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속 내전' 공화파 자멸

2009-06-04     한승동

<스페인 내전>
앤서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교양인 펴냄, 3만6천원

많은 한국인들이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켄 로치 감독의 <토지와 자유>,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앙드레 말로의 <희망>,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등이 스페인 내전을 다루고 있다는 건 알지만 정작 스페인 내전이 어떤 전쟁인지에는 제대로 알고 있진 못할 것이다. 우리 말로 나와 있는 책이 별로 없다. 영국의 전쟁사학자이자 역사저술가 앤서니 비버(53)의 <스페인 내전>(The Battle for Spain)은 바로 그 답답함을 풀어줄 최신 종합 해석서라 할 수 있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는 할리우드 스타 게리 쿠퍼가 주연한 로버트 조든이라는 제3국인이 등장한다. 원작자 헤밍웨이 자신의 분신임이 분명해 보이는 미국인 조든은 당시 전세계 53개국에서 3만2천~3만5천 명이 가담했다는 스페인 내전의 공화군 쪽 외국인 국제여단의 일원이었다. 조든이나 <토지와 자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간직한 국제여단의 이미지는 중산층 지식인이나 확고한 이념으로 무장한 대원에 가까울 것이다. 비버의 <스페인 내전>은 그런 이미지가 왜곡되고 과장돼 있다고 지적한다. 당시 국제여단의 영국 출신 지원병 가운데 80%는 직장을 그만두거나 실업 상태에 있던 육체노동자였다는 것이다. 폴란드나 헝가리 등 동유럽 쪽 지원병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 대다수의 참여 동기가 이타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대부분은 전쟁이 무엇인지 잘 몰랐고 일부는 무료하고 답답한 실업자 신세를 면해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영국인 지원병의 절반 이상이 공산당원이었다. 

노동자들에게 무기 안내줘 패배

비버는 헤밍웨이조차 “전선을 찾아가 병사들로부터 소총이나 심지어 기관총을 빌려서 적군이 있는 쪽을 향해 몇 발씩 쏴보는”, 정치적으로 공화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는 “방문객의 좋은 예”로 봤다. 앙드레 말로에 대한 그의 평가는 가혹하다. 당시 공산주의에 동조했던 말로는 공화정부의 돈을 받는 용병 조종사들로 ‘에스파냐’라는 비행단을 조직했다. 형편없는 규율에다 전투에도 잘 참가하지 않은 그 비행단으로, “하는 일도 없이 막대한 액수의 임금은 꼬박꼬박 챙긴” 말로는 사기꾼이요 기회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말로는 나중에 “지독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1936년 7월부터 1939년 4월까지 약 3년간 계속된 스페인 내전은, 1936년 2월 총선에서 온건개혁 세력부터 좌파까지 아우른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프랑코 장군이 대표하는 군부 대다수와 지주·자본가·가톨릭 등 우파 연합 세력이 쿠데타로 일거에 정권을 탈취하려 한 데서 비롯됐다. 쿠데타는 아나키스트 세력의 전국노동연합과 사회주의자들의 노동자총동맹이 주력이 된 정부군이 조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면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군대보다 노동계급의 무장을 더 두려워한 중도좌파 공화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제때 무기를 내주지 않았다. 그것이 대세를 갈랐다. 공화정부의 노동 주력군이 조기에 적극적인 역공을 가했다면 정부군의 이탈도 막고 색깔이 불분명한 대다수 준군사조직들을 공화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
었다. 그러나 상대의 실책으로 승기를 잡은 우파 국민군 역시 좌파의 예상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마드리드를 조기에 장악할 수 없었고, 쿠데타는 내전으로 확대돼 장기화됐다. 그에 따라 열강들의 개입도 본격화됐다.

