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이귀이스탄'으로의 여행

2015-04-01     다비드 가르시아

서방국가들을 비롯한 러시아나 중국은 자유가 전혀 없고 왜곡된 개인숭배로 점철된 투르크메니스탄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하 천연가스가 풍부한 중앙아시아의 중립국인 이 국가는 프랑스 건설부문의 대기업 ‘부이그’처럼 묻지마투자에 능한 해외 기업들이 좋아하는 고객이다.

2006년 12월 21일, 투르크메니스탄의 국영 TV들은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대통령의 사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정부의 한 고위 책임자는 프랑스 뉴스통신사 AFP에 “우리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고 전했다. 프랑스 건설업체 부이그 또한 망연자실했다. 1994년, 중앙아시아의 이 가스공화국에 진출한 부이그가 단골고객을 잃었는데 왜 아니겠는가. 니야조프는 자신을 “투르크멘의 아버지,” 즉 투르크멘바시라 부르며 돈을 물 쓰듯 했다. 과대망상에 빠진 이 독재자는 철권통치로 국민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수도에 끝임 없이 호화로운 건물들을 건축했다. 거대한 대통령궁, 사치스러운 정부청사, 골드바 모양을 한 중앙은행, 자신의 프로필로 도배한 프레스 센터…. 그의 열성적인 공사 파트너인 부이그는 수도 아시가바트를 명품 보석함처럼 고층빌딩으로 뒤덮었다. 현 대통령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또한 니야조프의 이름으로 혹은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금세 부이그에 일감을 몰아줬다. 부이그는 지난 20년 동안 25억 유로(1유로=1300원)를 받고 64개의 건물을 지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부이그 자회사는 단독으로 같은 기간 동안 부이그 건설의 해외수주 규모의 절반을 차지했다.(1)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자 말자, 투르메니스탄 지사인 ‘아시가바트 부이그’의 2인자 샤를리 상태르는 가족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프랑스에 귀국한 자신의 상관인 지사장에게 “간밤에 대통령이 사망했는데, 그는 임종 직전에 자신의 장례식을 우리가 맡아서 치러달라고 당부했다. 장례식에 쓸 유리와 나무로 된 이중 관 뚜껑을 갖춘 관을 구해야 한다”고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부이그 지사장(1999∼2009년)은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통화내역은 부이그의 전 전문경영인(2)이 집필한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 부이그에서 보낸 자신의 행보를 뒤돌아보기 위해 쓴 파격적인 이 회고록의 저자인 알도 카르보나로는 다국적 기업(부이그 건설)과 소수의 반정부 인사들에게 무자비하게 구는 정부(투르크메니스탄) 간에 이뤄진 끈끈한 공모관계를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작고한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의 측근 중 최측근인 카르보나로가 “대통령 관” 수송 작전을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자는 회고록에서 독특함과 “크기”를 만족시킬 만한 관이 파리에 있었다고 했다. 관은 파리-아시가바트 정기 항공편인 보잉737의 수화물 칸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카르보나로는 부이그 그룹의 항공사인 부이그 에어의 사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장은 관을 싣기 위해 부이그사의 여객기인 챌린저 동체를 해체하는 걸 허용해야만 했다.

카르보나로는 막내린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에 젖은 채 슬픈 목소리로, “투르크메니스탄 국기로 덮은 니야조프의 유해를 실은 운구차는 길가에 모인 국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수도 아시가바트를 가로 질러 그곳에서 15km 떨어진 킵차크로 이어지는 대로로 달렸다. 킵차크에 있는 모스크에서 종교 의식을 치른 후, 니야조프의 시신은 그의 가족들 곁에 영원히 잠들었다”고 언급하며, 니야조프는 자신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말한다.

