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적 한 미 동맹, 탄력적 삼각관계로
한-미·북-미 협력, 남북 대립 구도하의 로맨틱 삼각관계를 거쳐 세 양자관계가 협력 구도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성이 높은 방안이다. 북한의 의도적 위기 조성 조치들이 남한보다는 미국을 겨냥하고 있고, 남북 대화보다는 북-미 대화가 더 빨리 성사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한-미 간 전략적 공조가 이뤄져야 추진될 수 있다.
위기의 먹구름이 한반도를 짙게 감싸고 있다. 이 위기는 현상적으로 ‘북한의 로켓 발사 → 2차 핵실험 → 연속적인 미사일 발사’ 등 일련의 의도적인 도발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위기 상황에 책임이 있다는 천편일률적 보도가 나오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심지어 북한의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도 반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작금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길은 ‘국제 공조’에 의한 대북 압박밖에 없다. 현실적으로도 그럴까? 여기서는 작금의 한반도 위기 상황과 그 해결책을 좀더 객관적이고 균형적으로 모색해보기 위해 남북한과 미국 사이의 ‘전략적 삼각관계’의 틀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물론 한반도 문제는 6자회담의 다른 참가국이나 유엔도 관여되지만, 전쟁과 정전체제 유지 모두에 관여된 기본 당사자가 남북한과 미국, 3자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남북한과 미국은 ‘전략적 삼각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때 전략적 삼각관계란 세 행위자가 공통의 관심사를 둘러싸고 벌이는 일련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총합 혹은 그 패턴을 말한다. 이때 ‘전략적’이란 삼각관계가 세 행위자의 생존과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남ㆍ북ㆍ미’ 전략적 관계의 유형
삼각관계 속에서 기본적인 행동패턴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는 행위자 A가 B, C에게 영향을 끼치고, B와 C가 자신의 관계를 A에 대한 대응으로서 조정하게 되는 경우다. 가령 북한의 핵실험이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추구한 것이라고 할 때, 한-미 양국은 동맹관계를 강화하거나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상황은 A가 B 혹은 C 어느 한쪽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B와 C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북한이 미국(혹은 남한)과 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북한을 공동 적으로 삼아온 한-미 관계의 변화를 촉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전략적 삼각관계는 삼각형의 3개의 두 변이 띠는 성격, 즉 양자관계의 우호 및 갈등 관계에 따라 8가지 형태를 나타낸다. 이 중 4개는 인지 안정 상태를, 다른 4개는 인지 불안정 상태를 띤다. 인지 불안정 상태에 있는 삼각관계는 인지 안정 상태를 추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삼각관계의 작동 방식에 따라 인지 안정이 아니라 또 다른 인지 불안정 상태로 나아갈 수도 있다.
8개의 삼각관계 유형 중 국제정치학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유형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유형이 세 행위자 간 대칭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삼각경영관계’(menage a trois)이고, 둘째가 두 행위자 사이의 호감과 그 두 행위자 각각이 제3의 행위자와 갖는 적대감으로 구성되는 ‘안정적 결혼 상태’다. 셋째는 주요 행위자와 다른 두 행위자 사이의 호감과 다른 두 행위 사이의 적대관계로 구성되는 ‘로맨틱 삼각관계’다. 여기에 남-북-미 관계를 대입해보면, 삼각경영관계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수립될 때 세 양자관계 모두 우호관계를 보이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그런 유형이 자리를 잡은 바는 없다. 안정적 결혼 상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한-미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한반도 안보질서를 지탱해온 삼각관계다. 그에 비해 로맨틱 삼각관계는 보기에는 흥미롭지만 다루기에는 어려운 유형이다. 1994년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 이후 북한과 미국은 대화에 나섰지만 남북한은 대립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대북정책 방향과 속도를 둘러싸고 한-미 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했고, 북-미 관계 역시 (양국 간 적대관계와 양국 내 비판적 의견과 함께) 한-미 동맹관계의 제약으로 가시적인 관계 개선을 이루기 어려웠다. 말하자면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어느 양자관계 혹은 어떤 나라의 정책은 다른 두 양자관계 혹은 두 나라의 정책과 긴밀히 연관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최근 한반도 위기 상황을 어느 일방의 행동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방법일 수는 있어도 정확한 분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런 논리를 상황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것과 연결지을 때는 매우 부적절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을 동반할 수도 있다.
