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알제리로부터 버림받은 프랑스 부역자 '아르키'
알제리 독립 이후 몇 달 간, 프랑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아르키(알제리 무슬림 출신의 프랑스 보충병)’ 수천 명이 학살됐다. 살아남은 아르키 출신 대부분은 여전히 알제리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양국의 단순한 입장차 이상으로 복잡 미묘한 알제리 식민지 역사의 산 증인 아르키는 거의 제도적 차원에서 사회적 추방형을 당하며 살아간다.
알제리 북서부 극단에 위치한 틀렘센을 떠나 우리는 남쪽으로 향했다. 도로는 차츰 고도가 높아졌고, 이어 가파른 경사로가 굽이굽이 이어졌다. 주위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장관을 연출했다. 바위산에 들러붙어 있는 이곳저곳의 민가에서 사람들은 손바닥만한 밭 하나와 가축 몇 마리에 의지하며 소박한 삶을 일구어가고 있었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산악지대의 황량한 풍경 위로 그저 휴대폰과 위성 안테나, 현대식 가옥의 잿빛 콘크리트 이음돌 등 몇 가지 현대 문명의 흔적이 눈에 띌 뿐이었다.
우리는 베니 바흐델에 도착했다. 틀렘센에서 사십여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마을은 ‘프랑스 사람들’이 지어놓은 거대한 댐으로 유명했다. 일흔 아홉 살의 아브데라만 스누시는 염소 몇 마리와 함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삶을 이어간다. 매일 아침이면 그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집안 소유의 땅으로 염소들을 데려가 풀을 먹인다. 알제리 독립 전쟁 기간 중 1959년에서 1962년 사이 ‘아르키’로 활동했던 그는 이와 관련한 기자 인터뷰 요청을 처음으로 수락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여기에 꽤 규모가 큰 부대를 구축했었습니다. 주둔하는 병사만 최소 800명이었으니까요. 2차대전 때 참전했던 아버지는 이곳에서 통역업무를 맡으셨고, 이후 1955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사람들 손에 돌아가셨어요. 당시 내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죠. 그로부터 4년 후, 프랑스 군인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내 아내를 볼모로 잡고 부대로 들어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아내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결국 나는 아르키가 됐습니다.” 이곳 진지에 배속된 병사들 가운데에는 ‘피에르 쿠에트’라는 파리 출신 소집병이 있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부모님께 보낸 수많은 편지에는 알제리 현지인들이 겪어야 했던 갖은 “수모”와 “불필요한 탄압”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이 편지에 따르면 체포된 알제리 해방군 대원 및 그 아내에 대해, 혹은 이들을 도와준 것으로 의심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베니 바흐델 지역의 군 정보부 장교가 걸핏하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실시했다고 한다.(1) 스누시는 이 고문의 현장에 있었을까? 나아가 직접 고문에 가담하기도 했을까? “단언컨대 결코 그런 적은 없었어요. 우리 부대는 매복이나 수색 업무 등을 전담했습니다. 포로를 잡으면 군 정보부로 데려가긴 했지만, 그 자리에 남아 있지는 않았어요.” 1962년 3월 19일 휴전 당시, 사령관은 아르키들을 소집한 다음 이렇게 얘기했다. “프랑스로 떠나고자 하는 자는 떠날 수 있고, 이곳에 남아 있고자 하는 사람들은 남아있어도 된다.” 스누시는 남아 있는 쪽을 택했다. “가족들이 다 여기에 있었죠. 어머니, 형제 모두 다 이곳에 있어서 가족들을 져버릴 수 없었어요.” 프랑스군대가 알제리를 떠난 뒤, 알제리 해방군대원들이 산에서 내려왔다. “이들은 우리를 시디 라르비 병영으로 끌고 갔어요. 산 반대편에 있는 곳으로, 여기에서는 30km 정도 떨어져 있죠. 예전에는 프랑스 병영이었는데, 이후 민족해방전선의 군 조직인 민족해방군(ALN)이 회수했어요.” 1962년 4월 경, 스누시는 이곳에서 2주간 지냈다. 스누시 이외에도 각지에서 끌려온 아르키들은 모두 400여명에 달했다. “해방군 측에서는 우리를 조금씩 내보내주었고, 나 역시 마을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베니 바흐델의 아르키는 나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 명이었어요. 이들 모두 아직 이 마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스누시는 알제리 독립 후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살던 대다수 아르키 중 한 사람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아르키까지 포함하여 그 수는 수십 만 명에 달한다(박스 기사 참고). 아르키 관련 전문가 중 하나인 사학자 아브데라멘 무멘에 따르면 “50년 전부터 아르키는 프랑스로 도피하던지, 아니면 알제리에서 떼죽음을 당하던지 두 가지 선택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 번째 선택지가 존재했다. 독립 이후 (감금, 학살, 사회적 소외 등) 일부 아르키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감내하며 알제리에 남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옛날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같은 선택이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반세기 전부터 이들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아르키 학살’을 이용해왔다. 그리하여 이를 근거로 ‘알제리는 역시 놓지 말아야 했다’고 주장한다거나 ‘아랍인들은 모두 학살자이자 테러리스트이다’라고 떠들어댔다.