2014년 7월, 전 대통령이 사망 한지 8년 후 우리가 찾아 간 그의 고향 킵차크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투르크멘바시는 부이그가 특별히 디자인한 황금색 나뭇잎이 상감된 유리 모자이크 돔을 갖춘 원통 모양의 가족무덤에 안장됐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여름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군인이 무덤 중앙에 위치한 초소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입구를 지키고 있다. 녹색 올리브 색 유니폼을 입은 세 번째 군인은 자유롭게 주변을 돌아다니며 방문객을 엄밀히 감시한다. 그는 사진기를 든 방문객을 보면 손으로 X를 그으며 사진 촬영을 강력 저지한다. 대부분의 공공건물들처럼 이곳도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투르크멘바시 기념관은 텅 비었다. 젊고 부지런한 우리의 수행원은 투르크멘바시의 전성기를 조심스럽게 선전한다. 기념관 아래쪽의 검은 대리석으로 된 니야조프 가문의 다섯 개 무덤이 바닥과 벽을 장식한 환한 흰색 대리석과 대조를 이룬다. 니야조프의 무덤은 냉기가 돌았다. 아마 1948년 아시가바트를 강타한 지진 때 사망한 어머니와 두 형제의 가묘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니야조프는 이 가족들의 시신 뿐 아니라 세계2차대전 때 전사한 소련 전투병이었던 아버지의 시신도 영영 찾지 못했다.

국민의식 마비시킨 독재자와 부이그 간의 공모

니야조프의 가족무덤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건립한 모스크의 외관도 대리석으로 뒤덮였다. 부이그는 이 모스크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웅장하다고 자랑한다. 니야조프의 3종 세트는 대리석, 금, 물이다. 모스크 건설을 총 지휘했던 카르보나로는 “거대한 분수대와 길을 따라 뻗은 채 보글보글 물이 솟는 화려한 벽에 이르기까지 모스크의 외관은 대단하다”며 자화자찬한다. 국토의 80%가 사막이라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는 국가이지만 그런 사실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투르크메니스탄은 단지 물만 부족한 게 아니다. 20년 동안의 세뇌교육을 비롯한 억압과 개인숭배를 강요한 끝에 국민의 의식은 마비되어 이들의 뇌에서 모든 비판정신은 없어져 버렸다. 일반 국민과 특히 젊은 층을 교화하는 도구는 투르크멘바시에 헌정한 ‘영혼의 책’, 즉 루흐나마(Ruhnama)이다. 이 책은 마오쩌둥의 어록을 담은 붉은 소책자와 등가가치를 지녔다. 1993년 출간된 루흐나마는 왜곡과 반계몽적인 어리석은 행위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고, 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격언과 찬양이 뒤섞여 있다. 일례로, 이 책자를 읽는 투르크메니스탄인들은 자신들이 “차륜과 문자를 발명했다”고 알고 있다. 이슬람문화 국가인 이 나라 국민들은 또 “수염이 뇌에서 자라기 때문에 수염이 길면 길수록 뇌가 작고, 뇌가 작으면 작을수록 멍청하다”(3)하다고 배운다.

부이그는 별 양심의 가책도 없이 킵차크 모스크의 첨탑과 내부의 벽을 루흐나마의 인용구로 채웠다. 프랑스 기업은 심지어 금융지원을 통해 루흐나마 제2권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하는 열성도 보였다. 독재자 니야조프는 2006년 열린 연회 때 이 같은 부이그의 제스처를 높이 평가해 카르보나로와 그의 보좌관 샤를리 상테르에게 개인적인 감사를 표했다. 니야조프의 이 같은 호의적인 행동에, 부이그 이외에 다른 기업들도 니야조프의 변덕을 잠재우기 위해 주머니를 털었다. 독일에선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자금을 대 루흐나마를 독일어로 번역 출간했다. 헝가리, 아일랜드, 이태리 등의 다국적 기업들도 핀란드 출신 기자 아르토 할로넨이 다큐멘터리 영화 <거룩한 책의 그림자(L’Ombre du livre saint> (2008)에서 지적한 것처럼 루흐나마를 자국의 언어로 번역 출간하는 데 자금을 지원했다. 파리국제인권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대상작으로 선정하며 “세계 최대 건설회사인 부이그와 정기적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독재국가 간 밀월관계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생각이 듣고 싶었다”(4)는 말로 선정 이유를 밝혔다.

