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투쟁 약화가 민주주의 위기 초래

2015-04-30     라즈미그 크쉐양 | 사회학자

보통선거가 민주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이고 일단 도입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여러 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참정권 획득 과정이 직선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또 민중의 결집을 필요로 하는 매우 취약한 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 올해 1월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당이 승리했다. 하지만 시리자당의 선거공약과 유럽연합이 새 정부에 요구하는 개혁정책 사이의 깊은 간극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음을 잘 보여준다.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정책의 70%는 협상이 불가능한 것이고 30%는 수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피에르 모스코비시 경제문제 담당 EU 집행위원의 70-30 원칙 발언을 보더라도 오늘날 한 나라의 주권은 정치적 우선순위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정치제도가 그렇듯이 민주주의도 소멸하고 사라진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주주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의민주주의는 정치, 사법, 경제, 문화제도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프랑스에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된 것은 사회정책의 성공일 뿐 아니라 국민이면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상관없이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승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원칙은 보통선거이다. 보통선거는 성인이면 누구나 자신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국민투표에서 표를 행사할 권리를 말한다. 그리고 이 권리는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의 보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보통선거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 손에 쥐어진 건 아니다. 소위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났어도 모든 시민이 참정권을 갖지는 못했다.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실시했던 입법의회 의원선거(1791년)에는 일정 세금 이상을 납부한 남성 유권자들만 투표를 할 수 있었고, 1792년 제1공화국의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참정권이 확대되었지만 여성과 수입이 없는 시민은 여전히 투표할 수 없었다. 이후 1793년 헌법으로 남성유권자 보통선거를 보장했지만 1795년 다시 납세유권자 선거로 회귀했다. 완전한 대의민주주의가 출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민중투쟁이라는 값을 먼저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정치이론가 아담 쉐보르스키는 “정치적 권리는 민중계급에 의해 획득되었다”(1)라고 지적했다. 지배계급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만 양보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날 민주주의가 생명력을 잃어버린 데에는 민중투쟁이 사라지고 더 이상 사회운동으로 새로운 권리를 요구하기 어려워진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 세계 보통선거의 역사는 민주화의 조건이 무엇인지 잘 말해준다. 라이베리아(1839년)와 그리스(1844년)는 남성만이 참여하는 보통선거를 처음 실시했고, 뉴질랜드(1893년), 호주(1901년), 핀란드(1907년), 노르웨이(1913년)는 완전한 보통선거를 일찍이 도입했다. 모두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교적 ‘주변국’에 속하는 나라들이다. 1900년에 남성 보통선거를 실시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17개국이었고 완전한 보통선거를 실시한 나라는 1개국에 불과했다.

봇물이 터진 것은 1차세계대전 이후이다. 15년도 채 안 되어 완전한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나라가 4개국에서 10개국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파시즘의 부상으로 1930년대에 그 수가 줄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여성을 포함하는 보통선거를 도입했지만 1933년 히틀러가 철폐했다. 그래서 진정한 보통선거의 혁명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몇 나라를 예로 들자면, 프랑스가 1944년에, 이탈리아가 1946년에, 벨기에가 1948년에, 일본이 1952년에 보통선거를 실시했다. 미국은 남부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을 1965년에 통과시켰다. 18세기 말에 공표된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 원칙이 150년이 지나서야 온전한 현실이 된 것이다. 18세기 민주주의 ‘창시자들’에게 참정권은 재산이 있는 백인남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참정권은 직선으로 발전하며 확장되지 않았다.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4가지의 보통선거를 경험한 프랑스는 1815년에 또 납세자 보통선거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1848년 3월 5일 법령으로 남성 보통선거를 실시했고 그 이후 납세자 보통선거로 잠시 후퇴한 후에(1850년 3월 3일 법은 250만 남성유권자의 참정권을 박탈했다), 제2제정과 제3공화국에서 다시 남성 보통선거를 실시했다. 완전한 보통선거는 1944년에 가서야 치러졌다.(2) 이러한 방향전환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방향전환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현대사에서 참정권은 계급, 성(性), ‘인종’이라는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부여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사유재산, 수입, 납세여부, 문맹여부 등 사회적인 기준이었다. 성과 인종은 사회적인 기준보다 덜 사용되었지만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미국은 1965년에야 인종차별적 선거법을 폐지했고 스위스는 1971년에 여성 차별적 투표제도를 연방차원에서 종식시켰다(몇몇 주(州)는 1950년대에 이미 폐지한 바 있다). 이 두 나라는 오랫동안 불완전한 민주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에서는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14년 11월에 있었던 중간선거에서 몇몇 공화당 주지사들은 민주당의 표밭인 흑인과 히스패닉계가 사는 서민 지역의 ‘부적절한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제한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3)

투표권이 확대되는 데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할까? 민주화를 하나의 대의의 실현으로 축소할 수 없지만 ‘모방효과’라는 것은 존재한다. 민주체제가 많아질수록 비민주적 체제에 대한 압력이 높아진다. 그래서 비민주적인 나라는 외형적으로라도 민주체제를 갖추려 노력한다. 20세기의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들조차도 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고 보여주기 위한 선거를 실시했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구원하는 민중결집

