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 간 극우 오른쪽으로 간 극좌

2015-04-30     세르주 알리미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프랑수와 올랑드 대통령은 (극우주의자인) 르펜이 1970년대의 공산주의의 강령을 추종한다고 주장해, 프랑스의 정치이념적 혼선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과거에 서로 대립했던 국가들 간의 동맹 남발이 마찬가지로 국제관계의 이해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마치 박자를 맞추듯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정보 역시 혼동을 가중시킨다. 이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의 정체성을 정립할 것인가?

아랍에서 저항운동이 시작된 지 4년이 지나고, ‘분노한 자’들의 항거로 대변되는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시위를 비롯해 가중되는 불평등에 대한 전 세계적인 시위 이후에도 이루어 낸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기준이 될 지표의 상실로 말미암아 사회와 세계를 바꾸려는 열정만 고사될 지경이다. “이 모든 것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실망과 환멸만이 난무한다. 오래된 정당들은 해체되거나 간판을 바꾸고 엉뚱한 동맹들이 되풀이된다. 모든 것들이 익히 예상되는 정치적 범주를 뒤흔들어 버린다. 러시아는 “키예프의 파시스트들”을 비난하지만 생-페테스부르그에서는 유럽 극우들의 집회를 용인하고 있다. 프랑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상한 말이 담긴 선언을 되풀이 하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을 지지하는 발언도 반복한다. (외관상으로 명백한 극우에 속한) 국민전선은 아테네에서 급진 좌파가 승리를 거둔 것을 자신들의 승리인양 자축한다.

미디어라는 기계는 이 혼란스러움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증폭해서 박자를 맞추는 것 같고 또한 시청자들의 관심을 붙잡기에 적합한 저급한 주제들만 다루며 얼빠진 열정이나 두려움, 관음증이나 유발하려 한다. 극우와 종파 근본주의는 이 혼란을 이용하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문명 충격’에 대응하는 투사들은 전통과 신앙의 세계로 회귀하자는 선전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정체성과 영토, 전쟁 그리고 죽음으로 이미 오래 전에 화석화되어버린 사회질서를 옹호하고 있다.


정당들의 강령이 불명확한 프랑스

여기저기 난무하는 온갖 시도들이 그리스에서처럼 악의와 금지로 찬 촘촘한 벽에 부딪친다. 문제가 되는 이해관계는 강력하다. 그러나 전투는 너무나 불평등하게 진행된다. 이 난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적 세력과 명분을 공유하는 후원군 그리고 행동에 근거를 둔 원칙과 명확한 비전이 필요하다.(1) 그런데―좌파와 우파, 제국주의와 진보주의, 인종과 국민을 막론하고―예전에 해방의 전투를 무장하게 했던 기준이 되는 지표들에, 장 폴랑(Jean Paulhan)이 했던 말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적용해봐야 할 것 같다. “만일 단어가 의미를 바꾼 것이 아니거나 의미가 단어를 바꾼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다.”

프랑스는 독특한 한 예를 보여준다. 국민전선(FN)이 프랑스의 주요 정당의 하나가 된 이후로 ‘3당 연립체제’라는 주제가 회춘을 맞이했다. 좀 더 상세하게 어원을 추적해 보자. 애초에는(1944-1947년) 마르크스주의에서 파생한 두 개의 정당과 중도좌파 격의 제 3당이 지칭됐었다.(2)

그런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3이라는 숫자 놀이는 말 만들기 시합 같다. 각 주인공들은 다른 두 주인공들이 적어도 전략적으로는 자신에 대항하기 위해서 서로 연합했다고 주장한다. 국민전선은 ‘대중운동-사회당(UMPS)’연합을 말하고 여기에 대해 사르코지는 ‘국민전선-사회당(FNPS)’을 들먹여 대응한다. 이에 대해 좌파의 지도자들은 대중운동?르펜(UMPEN)이라는 말장난으로 수정한다.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해 이 세 가지 중에서 도대체 어떤 비난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분간해내기 어렵다. 예컨대 “경제 분야에서 프랑수와 올랑드의 정책은 니콜라 사르코지의 정책과 똑같다”고 작년 8월 정부에서 퇴출된 후 통찰력이 열 배나 더 증가한 전 사회당 출신 장관 아르노 몽트부르(Arnaud Montebourg)도 인정할 정도다.(3) 대중운동연합(UMP)과 사회당(PS)은 그들이 프랑스에서 서로 대립적이라고 느낀다고 말하지만 거의 둘 다 통합 유럽에 의존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이 둘을 구분하는 경제적, 금융적 기준을 분간하기 어렵다.