킵차크에 어둠이 내린다.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모스크엔 남자 한 명만이 덩그러니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연꽃자세로 미랍(mihrab)(5)을 쳐다보며 기도한다. 몇 분 뒤, 뮈에젱(muezzin, 기도 시간을 소리쳐 알리는 승려)이 91m 짜리 4개의 첨탑 중 한곳 꼭대기에 올라가 기도시간을 알린다. 기도시간에 지각한 두 신도가 중앙통로를 따라 분수대의 물주기 사이를 뚫고 달려온다. 요컨대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대략 1억 2천 900만 유로를 들여 건립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성소가 사람들을 끌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인구 80만 명이 거주하는 아시가바트가 모스크 바로 인근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스크는 극히 드문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연중 내내 텅 비어있다. 1㎡당 인구밀도가 고작 10명에 불과정도로 낮은 인구밀도나 500만 명에 불과한 전 국민의 수는 풍부한 천연자원의 양과 비교할 때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지난 5년 동안, 투르크메니스탄은 주로 세계 제4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가스 수출로 대략 10%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수의 세력이 가스를 독점하며, 투르크메니스탄은 전 소비에트 공화국 국가들 중 러시아 다음으로 빈부격차가 큰 나라이다. 투르크메니스탄 경제활동인구의 40%가 실업자이긴 해도, 이들은 가스, 전기, 석유, 물, 소금 등은 거의 무상으로 쓰고 있다.

부이그와 니야조프의 밀월관계는 정확히 1993년 5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를 개인방문 한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은 베르사유 근처 생-캉탕-앙-이브린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30헥타르의 녹지대에 궁처럼 건립한 ‘첼린저,’ 즉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부이그 본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부이그는 고작 2년 전에야 비로소 소련의 신탁통치에서 해방된 미지의 먼 변방국가의 대통령인 니야조프를 그 옛날 베르사유 궁에서 각국의 대신들을 영접하듯 맞았다. 부이그의 한 고위층 인사는 “우리는 그와 함께 연못과 조각상들 사이를 산책했다”며 웃었다. 1993년 7월 사망한 이 기업의 창업자이자 현 회장 마르탱 부이그(6)의 아버지인 프랑시스 부이그의 자서전은 부이그의 환상의 창인 첼린저는 “아무런 장벽 없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려는 제왕의 독재적 성향을 잘 보여줬다”고 강조한다. 니야조프는 황당할 정도로 투르크메니스탄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고 싶어 하며 허영에 빠졌다. 연구원인 장-바티스트 장젠 빌메르는 “대통령이 공식적인 지적도 아닌 지나치듯 내 뱉은 말 한마디가 법처럼 적용되었다. 일례로 2004년 2월, 그가 머리와 수염을 기른 남성들을 비난하자, 모든 이들이 머리와 수염을 잘랐다”(7)고 했다.

독재자에 온갖 아첨 부려 사업권 얻어

초기성과(니야조프의 부이그 본부 방문으로 얻은 성과)에 신이 난 부이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부이그는 자신의 경쟁사들 중 그 누구도 갖지 못한 패, 즉 유럽 최대의 TV 채널인 TF1도 소유하고 있었다. 부이그는 투르크멘바시를 데리고 TF1을 방문했다. 이 채널에 반한 투르크멘바시는 투르크메니스탄 제1국영 TV의 개혁을 부이그에게 맡겼다. 당시 이 공사를 맡았던 부이그의 책임자는 “투르크메니스탄 제1국영 TV의 화질은 형편없었다. 케이블 선들이 여기저기 사방으로 늘어져 있어 방송국 상태도 엉망이었다. 이 채널의 경영을 맡은 TF1의 기술자들은 제1국영 TV측에 많은 프랑스 문화와 여가 프로그램, 그리고 몇 편의 프랑스 영화를 양도해줬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기술에 대해선 장황하게 말하면서도 투르크메니스탄 제1국영 TV에서 방영한 프로그램의 특성에 대해선 언급을 자제했다. 지난 2014년 7월 25일 금요일, 투르크메니스탄 국영방송은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이 장관들에게 지시를 하고, 장관들은 마치 고분고분한 초등학생들처럼 그의 말을 조용히 받아 적는 방송을 방영했다. 국가가 통제하는 5개 채널이 이와 같은 방송을 끝임 없이 내보내고 있지만, 투르크메니스탄인들은 이들 채널보다는 500여개의 위성방송을 선호하고 있다.