미국, 좌파 분쇄위해 국민군 지원

당시 유럽 정치 지형을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셋으로 대별한다면 미국·영국은 장차 주적이 될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즘 세력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우파 국민군에 맞선 공화군을 지원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국민군을 도왔다. 미국은 내전 기간에 프랑코에게 350만t의 석유를 외상으로 팔았는데, 그 양은 같은 기간 공화정부가 수입한 석유량의 2배가 넘었다. 수출업체 텍사코의 회장은 열렬한 파시즘 찬양자였다. 스탠더드 정유회사도 프랑코에게 석유를 공급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스튜드베이커는 군용트럭 1만2천 대를 국민군에 공급했는데, 그 수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제공한 것의 3배에 가까웠다. 듀폰은 4만 발의 폭탄을 제공했고, 아연회사 리오틴토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프랑코한테 전비를 조달해줬다. 레닌의 볼셰비키혁명 때 자금을 지원했던 미국 자본가들이 이젠 스페인 좌파 분쇄에 앞장선 것이다. 영국 정부는 당시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유화정책’을 펴고 있었다. 놀랍게도 프랑코의 최대 지원세력이던 나치스의 헤르만 괴링 공군참모총장은 스페인 공화군에 몰래 무기를 빼돌려 뒷돈을 챙기고 있었다.
공화파가 기댈 외부는 소련과 멕시코밖에 없었다. 독소불가침조약까지 맺은 소련은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공화군 지원도 철저히 자국 이익 우선 원칙으로 일관했으며, 코민테른을 통해 공화파를 완전히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로 몰아갔다. 그리하여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 반스탈린 마르크스주의자 등 공화파 주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국제여단까지 그 제물이 됐다. 이‘내전 속의 내전’이야말로 공화정부 지도부의 무능과 함께 공화파 몰락의 최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비버는 본다. 무기까지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공화파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코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별로 한 역할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공화군에게 크게 불리한 쪽으로 벌어진 차이를 더 심화하고 공화군의 용기와 희생을 헛되이 낭비함으로써 전쟁을 패배로 몰고 간 것은 공화군 지도부였다.” 말하자면 공화파의 자멸이었다.

동족상잔 한국전쟁과 닮아

프랑코의 역할은 냉혹한 ‘빨갱이 청소’에서 빛났다. 스페인 남자 3분의 1을 제거하겠다고 호언한 그의 군대는 상대 진지를 돌파하는 순간 무차별 살륙과 겁탈, 약탈을 자행했다. 이 동족상잔으로 35만 명이 전쟁 중에 죽고 50만 명이 나라 밖으로 탈출했으며, 30만 명이 옥에 갇혔다. 전쟁이 종결된 뒤에도 프랑코의 ‘정화’작업은 계속돼 20만여 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내전>은 그 구체적 잔혹사와 군사적 측면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1982년에 낸 <스페인 내전>(The Spanish Civil War)을 완전히 개작한 이 신판 <스페인 내전>(2006)은 지난 20여 년간의 스페인 국내외 역사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독일 문서고에서 찾아낸 새 자료와 최근까지 접근할 수 없었던 소련의 당시 미공개 자료들을 발굴해 다시 작업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과 그 이후 프랑코 체제의 잔혹한 탄압 역사와 군사적 세부 사항들은 800쪽이 넘는 대작인 이 책으로 대체로 정리됐다고 할 수 있다.
비버의 말마따나 문제는 해석이다. 좌와 우만이 아니라 권위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앙집권과 지역분권, 지주·자본가와 빈농·노동자, 특권적 교회와 민중 등 다층적·다면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했던 스페인 내전을 한국전쟁과 비교해볼 수는 없을까.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4년 전에 발발해 비슷한 기간에 계속된 끔찍한 동족상잔. 냉전체제의 등장과 함께 약 40년간 지속된 우파 군사독재. 1975년 프랑코 총통의 죽음으로 끝난 스페인의 우파 독재와 1979년 10·26 사건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으로 일단락된 한국의 우파 독재, 그리고 이후의 급속한 민주화. 분명히 다르지만 닮은 점도 많다.

글 한승동  sdhan@hani.co.k*r
*<한겨레> 출판 전문기자. 주요 역저로 <대한민국 걷어차기>(2008), <시대를 건너는 법>(2007),<우익에 눈 먼 미국>(200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