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프랑스의 미디어에 비친 이민 40년
이민자가 바다를 건너다 목숨을 잃을 때는 가슴 아파하고, 이민자가 국가 질서를 흔들 때는 불안해하는 시청자들. 이민 문제는 언제나 시청률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두 나라 모두에서 이민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정치 현안이 요구하는 바와 결합해 인도적 문제와 안보 문제에 점점 더 집중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주된 해결책은 국경의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 문제에 관한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의 의견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바마의 결정을 논평했던 여러 언론은 이민의 진정한 원인에 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이민자들이 겪는 인간적 고통과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경찰 진압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이민 현상은 폭넓은 공적 논의를 필요로 하고 이런 논의가 적절한 이민 정책으로 이어질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이민 문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방식 중 어떤 관점이 사라져 버렸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각각이 지닌 다양한 접근 관점의 차이를 구분하여(박스 내용 참조) 프랑스와 미국의 주요 언론 22개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에서 ‘통합’에 대한 논의로
이민 관련 논의는 지난 40년간 굉장히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70년대 초 미국에서는 노조와 공화당 정권이 불법 이민에 대해 공동 전선을 펼쳤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오늘날 국가안보국에 편입된) 이민귀화국장으로 임명한 전 해군 출신 레너드 챕먼(Leonard Chapman)은 이민자의 ‘대량 유입’ 가능성을 우려했다.
한편 주요 노동조합 중 하나인 미국노동총연맹은 멕시코 노동력이 미국인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세자르 차베즈(Cesar Chavez)는 국경 너머에서 온 농업 노동자들이 파업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 그들의 입국을 허용하는 정책에 반대했다. 1975년 7월 3일 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일면에 실었다. “미국 책임자들에 따르면, 고용주들은 그들이 착취하고 헐값에 일을 시킬 수 있는 노동력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후 몇 십 년이 흐르며 미국 노동자들에 대한 경제적 압력은 굉장히 증가했다. 그럼에도 이민자들이 국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 저하를 가져온다는 생각은 여전히 건재하다.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이러한 생각은 매체 종류를 막론한 이민 관련 정보 중 47퍼센트에서 나타났던 반면, 2002년부터 2006년 사이에는 이 수준이 거의 8퍼센트로 떨어졌다.(1) 경제학자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이 오늘날 이러한 측면을 다루는 몇 안 되는 분석가 중 하나이다.(2)
이같은 변화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 사이에 이루어진 미국 정치판의 재편을 보여준다. 세력을 늘리길 바랐던 상당수의 노조들은 불법 이민에 반대하던 기존의 입장을 재고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의 신생 단체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장려했고, 이같은 입장은 지난 20년간 굳건해지기에 이르렀다. 전미라라자위원회(National Council of La Raza)나 멕시코계 미국인 법률보호 및 교육기금(Mexican American Legal Defense and Education Fund, Maldef)이 그 예로, 이 단체들은 미국에 정착한 라틴계와 아시아계 인구가 겪는 다양한 차별을 규탄한다. 이러한 방향의 행동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나, 인종 차별 주제에 집중한 나머지 이민의 경제적 원인과 외국인의 저임금 고용이 가져오는 결과에 관한 담화는 언론에서 점점 덜 나타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이 주제는 1970년대에 등장해 1980년대 초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주제가 1973년에는 전체 르포타주 중 46퍼센트에 등장한 반면, 2002년부터 2006년 사이에는 25퍼센트에만 등장한다. 이처럼 당시 자주 등장했던 차별 문제는 문화다양성 문제를 수반했다. 이 문화다양성 문제는 1983년 <리베라시옹>에 실렸던 기사 중 절반에 등장한다. <리베라시옹>의 어느 사설은 “프랑스에서는 다문화사회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3) 이후 1983년 드뢰의 지방선거에서 FN이 쾌거를 이뤘으며 우파 언론이 반이민 공세를 펼친 데 대한 응답으로, 사회당과 가까운 언론들마저 문화다양성 문제를 ‘국가 공동체’에 새로이 등장한 ‘통합’ 문제 뒤로 치워버렸다. <리베라시옹>의 주필 로랑 조프랭(Laurent Joffrin)은 다음과 같이 정당화하고 있다. “우리는 국민전선에 맞서기 위해 기저를 단단히 다지고 이민자 보호가 프랑스 공화국의 전통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우리는 ‘권리 평등’의 문제가 ‘다를 권리’(4)에 관한 담화보다 훨씬 더 중차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방향 전환의 영향은 즉각 나타났으며 이후 25년간 계속 피부로 느껴졌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모든 프랑스 언론에서 ‘통합’이라는 주제는 ‘문화다양성’의 자리를 차지하며(20퍼센트 대 8퍼센트) ‘국가적 통일성’은 전체 언론 기사 중 42퍼센트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미국과 비교해 세 배 이상의 수치이다. 여전히 더 세분화되는 시장경제를 통해 형성된 나라인 미국의 경우, ‘국가적 통일성’의 문제는 정치 지도자들과 유권자들에게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좌파 민주당이 공동체적 요구 사항에 매우 민감하다면, 우파 공화당은 (자유 이민에 호의적인 기업 다수의) 재정적 지원과 대체로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는 편을 선호한다.
