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국가폭력, 다시 ‘기억투쟁’으로

2009-06-04     정현백 | 성균관대 교수, 사학

 어찌 부엉이바위의 눈물뿐이랴. 멀게는 일제와 미군정 지배하에서 희생됐던 민간인들, 가깝게는 민주화운동이나 생존권 투쟁을 벌이다 스러져간 무명씨들. 그들의 절규가 잊혀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충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는 지난 5월 22일부터 이틀간 ‘글로컬 평화인문학’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폭력·기억·사회정의’를 제1세션 주제로 다뤘다. 여기서 ‘기억투쟁’으로 주제 발표를 한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의 발제문과 이와 관련된 종합토론 내용을 간추려 싣는다. 편집자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기억투쟁’

발표/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사학
 
한국은 서양 근대사와 관련해 에릭 홉스봄이 언급한 ‘이중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국가에 해당한다. 민주화에 성공했고, 산업화도 이뤘다. 하지만 그 경제성장이 불안정성을 내포한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화도 정치적 이념을 둘러싼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정체성의 중심에 놓인 것이 과거 청산 문제다. 지금 집권 여당은 의회에서 과거사 청산 관련 법안 수정을 기도하고 있다.

권력의 망각 시도에 맞선 ‘기억 문화’

 민주화가 타협의 결과로 달성되면서, 과거 청산은 불완전한 형태로 진행됐다.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던 국가권력은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했고, 이것은 국민들 속에 공식적인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가권력은 특정한 기억을 보존하고, 특정한 기억을 망각 속으로 묻어버리려는 집요한 시도를 했다. 국가가 만들어낸 공식적인 기억에 저항하고 이를 민주화운동이 간직해온 비공식적인 기억으로 대체하려는 본격적인 노력이 199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의해 지난 10년간 적극적으로 추진돼온 이런 움직임은 ‘기억투쟁’ 담론으로 불린다.
 2001년 결성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제 과거 청산 작업이 진실 규명과 배상을 넘어 정당한 ‘기억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본격적인 출발을 의미한다. 이런 제도화 과정은 과거 청산과 기억투쟁이 좀더 본격적인 발전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이를 둘러싼 많은 갈등과 쟁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선 기억투쟁이 제도화되고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념사업이 관료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또한 국가나 지방정부와 민간단체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누구의 기억이 공적 영역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벌어지게 된다.

 광주 민중항쟁의 경우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이룬 큰 사건이지만 광주에 대한 기억투쟁은 그 지역민의 축제로 남은 채, 국가적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군부독재가 의도적으로 확산시킨 지역갈등의 메커니즘에 의해 기억투쟁 자체가 그 왜곡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제도화 단계 이후에 생긴 또 다른 문제점은 피해자 집단과 민주화운동 세력 사이의 갈등이다. 이는 민주화운동을 ‘희생자 및 그를 둘러싼 과거 기억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와 ‘보다 보편적인 국민의 기억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 사이의 미묘한 각축전이었다. .

국가주의로 왜곡된 기념 공간 구성

 기억투쟁은 정치운동일뿐 아니라 문화운동이기도 하다. 아직도 진실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들을 국가정보원이나 경찰과 같은 정보기관이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고, 피해자나 참여자의 증언 채록도 더 필요한 실정이다. 그렇더라도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의 기억문화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것은 민주화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 민주화운동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억, 즉 과거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의 표준화,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표준화에 맞서 대항기억을 표현하고, 대안적인 상징을 형상화하려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증언, 의례, 기념일 제정, 기념물 조성 등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기억투쟁의 방식은 개인적 실존의 의미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기억을 재현할 것인지가 중요한 관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문화가 어떻게 좀더 국민에게 가까이 갈 것인가의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 외에도 그동안 부산, 광주 등에서 건립된 기념물이나 기념문화가 지닌 문제점에 대한 자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미 건립된 민주화운동의 기념공간, 예를 들면 4·19 묘지, 부마항쟁 기념공원 그리고 5·18 광주항쟁의 기념공간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에 따르면, 이들은 국가권력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기념물이지만 군부독재 치하에서 건립한 국가주의적 기념관의 구성 원리를 그대로 반복해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의 거대한 기념탑과 좌우 대칭형의 공간 구성, 제단의 위계적 배열 등이 그대로 드러나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거대주의, 국가주의, 과도한 민족주의, 남성주의, 획일주의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독재에 대한 침묵 환기 시켜야

 우리의 기억투쟁은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기억문화는 세 가지 차원을 포괄해야 한다. 첫 번째는 독재와 억압의 역사다. 과거의 지배세력이 만들어낸 기억 속에서 지도자의 학살과 부패는 주변화되고, 독재자는 미화됐다. 독재와 억압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독재자의 잔혹성과 피해자의 고통을 알려야 한다. 둘째는 독재와 억압에 저항했던 투쟁과 아름다운 희생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셋째는 독재와 억압에 대한 침묵을 환기하는 일이다. 독재와 인권 탄압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다수의 침묵과 방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기억문화는 대중이 방관의 역사적 책임을 공유하게 해야 한다. 기념의 핵심은 계승이다. 한국의 기념사업은 교육사업과 세대 간 경험의 계승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기억투쟁을 주도하는 조직들은 민주주의 교육과 민주화운동 교육을 시작하고 있다.


[종합토론 요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하고 미래와 관련시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역사 교육을 통해 과거 세대의 억눌렀던 경험을 되살리는 기억의 정치화 작업이 있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과거의 중요한 문제라고 하지만, 현재의 문제보다 중요하진 않기 때문이다. 공감의 문제다. 과거의 기억을 과거의 일만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면, 현재와 미래와 어떻게 관계돼 있는지 연결해주는 것이 공감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문제는 모든 문제를 개인화·현재화한다. 현재의 문제와 과거의 문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차단하고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공감이다. 경험을 통해 공감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공동 경험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 과거에 있었던 폭력이 현재 되살아나고 있는 상황이다. 폭력의 희생자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과 같은 과거의 경험을, 지금 진행되는 폭력의 문제를 경험하는 속에서 기억하고 연결하며 공감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교사와 역사학자들의 임무다.


 청중: 비주류의 기억, 개인적인 기억을 끌어올리고 교육현장으로 옮겨놓으면, 결국 그것은 주류의 기억이 되면서 의미를 상실하고 획일화되는 것 아닌가? 동아공동체라는 것이 결국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로 이해한다면,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 공동의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김동춘 교수: 기억이 정치화·독점화하면 문제가 생긴다. 광주의 기억이 광주에서 주류가 되면서 생기는 문제가 있다. 기억이 주류가 되면서 생기는 폭력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기억의 인간화·보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 미래를 말하면서 과거의 문제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좋은 세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이다. 평화를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관계와 소통 방법을 좀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탈근대의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다.
 라스 람브레히트 함부르크대 교수: 기억 문제에 관한 제안을 하겠다. 한 가지 종류의 획일적인 기억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기억의 내용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승자와 패자, 다수자와 소수자의 기억이 다르다. 베를린의회 앞에 홀로코스트 기념물이 세워졌다. 그러자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했던 집시족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 동성애자들도 자신들의 기념물을 세우겠다는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 폴란드 지역에서 독일로 추방됐던 사람들이 실향민으로서 자신들을 기억하는 기념관을 세워달라는 운동을 시작했다. 결국 기억이 각 그룹의 투쟁으로 전화된 경험이 있다.


 정리 한광덕 국내 편집장 kdhan@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