현 한반도 위기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2008년, 나아가 조지 부시 행정부 시기의 남-북-미 삼각관계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01년 대북 강경정책을 천명한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그 시기 비록 삼각경영 상태의 인지적 안정이 소멸돼버렸다. 그로부터 ‘2차 북핵 위기(2002) → 6자회담 개최(2003) → 9·19 공동성명 채택(2005) → 방코델타아시아(BDA) 사태 및 북핵 실험(2006) → 비핵화 초기 단계 진입(2007) → 비핵화 2단계 진입(2008)’ 등 사태는 변화무쌍하게 전개됐다.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8년간 남-북-미 삼각관계의 패턴은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에 일차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후 일련의 위기 상황은 북한의 모험적 행동이 주도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과 그에 따른 북한의 벼랑 끝 외교로 북-미 관계 악화는 물론 남북 관계, 한-미 관계에도 부정적인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모습은 1차 북핵 위기 때 남-북-미 삼각관계를 재연하는 듯했다. 2차 북핵 위기는 1차 위기 때와 달리 상황 수습이 빨리 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오래 전개됐다. 그로 인해 삼각관계의 다른 두 축인 남북, 한-미 관계에도 부정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그때 북한이 남북 관계 경색에 나서면서도 그것을 남한이 아니라 미국 탓으로 돌리면서 남북 대화의 문을 완전히 폐쇄하지는 않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2006년 북한의 미사일, 핵 실험으로 상황이 최고조로 악화되면서 남북 관계 유지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남한은 미국, 일본의 대북 제재 요구에 일면 응하면서도 남북 관계를 완전히 중단시킬 정도의 전면 제재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로써 남한은 2006년 하반기부터 새롭게 부상한 미국 내 대북정책 전환과 맞물려 남북 개선과 한-미 관계 유지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남북 간 협력이 북-미 갈등을 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라 북한의 핵실험 이후 유엔의 대북 제재가 추진되는 가운데서도 파국을 막고 6자회담 재개를 통한 국면 전환이 모색되었다.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구체적인 합의(이른바 2·13 합의와 10·3 합의)와 북-미 양자접촉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북의 위기외교 아닌 국가발전 전략
현재 남-북-미 삼각관계는 한-미 협력, 남북·북-미 대립으로 안정적 결혼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일종의 ‘인지 안정 상태’이지만, 현실은 위기 상황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북-미 관계 개선이 기대됐으나, 보는 바와 같이 그런 기대는 신기루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북한이 오바마 행정부의 대화 손짓을 거부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까지 감수하면서 예상보다 빠르게 일련의 강경 드라이브 조치를 취하는 것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북한의 군사적 조치들이 위기 외교의 일환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국가 발전 전략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구애받지 않고 2012년 ‘강성대국’ 건설에 진입한다는 목표하에 일관된 군사력 강화 프로그램을 전개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외부 정세를 명분으로 그 수순에 가속도를 높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4월5일)를 감행한 시점을 보면 오바마 행정부 집권 이전에 그 계획이 수립되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2차 핵실험 강행(5월25일)에 이어 미사일 발사를 연발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자체 군사력 강화 계획에 따라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이 북한의 안정적인 후계구도 마련과 맞물려 진행된 점을 고려할 때 군사적·기술적 능력을 대외에 과시하고 그것을 북한 정권과 인민, 최고지도부와 엘리트의 결속을 강화하는 대내정치적 목적에 활용하고 있다 하겠다.
만약 북한의 강경 행동이 위기 외교의 일환이라면 북한과의 대화 채널 가동을 통해 북한의 구체적인 협상 목표를 파악하고, 기존 6자회담 합의사항에 기초해 협상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북한과 미국의 기본 입장과 비핵화 2단계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의제는 북한과 미국, 일본의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북한의 경제 발전 지원 등 미래지향적이고 거시적인 방향으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정전협정 체제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북한의 “자위적 조치”는 유엔 안보리나 미국의 강력한 대응에 직면할 수도 있다. 북한은 최근 일련의 군사 조치를 지난 4월 로켓 발사를 ‘국제사회’가 우주의 평화적 이용 권리로 인정하지 않고 군사적 도발로 규정한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에 대해 미국, 일본 등이 안보리 소집 등 제재 움직임을 보이자 지금까지 보고 있는 바와 같은 행동을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런 국가권력 간의 명분 싸움으로 북한 인민을 비롯한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화롭게 살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결단하고 남북이 손잡아야
현재 극도로 악화된 한반도 위기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전망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더 올바른 질문일 것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안정적 결혼 상태는 위기가 심화되면서 한-미 관계에도 대북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 세 양자관계가 대립 상황을 보이는 극도의 인지 불안정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고 삼각경영관계로 전환시켜야 한다. 세 행위자, 세 양자관계가 동시에 협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현실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로맨틱 삼각관계를 거쳐 삼각경영 상태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한-미·북-미 협력, 남북 대립 구도하의 로맨틱 삼각관계를 거쳐 세 양자관계가 협력 구도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성이 높은 방안이다. 여러 로맨틱 삼각관계 중에서도 그와 같은 유형을 제시한 이유는 현 북한의 의도적 위기 조성 조치들이 남한보다는 미국을 겨냥하고 있고, 남북 대화보다는 북-미 대화가 더 빨리 성사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한국이 양해하고 한-미 간 전략적 공조가 이뤄져야 추진될 수 있다.
현 위기 상황은 북한이 감독하면서 동시에 남한과 공동 주연해 갈등을 벌이고 있고 미국은 관객(혹은 평론가)과 같다. 한반도 문제에 미국이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당사자이다. 또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한 한-미의 ‘안정적 결혼 상태’ 때문에 북한은 심각한 ‘피포위 의식’(sieged mentality)을 갖고 있다. 북한이 도발 행위를 일으킨 이와 같은 구조적 배경을 감안할 때, 결국 미국의 결단이 필요하다. 현 위기 상황에 대한 대증요법은 역사구조적 성격을 갖고 있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위기의 확대재생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은 한반도의 분단과 정전체제 유지에 관여해왔기 때문에, 통일과 평화의 길에도 책임의식을 갖고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이 아니고 현실이 되려면 남북은 대립하면서도 협력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럴 때 한반도 냉전구조는 해체될 수 있다.
글·서보혁*
*정치학 박사. 이화여대 평화학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이다. 쓴 책으로는 <탈냉전기 북미관계사>(2004·선인), <북한 인권: 이론, 실제, 정책>(2007·한울) 등이 있고, 공역서로 <실패한 외교>(2008·사계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