반면, 프랑스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복지국가의 존재는 국가공동체가 지닌 본래 의미를 보존하게 해주었다. 사회보장책이 약화됨에 따라,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언론은 문화적 통일성이라는 개념을 휘두르길 바랐다. 1980년대 초, 문화적 통일성의 주제는 특히 FN과 <르피가로>, <르피가로 매거진> 같은 신문에 의해 옹호되었으며 당시 이 주제는 이민에 관한 여러 주제 중 비주류였다. 이후 정부의 주요 정당들은 인종주의와 차별 문제를 뒤로 치워버린 후 문화적 통일성의 주제로 돌아섰다. FN의 부상은 계속되었으며, 오늘날 언론은 30년 전에 비해 이 주제를 덜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흑인과 아랍인 계열의 이민자와 그 후손은 계속해서 차별을 겪고 있다.
‘공공질서’와 ‘안보’, 그리고 인도적 접근
경제 문제와 인종주의 문제를 뒤로 미룬 채, 미국과 프랑스 언론들은 한편으로는 ‘공공질서’와 안보 주제에(2000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의 경우 62퍼센트, 프랑스의 경우 45퍼센트의 르포타주에 등장),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적인’ 측면에(동일 기간 동안 미국의 경우 64퍼센트, 프랑스의 경우 73퍼센트) 점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화려하면서도 단순하고 굉장히 시각에 호소할 뿐 아니라, 이민자에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인 단체 및 정부기구들과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요컨대 이 관점들은 상업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라는 이중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는 셈이다.
어느 언론이나 TV채널에 있어, 불법 이민을 비방하는 것은 흥행이 보장된 상업적 공식이다. 왜냐하면 사회학자 토드 기틀린(Todd Gitlin)이 썼듯이, ‘미디어 역사의 원형은 범죄의 역사(5)’이기 때문이다. 공공질서라는 주제에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폭동, 경찰, 국경검문소, 무기, 추적 레이스, 체포 같은 충격적인 이미지를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되풀이되는 데는 또 다른 원인이 존재한다. 프랑스 기자들은, 그리고 미국 기자들은 더더욱, 내각이나 지방자치단체, 행정당국 등의 공식 출처로부터 그들의 정보를 생산해낸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들의 관심사가 정부 대표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관심사에 보조를 맞추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또한 정부들은 종종 이민을 공공질서에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기 때문에, 기자들 역시 그와 동일한 태도를 취하도록 부추김을 받게 된다. 기자들의 태도는 정치적 관심사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변화했다. 9.11 테러의 영향 아래 민주당과 공화당이 입에 ‘안보’라는 말만 달고 지냈던 2002년에는 공공질서의 관점이 관련 주제 중 64퍼센트의 기사에 등장했다. 반면 2004년에 이 비율은 53퍼센트로 떨어졌다가(1994년과 거의 동일한 수치) 2005년, 불법 이민자를 형사재판에 회부하는 법안인 HR 4438을 표결할 때 62퍼센트로 반등했다.