알제리 전쟁 이후에 소탕당한 아르키들
물론 1962년의 상황에서 수개월 간 프랑스 군복 입은 모습을 뽐내다 다시 고향에 돌아가기로 한 아르키의 결정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알제리 전역에서 취합한 60여개의 증언들은 대개 비슷했다. 일단 휴전이 공포된 후, 그리고 특히 알제리 독립일인 7월 5일 이후, 프랑스 군대는 알제리에서 철수한다. 그러자 뒤늦게 의협심이 발동한 의용부대가 등장했고, 일부 해방군대원들도 이에 가담한다. 휴전이 공포된 것이 3월의 일이었기 때문에 일명 ‘3월단’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람들은 수많은 아르키들을 체포하고 친불 성향의 인사 및 군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인다. 3월단에게 있어 아르키 소탕 작전은 (전쟁이 끝난 상황이었으므로) 위험 부담 없이 영웅 행세를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여러 마을에서 인민재판이 진행됐고, 사람들은 그동안 이런 저런 아르키들에게 당한 고초와 수모에 대해 증언했다. ‘재판’은 약식으로 이뤄졌고, 처형된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카빌리 지방의 아크부 인근 티프리트 마을에서 만나 본 아르키 출신 하센 데르위시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1962년) 9월 말, 몹시 흥분해 있던 남자들 무리가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마을로 달려와서 아르키를 잡아들였죠. 대개는 ‘3월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지드’라는 사람을 포함하여) 아르키 일곱 명을 체포했어요. 우리를 다 죽이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민족해방군 쪽 사람이 하나 와서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직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을 왜 죽이려 하느냐고. 또 어차피 국민들 앞에 세울 것이니 잘못한 게 있다면 그때 가서 단죄할 것이라고, 지은 죄가 없다면 무엇 하러 죽이느냐고 했어요.”
다음 날 아침, 일곱 명의 아르키들은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 네 시간 동안 서 있어야 했다. 하센 데르위시의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백여 명 쯤은 족히 됐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들은 일말의 동정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같은 마을 사람이 목전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은 보려하지 않았으니까요. 다들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이기도 했고….” 결국 마을사람 하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부지드 녀석 하나만 빼면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 만일 그를 풀어주면 내가 가서 저 자를 처단할 것이다.” 이장은 “어느 한 집만 불행에 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다 국가에 넘겨야 합니다. 국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것”이라고 했다. 데르위시는 “이 부지드라는 사람 때문에 다들 곧 바로 풀려나지 못했던 것”이라고 했다. 일곱 명은 모두 아크부 유치장에 구금된 뒤, 한 달 후 알제에 있는 엘 하라시 중앙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곳에서 데르위시는 다른 천 오백 명의 포로들과 함께 4년을 보낸다. “가혹 행위 같은 것은 없었지만 재판 따위는 거치지도 않고 거기에 갇혀 언제 나갈 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갔죠.” 1966년, 데르위시는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알제리 남부 우아르글라 쪽에 가서 도로 건설 작업도 해야 했다.(2) 결국 그는 1969년에 석방되어 고향인 티프리트로 돌아간다.
