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2009-06-03     로랑 보넬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에르베

정치와 마찰 빚는 ‘이성의 수호자’는 옛말
언론·기업·정부의 승인이 지식인의 자격 조건

다른 여러 단체와 그 경계선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변호사 세계나 의사 세계와는 달리 지식인 세계의 경계선은 늘 논쟁거리가 된다. 사실 ‘지식인’이라는 타이틀은 스스로 자신의 지적 수준을 자랑하려는 사람들이 공공 토론에서 쉽게 이용하거나 남용하기 쉽다. 과연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들은 누구인가?

지식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크 줄리아르와 미셸 위녹이 편찬한 2002년판 <프랑스 지식인 사전>(쇠이유출판사)대로라면, 지식인들은 매우 드물고 인구학적으로 소멸될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사전에는 프랑스의 경우, 현존 인물 140명만이 수록돼 있고 그들의 평균 연령은 74살이다. 이 숫자는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 소속 연구원 1만2천 명, 대학의 교원·강사·연구원 1만5천 명, 수많은 예술가·작가·기자 등 ‘정신노동자’ 집단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극소수다.

통계상의 이런 차이는 법적·직업적 경계선에 의해 확실히 구별되는 의사나 변호사들과 달리 ‘지식인’의 범주가 모호하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지식인은 어렵고 힘든 일을 수행하는 능력과 행동하는 힘, 이 두 가지에 의해 정의된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의 자유기고가, 노벨 물리학 수상자, 영화감독, 정부 보좌관, 유전학자, 인류학자, 시인 등이 어렵고 힘든 정신노동을 하고, 때로는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공공 토론에 참여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분류 원칙에 근거해 이들을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드레퓌스 사건부터 알제리 전쟁을 거쳐 1995년 11∼12월의 파업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집단이 일련의 결집을 통해 그 공적 존재를 드러내온 까닭에 행동하는 힘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지식인에 대한 정의란 지식인을 존재하게 하는 데 실질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의 ‘작업’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것이고, 위에서 언급한 사전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보편성, 공평성, 이성 지녀야

지식인을 말할 때면 늘 처음으로 언급되는 드레퓌스 사건은, 지식인이라는 용어를 확립하고 지식인이 국가적 사건에 개입해야 할 조건으로 보편성·공평성·이성 같은 가치들을 정립했다. ‘지식인의 탄생’에 대해 조르주 클레망소는 경의를 표했고, 반드레퓌스주의자들은 비웃었지만, 이러한 ‘지식인의 탄생’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진 것도,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1) 이 사건을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그리고 사전 계획 없이 공적 공간에서 지식인, 그것도 좌파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만들어냈다.

뒤이어 지식인의 참신한 구실에 애착을 갖게 된 정부는 지식인, 특히 ‘혁명적 지식인’과 경쟁할 수 있는 인물들인 ‘특수 지식인’과 ‘정부 지식인’을 만들어냈다.(2) 이런 분류가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이란 지위의 정당성이 학계에서 시작된 반면에, 지식인의 의미는 일찍이 정당·국가·대중 같은 외부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인 활동을 하는 정치가와 학자 사이의 갈등이 반복된다.

장 폴 사르트르가 대중화시킨 ‘동반자’ 미셸 푸코가 옹호한 ‘특수 지식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완성시킨 ‘집단적 지식인’의 이미지는 이런 갈등을 치유하려는 수단들이다. 또 이성의 정치적 이용에 맞서 이성을 정치에 이용하려던 수단들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장(場) 주변에 자리잡은 인정 절차(출판, 언론 또는 정치)를 거치지 않고 지식인이 되려면 그에 필적하는 학문적 업적을 쌓아야 한다. 지식인이라는 지위는 작품이나 동료들의 인정으로 그 가치가 좌우되는 사람들보다는, 지식인 세계의 재생산과 분배, 통속화 등 심급을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진정한 지식인 사업가들은 여러 사회 영역을 연결해주는 몫을 한다. 이런 현상은 우선 정치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오늘날 자신들을 대변할 지식인을 갖지 못한 정치조직이나 노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프랑스 공산당(PCF)이나 프랑스 민주노동동맹(CFDT)은 수많은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은 잡지 <에스프리>와 <르데바>를 중심축으로 삼고, 1995년의 쥐페 개혁안(3)을 지지할 때처럼, 자신들의 긴밀한 관계를 여러 차례 과시했다. 출판도 마찬가지다. 대중을 위한 각종 시리즈나 인문과학 잡지를 발행하고 관리하는 일은, 사교적·정치적 특성 때문에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미디어와의 관계를 보면, 드레퓌스 사건 때부터 벌써 미디어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 영향력은 이후 현격하게 강화됐다.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매체의 발전은, 공적인 명성과 독자 등 각 부문에서 과거와 전혀 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해주었다.