사람들은 굳이 “말만 번지르르 한 문화”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TF1은 1996년 9월 10일, 당시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의 초대로 프랑스를 방문 한 니야조프를 상대로 깜짝 특별방송을 제작하며 문화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그는 3년 전에도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의 초대로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부이그의 전략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객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챌린저에서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과 아시가바트의 국회의사당 건설 계약을 체결한 이후, 그를 포르트드파리에 위치한 블론뉴-비앙쿠르로 안내했다. 부이그 회장 마르탱 부이그와 TF1 사장 파트릭 레이가 니야조프를 대동하고 TF1 방송국으로 간 것이다. 니야조프와 레이는 스타 방송진행자 장클로드 나르시의 진행으로 45분간 쌍방 인터뷰를 가졌다. TF1 사장은 인터뷰 내내 문화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는 “투르크메니스탄처럼 인구밀도가 낮은 국가에선 텔레비전으로 문화를 발전시키는 게 힘들다. 투르크메니스탄보다 인구가 10~12배나 더 많은 프랑스에서조차 텔레비전으로 프랑스 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거드름을 피웠다. 한편 니야조프는 “당신네는 문화의 최대 매개체인 세계 최대 텔레비전 채널을 가졌다”는 진심어린 칭찬을 했다. 방송사 대기실에 있던 부이그의 간부들은 쾌재를 불렀다. 부이그의 전 간부는 “우리는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이 프랑스 TV 출연을 기뻐할 줄 알았다. 물론 이 방송을 방영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 그는 이를 믿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TF1은 자사 홍보에만 열을 올릴게 아니라, TV 시청자들에게 부이그가 아시가바트에 건설한 건물들이나 보여주는 게 나을 법 했다. 투르크메니스탄 남단 끝자락에 위치한 수도 아시가바트는 카라쿰 사막과 사막을 마주한 코페트다그(Kopet Dag)산, 즉 이란 국경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안에 있다. 프랑스 기업은 거대한 복합 대통령궁을 시작으로 수도를 최고 권력자를 위한 전용 도시로 완전히 디자인했다. (대통령궁은) 전형적인 아시가바트풍이다. 거대한 3개의 금색 돔과 웅장한 흰색 주랑(柱廊)이 이슬람주의의 오리엔탈리즘을 가미한 고전적인 유럽의 건축양식을 연상시킨다. 경찰과 군인들이 대통령궁 양쪽에 있는 벙커에서 궁을 지키고 있어 사람들의 건물 접근을 막고 있다. 대통령궁 바로 맞은편에 있는 법무부와 국방부의 호화청사도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문화행사나 포럼을 개최할 때 쓰는 화려한 루에트궁은 관광객의 접근은 허락하지만, 궁경비들이 지근거리에서 방문객을 감시한다. 분수대와 공공벤치도 여지없이 경비들이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조금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빌타랍거리가 있는데, 이곳도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제외하곤 눈에 띄는 사람들이 없어 황량하긴 매한가지이다. 폭 넓은 인도를 갖춘 아시가바트의 주요 간선도로들은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한산하다. 소수의 시민들만이—1991년 투르크메니스탄 독립 이후 줄곧 대통령 개인숭배의 장으로 전락한—이 황무지(아시가바트)를 돌아다닌다. 2006년 정권이 바뀐 이후 전임자와 같은 유형의 후계자, 베르디무하메도프 현 대통령의 거대한 초상화들이 고인이 된 니야조프 대통령 동상들 옆에 걸렸다.

용감한 한 행인이 “경찰 수가 시민 수보다 많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투르크메니스탄 수도를 자주 찾는 프랑스의 한 기업인도 “아시가바트는 실제모형으로 설계된 유령도시이다”라며 행인의 말에 동감한다. (아시가바트에서는) 굴삭기 건설업체가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시민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 따라서 2008년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이 대통령궁의 증축을 지시하자, 러시아 구역인 보이엔 나야클리니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당시 철거장면을 목격한 한 시민은 “정부당국은 건물을 철거하기 전 주민들에게 3일 간의 이주 기간을 주었다. 한 가족이 이주를 거부하자 경찰들은 이들의 이삿짐 박스를 내동댕이치고 주방용품을 깨부순 뒤, 아이들 엄마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고 증언했다. 동네 여성들의 적극적인 개입 이후, 이 엄마는 풀려나고 이 여성에게 수갑을 채웠던 경찰관들은 정직처분을 받았다. 철거작업이 끝난 이후, 부이그의 기중기들이 이 지역에 부지기수로 등장했다.

