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통해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철학자가 5월의 푸른 청년들에게

2015-04-30     이정우

청년기에 접어든 여러분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 중 하나는 아마도 ‘나’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고민은 삶에 항상 따라다니는 화두이지만, 특히 20대 나이의 여러분들에게는 핵심적인 화두일 것입니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고, 또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일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좀 다릅니다. ‘나’ 역시 ‘인간’의 한 요소이므로, 인간에 대한 파악은 곧 나에 대한 파악이 됩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인간이라는 일반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는 부분 못지않게 오로지 나의 고유한 측면에서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나를 규정하고 있는 측면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동시에 그런 측면들로 해소되지 않는 나 고유의 측면들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란 객관적 ‘인식’과 주관적 ‘창조’가 얽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결여될 경우 우리는 주관적인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후자가 결여될 경우 우리는 고유한 나를 만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죠.
 

인식/공부의 필요성과 한계

우선 첫 번째 측면을 생각해봅시다. 나라는 존재의 ‘~임’을 알아가는 과정을 우리는 ‘공부’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공부의 의미는 이미 많이 몰락했지만, 공부라는 개념의 본래 의미는 이런 것이죠. 특히 대학생들인 여러분들은 세계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공부합니다. 언어학자들은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의 심층적인 메커니즘을 밝혀 보여줍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우리의 무의식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경제학자들은 우리 사회의 경제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분석해줍니다. 물리학을 통해서는 사물들이 여러 작은 입자들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또, 생물학은 우리 몸이 세포로 되어 있다든가 DNA를 통해서 유전을 한다든가 하는 사실들을 알려주죠. 이외에도 숱한 형태의 과학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런 지식들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앎을 넓혀나갈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공부들에 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그렇구나 하고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다소 거리를 두고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나와 세계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단과 혼란만 가중되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인 지식을 전체적인 지식으로 오해함으로써 독단이 쌓이고, 수많은 지식들을 정리하지 못함으로써 혼란에 휩싸입니다. 내가 살았던 20대를 추억해 보면 바로 그런 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식/과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반성한다는 것은 곧 이런 지식들을 아무리 쌓아도 해소되지 않는 한 가지, 아니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런 과학적 사실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궁극적으로 ‘나’, 이 고유한 나는 이런 사실들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동원해도 완전히는 해소되지 않는 그 어떤 나가 있다는 것이죠. 20세기 중엽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은 이런 고유한 나의 존재 방식을 ‘실존(existence)’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주체성(subjectivity), 이것이 곧 실존이죠.

