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와의 마지막 인터뷰

“사회주의적 가치는 예수 십계명에도 있다.”

2015-04-02     이냐시오 라모네

“사회주의적 가치는 예수 십계명에도 있다.”

카라카스는 2월 중순 쿠데타를 좌절시켰다고 발표했다.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 미래를 위협하는 주요인은 볼리바리안(남아메리카의 과거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의 이념을 지칭하는 표현. 자세한 내용은 글의 끝부분에 있는 주석 참조-역주) 혁명의 내부 과정에 있다. 즉 부패를 말한다. 부패는 2013년 사망한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유고 차베스가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마지막 대담에서 주장한 혁명 윤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여기 두 사람의 대담 발췌문을 수록한다.

 

-혁명에 대한 당신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혁명이라는 건 매우 구체적인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수많은 혁명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실수는 그 시도들이 이론적인 양상에 틀어박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실용적인 차원에 몰두하지 못했습니다. 내 생각에 혁명은 분명히 이론도 필요하지만, 마찬가지로 실천도 요구합니다. 나는 조금 더 나아갔지요. 내 신념은 실천이야말로 하나의 혁명이 실제로 혁명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실천”이며, 적어도 우리가 1999년부터 이곳 베네수엘라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어떤 반대자들은 당신이 국민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여론에 혼동을 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불법적으로 (2007년 12월 2일 투표로) ‘국민들에 의해서 거부된’ 헌법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고 쉬지 않고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사회주의를 도입한다고 말했지만, 국민은 사회주의에 ‘노No’라고 답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2006년 선거운동 당시 나의 이념적 바탕은 ‘시몬 볼리바르 국가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주장을 가지고서 국민에게 ‘우리는 사회주의의 길을 택할 것’이라고 유권자들에게 명확하게 외치면서 베네수엘라 전국을 누볐습니다. 아마 수백만 번도 넘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63%의 득표로 2006년 12월 3일의 선거에서 이겼습니다.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나는 국가의 제 1차 사회주의 계획의 7대 기본전략을 분명하게 정의했습니다. <2006년, 후보자 유고 차베스의 통치 프로그램>이라는 팸플릿까지 발행했지요. 수백만 부가 뿌려졌습니다.”

-그 7대 전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시몬 볼리바르 국가 프로젝트와 사회주의 베네수엘라를 위한 7대 전략은 ⓵ 새로운 사회주의 윤리, ⓶ 지고의 사회적 행복, ⓷ 정치적 차원에서는 혁명이 주역이 되는 민주주의, ⓸ 사회주의적 생산 방식, ⓹ 새로운 국가 정치지정학, ⓺ 에너지 강국 베네수엘라, ⓻ 새로운 국제 정치지정학입니다. 2006년 나에게 표를 주면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 투표한 줄 모르고 투표했다’고는 그 누구도 말하지 못할 겁니다. 이 과정은 언제나 투명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투명하고 합법적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적법한 헌법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볼리바리안 헌법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결정은 한 적도 없고 결코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 윤리상의 기본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당신에게 사회주의란 무엇 입니까?

“로물로 가예고스(1948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냈으며, 소설가로도 유명하다)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1) ‘베네수엘라 평원이여, 희망처럼 펼쳐진 지평선이며 의지처럼 늘어선 길들이여.’ 나에게 사회주의란 베네수엘라 평원과 같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미래처럼, 사회주의는 지평선이며 길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만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건 바로 우리의 몫이라는 얘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역사는 여러 가지 사회주의가 있으며 베네수엘라 사회는 독특한 성격을 지녔다고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상황, 맥락 속에서 잉태된 교리를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시도 하려는 것은 두 가지를 배열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새로운 사회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활발한 변혁과정에 있는 베네수엘라 사회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혹은 서로가 서로를 바꿀 수 있도록 변증법적으로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지금 진행 중에 있는 이러한 이중의 변화가 바로 우리가 볼리바리안 혁명에서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해서 저는 당신이 볼리바리안 혁명, 사회주의, 그리고 국가의 독립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실제로 당신은 ‘국가’의 성격과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3가지 개념 사이의 관계를 설정해보도록 하지요. 개발의 도상에서 어느 시점에서는 국민이 분기점에 이르러서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현존하는 두 개의 길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이미 말했듯이 사회주의는 그 변형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 어떤 모델도 모방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리만의 사회주의를 개발하기를 원했지요, 나는 이론가가 아닙니다. 레닌도 아니고 마르크스도, 마리아태귀(1894∼1930,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도 아닙니다.(2) 그러나 나는 공부하고, 독서하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 라틴아메리카, 혹은 전 세계의 석학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몇 가지 개념을 개발했습니다. 예컨대 사회주의 이전의 위대한 사상가인 시몬 볼리바르가 있으며 <빛과 사회적 미덕>이라는 멋진 책을 써낸 시몬 로드리게스도 있습니다.(3)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와 투기를 맹렬히 비난했으며 라틴아메리카를 위한 사회주의 계획의 기본적인 생각들을 피력했습니다. 또 다른 사회주의자이자 브라질인인 천재 호세 이나시오 아브레이유 에리마(4)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예수 그리스도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자이고 혁명가이며 가장 위대한 사회주의자인 그리스도 말입니다.

