. 분권화에 따르면 해당 지역에 일종의 언어, 경제, 안전에 관한 일종의 자결권을 부여하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자기들만의 고유한 경찰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 안건에 관한 대화는 당사자들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정부 내 주전론자들 사이에서 그 어려움이 뻔히 예상된다. 가장 호전적인 인물로는 총리인 아르세니 야체뉵과 내무부장관인 아르센 아카보브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아직도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완벽한 승리를 원하고 있다. 2차 민스크 조약이 서명되고부터 키예프의 수많은 인물들이 이 조약을 비난하는 대열에 가세했다. 특히 극우당인 우익당의 당수 드미트리 라로크(Dmitri Iaroch)는 조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외무부장관인 파벨 크림킨(Pavel Klimkin)은 우크라이나는 헌법개정을 추진해야 할 의무도 돈바스에 자치권을 양보할 의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포로센코는 2차 민스크 조약 채택 시부터 우크라이나 연맹은 오늘의 작업은 아니라고 뉘앙스 가득한 발언을 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다시 우크라이나를 통일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담화다. 반군은 반군대로 독립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몇 가지 희망

2차 민스크 조약문서가 1차 민스크 조약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지만 조약 시 나온 공동성명은(8) 그나마 몇 가지 긍정적인 점을 함축하고 있다. 러시아, 유럽연합, 우크라이나는 소위 ‘겨울 선물’이 마감되는(9) 2015년 4월 1일부터 다시 개정해야 할 가스관련 협상에서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경제를 살리려는 의지가 그나마 서로 가까워지는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유럽은 유럽연합과 우크라이나 사이의 자유무역협정 조인 시 러시아가 느낄 불안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2차 민스크 조약의 추가 조항에 있어서 돈바스 일부 지역의 언어 자결권과 영토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러시아와 협력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수줍게나마 정치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정전은 가장 급진적인 우크라이나 군대가 도발을 중지하고, 모스크바가 해당 지역에서 자신들이 우세하다고 믿고 이를 증명하려는 분리주의자들을 억제한다면 지속될 것이다. 그 다음에 공은 키예프로 넘어갈 것이다. 유럽연합은 라다(의회)가 포로센코 대통령이 어려운 과정을 잘 진행시켜 나가도록 돕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 이 진행 과정은 정부 내 일부 반대파의 항의와 곧 다가올 선거 캠페인에 직면해 있어 언제든지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록 배후로 약간 물러서있긴 하지만 워싱턴 역시 우크라이나 의회, 특히 야체뉵 총리를 통해 우크라이나 의회를 압박할 수단을 가지고 있어 조약이 실행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강대국들은 2월 17일 유엔안보리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한 결의안 2202조에 고무되어있다. 이 결의안은 민스크 조약을 적용하도록 노력할 것을 주문하면서 ‘우크라이나 영토의 통일성과 주권을 완전히 존중’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주고 있다. 크리미아의 병합을 은밀하게 인정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1) 특히 대전차 미사일 재블린을 인도하겠다는 것이었다.
(2)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 말미인 2014년 6월 16일 열린 외교적 만남 때 한 약속을 준거로 했다.
(3) 이 조약은 2014년 9월 19일 같은 당사자들이 서명한 양해각서의 의해 보완된다.
(4) 우크라이나와 유럽연합의 자유교역지대의 실시는 2015년 12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5) 줄리앙 베르쾨일(Julien Vercueil), ‘우크라이나 사태의 경제적 뿌리들(Aux racines économiques du conflit ukrainie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7월. 참조.
(6) 쟝 라드반이 (Jean Radvanyi), ‘모스크바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위에 나서다 (Moscou entre jeux d’influence et démonstration de force)’,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4년 5월. 참조.
(7) 로람 제슬렝(Laurent Geslin) & 세바스치앙 고베르(Sébastien Gobert), ‘돈바스에서의 철야 전투(Veillée d’armes au Donbass)‘,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4년 12월. 참조.
(8) 구체적 내용은 벨라루스의 프랑스 대사관 사이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www.ambafrance-by.org
(9) 2014년 10월 말 조인된 단기 계약으로 2014년 11월 1일부터 2015년 3월 31일까지의 기간에 해당되는 조약. 지불은 다음 달부터 선불로 이루어지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밀린 빛 30억 달러 가량을 지불한다.

 

글‧이고르 들라노에 Igor Delanoë

번역‧이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