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종말, 유럽의 새 출발?

2009-06-03     프레데리크 로르동 | 경제학자

금융위기로 한계 드러낸 유럽연합의 무능
희망 보이는 않는 상황… 유권자가 나서야


경제위기의 폭풍으로 유럽연합(EU)의 법적인 기둥이 하나씩 흔들리는 가운데 유럽의회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4월에 유럽중앙은행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다. 화폐를 남발할 수밖에 없는 정책을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범상치 않은 이상기후는 오히려 유럽의 계획에 대해 완전히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인가?


경제 세계화를 지지하는 이들은 세계 정부가 있어야 가장 확실하게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경제학자들은 과도한 자유주의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오로지 전세계가 함께 협력해서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 세계적으로 협력하자.” 물론 이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은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정치의 세계화가 결국 경제의 세계화를 내실화할 것이라는 생각에 정치의 세계화 꿈을 밀고 나간다. 정치가 세계화하면 ‘제대로 된’ 감독기관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각국의 자본주의는 국가의 틀 안에서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당시 초국가적인 힘을 가진 기구들이 제도적으로 세워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길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국가적인 힘을 요구할 수 있는 세계 정부가 현재 어디에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왜 아무 데도 없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적인 규모의 정치적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조절하는 기관들이 제도적으로 마련되려면 시장의 경제 수준과 제도 구축에 관한 정치 수준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잘 맞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역적인 차원이 새로이 중요해진다.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처지이기도 하고 반대로 가장 불리한 처지이기도 한 지역이다. 제도 통합 과정만을 보면 분명 유럽만큼 앞선 지역도 없다. 하지만 현재 세계 경제위기를 맞아 유럽이 가진 결점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한다. 오래전부터 유럽은 자신의 결점이 없다고 늘 주장해왔고 그나마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사회망 덕분에 이런 변명이 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사상 최대 경제위기의 칼날 앞에서 기존의 유럽 전략이 흔들리고 있으며 참고 인내하란 호소도 더는 먹히지 않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돌파구를 찾기가 힘든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성적으로는 생각해볼 수 없었던 일도 감정에 의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지금의 유럽을 부수고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자’가 그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부술 만한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여러 가지로 살펴봤을 때 유럽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다. 다만 유럽만이 이런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유럽을 대표하는 유럽의회 자체가 오히려 유럽은 이제 사망했음을 더욱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닐리 크뢰스 유럽의회 공정거래 담당 집행위원은 심지어 2008년 가을부터 금융위기에 관한 대토론에 참석해 발언하면서 프랑스 정부가 은행 6곳(BNP파리바, 크레디아그리콜, 방크포퓰레르, 크레디 뮤튀엘, 소시에테제네랄, 덱시아)에 자금 지원을 해주기 위해 105억 유로를 지원하기로 한 결정은 ‘존엄한’ 자유공정경쟁법으로 봤을 때 불법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물론 공식적인 성문법 시각에서 보면 크뢰스 집행위원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실제로 ‘근사한’ 리스본 조약을 보면 정부의 보조를 금한다는 조항 107조가 있다.

하지만 본 조항뿐만 아니라 다른 조항들도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 예외도 두고 있다. 심각한 위기 앞에서 뭔가 빨리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유럽 정부들은 원칙에 얽매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느니 차라리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이 또한 사실이다. 나중에 어느 정도 위기가 지나가면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원칙을 쉽게 위반하는 일도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원칙에만 얽매여 인색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가강 기본적인 경제 조항에서 보면 리스본 조약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 하는 조약이다. 가령 123조는 유럽중앙은행이 중앙행정부, 지방정부, 공공기관에 대출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실제로 유럽중앙은행이 헝가리 정부한테 50억 유로를 현금으로 대출해주는 것을 막지 못했다. 더구나 헝가리는 유로화 가입 국가도 아닌데 말이다!

또한 경쟁과 관련된 101, 102조는 지배적인 위치가 생겨나는 것을 막고 있으며 집중을 막는 구실을 하지만 유럽 정부들이 은행 인수를 부추기고 은행 구조조정에 착수하는 것을 전혀 막지 못했다. 실제로 유럽 정부들은 공공 재정을 아끼기 위해 가장 허약한 은행을 더 상황이 나은 은행이 인수하도록 부추긴 바 있다. 예를 들어 BNP파리바는 포르티스를, 로이드TSB는 HBOS를, 바비에르 지역은행은 LBBW를, 코메르츠방크는 드레스드너방크를 각각 인수해 말이 많았다. 이처럼 유럽 정부들의 승인을 받아 금융 분야는 빠르게 공고해졌다. 분명 경제 상황이 정상적이었으면 인수가 더욱 신중하게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또 경제위기를 맞아 몇몇 금융권 인수는 졸속으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닐리 크뢰스 집행위원은 은행들이 독점권을 행사할 때는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의 논리로 무장한 듯하다. 민간 분야는 뭘 하는 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좋은 소리로 타일러야 하는데도 말이다. 다시 정부의 지원을 규정한 107조 조항을 살펴보자. 언제나 정부가 맨 먼저 나서서 반 집중 조항을 위반한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지만 말이다. 어쨌든 크뢰스 집행위원은 정부가 유럽 조약을 위반하며 지원을 해주는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조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회원 국가들이 불쾌한 것이다.

한편, 호아킨 알모니아 경제 담당 집행위원은 126조와 통합 안정 협정에 따라 공공 적자 폭은 3% 이하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최대 불황인 지금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는 망상에 가까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망상적인지 상상할 수 있도록 적절한 비유를 찾아봐야겠다. 연쇄 추돌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던 구급차가 노란 불일 때 지나갔다고 경찰에 잡히는 상황에 비유하면 되는 건가? 아니면 연료가 바닥날 지경인데 부패한 요구르트를 실었다는 이유로 착륙을 할 수 없게 된 비행기가 처한 상황에 비유하면 되는 건가?

알모니아 집행위원의 말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공공 적자가 늘어나면 공공 부채 역시 쌓인다고 주장한다. 설마 자신들만 이런 사실을 안다고 믿는 건 아닐까? 이들은 정부가 천문학적인 액수를 동원하게 되면 오히려 공공 재정 위기가 심화되어 모두들 걱정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서 위기는 나중에 생각하는 게 기본적으로 합리적이다. 시간을 버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재앙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건 마지막까지 정부들일 것이다. 정부의 이러한 노력이 하찮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시간을 벌어놓고 보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회 집행위원들의 입장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현재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로 유럽의 법적인 기둥이 하나씩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101, 102, 107, 123, 126조 조항 이야기도 좋지만 이제 그만하자. 집행위원들은 무조건 어느 상황에서도 법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판사의 처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정말로 필요한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법이다. 오히려 너무나 융통성 없는 유럽의회 때문에 심각한 위기가 오면 더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법이 공정한지 판단하는 일은 판사에게 맡기자. 지금 필요한 건 융통성 있는 정책이다.지금 유럽연합의 모습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으며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이야말로 유럽 시민들이 유럽을 회생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중증 환자들에게 직접 가서 한마디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와 유럽사회학연구소(CSE)에서 연구팀장을 맡고 있다. 금융위기, 사회학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특히 저서 <언제까지?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Jusqu‘à quand? Pour en finir avec les crises financières)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최근 저서로는 2009년에 출간된 <넘쳐나는 위기: 파산한 세계의 재건>(La crise de trop. Reconstruction d’un monde failli)이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꼬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엔돌핀 경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