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분노, 강남좌파에서 시민운동가로

2015-04-30     박성미

나는 강남좌파였다. 내가 십대를 보냈던 학교는 사립예술고등학교였다. 그 고등학교 셔틀버스는 대치동과 개포동, 삼성동과 청담동을 연결하고 다녔다. 유명 사립대학을 다니며 부모님의 지원 속에 유학을 떠났고, 어렸을 때부터 아무렇지 않게 살아 오던 곳이 바로 강남이라는 계층적으로 무척 특수한 세계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주변인도 친구들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모두들 어학연수를 다녀오거나 유학이나 대기업 취업을 꿈꾸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겪지 않은 채 젊은 날을 연애와 낭만에 맘껏 탕진한 뒤 철없고 풍요로운 대학생활을 보냈다. 주변의 학생들도 대부분 토익과 어학연수와 배낭여행과 교환학생으로 해외로 나가는 것에 매료되었다.

2003년 나는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도서관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부산 영도에서는 노조 지회장이 배를 만드는 크레인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2008년 유학에서 돌아온 후 TV와 뉴스도 제대로 볼 짬이 없이 영화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하며 지방과 시골을 전전했다. 그 이듬해는 내가 연출한 작은 영화로 국내외 영화제를 돌아다녔고 몇 군데 영화 촬영 현장을 뛰며 나름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용산에선 다섯 명의 철거민과 한 사람의 경찰이 죽었고, 평택의 한 자동차 공장의 지붕에서는 물과 약도 없이 최루액과 테이저건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경찰들이 뛰어들어가 때리고 또 때렸다.

분명 뉴스도 보고 포털도 보고 인터넷도 보고 살았지만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현실은 그토록 조용했다. 거리와 지하철과 버스, TV와 인터넷 모두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의 절반은 광고로 도배되어갔고 어떤 진실에서는 멀어져갔다. 경찰이 노동자를 밟고 있을 땐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금을 몇 개 땄다 기뻐하라고 알려왔다. 대추리에서 사람들이 쫓겨나고 있을 땐 스타 여배우가 누군가와 열애를 시작했다고 알려왔다. 세상에 상처 입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언론’이라는 건 마치 사람들이 진공 속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끔 단단한 차단막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수많은 가짜 기사 속에서, 수많은 광고 속에서 차단막이 아니라 다리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기사는 거의 볼 수 없었다. 크레인에 올랐다는 어느 여성 노동자의 편지 한 통이 그녀와 나를 연결해준 첫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10년 전 그때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대량학살이 있었고 2년을 싸워 노사가 합의를 했건만 그 합의를 사측이 번복하던 날, 키 큰 사내 하나가 숨죽이며 올랐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갇힌 짐승처럼 이 크레인 위를 서성이며 오늘은 동지들이 얼마나 모일까 노심초사 내려다보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동지들이 많이 모인 날은 삶 쪽으로, 동지들이 안 모이는 날은 죽음 쪽으로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며 129일을 매달려 있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도크에 배가 빠지던 날, 육중한 배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뒤돌아서던 조합원들을 보며 끝내 유서를 썼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중략)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끊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라는, 아무도 눈길 주지 않던 밟힌 들풀 같은 한 여성 노동자의 글이었다.

지하철에서 글을 읽다가 눈물이 똑 떨어졌다. 그녀의 동료는 오래 전에 크레인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한다. 그렇게 목숨과 맞바꾼 단체협약이 몇 년만에 깨졌고 그 동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크레인에 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 동료가 보았던 그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고 있다 했다.

그녀는 젊었을 때 미싱을 돌렸고 화진여객 버스 안내원을 했다. 그리고 최초 여자용접공으로 한진중공업 조선소43에 입사했다. 그러나 노조 활동을 이유로 어용 노조 간부에게 툭하면 얻어맞았으며 감옥과 대공분실을 다녔다. 그녀의 그런 경험도 놀라웠지만 그런 삶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다는 나 자신이 더 충격적이었다. 고통과 상처를 영화에서 그려내는 작업을 해왔던 나는 부끄러웠다. 미싱공과 버스안내원과 파란 옷의 노동자를 나는 영화에서 수도 없이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동료는 스스로 크레인을 내려가고 싶었으나,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했다. 그녀는 꼭 그 사람이 못했던 그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영화 속에서 세상을 바꾸어 나간다면 굳이 현실에서도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알게 된 후로 마음 한켠에 남게 된 죄책감은 작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어찌 보면 누군가에겐 의문도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때 알았다. 나는 빚을 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사는 것이다. 오로지 그거다. 나의 사랑하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략)
 