이미 1989년에 현 사회당 제1서기인 장-크리스토프 캉바델리스(Jean- Christophe Cambadelis)가 우울한 심정을 드러낸 바 있다. “회의주의가 서서히 엄습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여러 가지 제약이 증가하고 사회적으로는 차츰차츰 지지를 잃어가고 있는 마당에 (사회당의) 영역을 재정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적의 영역에서 사냥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불쾌한 일이지만 재주껏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6)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 경제적 상황이 당시보다 더 악화된 조건에서(1988년 성장률은 4.3%, 1989년에는 4%였다) 권력을 쥔 사회당은 소위 프랑스 사회 자체가 우경화되었다는 걸 구실삼아 신자유주의로의 진로 이탈과 자신들의 정치 프로젝트의 깊이 모를 공허함을 다시 한 번 정당화하려고 한다. 캉바델리스가 지난 해 10월 또다시 비통해 한 적이 있었다. “반동적인 전통적 이슈들이 전면을 차지합니다. 정체성이 평등을 위협하고, 이민자 자손들보다는 토착 프랑스 국민들의 자유가 우선시 됩니다. 상당히 심각한 편입니다.” 충격적이고 아픈 확인이다.(7)

놀라기만 할 것인가? 반동적인 벼락의 방향을 바꾸기는커녕 ‘중도 온건파’의 정책은 수십 년 전부터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에서 겨우 피뢰침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거의 징벌에 가까운 새로운 약속만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보여줘야 할 것이 아닌가. 미국의 진보적인 잡지의 사장인 짐 노레커스(Jim Naureckas) 역시 미국에서도 조세저항운동(Tea Party)이 거세진 이후로 유사한 괴멸이 발생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만일 당신이 세상은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고 사소한 변화 정도만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만 중도주의는 이념으로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중도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8)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진보적 선택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된 전형적인 예를 현재의 그리스가 처한 상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불과 5년 동안에 자유-사회당인 파속당은 45%에서 5% 대의 지지율로 추락했으며 반대로 시리자당은 비상했다. 스페인에서도 정도는 덜하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사회-민주당들이 비교적 잘 버텨내고 있다. 예컨대 이탈리아에서 마테오 렌지(Matteo Renzi)는 제도권 내의 저항자의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전체적인 혼란을 틈타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40.8%의 득표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렌지의 정책은 이탈리아 사장단의 기대에 부응한 것으로서 겨우 형태와 스타일만을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임시 계약직으로 일하는 청년들과 약자들을 걱정한다고 주장하면서 보호받는 고임금 생활자들의 ‘특권’을 단호하게 공격한, 토니 블레어 세대의 고유한 표현들인 젊음, 비정형성 같은 구호들이 유권자들을 매혹한 결과였다. 정치 엘리트들은 언제나 국민들을 국적, 종교, 세대, 생활방식, 문화적 취향, 거주지에 따라 분열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려고고 노력한다.(9) 또 끊임없이 양 극단화를 시도해서 공론의 논쟁을 이끌어내 이것으로부터, 사회적 질서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국민전선의 성공은 이 당이 의도적으로 증폭시킨 혼란에 기인한다. 이 당의 담화는 인종적 국수주의를 뒤섞는 것이며(이 경우에도 국가가 우선한다), 이것이 우파의 유권자나 일반적으로 좌파가 옹호하는 사회적 요구를 원하는 유권자들을 매혹한 것이다. (전 환경부장관인 세실 뒤플로(Cecile Duflot)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공론의 장에 거의 매일 등장하는 정체성, 이슬람, 이민 같은 문제들이 뒤섞여 “니콜라 사르코지와 마린 르펜 사이에는 인쇄 용지아래 놓인 압지 한 장 차이 뿐이다”와 같은 혼동이 야기된다.(10) 그러나 전 대통령은 이 같은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보다 본질적인 측면을 들추는데 그에 의하며 “마담 르펜이 자신이 극우라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그녀는 극좌의 경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특히 최저임금과 은퇴연금에 대해서 멜랑송(Melenchon)과 똑같은 조치를 제안하고 있다.”(11) 사르코지는 마담 르펜과 사회당의 짝짓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첫 날은 국민전선에 투표 하십시오. 그것은 곧 2차 투표에서 좌파에게 승리를 넘겨주는 것입니다. 국민전선-사회당(FNPS)일 뿐입니다.”(12)
도대체 여기저기서 손을 벌리는 국민전선의 지지층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대개 대중계층 출신으로 대다수가 프랑화로의 회귀를 지지하며(63%), 재산에 대한 연대세의 폐지에 대해서는 대중운동당(UMP)보다 덜 우호적이다(29% 대 52%). 은퇴 연령을 60살로 책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우호적이다(84% 대 49%). 반대로 엄격한 이민 수효의 통제와 대학에서 차도르나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서 이 두 지지층의 요구는 엇비슷하다.(13)
그러면 프랑스 사회가 우경화한 것인가? 좌경화한 것인가?… 우파의 정책에 의해서 배신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좌파의 지지층이 해체된다고 지칭하기보다는 아마도 대혼란이 일고 있다고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국민전선의 지지층 중 절반 가까이가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개혁되기를’ 바라고 ‘부자에게 뺏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를 제안한다.(14) 여기서 역사는 또다시 정치가 적합한 출구를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정당한 요구가 이상한 방향으로 탈선해버린 예를 목격한다.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운 국제정치