프랑스에서 이 공공질서의 주제는 ‘방리외(banlieue, 대도시 주변에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 지역-역주) 지역의 위기’에 관한 담화와 관련되어 1980년 초 급부상했으며, 이후 1990년 초 두 주요 정당이 이 주제를 다시 다루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예컨대 1991년, 사회당 출신의 총리 에디트 크레송(Edith Cresson)은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기 위한 항공기를 임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2000년대부터 차기 정부들이 국가 통합과 국가적 통일성에 다시 집중함에 따라 안보 주제의 출현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한편 이 주제에 관한 인도적 접근은 두 나라 모두에서 점차 일반화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피난처(France Terre d'Asile), 시마드(Cimade), 인권연맹(Ligue des droits de l'homme), 프랑스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등이, 미국에서는 전미라라자위원회, 말데프(Maldef), 미국시민자유연맹 이민자 인권 프로젝트(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 Immigrants' Rights Project), 전미이민포럼(National Immigration Forum) 등의 수많은 단체들이 이 접근법을 옹호했다. 프랑스 단체들은 주로 정부보조금과 단체원의 분담금으로 연명하는 반면, 미국 단체들은 인권에 관심을 보이는 소액 기부자들과 가톨릭교회, (포드, 카네기, 맥아더 등의) 강력한 재단들, 그리고 저렴한 노동력의 원천을 보존하는 데만 관심 있는 은행, 건설기업, 다양한 다국적기업 등이 난잡하게 뒤섞인 협력 관계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
인도적 접근이라는 접근법 역시 공공질서라는 주제처럼 대중의 지지를 얻게 해주었다. 미국에서 이 접근법은 특히 미디어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던 개인화된 내러티브 형식의 글쓰기에 부합한다. 이 스타일을 잘 사용하면, 독자-시청자에게 이주자들의 경험을 재구성해주고 그들이 몰랐던 이주자라는 사회계층에 대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효과적인 기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의 가장 유명한 예는 아마도 <엔리케의 여행(Enrique's Journey)>일 텐데, 여섯 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2002년 <로스앤젤레스타임스>지에 실린 이 르포타주는 소니아 나자리오(Sonia Nazario)에게 퓰리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엔리케의 여행>에서 기자는 중앙아메리카 출신의 젊은이가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 떠난 이야기를 회상한다. 젊은이의 어머니는 굶주린 자식들에게 돈을 보내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 일자리를 찾아 아이들 곁을 떠나야만 했다. 독자들에게 이같은 경험을 재창조해주기 위해, 저자 나자리오는 엔리케가 멕시코에서 했던 것처럼 기차 지붕에 몸을 싣고 가기까지 하며 온두라스부터 놀스캐롤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엔리케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르포타주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어머니가 떠난 고통을 그토록 겪은 후, 엔리케 자신조차 그의 딸에게 똑같은 경험을 안겨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후, 엔리케는 온두라스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출발하기 전 그가 짐작했던 바처럼, 마리아 이사벨은 임신한 상태이다. 2000년 11월 2일, 그녀는 카트린 자스민이라는 이름의 작은 여자아이를 출산한다. 아기는 엔리케를 닮았다. 입과 코, 눈매가 엔리케와 똑같다. 숙모가 아기를 돌봐주겠다며 마리아 이사벨에게 미국으로 가라고 부추긴다. 마리아 이사벨이 말한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난 갈 거야. 아기는 데리고 가지 않고 가겠어.” 엔리케가 동의한다. “아기는 포기해야 해.”’
이 르포타주를 발췌해 만든 책에는 찬사 일색의 비평이 쏟아졌다.(6) 예를 들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나자리오의 인상적인 르포타주는 이민에 관한 현 논쟁의 초점을 정치사보다는 개인사에 맞추게 했다”고 평가했다.(2006년 2월 22일)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주 현상의 주요 동기를 파악하게 해주지 못한다. 독자는 분명 엔리케가 느낀 감정을 아주 작은 하나하나까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엔리케가 어떻게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지는 알지 못한다.
이민의 논의를 위해서는 세계 경제와 국가의 여러 정책을 다뤄야 할 것
그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저널리즘이라면, 이민자들의 어려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넘어서서, 세계 경제의 구성과 미국 및 프랑스 같은 서구 국가들의 대외정책, 무역정책, 사회정책이 어떻게 남쪽 국가에서 북쪽 국가로의 이주를 불가피하게 만드는지를 분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프랑스-알제리인 사회학자 압델말렉 사야드(Abdelmalek Sayad)가 상기시키듯, 이민은 무엇보다도 이주이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는 무장단체와 민병대에 의해 25만 명이 과테말라와 살바도르, 니카라과 지역의 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1980년 미국 내 살바도르 출신의 이민자는 10만 명에 불과했으나, 이후 10년간의 전쟁과 분쟁을 겪고 나서는 50만 명에 달했으며 오늘날에는 백만 명을 넘어선 상황이다.