-예수의 메시지가 사회주의적이란 말인가요?

“진정한 기독교는 도덕적 사회주의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입니다. 사회주의적 가치는 예수의 십계명에도 나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서로 서로 사랑하라.’ 사회주의의 지고의 가치는 사랑입니다. 자본주의는 야망, 이기주의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도 증오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기 때문에 증오가 영원히 존속하는 거지요.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의 상품이나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자본주의의 지령은 ‘할 수 있으면 도망쳐보라’입니다. 반면 사회주의의 지령은 ‘우리 모두 도망칩시다, 형제처럼 어깨동무를 하고서’입니다. 사랑 대 증오인 셈이죠. 사회주의의 윤리는 혁명적인 새로운 시민들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정신을 바꿔야 합니다. ‘정신을 변화시키는 일 없이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일도 없다’라고 트로츠키가 말했죠. 이렇게 해야만 체 게바라가 주장한 21세기의 인간—물론 여자를 포함한—21세기의 사회주의자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사실상, 우리가 정신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혁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나머지는 전부 부수적인 것인 셈이지요. 그런 이유로 나는 사회주의를 무엇보다 하나의 도덕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비단 경제적인 모델만은 아니죠. 만일 그렇다면 영혼은 없는 셈이니까요.”

-그렇다면 사회적인 층위에서는 어떤가요?

“예, 물론 ‘사회적 사회주의’도 있습니다. 아 동어반복이 있군요. 용서하세요. 이는 평등을 위한 투쟁에 근거한 사회주의로서 볼리바르가 추구한 순수한 사회주의의 찬란한 개념입니다.(5) 우리가 30년 전부터 착수한 모든 사명은 사회적 층위에서 우리의 사회적 프로젝트의 본질 자체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목표는 가난으로부터 국민을 구해내고 법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실행되는 평등을 낳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회적 방벽을 쌓고 약한 자를 보호하고 궁핍에서 구해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볼리바르식 사회주의는 도덕과 사회라는 두 개의 층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군요.

“아닙니다. 다른 층위도 있습니다. 도덕적, 사회적 측면 외에 다른 요소도 있습니다. 특히 정치적, 경제적 요소 말입니다. 경제적 사회주의란 경제의 전략적 분야를 국유화하는 것이며 공동으로 개발하고 노동자들을 모든 조직체와 기업의 관리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공립은행처럼 말입니다. 정치적 사회주의는 어디에 있을까요?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민주주의에는 있지 않습니다. 우리 헌법에 규정된 ‘참여와 (국민이) 주역이 되는 민주주의’에 있습니다.”

-다른 구성 요소도 있나요?

“예, 우리의 사회주의는 영토의 층위에도 존재합니다. ‘지리적 사회주의’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종에 따라서 영토에도 불공정과 불평등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영토에 대한 또 다른, 보다 활력적이고 보다 변혁적인 시각을 자극해야 합니다. 영토는 생명이 없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토적 사회주의도 생각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사회주의는, 내 생각으로는, 군사적 층위에도 존재합니다. 군사력은 전 국가적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데 있어 국민과 함께 참여하며 협동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손에 손을 맞잡고 국민과 함께 민․군 결합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국가의 독립이란—이 세 번째 개념에 접근하자면— 이 조건하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곳에 자본주의가 존재했다고 한다면 유일한 형태의 자본주의가 됐을 의존적 자본주의 하에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천한 상황에 처하도록 선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배당하는 나라, 의존적인 나라, 부패한 나라, 즉 식민지국민으로 살도록 말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그러면 부패는?