투표권 확대를 위한 필요조건 중의 하나가 민중투쟁이다. 통계적으로 투표권이 확대될 때는 그 몇 년 전부터 파업, 시위, 폭동, 어느 정도의 폭력이 동반된 민중운동이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4) 반대로 민주적 권리의 확대와 다른 변수(경제성장, 문맹퇴치, 도시화…) 사이의 상관관계는 훨씬 미약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적인 이유에서든 경제적인 이유에서든 노동자, 여성, 소수자 등 피지배층이 평등한 권리, 특히 참정권을 요구하면 지배층은 가능한 오래 버티기 때문이다. 투표권 확대는 사유재산의 위협이고 재산이 있는 사람만이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19세기와 20세기 정치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보수주의자들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5) 이러한 종류의 논리는 민주주의 발전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미쉘 크로지에, 새뮤얼 헌팅턴, 조지 와타누키가 주도한 삼각위원회가 1975년에 발표한 현대 사회의 <거버넌스의 위기>라는 제목의 보고서에도 같은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5) 하지만 민중의 압력이 너무 커지면 지배층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권리를 획득했다는 뜻은 아니다. 전쟁과 지배계급의 분열이라는 두 가지 부가적인 요소가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학자 고란 테르본은 몇몇 민주체제는 ‘패배의 민주주의’라고 지적했다. 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하는 동안 혹은 전쟁이 끝난 후에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는 뜻이다.(7)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의 투표권 확대는 패전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프랑스 역시 1870년 보불전쟁에서 패배하고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무너진 후에 남성유권자 보통선거가 재도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보통선거의 혁명이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기존의 정치세력을 해체시키고 반대세력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준다. 전쟁 전에도 국민을 결집시키기 위해 참정권을 확대하기도 한다. 비스마르크는 회고록에서 “보통선거 실시(1866년)를 수용한 것은 오스트리아와 해외 열강에 맞서 싸우는 데 좋은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데 좋은 무기였다.’(7)라고 썼다.   

지배계층의 분열 역시 참정권 확대에 일조했다. 앙시엥 레짐의 귀족계급은 신분제도에 의지해 지배력을 공고히 했고 신분제도를 분쟁 해결의 도구로도 이용했다. 새로운 종류의 지배계층인 부르주아지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신분제도를 붕괴시켰다. 직업의 사회적, 공간적 분리는 내부 분열(산업, 농업, 상업, 금융 등)을 야기했고, 서로의 이권이 꼭 겹치는 것은 아니었고 권력과 이윤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을 했다. 대부분 평화적인 것이었지만 때로는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미국 독립전쟁(1861년~1865년)의 원인 중 하나가 지배층의 갈등 악화였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내부 경쟁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회제도라는 새로운 해결 메커니즘을 도입했다. 이렇게 해서 민주체제의 뿌리인 의회제도가 근대가 시작하는 시점에 위에서 언급한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에 도입되었고, 18세기 중반에는 영국과 스웨덴에 의회군주제가 성립되었다. 의회제도는 그 뿌리가 고대까지 올라가지만 자본주의와 결합해서 새로운 역사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지배계급의 내부 분열로 인한 동맹과 대립은 피지배계급이 참정권을 비롯한 여러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획득한 권리는 때로는 특정 분야의 지배층과 동맹으로 얻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여성의 참정권은 여성운동의 덕분이기도 했지만 몇몇 나라의 경우는 지배계급의 특정 계층이 여성들의 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 국가에서는 여성들이 신부들의 권유에 따라 표를 행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의 참정권을 지지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압력과 ‘위’에서의 분열이 만나 여성 참정권이 실현된 것이다.               

험난한 보통선거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은 민주주의 탄생의 중요한 계기였던 민중의 압력이 20세기 말에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선진국에서는 그렇다(개발도상국은 선진국과는 다른 민주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부재하다는 것도 민주주의 후퇴의 원인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신자유주의는 어떠한 대안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지배층 내부에서 나온 정책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9) 철옹성 같은 강력한 권력집단은 민중운동에 어떠한 틈도 주지 않았다. 2008년 경제위기에도 지배계층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그리스 정부는 유럽연합의 강경한 태도 앞에 외롭게 서있다. 하지만 시리자당의 승리는 틈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개의 틈이 동시에 벌어진다면 민주화는 다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글·라즈미그 크쉐양 Razmig Keucheyan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특히 안토니오 그람시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 <자연은 전장(戰場)이다: 정치적 생태학에 대한 에세이>(2014), <좌파라는 반구(半球). 새로운 비평적 사고의 지형을 그리기>(2010)가 있다.

번역·임명주 mydogtulip156@daum.net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Adam Przeworski, ‘Conquered or granted? A history of suffrage extensions’, <British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vol.39, n° 2, Cambridge, 2009. 4.
(2) Alain Garrigou, ‘프랑스의 ‘발명품’ 보통선거(Le suffrage universel, “invention” francais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8. 4.
(3) Brentin Mock, ‘미 공화당의 인종차별주의적 ’유권자 삭제(Retour feutre de la discrimination electora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 10.
(4) Adam Przeworski, <Conquered or granted ? A history…>, op. cit.
(5) Bernard Manin, <대의정부의 원리(Principes du gouvernement representatif)>, Flammarion, Paris, 2008.
(6) Olivier Boiral, ‘삼각위원회의 불투명한 권력(Pouvoirs opaques de la Trilatera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3. 11.
(7) Goran Therborn, ‘The rule of capital and the rise of democracy’, <New Left Review>, n° I/103, London, 1977. 5~6.
(8) Ibid.
(9) Gerard Dumenil, Dominique Levy, ‘상류층의 출구 전략(Alliance au sommet de l’echelle socia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