상당수의 아르키들은 직접적으로 인민재판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민족해방전선의 강압 취조를 받아야 했다. 왜 대불협력을 했느냐, 민간인을 괴롭혔느냐, 해방군 대원을 고문하였느냐 등 질문은 언제나 똑같았다. 1962년 당시, 가니 사루브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시디 벨 아베스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보덴스(오늘날의 벨라르비)에서 농촌 지역 감시원으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전쟁 막바지의 6개월 간 마을의 프랑스 헌병대 보조근무를 맡는다. 1962년 7월 10일 경, 보덴스 주위에서는 대대적인 아르키 검거가 이뤄졌고, 가니 사루브는 르포르 농장(3)에 강압적으로 끌려갔다. “이 농장에 있던 아르키는 나를 포함하여 대략 60여명 정도였습니다. 나보다 먼저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흘 간 우리를 때리고 고문했어요.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예전에 프랑스 사람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의 고문이 이뤄진거죠. 사람들은 내게서 어떤 독립운동가 하나를 죽였다는 실토를 받아내려 애를 썼습니다. 예전에 프랑스 헌병대에 잡혀온 사람이었는데, 당시 내가 현장에 있긴 했지만 그 사람을 죽인 건 내가 아니었어요. 다른 어떤 헌병 하나가 이 사람의 하복부를 가격했는데, 그만 내출혈이 생겨 목숨을 잃었어요. 다만 너무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나는 그 사람을 내가 죽였다고 자백했어요. 그러나 이후 다른 아르키들에 대한 취조가 이어졌죠.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죠. 결국 나흘간의 취조 끝에 우리는 모두 풀려났어요.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어요.”
과거 아르키로 활동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1962년 가을은 가장 힘든 시기였다. 알제리 독립전쟁의 영웅들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고, 이에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 이 틈을 타서 폭력과 난투극이 기승을 부렸는데, 간혹 전쟁과 아무 상관없이 폭력 사태가 빚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우아리 부메디엔 대령과 그의 막강한 국경 부대의 지지에 힘입은 아흐메드 벤 벨라는 1962년 9월 29일 마침내 정부를 수립하고 알제리 초대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그 후로도 몇 달이 더 지난 후에야 비로소 경찰 권력이 바로 세워지며 범죄를 총괄하고, 특히 아르키에 대한 범죄를 차단할 수 있게 된다(물론 이를 차단하고자하는 의지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1963년 6월 4일, 벤 벨라 전 대통령은 얼마 전 아르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던 오랑에서 성명을 발표한다. “알제리에서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알제리에는 13만 명의 아르키가 있으며, 우리는 이들을 용서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스스로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면서 상대가 아르키라는 이유만으로 고작 시계 하나를 빼앗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범죄자는 모두 체포됐습니다. 앞으로는 준엄한 법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같은 범죄 행위는 처형으로 단죄할 것입니다.”(4)
사회의 그늘에서 살게 된 아르키들
아르키에 대한 물리적 폭력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실질적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만나 본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지난 50년 이상 자신과 그 가족들이 받아 온 사회적 수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들은 알제리 국민으로 살아가면서도 온전히 알제리 국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꽤 심할 정도의 사회적 신분 강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이들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스크라 북부의 므슈네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레스 지역 농민 아트만 붓자자도 이에 해당했다. 1957년, 그의 가족은 강제로 끌려 나와 다른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프랑스군의 대규모 수용소로 보내졌다. 지하 독립 운동가들이 하루이틀 밤 묵기 위해 숨어들어갈 만한 동네 뒷산을 모조리 수색하기 위해서였다. 말 그대로 아사 직전 상태였던 어린 아트만은 결국 아르키에 지원한다. “어머니와 동생에게 뭐라도 좀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단다. 부친은 이미 1954년에 돌아가신 후였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 므슈네시를 찾은 그는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땅 하나를 얻어 살면서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 시절 일자리를 배분해준 건 바로 민족해방전선이었어요. 내 경우, 국가직 일자리는 결코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50년 전부터 그는 여기저기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며 극도의 빈곤 속에서 근근이 살아왔다. ‘더러운 아르키 놈’이라는 이유로 사장에게서 돈을 못 받는 것은 물론, 언제 해고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다섯 자녀 가운데 일자리가 정해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네 딸들 역시 모두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는 찾지 못했다. 그중 사회학 석사학위를 갖고 있는 마흔 살의 카디자에 따르면 “알제리에서는 대학을 나왔더라도 연줄이 있어야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어요. 추천이 필요한 것이죠. 아버지는 인맥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아르키 출신이었어요. 아르키의 자식에게는 결코 일을 주지 않아요.”