“우리는 계속 엄격하게 부패와 싸워 왔습니다. 저는 야레 감옥의 수감 시절에도 모든 면에 걸쳐서 시민의 도덕성을 회복함으로써 부패를 심판해 끝장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6) 이는 공공연히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미디어에 따르면 아직도 부패는 여전하다더군요.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부패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러나 내가 하려는 말을 잘 들어 보세요. 예전에 과두체제의 언론이 부패를 고발하려고 한 조그만 노력에 비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한 노력은 자랑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반대로 오늘날, 거의 완전히 소수 지배에 들어가 있는 언론은 조그만 사소한 부패라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만들어 내거나 조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만일 조금이라도 부패의 흔적을 찾으면 과거에는 당국이 어떻게든 감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그 반대이지요. 우리 정부는 부패를 밝혀내고 제제를 가하려고 노력합니다. 과거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 시절에는(7) 사람들이 거리에서—이는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의 여론조사에 의한 것입니다—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부패가 우리를 죽이는구나!’ 오늘날에는 여론조사에서 부패는 거의 집단적인 문젯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국제 투명성 기구는 그렇게 말하지 않던걸요?

“예, 그들이 우리가 가장 부패한 정부라고 고발했지요. 그리고 현재 더 부패가 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캠페인은 체계적이고 부분적이며 악의적인 것입니다. 완전히 객관성이 결여된 것입니다.”

-<엘 나시오날〉지에 따르면, 인터 아메리칸 언론학회에서 ‘베네수엘라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부패가 두 번째로 심한 나라’라는 말이 나왔다는군요.(8)

“놀랍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왜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라니…. 여기서는 텔레비전과 거의 과두정부격인 언론 전체가 그들이 ‘볼리부르주아’라고 명명한 새로운 부유층에 관해서 떠들어 댑니다. 그러나 나는 사실에 근거해서 주장합니다. 부패 문제가 국민의 주 관심사가 아닙니다. 반복하지만 여론조사를 해보면 부패 문제는 거의 등장하지도 않고 아주 낮은 비율을 차지할 뿐입니다. 게다가 야당도 부패 문제를 전 국가적인 문제로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패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면 야당이 당연 고발하는 게 논리적이고 추론이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금 당장에 확실한 통계 자료를 갖고 있지 않지만, 당신에게 보장합니다. 부패는 정부 내 고위 공직자부터 시작해서 놀라울 정도로 감소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장관이나 기관, 국립은행 등에 대해서 매우 세심하게 살핍니다. 아무리 많은 균열이 있고 유감스러운 경우가 아직도 발생한다고 해도 당신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부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고 말입니다.”

-예전의 부패 수준과 비교해서 말이죠?

“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곳 (대통령궁인) 미라플로레스의 궁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소위 ‘일본식 스위트’라고 불리던 정원이 있었습니다.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거기서는 온갖 종류의 파티와 사업이 진행됐습니다. 위스키와 샴페인이 넘쳐나고 뇌물이 오고 가고 여자들도 있었지요. 그야말로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1988년 말 몇 개월 동안과 1989년에 나는 여기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곳에 들락거려보았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듣기도 했고요. 심지어는 민간인과 공무원으로 이루어진 내부 네트워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사람들이 1989년 12월 나를 체포해서 미라플로레스에서 쫒아내버렸습니다. 그 때가 국가의 부패가 절정에 오른 시기였다는 것을 보장 할 수 있습니다.”

 

*용어설명 '시몬 볼리바르 국가 프로젝트'