국제정치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아직도 민주주의, 연대감, 인권, 반-제국주의 등과 같은 지침이 외교를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오늘날 외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국가의 이익이라는 것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냉전시대에도 폴란드 사회당은 스페인의 프랑코에게 석탄을 공급해 줘 극우의 독재자가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탄광 광부들의 파업을 무력화하도록 도와준 전력이 있다. 마오쩌뚱의 중국도 친미파 압제자들과 꽃다발을 주고받는 밀월 관계를 유지한 적이 있다. 소비에트 연맹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자 순수 지하드주의자들도 백악관의 후원으로 무장하고 피가로 잡지 앞에서 부드러운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예컨대 미국이 이라크에서는 이란을 지지하고 예멘에서는 이란과 대립하고 스위스에서는 이란과 협상하는 상황으로 보아 세계는 요지경이란 말인가? 사회주의 공화국인 베트남이 중국인민 공화국의 패권적 야심에 대비하기 위해서 미국 함대에 기대를 거는 상황은 또 어떤가? 사실 국가들은 언제나 너무 강력한 보호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해왔고 때로는 침략 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반대의 동맹도 서슴지 않았다. 러시아나 중국이 그리스 총리가 금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스크바나 베이징에서 가능한 수단을 찾으려는 것을 비난하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는 정치적 선택 역시 결국 하나의 도덕적 입장이 본질을 드러낸 것뿐이다.

수십 년 동안, 반항적인 국가들의 사회주의 체제가 미국의 체제와 거리를 두고 다국적 기업들에게 타격을 가하려 한 만큼,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 동조하는 나라들은 좌파 투사들을 관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런 예는 이제 흔한 광경이 아니다. 어떤 지역도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차례차례로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낫다… 즉 패권주의에 저항하는 세력이 국제정치의 무대에 올라와 선택의 여지가 많을 때는 저항을 지지하는 쪽에 저항을 격려하는 것이다. 동시에 강대국들의 미움을 사 표적인 된 국가들을 원조한다고 그 나라의 다른 정치나 사회적 선택을 지지하는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으며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다. 한 가지를 지지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연대감이 형성된다거나 반대로 한 가지를 반대한다고 자동적으로 적대관계가 설정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그런 낭만적인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계급이나 투쟁을 원하지 않나요? 평민과 무질서한 수많은 다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국민을 원하지 않나요? 폭동과 종족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자인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id)(15)가 경고한 적이 있다. 정치가 오랫동안―제례 예식과 목가와 신비주의로―세속적인 종교를 이용해 온 나라에서는, 정치의 몰락(선택의 폭 축소, 마켓팅, 부패, 공직 이탈)이 열정을 자화(磁化)해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다.

이 같은 유희에 의해서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분파들이 승리를 거두곤 한다. 서구의 한 우파는 구대륙의 기독교적 가치, 나아가서는 그가 오랫동안 집요하게 반대해온 정교의 분리라는 이름으로 소수 이슬람에 대한 문화 전쟁에 돌입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식민지주의의 후유증을 억제하는 것과 계몽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진보적 유산을 고발하며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 적어도 유럽에서 이러한 대립의 결말이 어떻게 될 지 너무나 뻔하다. 오직 미셀 우엘베크(Michel Houellebecq) 같은 환상 소설가만이 이슬람을 최후의 승자로 그려낼 뿐이다. 

급진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을 주 독자로 한 잡지에 발표된 대담에서 공화국 토착민 당(Parti des Indigenes de la Republique (PIR)의 대변인인 우리아 부텔지아(Houria Bouteldja)은 “개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16)… 탈식민지적 관점이란 것은 우선 먼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고, 한 이슬람, 한 흑인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퇴행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간에 보장하지만 이것은 거대한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안하면서 혼종 간의 결혼을 환기시킨다.  
 

우리가 우애적인 투쟁에 동참해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막연하다. 분명 ‘문명의 충격’이나 인종적 혹은 종교적 분리주의로 대중을 영원히 분열시키겠다는 의미인가?