서러운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은 비단 이 집만이 아니다. 파티하 람리는 1993년, 오랑 남부로 100킬로미터 쯤 떨어진 타비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군에서 하사를 지낸 부친은 전쟁이 끝난 후 타비아에 있는 처가로 돌아와 이곳에서 지냈다. 식민지 시절 시의원을 지낸 장인은 1958년 민족해방군 손에 목숨을 잃었다. 부친은 1962년 가을 몇 주 동안 강제노역을 하며 갖은 구타와 가혹 행위를 당했는데, 그러고 난 후에는 그의 삶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2012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학교에서는 나를 ‘아르키 자식’으로 취급했죠. 마음이 아팠어요. 고등학생 때는 진짜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이 친구들은 우리 아버지가 아르키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속내를 다 털어놓는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친구들과의 사이에서는 문제될 게 없었어요. 다만 다른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아르키 딸년’으로 취급했어요. 나는 참을 수가 없었고, 이에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됐어요.” 같은 반 친구들 중 파티하 같이 부모가 아르키 출신이었던 경우는 모두 세 명이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3천 디나르에 달하는 월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알제리의 모든 고등학생들에게는 매달 3천 디나르(약 3만 5천원) 정도의 교육 수당이 지급된다. 참고로 알제리의 한 달 최저임금은 180유로(약 21만원) 수준이다. “우리 반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다 지원금을 받았어요. 심지어 부잣집 애들도 이 돈을 받는데, 우리만 못 받았어요.”
하지만 아르키 출신이나 그 자녀들이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이나 수당을 받을 수 없도록 금지한 법 조항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알제리 법 그 어디에서도 ‘아르키’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르키에 대한 용서를 가장한 이 침묵은 잔인할 정도로 아르키 가족의 발목을 잡는다. 제아무리 말단 공무원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다면 자기 맘대로 규정을 적용할 수 있으며, 대개 이는 ‘배신자’로 취급되는 이들에 대한 차별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배신자’들은 스스로를 항변할 수도 없다. 아르키의 명확한 범위를 한정짓고 이들이 어떤 부분에 대해 실질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지 명시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 지원책이 폭넓게 발달해 있는 알제리에서는 구청에 가서 절차를 밟아야만 각종 자격증과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아이들의 교육 실습이나 사회보험, 의료보험 혜택을 받기 위해서도 관련 수속을 밟아야 한다. 그런데 각 마을에서는 혁명 기간 동안 누가 무엇을 했는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아르키와 그 자녀들은 언제든 행정당국으로부터 사회복지서비스 지원을 거부당할 수 있다. 해방군과 순국선열에 관한 1999년 4월 5일 법에서는 아르키를 암시한 구절이 한 군데 발견되긴 한다. 동 법의 68조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해방 혁명 기간 동안 조국의 이익에 반하는 입장에 있던 사람들과 비열한 행동을 한 자들의 경우에는 현행법에 의거하여 시민권과 참정권이 상실된다.”(5) 하지만 굉장히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법의 그 어떤 시행령도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법의 시행을 위한 법적 장치가 없으므로 이 법은 사장된 법이나 다름없다. 다만 이 법은 관할 구역의 아르키(및 그 자녀)를 상대로 하급 공무원들이 임의로 불이익을 주는 것에 대해 모호하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알제리 독립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 알제리 내에서 아르키 문제는 여전히 터부시되고 있다. 역사학자 실비 테노는 “현 정부의 권력에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고 설명한다. “정부는 해방군의 활동을 높이 사고, 이어 민족해방전선 기치 아래 단결한 국민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독립 전쟁 영웅담을 제도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구축했다. 이 같은 담론에서 아르키의 수는 (현실과 달리) 크게 줄어들고, 이들은 부득이하게 배신자의 역할을 맡는다.” 