처음으로  법을 어기다

그날, 나는 법을 어겼다. 2011년 그 여름, 나는 처음으로 법을 어겼다.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한통 날아왔다. 내가 1차 희망버스를 다녀온 뒤 한 달 정도 지나서였다. 소환장에는 ‘폭력 및 처벌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공동주거침입죄’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경찰서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경찰이 물었다.

“김진숙씨와 어떤 관계인가요?”
“트친(‘트위터 친구’의 줄임말)... 인데요.”

나는 대답하고서 웃어 버렸다. 무슨 대단한 관계라도 있어야 하나.

경찰은 김진숙씨가 크레인을 점거한 것은 불법인데 범법 행위를 도우러 간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 사람이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이고 나는 그 사람이 살기를 바랬기 때문에 그곳에 갔다고 말했다. 그랬다. 크레인도 공장도 모두 조남호라는 사람의 ‘소유’였고 그 어떤 것도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것이었던 적은 없었다. 내가 소환장과 벌금을 통보받은 것도, 법이 사람보다 사유재산을 더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소환장을 통보받은 사람은 사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홀로 싸우는 외로운 노동자를 응원하러 갔고,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고 담을 넘어 들어가 사랑해요라는 피켓을 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크레인에 바람개비를 붙이고 풍등을 날렸던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로부터 소환장을 받았다. 백여 명이 넘는 숫자였다.

민변의 변호사님과 상담한 후 법원에 출석했다. 깔끔하게 기소내용을 전부 인정하고 대신 최후 변론서를 써서 선처를 호소하기로 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영화를 만드는 연출자입니다. 영화에선 탄압받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등장하지만 크레인 위에 있는 그녀는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약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현실을, 영화 속에서만 만들어왔던 게 매우 미안해졌습니다.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그분들을 돕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저는 시나리오에서 단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기 있는 그녀에게 감동을 받은 저는 트위터로 말을 걸었고 그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극한 상황에 있었지만 늘 다른 사람을 격려하였고 따뜻하고 유쾌한 유머로 웃음을 주곤 했습니다. 8년 전 그녀의 동료는 점점 희미해지던 관심 속에서 죽어갔다 했습니다. 지금 크레인 위의 이 사람도 외롭게 두면 죽음을 선택하겠구나. 그동안 노동운동 같은 것도 전혀 몰랐고 정치나 사회에도 관심 없었던 저이지만, 어떻게든 이 사람 만큼은 살리고 싶었습니다.

보통의 건강한 심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만약에 누군가의 집 안에서 어떤 사람이 폭력을 당해 죽을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경우, 담을 넘어서라도 들어가 사람을 구했을 겁니다. 제가 6월 11일 영도 조선소에 들어갔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회사는 대답이 없고,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외롭게 그곳에서 최후의 결단을 선택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법정에서 낭독한 ‘피고인 최후 변론서’였다. 그리고 나는 내게 떨어진 벌금 백만원을 집행유예 받았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후에도 벌금으로 고통받고 있다. 특히 송경동 시인의 죄는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

 

글·박성미
박성미씨는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생활과학부를 졸업하고 프랑스 영화학교III3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돌아와 <플라잉 피그> 등 세 편의 단편영화와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1년 우연히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에 연대한 것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어 SNS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연대활동에 참여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소재로 레고로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희망버스, 러브스토리>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했으며 온라인 매체에 가끔 기고하는 시민기자이자 창작자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미숙한 대응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2014년 4월, 박성미씨는 청와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당신이 대통령이어선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은 각종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졌고, 조회 수가 50만여 건이 넘어서며 한때 게시판이 다운되기도 했다. 


*이 글은 박성미씨가 쓴 <선한 분노>(아마존의 나비·2015년·4월)에서 발췌해 실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