또 하나, 과학적 지식들이 제시하는 내용이 다양해서 어떤 궁극적 지식으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과학은 모두 인간을 어떤 특정한 틀로 환원해 설명해주지만, 문제는 그 틀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끔씩 어떤 틀이 기존의 틀을 포괄함으로써 과학적 발전을 이루기도 합니다만(마르크스의 ‘타자’ 개념이 푸코의 ‘타자’ 개념에 포괄된다든가,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이 리만 기하학으로 포괄된다든가, 열역학이 통계역학으로 포괄되는 경우 등. 바슐라르는 이런 포괄을 ‘enveloppement’이라는 개념으로 논했습니다), 이런 일은 매우 드뭅니다. 어떤 하나의 틀로 다른 틀들을 환원해 설명하려 하는 것을 ‘환원주의(reductionism)’ 즉 어떤 일정한 원리들을 설정해 놓고서 모든 것들을 그리로 소급시켜 설명하려 하는 입장이라고 합니다만, 그 어떤 환원주의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사변을 통해서 환원주의를 시도했고, 최근에는 예컨대 뇌과학이니 동물행동학이니 하는 분야들을 비롯한 생명과학을 동원한 환원주의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들의 다원성은 어느 하나의 틀로 결코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그중 어느 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요컨대, 한편으로 어떤 지식들을 동원해도 ‘나’는 온전히 해소되지가 않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런 지식들 자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 아니 그 이전에 개개의 개별적 존재, 개체, 개인 등은 그 어떤 틀로도 온전히는 환원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지식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일까요? 물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지식들이 ‘나’를 온전히 해명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각각의 과학은 인간의 어떤 측면을 매우 잘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주관적인 상상과 착각에 빠진다면, 이는 곤란한 일이죠. 자신의 주관을 넘어 객관적인 지식을 쌓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자의적인 주체성의 환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식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하면 많이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 가능한 한 많이 공부하는 것이 좋을까요? 어느 한 지식만을 잘 아느니 차라리 지식이 없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없이 단순한 상식에 따라 사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이지만, 최소한 독단에 빠지지는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느 한 지식만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그 지식만으로 세상을 보고, 오로지 그 지식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오히려 몰상식한 인간이 되기 십상입니다. 생물학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인간의 언어, 문화, 역사, 정신 등등은 도외시하고 덮어놓고 뇌의 운동이니 세포의 분열이니 DNA니 하는 것들을 가지고서 세상을 봅니다. 정신분석학만 공부한 사람은 덮어놓고 무의식이니 하는 것들을 동원해서만 사람을 봅니다. 특정 과학만을 공부한 사람은 지식의 어떤 한 영역에서는 성과를 낼지 몰라도, 삶 전체, 인생 전반에 대해서는 차라리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그래서 공부를 할 때 가능하면 여러 분야, 여러 관점, 여러 틀을 많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그 수많은 지식들을 어떻게 균형 있게 건강하게 섭취할 수 있을까요? 이 맥락에서 특히 중요한 두 학문이 역사와 철학입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와 철학을 통해서 다양한 지식을 종합하고 거시적 안목을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야들은 어느 특정한 영역을 다룹니다. 물리학은 물질을, 생물학은 생명체를, 경제학은 경제 현상을, 언어학은 언어를 다룹니다. 하지만 역사와 철학은 모든 분야들을 종합해서 삶 전체를 바라보는 거시적 비전을 주는 분야이고, 때문에 늘 이 두 분야를 중심에 놓고서 다른 지식들을 종합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지식은 시간이 흘러가면 역사가 됩니다. 언어학은 언어학사가, 미술은 미술사가, 정치는 정치사가 됩니다. 모든 것은 결국 역사인 것이죠. 그리고 역사에 대한 폭넓은 시각에 근거해서 현재와 미래를 사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종합적 안목, 거시적 안목의 성숙에는 철학적 사유가 필수적입니다. 앞에서 특정한 과학을 가지고서 세계 전체를 보려는 시도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이것은 바로 철학이 해야 할 일을 개별 과학을 가지고서 하려는 시도, 즉 사이비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형태의 환원주의는 결국 사이비 철학인 것이죠.

요컨대 1) 아무리 지식을 쌓아도 ‘나’라는 존재가 그 지식들로 온전히 환원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고유한 실존이고,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주체성입니다. 2) 하지만 이것이 과학적 지식을 도외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양한 과학을 널리 공부해 교양을 쌓는 것이 ‘나’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관적인 착각에 빠져 살아가게 됩니다. 3) 늘 역사와 철학을 가지고서 여러 지식을 종합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나의 사상, 사유, 비전을 기를 수 있습니다.
 

타인들과 더불어 나를 만들어가기

우리는 처음에 ‘나’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고, 나를 이해/인식하는 것과 나를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바로 나를 이해/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20대에게는 특히 중요한 문제죠. 이제 두 번째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봅시다. 이제 나를 이해/인식하는 것에서 나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방향을 돌려봅시다.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는다 해도, 나아가 역사와 철학을 통해 나의 사유를 만들어간다 해도, 여전히 그런 사유로는 해결되지 않는 ‘나’가 남습니다. 이 대목이 바로 내가 ‘만들어가야’ 할 나입니다. ‘나’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삶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행위하는 나, 내가 만들어가야 할 나, (객관적 ‘나’가 아니라) 고유한 주체성으로서의 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 창조의 문제입니다. 인식이 없는 창조는 주관일 뿐입니다. 하지만 창조가 없는 인식은 일반성에 그칠 뿐 고유한 나를 완성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나를 창조해간다는 것이 오로지 나라는 존재 그 자체 내에서만 가능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독립된 어떤 개체, 독립된 나의 주체성은 사실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입니다. 나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관계 속에 들어 있는 나입니다. 나아가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그러고 나서 다른 존재와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나의 나-됨은 특정한 관계를 통해서 성립합니다. 예컨대 가족 안에서의 나와 학교에서의 나는 많이 다르죠? 사회에 나가 특정한 관계망들 속에 들어가면 그때마다 ‘나’는 달라집니다.