알제리 역사 교과서가 알제리 독립전쟁을 다루는 방식에 관한 주제로 학위 논문을 쓴 리디아 아이트 사아디-부라스에 따르면, 교과서 내에서 아르키는 “프랑스 군대의 앞잡이가 되어 알제리 민간인에 대해 온갖 비열한 잡일을 다 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리디아가 인용한 9학년(한국의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서는 아르키가 “마을을 포위하고 방화를 저질렀으며,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인 다음 재물을 빼앗았다. 아르키들은 청년과 노인들을 군부대로 끌고 간 뒤, 프랑스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이들을 고문했다”고 적고 있다.(6) 그 결과, 알제리 중고등학교의 쉬는 시간 중에는 ‘아르키 자식(Ould harki)’이라던가 ‘아르키 놈(Espece de harki)’ 같은 모욕적인 언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아이들이 분명 전쟁과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의 언어 세계에서도 이 용어는 정치적 책임자를 깎아내리는 의미로 사용되며, 보다 포괄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이나 다른 나라의 이득을 위해 일하면서 알제리의 국익을 해치는 정부 권력자를 폄하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2013년 민주문화연합(RCD) 정당의 사이드 사디 대표는 알제리 북부 타즈말트 시의 스마일 미라 시장을 고소했는데, 이유인즉슨 스마일 미라 시장이 감히 텔레비전 방송에서 자신의 부친 아마르 사디가 아르키였다는 투로 말을 했다는 것이다.(7) 알제리 기자 입장에선 이 노장의 정치가들을 찾아가 취재를 요청할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대학에서도 감히 아르키를 논문 주제로 선택하는 학생은 없다.
이렇듯 아르키에 대한 편견이 굳어진 상황에서 아르키 자녀들은 나라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타즈말트 시의 스마일 바지는 올해 나이 여든으로, 1956년에서 1962년 사이 아르키로 활동했다. 현재는 두 아들인 자멜 및 자히르와 함께 알제리에서 살아간다. 2004년부터 두 아들은 주 알제 프랑스 영사관을 상대로 계속해서 국적 취득 절차를 밟고 있다. 이들은 아르키 자녀라는 지위를 이용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권 적용을 받지 않을까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프랑스 국적법의 원칙은 속지주의가 아니던가. 나는 1960년에 프랑스 영토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프랑스 국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인가?(8) 게다가 우리는 국가유공자의 자녀들이다. 할아버지는 프랑스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수여받으셨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건 아무 것도 없다. 알제리 쪽에서도 프랑스 쪽에서도 우리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가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프랑스로 들어가는 문도, 알제리로 들어가는 문도 우리 앞에선 모두 닫혀있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대학에서 문학 전공 교수를 지낸 뒤, 1999년부터 오스트리아 주재 <르몽드>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리베라시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최후의 금기 - 알제리 독립 이후 현지에 남은 '아르키'들>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1) 피에르 쿠에트Pierre Couette, <알제리 서신집(Lettres d’Algerie)>, http://germaincoupet.fr
(2) 일부 아르키들은 모로코와 튀니지 국경 지역의 지뢰 제거 작업에 할당되기도 했다. 대개는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Cf. Fatima Besnaci-Lancou, <죽음으로 내몰린 아르키(Des harkis envoyes a la mort)>, L’Atelier, Paris, 2014.
(3) 르포르Lefort는 프랑스의 예전 식민지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그 이름의 정확한 철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4) 1963년 6월 4일의 아에프페 통신 속보로, 일간지 <르 몽드>가 1963년 6월 5일 ‘벤 벨라 대통령 오랑 선언: 아르키 살인범 처단될 것(Les assassins de harkis seront executes, declare M. Ben Bella a Oran)’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시 게재.
(5) 1999년 4월 5일 법 제99-07호, 1999년 4월 12일 알제리 공화국 관보에 게재.