부이그는 아시가바트 남부 아카빌 대로에 새로운 국회의사당 건물을 지었다. 순환도로를 따라 까마득히 펼쳐진 수많은 공사 현장에 투입된 인부들을 제외하곤 이곳을 지나는 인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부이그의 한 책임자는 미국 외교관들에게 “정부통신부 신(新)청사엔 사무실 공간만 1만 5천㎡에 달하지만 근무할 직원 수는 고작 170명밖에 되지 않는다”(8)고 했다. 예컨대 공무원 1인당 평균 88㎡의 공간을 차지하는 셈이다. 2010년부터 2014년 8월까지 투르크메니스탄 주재 프랑스 대사를 지낸 바 있는 피에르 르보빅은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재체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보며 이를 객관화하려 했다. 그는 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이 부동산 열기에 국가예산을 탕진하는 것은 전임 대통령의 정책을 연장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르보빅은 또 부이그가 건립한 건물들이 대통령 선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역사가 고작 23년밖에 되지 않은 국가의 신임 대통령이 수도에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 하는데 그게 부당하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프랑스의 왕들과 프랑스 공화국의 최근 대통령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한번 봐라”며 반문한다.

독재자의 언론인 탄압에 무관심한 부이그

까다로운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프로젝트와 공사장을 감독하며 자신의 파트너인 프랑스 기업이 공사를 지연하는 것을 두고 공개적으로, 심지어 TV카메라 앞에서도 호되게 나무랐다. 투르크메니스탄 주재 전 프랑스 대사(2006년~2010년)겸 프랑수와 올랑드 대통령의 전 아시아 고문(2012년~2014년 7월)이었던 크리스티앙 르쉐르비는 “니야조프는 부이그와 직접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투르크메니스탄 부이그 지사와 마르탱 부이그와 의논하면 세세한 것까지 모든 것은 직접 챙겼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부이그의 회장 마르탱 부이그는 독립기념일인 10월 27일엔 꼭 투르크메니스탄에 간다. 그가 적어도 1년에 한번은 투르크메니스탄에 가는 셈이다. 그는 이를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을 공고히 하고 대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는 계기가 삼았다. 카르보나로는 “니야조프 때, 마르탱 부이그는 국가 원수급 영접과 의전을 제공 받았다”고 했다. 2001년 10월 27일은 마르탱 부이그 파워의 절정기를 보여준 상징적인 날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날 그는 연회장에 초대된 아시가바트 주재 각국 대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란 듯이 3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연회장의 주인공은 각국의 대사나 미국 대사가 아닌 단연 마르탱 부이그였다. 부이그 회장의 공조 자들인 부이그의 ‘착한 병사’들은 굴욕적인 명령도 주저 없이 따랐다. 이날 카르보나로는 니야조프가 자신에게 1리터짜리 보드카를 병째 단숨에 들이마시라고하자, 그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모든 장관들이 키득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를 실행했다.

만약 부이그가 독재자와 공조한 대가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투르크메니스탄 프레스센터 때문일 것이다. 독재정부청사와 대통령궁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레스센터는 니야조프 프로필로 도배되어 있고, 펼쳐 놓은 책 모양을 한 외관은 루흐나마를 연상시킨다. 이 건물 안에 표현의 자유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언론사 사무실들이 들어서 있다. 여성 언론인 오굴사파르 모라도바가 고문으로 감옥에서 사망한지 몇 주후에 프레스센터 개관식이 있었지만, 마르탱 부이그는 그 일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부이그 회장은 투르크멘바시와 함께 통상적인 개관식을 준비한데 반해 현지 프랑스 대사는 항의 표시로 개관식을 보이콧했다.