1821년 9월7일, 콜롬비아 의회가 만장일치로 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고 시몬 볼리바르(당시 38세)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ㆍ에콰도르ㆍ파나마 등 4개국의 뿌리인 콜롬비아가 탄생한 순간이다. 대(great) 콜롬비아를 뜻하는 그란 콜롬비아는 1863년부터 사용된 개념이다. 분열 끝에 작아진 콜롬비아와 달리 그란 콜롬비아는 멕시코를 제외한 중미 전지역을 망라했다. 베네수엘라 지역에서 태어나 에콰도르ㆍ콜롬비아를 해방한 볼리바르와 그 지지자들에 의해 1819년 12월 문서상으로 선언된 콜롬비아 공화국은 실질적인 거대국가로 태어났다. 대통령 뿐 아니라 ‘해방자(Liberator)’로 지명되어 의회의 동의 없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권력을 얻게 된 그는 남미해방에 뜻을 두고 페루로 진군해나갔다. 페루에서 남미독립의 또 다른 영웅 산 마르틴과의 협력으로 페루까지 통합했다. 당시 그란 콜롬비아는 오늘날의 브라질 북부와 볼리비아ㆍ코스타리카ㆍ가이아나ㆍ온두라스ㆍ니카라과 일부까지 아울렀다. 그란 콜롬비아는 볼리바르의 실각(1829년)과 죽음(1830년) 직후 무너지기 시작해 결국은 오늘날의 콜롬비아로 축소됐다. 그 이유는 기득권 유지만이 관심사였던 토지 귀족들의 저항과 일반 대중의 무관심, 거대국가의 출현을 원하지 않았던 미국과 스페인의 교묘한 방해 때문이었다. 차베스는 자신의 남미 통합논의와 청사진을 ‘시몬 볼리바르 국가 프로젝트’라 부르며, 생전의 볼리바르가 꿈꾼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1) 로물로 가에고스(Rómulo Gallegos, 1884∼1969), 작가이자 정치가. 그의 소설 〈도나 바르바라(Doña Bárbara)〉(1929)는 20세기 베네수엘라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이 소설로 인해 작가는 후안 빈센테 고메즈(Juan Vicente Gómez) 독재치하에서 망명해야만 했다. 1936년에 교육부장관을 지내고 1948년 민주행동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나, 9개월 후 마르코스 페레즈 히메네스(Marcos Pérez Jiménez) 장군이 이끈 군부 쿠데타에 의해서 축출된다.
(2)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귀(José Carlos Mariátegui, 1894∼1930), 가장 영향력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마르크스주의 페루 사상가. 7편의 〈페루 실상에 대한 에세이〉(1928)가 있다. 페루 공산당의 창당 발기인 중 한 사람이다.
(3)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íguez)(1769∼1854), 베네수엘라의 교육자이자 철학자. 볼리바르의 멘토였음. 유럽 망명 시절(1801∼1823)에는 시몬 로빈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음.
(4) 호세 이나시오 데 아부레우 에 리마( José Inácio de Abreu e Lima) (1794∼1869), 브라질 장군, 컬럼비아 독립전쟁 시 볼리바르 편에 서서 싸웠음.
(5) 1819년 2월 15일 담화.
(6) 야레 감옥의 수감 시절을 말함. 차베스는 1992년 쿠데타 시도로 2년 동안 수감되었었다.
(7)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Carlos Andrés Pérez) (1922∼2010),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에 가입된) 민주행동당의 대표. 1974∼1979년과 1989∼1993년에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었다. 1993년 공금 횡령과 착복으로 의회에 의해 면직된다.
(8) <El Nacional>, Caracas, 6 octobre 2008.

 

글․이냐시오 라모네 Ignancio Ramonet
파리 7대학 언론학과 명예교수이며, 세계다보스포럼에 반대하는 세계사회포럼(WSF)과 국제투기 자본에 맞서는 ‘국제투기자본 감시시민기구’(ATTAC)의 상임고문을 지냈다.
 
번역․이진홍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역서로 <진보와 그의 적들> 등이 있다.

 

우고 차베스는 누구인가

2013년 3월 5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타계한 차베스는 1983년 정치 및 사회 운동인 '혁명 볼리바르 운동-200'을 조직했고, 1989년의 민중봉기 ‘카라카조’에서 두각을 나타했다. 당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가 구조조정 정책을 실시하면서 베네수엘라의 수도에는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시위 진압으로 베네수엘라는 완전히 변했고 300여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후부터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정치와 불가분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어서 1992년 2월 젊은 장교들과 함께 페레스 대통령의 부패 정권을 쓰러뜨리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차베스가 줄곧 추구한 것은 베네수엘라 특유의 사회주의, 베네수엘라의 맥락과 맞는 사회주의였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 아래 붙잡혀 있던 베네수엘라는 변화하기 힘든 국면에 있었다. 직업군인인 차베스로서는 이러한 베네수엘라를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개혁을 위해 대선에 출마하게 된다. 그는 1998년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다. 1999년에 개헌된 헌법에 따라 2000년 7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재선되었다. 두 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한 후 권력 강화를 위한 일에 몰두하자 재계와 노동계가 전면파업에 돌입하기도 했다. 결국 2002년 4월 재계와 일부 장성이 쿠데타를 주도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지만, 차베스 지지 세력들이 쿠데타 세력을 몰아내면서 이틀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2004년 8월 대통령 소환 투표에 회부되었으나, 소환이 부결됨에 따라 계속 대통령직을 유지하였다. 2006년에는 3선에 성공했다. 2009년에는 '대통령 연임제한 규정 철폐'를 안건으로 한 국민 투표에서 승리하며 장기 집권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2012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4선 연임에 성공하게 된다. 2013년 1월 재취임 후 2019년까지 대통령직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2013년 3월 암투병 끝에 사망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차베스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에 정면으로 도전한 독특한 정치 행보와 갑작스러운 요절로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는 무엇보다도 베네수엘라에 어울리는 사회주의체제를 만들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예전부터 존재하던 사회의 부패 때문에 그의 바람이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