(6) 리디아 아이트 사아디-부라스Lydia Ait Saadi-Bouras, ‘알제리 교과서에 묘사된 아르키(Les harkis dans les manuels scolaires algeriens)’, <1962-2012 아르키, 그 신화와 실제(Harkis 1962-2012. Les mythes et les faits)> 中, <레 탕 모데른(Les Temps modernes)> 제666호, Paris, 2011.
(7) <리베르테(Liberte)>, Alger, 2013년 12월 22일.
(8) 드골 정부는 1962년 7월 21일 법령에 의거, 알제리의 모든 ‘무슬림’들로부터 프랑스 국적을 박탈했다.
<보충기사>
'아르키'라는 이유로 자행된 폭력
‘운동’ 혹은 ‘움직임’을 뜻하는 ‘하라카haraka’에서 유래한 단어 ‘아르키harki’는 원래 프랑스 군대가 무슬림 인구 중에서 모집한 다섯 개 보충병 그룹 중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만 가리켰다. 나머지 네 개는 모카즈니mokhaznis와 치안 기동대, 자위대, 아사스(수비대) 등이다. 1954년부터 1962년까지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아르키는 차츰 다섯 개 보충병 그룹 모두를 칭하는 용어가 됐다. 저마다 맡고 있는 지위와 업무도 꽤 비슷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다들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었어도 군인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간혹 현지 군사 작전에 참여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언제든 보직을 철회할 수 있었으며, 전투병이라기보다는 막대한 급여를 받는 행정직 군인에 해당했다(이들은 매월 2만 5천 프랑 정도를 받았으며, 참고로 그 당시 프랑스의 식민 농원에서 일하던 알제리 농민 노동자는 1인당 3천 프랑 정도를 받았다).(1)
알제리 전쟁 기간 동안 보충병으로 복무한 알제리인의 수는 약 2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하지만 프랑스 군복을 입은 이는 비단 이 무슬림 보충병 뿐만은 아니었다. 알제리 청년 중 50%가 소집에 응했으므로 소집병의 수만 해도 12만 명에 달했고, 5만 명 가량은 직업 군인이었다. 여기에 (국회의원, 시?도의원, 시장, 구청장, 지방관리 ‘카이드’, 경찰, 공무원 등) 공공연히 프랑스 편에 섰던 민간인 3만 명까지 더하면 전쟁 중 프랑스 사람과 함께 ‘일을 했던’ 알제리 성인 남성의 수는 모두 45만 명에 이른다. 알제리 독립 후 이들은 모두 과거의 부역 행위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다.(2)
1962년 여름과 가을 동안 자행된 학살의 피해자들 중에는 보충병과 소집병, 군인, 민간인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오늘날 알제리에서 매우 모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 ‘아르키’라는 용어는 알제리 혁명전쟁 기간 중 프랑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구분 없이 지칭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아르키 중 학살된 사람의 명확한 수는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 들어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프랑수아자비에 오트뢰에 따르면, “사실에 대한 집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수치는 불확실해지고, 학살자 수에 대해서도 그저 ‘수천 명의 알제리 사람들’ 정도로 정확한 수치 없이 모호하게 지칭한다.”(3) 반면 프랑스로 떠난 아르키의 수는 정확히 2만 5천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사학자 질 망스롱은 “아르키로 복무한 전력이 있거나 전쟁 중 한 때 보충병 훈련을 받은 사람들 중 대다수가 알제리 독립 후 가족들과 함께 계속해서 알제리에 잔류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곧 제아무리 불화와 침묵으로 얼룩진 역사라 할지라도 엄연한 알제리 역사의 일부에 해당함을 뜻한다.” 하지만 지중해를 사이에 둔 프랑스와 알제리 양측은 이 자명한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하다.
(1) 그중 자위대는 급여를 받지 않았으며, 의무 징집병은 매월 900프랑 정도를 받았다.
(2) 항불운동가와 무장투쟁군, 병참 지원 세력으로 구성된 인민해방전선 진영도 거의 비슷한 수의 성인 장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3) 프랑수아자비에 오트뢰Francois-Xavier Hautreux, <1954-1962 아르키의 알제리 전쟁(La Guerre d’Algerie des harkis, 1954-1962)>, Perrin, Paris,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