찰리 채플린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거지인 주인공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길에 빨간 깃발을 단 작은 막대기가 떨어져 있습니다. 주인공이 그것을 주워서 “이게 뭐지?” 하고 장난으로 흔들어 봤습니다. 그런데 그 뒤쪽에서 데모대가 몰려 온 것이죠. 그러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인공은 졸지에 혁명의 주체가 되어버린 것이죠. 주인공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어떤 특정한 존재가 되는 것이죠. 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므로 꼭 기억해 두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나-됨(being-I)이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죠. 그럴 경우, ‘나’는 관계가 달라지면서 아예 다른 어떤 존재로 끝없이 변해버릴 테니까요.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여러 번 결혼하는데, 결혼할 때마다 배우자에 동일화되어 버리죠(identified). 배우자와 같아져 버립니다. 예컨대, 기억이 정확치는 않습니다만, 선생과 결혼하면 아주 조신한 여인이 되었다가 사업가와 결혼하면 아주 정력적인 여인으로 둔갑하곤 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나’라는 주체성이 거의 없다고 해야겠죠. 이럴 경우, ‘나’라는 것은 의미를 상실할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이 관계 속에서 변해 가는 존재라 해도 ‘나’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변해서 흘러가는 것은 아니죠? 왜 그럴까요?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까요. 현대 철학의 문을 연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그의 위대한 저서인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을 심층적으로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꼭 읽어볼 만한 저작이죠. 들뢰즈의 『시네마』와 함께 읽으면 더 좋습니다. 베르그송이 밝혀 주었듯이, 기억이란 딱 정해져 있는, 불변의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이미 지난 일이므로 변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 창고에 저장되듯이 저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시간 속에서, 관계 속에서 변해 가는 존재인 동시에 또한 기억을 통해서 그 정체성을 성숙시켜 나가는 존재라 하겠습니다. 나의 삶은 관계 속에서 계속 생성해가고, 거기에 기억이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시, 기억 자체도 계속 생성해가기 때문에 ‘나’란 무척이나 복잡하고 역동적인 존재인 것이죠. 그래서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생성해가는 것인 동시에 기억을 통해서 일정한 정체성―그러나 그 자체 계속 생성해 가는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내가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습니다.

이런 성숙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면,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헤겔은 ‘나’란 반드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타인을 경유해서만 성립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내 안에 갇혀서 나를 이해하는 것을 좀 어려운 말로 ‘즉자적(an sich)’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영어의 ‘in itself’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즉자적 수준에서 생각한 ‘나’는 사실 주관적인 환상에 불과하죠. 참된 나는 타인과 부딪쳐보았을 때 알 수 있습니다. 타인과 부딪쳐서 내가 부정되어 봐야, 흔히 말하듯이 “깨져 봐야” 비로소 나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수준을 ‘대자적(fur sich)’ 수준이라 했습니다. 영어의 ‘for itself’에 해당하죠. 그런 과정을 거쳐서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와 봐야 비로소 ‘나’라는 것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의 과정을 거쳐서 나 자신에게 돌아온 나, 즉 단지 자신 내부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나가 아니라 타인에 의한 부정을 거쳐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 나가 바로 ‘즉자-대자적(an-und-fur sich)’ 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일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하며, 그런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서 나는 성숙해갈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나는 내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속담에도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죠? ‘즉자적’ 단계입니다. 하지만 사고가 성숙해지면서 우리는 상대방도 나 못지않게,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게 자존심과 욕망, 아집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순간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가졌던 환상이 부정됩니다. 그로써 ‘대자적’ 단계에 들어섭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이제 나는 오로지 내 시선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도, 또 더 나아가서는 상대방과 내가 관계 맺고 있는 그 객관적 전체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나만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관계-망 전체에 대해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나’에 대한 ‘나’의 시선이 한층 성숙해집니다. 이것이 ‘즉자-대자적’ 단계입니다. 20대의 나이란 한참 자존심, 욕망, 아집, 주관, 환상이 강한 나이죠. 헤겔적인 뉘앙스에서의 성숙이 특히 필요한 나이 대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이 관계라는 것이 이미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관계들이 열려 있고 그래서 자유로운 관계들을 통해서 나를 성숙시켜 가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가 않죠. 이 점을 조금 더 이야기해봅시다.

