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외계인이 아닐까?

2015-05-04     성일권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선, 예컨대 ‘불의’라고 쓰고서 이를 ‘정의’라고 읽고, ‘부패사회’를 ‘투명사회’라고 읽는 등 단어의 표기와 원래적 의미를 대치시키는 우스갯소리가 들린다. 이른 바, 배반적 모순어법이다.

한 개인이나 사회가 두 언어를 쓰는 상태를 ‘유식하게’ 영어로 말하면 바일링구얼리즘(bilingualism) 또는 다이글로시아(diglossia)라고 한다.(1) 앞쪽 말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고, 뒤쪽 말은 그리스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둘 다 어원적으로 ‘두 개의 혀’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은 이 두 낱말을 구분해서쓴다. 바이링구얼리즘은 한 개인이나 사회가 두 개 언어를 쓰고, 그 두 언어가 사회적 기능에서 차별적이지 않은 경우를 가리킨다. 예컨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가 둘 다 통용되고, 시민들 상당수가 이 두 언어를 병용한다. 그리고 이 두 언어가 기능적 차이를 거의 지니지 않는다. 반면에 다이글로시아는 한 개인이나 사회가 두 개 언어를 쓰되, 그 두 언어가 사회적 기능에서 차별적인 경우를 가리킨다. LA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은 코리안타운에서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영어를 잘 모를 경우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에서든 공민권 행사에서든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물론 다이글로시아 사회에서도 그 주류언어 배경을 지닌 사람은 꼭 다이글롯이 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영어를 제1언어로 쓰는 LA 사람이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를 꼭 익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스페인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를 제1언어로 쓰는 캘리포니아 사람은 영어를 반드시 익혀야 한다.

한국은 전형적인 다이글로시아나 바이링구얼리즘을 찾기 어려운 단일언어사회로 꼽혀왔고, 실제로 한국인이라면 모두 단일언어 국민임을 자랑스레 여겨왔다. 물론 최근 들어 이주노동자 사회가 형성되면서 몇몇 지역에서 한국어의 다이글로시아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주 예외적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의 배반적 화법이 세간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대통령이나 총리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무슨 일이 터지면 명약관화한 사실 앞에책임지려는 자세보다는 당장에 면피하려는 언어도단식 발언을 남발하고 있다. 이들의 말은 분명 한국말이면서도 한국 사람으로는 이해가 쉽게 안 된다. 부정부패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이 부정부패 척결을 되려 주장하질 않나, 국정실패의 최고 책임자가 자신의 사과 대신에 오히려 제3자에 대한 책임을 추구하질 않나. 일각에서는 이같은 배반적 모순어법을 일컬어 ‘유체이탈화법’이라고 점잖게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토지> 원고에 박경리 선생이 꾹꾹 눌러 쓴 어법대로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위정자들의 언어가 조롱거리로 전락된다면, 이는 그들과 유권자들이 극심한 바일링구얼리즘이나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놓여 있는 탓이라. 그들의 언어습관이 국민 대다수의 상식선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면, 그들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 다. 혹시 ‘외계인’들이 아닐까? <르 디플로> 5월호에선 각국의 국가 권력이 정의와 질서라는 이름아래 자행한 유체이탈 행태들을 주요 읽을거리로 마련했다. 일독을 권한다.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발행인

(1) 고종석, <언어의 무지개>(알마, 20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