“20살의 젊은이에게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라는 <피가로> 지의 질문에 에세이스트 미셀 옹프레(Michel Onfray)가 이렇게 답했다. “배는 흘러갑니다. 우아함을 간직하세요, 서서 죽으세요.” 덜 냉소적이고 덜 절망적인 다른 선택도 있다. 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해서, 정치의 주권을 위해서 흔들리지 않는 투쟁에 동참하는 것도 분명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 그 결과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할 뿐이다. 너무나 많은 이슈들이 우리의 눈을 혼란스럽게 해서 정작 그 기반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운명을 되돌아보도록 하자.

경제적 민주주의라고? 우선 먼저 둑을 쌓고 자본이 사회에 행사하는 공갈과 협박을 하는 권력을 중지시켜야 한다.(17) 이는 좌파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이기도 하다. 물론 해방 이후, 인민공화국운동(MRP) 같은 당도 “경제적 결정권을 자본 소지자들에게만 맡기고 자본의 우월성이라는 기초 위해서 인간관계를 조직하는 자본주의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기는 했다.(18)

정치적 주권이라고? 이것은 그리스 사태 시에 유럽 연합이 파괴하겠다고 주장한 소중한 재산이다. 바로 얼마 전에 사르코지가 막 당선된 치프라스를 두고 “선거 때 했던 약속을 삼켜버리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고(19) 스스로 자축한 적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유로존 내의 공보의원들도 유사한 뉘앙스를 풍기는 담화를 발표한 바 있다. 그들은 그리스 총리가 금융 질식 상태에서 그리스를 구하려면 여당과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미 ‘이 정부는 살아남을 수 없다’(20)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어찌 되었던 이런 유의 평결은 그리스 국민의 정치적 주권을 침해하는 쿠데타나 다름없다. 온통 안개 속에 쌓인 지표만을 보여주는 세계에서 난파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고도 정당하고 우애적인 투쟁에 동참하는 길밖에 없다. 패할 것이 뻔 하다해도 모두가 그것이 곧 남의 일만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주요 저서로 <새로운 감시견(Les nouveaux Chiens de garde)>(1997) 등이 있다.

번역·이진홍
파리7대학 불어불문학 박사.


(1) ‘재정복을 위한 전략(Strategie pour une reconquete’,〈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 9.
(2) 프랑스 공산당(PCF), 국제 노동자 연맹 프랑스 지부(SFIO)와  인민공화국 운동(MRP).
(3) 〈레 제코Les Echos〉, Paris, 1er avril 2015.
(4) 〈르 푸엥 Le Point〉, Paris, 1er janvier 2015.
(5)  <르 푸엥 Le Point〉, 9 avril 2015.
(6) 1989년 12월 16일자 사회당 콜로키움, ‘우리의 이념적 대빌은 어디에 있는가?(Ou sont nos divergences ideologiques?)  참석자 발언.
(7) 〈Questions d’info〉, LCP, 15 octobre 2014.
(8) ‘Centrist anxiety at the “New York Times’, 〈FAIR〉, 2 fevrier 2015, www.fair.org.              
(9) 브누와 브레빌(Benoit Breville)과 피에르 렝베르(Pierre Rimbert), ‘국민의 오른 편에 자리한 좌파 Une gauche assise a la droite du peup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 4.
(10)〈르몽드〉, 2015, 4. 1.
(11) <TF1〉, 20시 뉴스, 17 mars 2015.
(12)〈르피가로 Le Figaro〉, 2 mars 2015.
(13) IFOP-Le Figaro Magazine이 실시한 여론 조사(2014 4월 3일), 그리고 Cevipof-Le Figaro이 실시한 여론조사(2014년 4월 8일).
(14) 각기  47 % et 45 %로 나타남. Sondage Cevipof-Le Figaro, op. cit.
(15)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id), 〈비종교적 정치 에찬 Eloge de la politique profane〉, Albin Michel, coll. ≪ Bibliotheque Idees ≫, Paris, 2008.
(16) 〈Vacarme〉, n° 71, Paris, printemps 2015.
(17) 프레데리크 로르동(Frederic Lordon), ‘좌파는 죽지 않는다 La gauche ne peut pas mouri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septembre 2015. 참조
(18) 마리오 아인나우디(Mario Einaudi)와 프랑수와 고겔(Francois Goguel),이 인용, 〈 Christian Democracy in Italy and Franc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52.
(19) 〈르피가로 Le Figaro〉, 2 mars 2015.
(20) 〈파이넨셜 타임즈  Financial Times〉,6 avril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