 니야조프는 프레스센터 개관식이 있은 지 2주 후에 사망했다. 하지만 부이그의 사업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이 호화로운 건물 건설은 프랑스에, 토지개발은 터기에, 의료장비 사업은 독일에, 발전소 건설은 미국에게 분배해 수주를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아침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의 매제, 무하메도프 이칸굴리예프가 카르보나로를 호출했다. 대통령궁의 최고 관리자인 그는 투르크메니스탄 부이그 지사장인 카르보나로에게 대통령 몫으로 요트를 한척 구입하라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고 털어놓았다. 이들 둘은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칸으로 가, 그곳에서 어렵사리 아주 귀한 요트를 구입했다. 대통령은 카르보나로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만약 이칸굴리예프가 당신에게 내 부탁이라며 당신 소관의 일이 아닌 일을 시켜도 걱정 말고 처리하길 바란다. 돈을 내가 지불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아마 원가를 100배 이상 부풀릴지도 모른다. 베르디무하메도프는 복합 대통령궁 확장 공사를 통해 돈을 챙기는 것과 별도로, 2억 7천만 유로를 들여 호화로운 오주켄트 호텔건설을 주문했다. 이 두 사업은 부이그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수주한 최대의 공사이자 가장 수지맞는 장사이다. 이 두 건물의 4분의 3이 거의 항상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사치스러운 이 두 건물을 직접 관리하고 있어 투르크메니스탄에서의 소득의 격차(공무원과 일반인 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빌메르는 “부가 재분배되지 못하고 소수의 친정부 인사들의 손아귀에 있다”(9)고 지적한다. 뉴욕에 본사를 둔 비정부기구(NGO)인 유라시아 민주주의 이니셔티브(Eurasia Democracy Initiative)의 소장 피터 잘마예프는 니야조프 시대 때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는 본질적으로 독립 이전에 비해 전혀 변한 게 없다. 변한 게 있다면 그건 단지 베르디무하메도프가 니야조프보다 좀 더 젊다는 것뿐이다. 그 이외에는 사소한 몇 가지만 빼면 베르디무하메도프는 투르크멘바시와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평한다. 2010년 2월, 그의 전임자처럼 베르디무하메도프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의 초대를 받았다. 그는 니야조프보다 더 친밀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뇌이쉬르센에 있는 마르탱 부이그의 자택에 초대되어 사망한 프랑스 석유회사 토탈 회장 크리스토프드 마르주리와 알스톰 사장 파트릭 크론 등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킵차크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엔 대초원 있으나, 배회하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부이그가 투르크메니스탄에 최초로 건설한 모스크가 있는 조크데프시 양쪽 길목엔 목화밭이 줄지어 펼쳐져 있다. 이 도시는 1882년 투르크메니스탄인들이 러시아 침공군을 상대로 영웅적인 최후의 항전을 치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 주민들은 현재 섬유산업으로 먹고 살고 있다. 시 중앙에 걸려 있는 베르디무하메도프의 초상화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모스크 주변은 물론이고, 뜨거운 태양아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모스크 안에도 아무도 없다. 모스크의 주인인 비둘기 떼가 주요 돔을 뒤덮었다. 하지만 우리 가이드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모스크가 “투르크메니스탄 스타일”이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그에게 아무도 찾지 않는 성소를 짓기 위해 다국적 기업에게 1천만 달러를 지불한 게 타당하냐고 물었지만, 그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시늉을 했다. 우리를 태운 러시아인 운전사도 우리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체제를 조금만 비판해도 체포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현지 간수가 너무 잔혹하기 때문에 용기 있자는 자들도 기백이 꺾인다. 아시가바트에서 북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악명 높은 오바단 데프 감옥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곳에 수감되어 있는 수십 명의 정치범들은 여름에는 50°C 그리고 겨울에는 영하 20°C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온도 속에서 독방에 격리 수용되어 있다. 이들은 몽둥이나 개를 동원한 고문을 당할 때만 독방에서 나온다.

결국 부이그가 제왕처럼 구는 국가에서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왜냐하면 부이그 말고도 또 다른 프랑스의 거대 건설업체인 빈치(Vinci)가 투르크메니스탄 건설 시장에 뛰어 들었기 때문이다. 세계 1위 건설업체인 부이그는 이제 이 야심찬 신참 기업과 경쟁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부이그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일까? 부이그의 전 고위간부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부이그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어쨌든 간에, 전 세계를 비치는 부이그의 창이 부이그가 아시가바트에 남긴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파리 부이그 본사 건물의 3분의 2를 리모델링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 향후 “부이귀이스탄 효과(effet Bouyguistan)”는 자신의 이름을 새로운 경제학이론에 붙이게 될 것이다.