미국의 무역정책 또한 이같은 대대적인 이주 현상에 한몫했다. 1993년에 조인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멕시코인들의 생활 및 고용 조건을 개선시키기는커녕, 수많은 주민들, 특히 농촌 지역의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가게끔 압력을 가함으로써 빈곤과 위험을 가중시키는 데 일조했다. 미국 기업들은 이러한 멕시코 주민들을 맞이할 터전을 준비해 놓았다. 미국의 산업과 서비스 분야들이 이들의 노동 조건을 조정해 낮은 임금과 형편없는 혜택을 가지고 ‘유연한’ 일자리를 제시했던 것이다. 축산, 섬유, 건설, 요식, 호텔 등의 업계에서 미국 근로자들은 종종 해고되었고 임금이 훨씬 더 낮은 불법 이민자들로 대체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법제도가 훨씬 엄격해 일자리 문제가 덜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하기는 해도 역시 동일한 추론을 내릴 수 있다.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의 수많은 이민자들 또한 예전 식민지였던 국가들과 프랑스가 맺고 있는 불평등한 관계에 관련된 경제적 혹은 정치적 어려움으로 인해 자국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국제앰네스티의 토고 연구자 아르센 볼루비(Arsene Bolouvi)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프리카의 뿌리 깊은 불안 상태가 대대적인 이주를 부추기고 있다. 거의 하늘을 찌를 정도로 그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그 어떤 벽으로 이 현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국적 기업들의 음모, 무기 판매, 자원 통제,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 독재 정부, 이 모든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배고픔과 전쟁에 쫓기는 채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탈출을 시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민의 국제적 요인이 지닌 복잡성은 이민 문제를 개인의 멜로드라마 형태로 다루게 만들 우려가 있다. 게다가 이민 문제에서 국제적 요인을 언급하는 것은 민감한 이데올로기적 논의의 장을 여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왜냐하면 이 요인이야말로 정치계와 언론계의 대다수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는 현 경제 및 사회 제도의 편파성과 결함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강화되고 미국이 조종하는 여러 분쟁들이 중앙아메리카 대륙을 황폐화했던 반면, 이민의 국제적 요인을 언급한 언론 르포타주의 비율은 30퍼센트에서 12퍼센트로 떨어졌다. 한편 프랑스 언론들은 미국 언론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전체 기사 중 3분의 1에서 이민의 요인으로 세계경제를 언급하며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 수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같은 차이는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지성적·정치적 문화 한가운데에 반세계화의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민에 관해 이 두 나라의 미디어는 대부분 미완성의 그림밖에는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민 주제를 공포심이나 동정심을 이용해 그것이 지닌 감정적 차원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극우파의 자리를 굳건히 해주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시민들의 민주적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글·로드니 벤슨 Rodney Benson
뉴욕대 사회학교수. 저서로 <Shaping Immigration News : A French-American Comparison>(2014)가 있다.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 및 국문학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프랑스에서는 <르몽드(Le Monde)>, <르피가로(Le Figaro)>, <리베라시옹(Liberation)>, <TF1>, <프랑스 2(France 2)>,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 <로스앤젤레스타임스(The Los Angeles Times)>, ABC, CBS, NBC를 대상으로, 상반되는 내용의 언급은 제외한 채, 이민 주제에 할당된 기사를 분석하여 이 같은 퍼센티지를 도출했다.
(2) 일례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North of the Border’, <The New York Times>, 2006년 3월 27일 기사 참조
(3) ‘Une implosion statistique, une bombe dans l’imaginaire’, <Liberation>, Paris, 1983년 9월 9일.
(4) 저자와의 인터뷰
(5) 토드 기틀린(Todd Gitlin), <The Whole World Is Watching : Mass Media in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New Lef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1980.
(6) 소니아 나자리오(Sonia Nazario), <Enrique’s Journey : The Story of a Boy’s Dangerous Odyssey to Reunite with His Mother>, Random House, New York, 2006.
<보충기사>
언론이 이민문제를 다루는 법
기자 아르노 르파르망티에(Arnaud Leparmentier)는 2015년 4월 9일 자 <르몽드> 1면에서 “프랑스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그리스이다”라고 주장했다. 르파르망티에가 아무런 진전성 없이 이 논거를 급하게 갖다 댔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정도로, 이는 아주 케케묵은, 누구나 풀 수 있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은 얘기이다. 여기에 그는 “프랑스는 해가 지날수록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주의적”으로 되고 있으며 “세금과 공공지출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덧붙였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농담인 줄 알았다. 익살스러운 농담꾼인 르파르망티에가 <르푸앙>지의 끝없는 한탄조의 이야기나 세르주 다소(Serge Dassault, 우파 신문 <르피가로>지의 회장)의 <르피가로>지 연례 사설을 따라한 줄 알았다.
그런데 천만에. <르몽드> 편집부차장 르파르망티에는 가톨릭 주교 같은 진지함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고서 결론만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다. OECD는 르파르망티에 같은 사람들이 내뱉는 모든 걸 확인할 방도도 없이 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출처 아닌가. 일례로 2008년 4월 OECD는 아일랜드 은행들의 ‘건전한 재정 상태’와 ‘저항력’을 강조했지만, 몇 달 후 이 은행들은 국가 전체를 몰락으로 이끌며 도산했다. 어쨌거나 르파르망티에는 “프랑스의 노동법은 여전히 보호적 성격이 가장 강한 노동법 중 하나”이며,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거대한 그리스가 될 위험을 수반한다”고 유감스러워한다.