<프랑스 지식인 사전>의 두 편찬자는 이 모든 영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다. 자크 줄리아르는 대학(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원장)과 노조(민주노동동맹 산하 국립교육노련(SGEN)), 두 영역의 교차점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르누벨 옵세르바퇴르>의 대표를 맡는 등 ‘문화적’ 언론과 출판계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문고판 ‘푸앵 폴리티크’ 시리즈를 발행하기 전에는 쇠이유출판사의 문학 고문을 역임했고, 오랫동안 잡지 <에스프리>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미셸 위녹으로 말하자면, 파리정치학교의 현대사 교수이며, 출판계와 언론계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 ‘역사의 세계’(자크 줄리아르 공저) 시리즈를 기획했고, 오랫동안 쇠이유출판사의 ‘푸앵 히스토리’ 시리즈 발행인을 역임했으며, <르누벨 옵세르바퇴르>의 측근이기도 했다. 이후 <레벤느망 뒤 죄디> 공동 발행, <피가로 리테레르>의 ‘리뷰’란 책임자를 지냈다. 또 잡지 <리스트와르>의 편집위원이다.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는 두 사람의 권력이 ‘중요한’ 지식인들을 지명하고, 지식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하는 데 미리 작용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식인의 역사란 바로 세력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 사전을 편찬자들의 주소록쯤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성찬식에 신부가 참석해야 하듯이, 지식인을 임명하는 행위에는 ‘사심 없는 관심’을 가진 성직자들이 필요하다. 이 전문가들의 협력은 소중하다. 새로운 지식인의 모습 안에 드레퓌스 사건 이후부터 현재까지 지식인 집단의 과거 전체를 포함시킬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줄리아르와 위녹은 “따라서 파시즘, 공산주의가 함께 등장하는 서글픈 20세기는 역사적 전통에 긴 공백기를 만들었다. 사르트르는 최후의 모히칸이 아니라 자격 없는 아들이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사전에 수록된 수많은 저자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식인들, 미디어적 관심에 집중

그들은 특수한 열정에 빠진 성직자들의 죽음을 축하하고 연구자들을 연구소로 돌려보내면서, ‘사상 클럽’의 견해에 경의를 표하고 보편주의로의 귀환을 확인해줄 인도주의적 태도에 관여하기를 찬양한다. 베르나르 쿠슈네르의 ‘내정간섭 권리’ 운동이나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보스니아 지지 견해’를 미디어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 프랑스 사상의 새로운 방향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편향적인 투사(鬪士)주의’에 대한 그들의 비난은, ‘자유로운’ 지식인들이 프랑스기업운동(MEDEF)의 토론이나 국가개혁위원회 또는 생시몽재단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두뇌집단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이 사전에 수록된 지식인들은 그들의 저서나 사회 참여를 고려해 수록된 것이 아니다. 이 사전에는 무엇보다 ‘정부 지식인들’(자크 아탈리, 알랭 맹, 뤼크 페리, 장노엘 잔네 등)과 ‘미디어 지식인들’(4)(알랭 팽키엘크로, 앙드레 글뤽스만, 그리고 여러 주장을 대변하는 텔레비전 방송에 적합한 주동자들)이 수록돼 있다.

미디어와 기업 경영자들, 고위 공무원 또는 정치 책임자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이 두 부류의 지식인들은, 구조적으로 자신들의 구실을 지배 사상과 그것의 변화에 맞추게 되어 있다. ‘사회 문제의 민족화’에서 ‘포퓰리즘’으로, ‘반미주의’에서 ‘고용시장 봉쇄’로 그들은 미디어 안에서 그리고 미디어를 위해서 만들어진 주제들을 반복하는 학자들이 됐다. 기존 권력에 대해 자율적인 태도를 취했던 드레퓌스주의자들과 이들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극좌사상’ 또는 ‘진보주의’에서 ‘경제현실주의’로 노선을 바꿨고, 과거에 열렬한 행동지지자였다는(이것이 그들에게 ‘공평한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게 해 줬다) 공통점이 결합돼 예기치 못한 보수주의로의 방향 전환이 가능해졌다. 사실 이런 결합이 ‘개혁’을 운동으로, 사회적 권리 옹호를 수구주의로 간주하게 하는 확고한 정당성을 그들에게 부여해줬다. 다시 말해 운동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퇴보를 진보로, 노동·건강·사회보장 체제 내에서의 민주적 기득권 수호를 보수주의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1950∼60년대 공산당의 ‘동반자들’을 비난하면서 말없이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동반자로 변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부의 각종 위원회의 보잘것없는 지위, 공영 라디오 방송, 언론의 서평이나 대중연설가 자리, 가끔은 교육부 장관의 자리 같은 것들을 차지하면서 그들의 재능에 어울리는 보수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1995년의 파업 지지, 일부 학자들의 신자유주의적 유럽헌법 조약 반대, 불법 체류자들을 위한 사회학자들과 법학자들의 구체적 참여, 시장정책이나 안전정책의 부정적 효과와 미디어 집중의 폐해 조사 등의 일들은,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항을 지지하고 정치적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 지식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또 다른 지식인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역사는 새롭게 쓰일 수 있다.

 

 


 


<각주>
(1) 크리스토프 샤를, <‘지식인’의 탄생, 1880∼1900년>, 1990.
(2) 특히 제라르 누아리엘, <공화국의 저주받은 아들들>, 2005 참조.
(3) 쥘리앵 뒤발, 크리스토프 고베르, 프레데릭 르마롱, 도미니크 마르셰티, 파비엔 파비, <프랑스 지식인의 ‘12월’>, 1998.
(4) 필리프 리위토르, ‘불분명한 범주의 기원과 진화’, <프랑스 미디어 지식인들>, 2006.

로랑 보넬리 Laurent Bonell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에르베 파야 Hervé Fayat*   *파리 낭테르대학 정책분석팀(GAP) 연구원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