 

(1) 프랑스 외무부 자료 참고.
(2) Aldo Carbonaro의 저서 <건설계의 알라신(Le Béton d’Allah)> 참고.
(3) Jean-Baptiste Jeangène Vilmer, <투르크메니스탄(Turkménistan)> 인용, CNRS Editions, 파리, 2010년.
(4) 전게서.
(5) 이슬람 사원의 벽에 메카 쪽을 향하여 나 있는 벽감(壁龕).
(6) Elisabeth Champagnac et Vincent Nouzille, Citizen Bouygues, <왕회장의 비밀스러운 역사(L’histoire secrète d’un grand patron)>, Belfond, 파리, 1988년.
(7) <투르크메니스탄(Turkménistan)> 인용.
(8) 2010년 12월 14일 일간 <르몽드>가 인용한 위키리크스 폭로 기사 참고.
(9) <투르크메니스탄(Turkménistan)> 인용.

 

<보충기사 1> 아첨 경쟁에 뛰어든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는 자신의 56번째 생일을 맞아 미국의 스타 가수 제니퍼 로페즈를 초대해 개인 콘서트를 개최했다. 그는 또 2013년 6월 카스피 해 연안에 위치한 해수욕장인 아바자에 첫 요트 클럽도 개장했다. 요트장 개막식에는 투르크메니스탄 건설시장의 3분의 2를 장악한 터키 건설 기업 폴리멕스(POLIMEKS)도 있었다. 유럽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기업은 투르크메니스탄이 추진하는 24억 유료 규모의 아시가바트 신공항 공사와 2017년 아시안게임을 개최할 종합경기장 건설 등, 두 거대 공사를 수주했다. 폴리멕스는 이 공사로 대략 50억 유로를 벌어들일 것이다. 부이그 회장 마르텡 부이그처럼 터키의 다국적 기업 회장 에롤 타반카도 자신의 사업파트너인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에게 비굴하게 군다. 투르크메니스탄 전문가인 한 기업인은 “폴리멕스 회장은 베르디무하메도프한테 마치 투르크메니스탄 장관처럼 아첨을 한다. 이는 출자자와 고객 간의 관계를 뛰어 넘는다. 그는 말 그대로 대통령의 시종이다”라고 말한다. 터키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투르크메니스탄 물품 공급국이다. 또 다른 터키 업체인 르네상스도 상당한 규모의 실적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내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의 전 외교 고문인 크리스티앙 르쉐르비는 “투르크메니스탄은 터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쨌거나 3천여 명의 터키 기업인들이 아시가바트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D. G.

 

<보충기사 2-투르크메니스탄 연대기>

소비에트연방 시대부터 현 독재체제까지

 1881년: 6세기부터 중앙아시아 사막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투르크 유목민들은 오랜 기간 동안 몽골 제국의 칸에게 지배를 받다가, 침공한 러시아 군을 상대로 조크데프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친 뒤 러시아제국에 편입됨. 이후 투르크멘 영토는 러시아 지방인 투르케스탄에 통합됨.

1924년: 투르크멘은 현 국경을 유지한 채 투르크메니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창설하고, 투르크족들을 투르크메니스탄에 강제로 정착시킴.

1991년 10월 27일: 투르크메니스탄의 독립 선언. 소련 공산당의 전 제1서기장이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의 반대세력이었던 니야조프의 철권통치 시작.

1992년: 니야조프가 99.5%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됨. 전 공산당은 민주당으로 개명하고 유일 여당이 됨.

1993년 5월: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의 초대로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니야조프는 생-캉탱-앙-이블린에 위치한 부이그 본사를 방문해 투르크메니스탄에 모스크 건설을 부탁함.

1994년 4월 27일: 미테랑 대통령 아시가바트 국빈 방문. 마르탱 부이그와 니야조프 간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궁 건설 계약 체결.

1996년 9월 10일: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의 초대로 프랑스를 공식 방문한 니야조프가 TV채널 TF1에 출연했지만 이 방송은 전혀 방영되지 않음.

1999년: 니야조프 종신 대통령에 취임.

2002년 11월 25일: 쿠데타 시도 감지. 12월 25일, 니야조프가 쿠데타 주동자로 지목한 전 외무부 장관 보리스 쉬크무라도프가 체포되어 4일 후 종신형을 선고 받음.

2006년 12월 21일: 니야조프의 공식 서거일.

2007년: 부총리 겸 보건부 장관이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의 대통령 당선.

D. G.

 

글‧다비드 가르시아 David Garcia
기자이자 저서 <부이그가 왕 노릇하는 국가 (Le Pays où Bouygues est roi)>(Danger public, 파리, 2006년)의 저자.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독해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