‘하나’와 ‘여럿’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하나’라는 말은 참 묘한 말입니다. 나도 하나이지만 우리 가족도 하나죠. 우리 학교도 하나입니다. 무엇이든 한 덩어리로 보면 하나죠. 여럿을 하나로 묶어서 보면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이렇게 여럿으로 구성된 하나가 참 많습니다. 가족부터 그렇고 한 학교, 한 학급, 한 동아리, 넓게는 한 국가, 한 권역 등등. 그리고 이런 단위들(units)은 피라미드처럼 위계(hierarchy)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생들이므로, 한 대학을 생각해 봅시다. 일단 이과와 문과로 나뉘죠? 문과로 들어가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으로 나뉩니다. 또, 인문학으로 들어가면 어문학 계통과 인문 계통으로 나뉩니다. 어문학으로 들어가면 서양 어문학과 동양 어문학으로 나뉘겠죠. 이런 식으로 계속 스무고개 하듯이 나뉘어 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이야기하면 한 개인은 예를 든다면 불문학과에 속하고, 어문학계에 속하고, 인문대학에 속하고, 문과계에 속하고, 어떤 대학에 속하는 것이죠. 대학만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단위들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좀 개념적으로 이야기해서 우리의 사회는 일반성(generality)과 특수성(particularity)의 체계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일반성이 여러 특수성들로 나뉘어 있는 구조인 것이죠. 하지만 이 일반성도 그보다 상위의 일반성에서 보면 또 하나의 특수성입니다. 사회란 이렇게 피라미드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지금 우리 논의의 맥락에서 무엇을 말할까요? 바로 우리가 사회에서 맺는 관계들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관계를 통해서 ‘나’를 만들어간다고 해도, 이 관계라는 것이 사실은 매우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는 한 인간을 자꾸 이런 정형화된 관계망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통해 ‘나’를 만들어간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이런 정형화된 관계가 아닌 독특한 관계, 특이한(singular)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삶은 창조적인 것이 될 수 있죠. 바로 이렇게 특이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하는 힘, 결코 어떤 정형화된 관계에 온전히 복속되지 않으려고 하는 역능(potentiality), 이것이 곧 앞에서 말했던 고유한 나, 그 어떤 것으로도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삶이란 그저 어떤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일종의 실험 즉 삶의 존재양식(mode of being)을 둘러싼 실험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회에 이미 구축되어 있는 틀을 간단히 무시하고서 내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앞에서 말한 ‘즉자적’ 단계에 머무는 것이죠. 우리는 공기 없이 살 수 없듯이 사회의 틀 없이도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유와 모색, 실험, 소통, 좌절 등등을 통해서 서서히 스스로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사회의 변화에도 일조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내 생각만으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낭만적인 착각이죠. 창조적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 내면의 불을 꺼트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사회와 부딪치면서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1) ‘나’란 오직 나 내부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숙시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대부분 정형화된 관계로 되어 있고, 사회는 그런 관계를 강요합니다. 3)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내부의 ‘나’,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의 주체성을 통해서 창조적인 관계들을 맺어나갈 때 진정한 ‘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에만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립하는 ‘나’가 화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글·이정우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교수와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경희사이버대 교수로 재직하며, 경희사이버대가 운영하는 대안 인문학 교실인 ‘파이데이아 홍릉’(  pahong.khcu.ac.kr)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소운 이정우 저작집>(그린비·전 6권), <천하나의 고원>, <세계철학사1: 지중해 세계의 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