이처럼 그리스 파산의 예로부터 프랑스를 더더욱 우파적으로 통치할 필요성을 추론하는 기자들의 잔소리를 전부 헤아리려면, 웬만한 크기의 그물망으로는 건져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르파르망티에가 이 같은 주장을 하기 한 달 전, <르몽드>에서 <르푸앙>으로 곧바로 옮겨간 그의 옛 동료 피에르-앙투안 델로메(Pierre-Antoine Delhommais)는 열망이 좌절된 데에 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주 35시간 근로제에서 주 39시간 근로제로 되돌아가고, 퇴직 연령을 몇 년 더 늦추며, 공휴일수와 유급휴가일수를 줄이고, 청년 SMIC(최저임금제)을 도입하는 것. 사람들은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역주)가 이런 개혁을 우리에게 강요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매우 아쉬워할 것이다. 이러한 개혁이 언젠가 내부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봤자 소용없을 터이므로.”(2015년 3월 5일) 그래, 26퍼센트의 실업률과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 환자들이라니 그것참 멋질 것이다. 3년 전, 독일 타블로이드지 「빌드」(19페이지 올리비에 시랑(Olivier Cyran)의 기사 참조)가 이미 동일한 의견을 내놓았다. “프랑스는 새로운 그리스가 될 것인가?”(2012년 10월 31일)
비록 독창성 분야의 최고훈장은 포기해야 할 테지만, 르파르망티에는 ‘열정상’에 자신의 운을 다 걸고 있다. 그는 2002년 “유럽 국가들은 20년 전부터 잘못된 선택을 해왔다. 경찰, 사법, 군대, 행정 지출 등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지출(sovereign expense)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는데 (…) 반면 복지를 위한 지출(보건, 퇴직, 가족수당, 실업, 주택보조금, RMI(최저소득제))은 끝없이 늘어나고 있다”(르몽드, 2002년 6월 14일)며 개탄했다. 그리고 20년 전부터 르파르망티에는 계속 악담을 퍼붓고 있다.
1996년 : 물리넥스(Moulinex, 프랑스의 소형 가전제품 브랜드-역주)가 2,600명의 대량 해고 조치를 발표한 후 주가가 급등했을 때 르파르망티에는 이런 기사를 발표했다. “프랑수아 피용(전 국무총리, 프랑스 정치인. 당시 체신부장관으로 재직-역주)과 프랑크 보로트라(Franck Borotra, 프랑스 정치인이며 당시 이블린 도의회의장-역주)는 이처럼 가혹하지만 불가피한 구조조정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정치적 포퓰리즘을, 그리고 계제에 맞지 않는 개입주의를 보여주고 있다.”(<르몽드>, 1996년 6월 21일)
1997년 : 르노가 벨기에 빌보르드 지역의 공장 문을 닫자 증권가는 이에 박수갈채를 보냈고 르파르망티에는 해고 조치를 단행한 기업들에 대한 시장의 열광을 정당화했다. “수년간 방만한 경영을 계속한 기업들의 주가는 바닥을 쳤다. 마침내 지도자들이 전략을 바꾸었을 때 주가가 반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르몽드>, 1997년 3월 5일)
1998년 : 독일이 차기 내각을 선출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르파르망티에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검토했다. “통일한 지 8년이 지난 독일은 자국의 사회복지제도에 짓눌려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다. (…)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는데, 독일인들은 본인에게 제시된 일자리에 굉장히 까다롭게 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르몽드>, 1998년 9월 26일)
1999년 : 독일 대형건설사 필립 홀츠만(Philippe Holzmnn)의 도산으로 2만 8천명의 일자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der, 사회민주당 출신으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 총리로 재직-역주)가 중재를 시도하자 르파르망티에는 맹렬한 비난을 쏟아 부었다. “대선 기간 동안 근대성을 예찬하던 독일 총리는, 일부 독일 언론이 ‘어제의 고용구체잭, 그리고 사회적 시장경제모델의 고용구제책’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정책을 펼친다.” 그렇다면 건설 근로자들의 운명은? “건설 분야의 과잉 고용은 타파되어야 한다.”(<르몽드>, 1999년 11월 25일)
만약 이 기분 좋은 사회 프로젝트가 언젠가 저널리즘 분야에서 경제성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기자를 대신할 자동인형을 프로그램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글·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미디어비평행동단체인 Acrimed에서 활동 중이며, 대안 언론 <르플랑 베>를 발행하고 있다.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 및 국문학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