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FO 음모론’의 진짜 배후는?

2009-07-02     피에르 라르그랑주 |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와 TV 시리즈물 <X파일>이 거둔 대중적 인기, 그리고 9·11 테러 혹은 인간의 달 착륙의 실상에 관한 음모론적 주장에 대한 대중적 관심들은 우리에게 정치적 상상의 영역에서 음모론의 실체에 의문을 갖게 된다. UFO를 둘러싼 음모론의 기원과 실체를 짚어본다.


일부 음모론자와 흥미 위주 접근하는 언론의 합작
대중의 ‘권력 불신’과 ‘과학 맹종’을 반영한 측면도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먼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1898년 허버트 조지 웰스의 공상과학 소설 <우주전쟁>이 출간된 이후에야 사람들은 처음으로 우주인의 침공을 상상하게 됐다. 그리고 1947년 6월 25일, 미국에서 외계인의 지구 방문 가능성에 대한 토론이 처음으로 벌어졌다. 이날 미국 언론은 워싱턴주 레이니어산 근방에서 목격된 낯선 물체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전날 개인 비행기 조종사 케네스 아널드는 앞부분은 둥글고 뒷부분은 삼각 형태를 띤 이상한 모습의 비행물체 9개를 목격했다. 그는 동료들과 <이스트 오리거니언>의 기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때 비행접시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수백 번의 다른 목격담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이때가 우리가 이후 UFO(1)라고 부르는 물체가 처음으로 대규모 출몰하는 시기였다.
이즈음에 비행접시에 대한 진실이 대중에게 비밀로 부쳐졌다는 소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비행접시 목격담을 ‘대중적 미신’으로 치부하는 게 지배적인 담론이었지만 일부에서는 비행접시와 숨겨진 비밀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의심했다. 일례로 1947년 7월 미 연방수사국은 한 시민이 후버 국장 앞으로 보낸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이 편지는 비행접시에 대한 자료를 은폐하는 데 국장이 가담했는지를 물었다.

<어메이징 스토리스> 같은 일부 공상과학 잡지도 지상에 추락한 비행접시를 군대가 발견해서 숨기고 있다는 소문을 싣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부에서만 이런 소문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 프랭크 스컬리의 베스트셀러 <비행접시의 이면>이 출간된 1950년 이후에는 일반 대중도 ‘군 은폐론’을 접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이 시기 처음으로 아마추어 UFO 연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체를 조직하고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들은 두 경향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비행접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목격담을 모으는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미국 공군이 이미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공군을 의심하는 부류였다. 1952년에 설립된 ‘공중 현상 리서치 단체’(APRO), 그로부터 4년 뒤에 설립된 ‘전국조사위원회’(NICAP)는 군이 확보한 정보를 공개하기 위한 로비 활동을 조직했다. 예비역 해병 장교이자 비행접시에 관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1957년부터 ‘전국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도널드 키호는 언론인, 군인, 정치인들을 위원회에 영입했다. 영입된 인사 중에는 1947년 중앙정보국 초대 국장을 역임한 로스코 힐렌퀘터 장군도 포함됐다. 그러나 키호는 군이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믿기는 했지만 비행접시의 추락에 관한 스컬리의 폭로를 받아들이진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한 기자가 스컬리의 제보자가 연방수사국에서도 잘 알려진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캐내면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다른 UFO 관련 단체들도 세계 도처에서 조직되면서 이들은 ‘UFO학파’(Ufology)를 형성했다. 또한 언더그라운드 소그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남극대륙 외계인 기지설, 신비한 검은 옷의 사나이들(유명한 ‘맨 인 블랙’), 비행접시 추락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외계인의 비밀스런 회동설 등 외계인에 관한 수많은 판타지풍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드물게는 ‘외계인과 만났다’며 기자회견을 열어 지구에 외계인의 평화와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이 가운데 친환경 담론을 구사하는 이들은 ‘불가사의 역사 연구가들’에 의해 ‘뉴에이지’ 그룹의 원조로 취급받았다. 이들 중에 가장 유명했던 아담스키는 1959년에 네덜란드 여왕 율리아나를 접견하기도 했다.

1960년대, UFO 논쟁 분수령

   
외계인과 함께 한 인류의 역사

1960년대는 UFO에 관한 논쟁의 분수령이었다. 젊은 과학자 세대에서 이 문제를 심각히 보는 연구자들이 생겨났다. 일부 과학자들은 ‘UFO학자’들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은 공군의 비행접시 연구계획 책임자에 대한 비판의 와중에서 일어났다. 1966년 3월, 미국 미시간주의 늪지대에 착륙하는 비행접시 편대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쇄도했다. 이로 인해 여론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군은 여론을 잠재우려 공군 과학 자문위원인 천문학자 조지프 앨런 하이네크를 내세워 이 현상의 원인을 꾸며내라고 주문했다. 하이네크는 이 현상이 늪에서 발생하는 가스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언론은 그에게 비판을 쏟아냈으며 당시 미시간 주의원이었던 제럴드 포드를 비롯한 정치인까지 그의 가당치 않은 설명에 반응할 정도였다.

점차적으로 과학적 논쟁은 은폐된 정보의 존재 여부에 대한 의심으로 번져갔다. 미 국방부는 비행접시 연구 계획인 ‘블루북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콜로라도대학 과학위원회에 연구를 위임했다. 이 위원회 위원장은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독립적인 태도로 유명한 에두아르드 콘돈이 맡았다. 그는 자신의 진보적 사상 때문에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곤혹을 치르기도 한 인물이었다.

콘돈 박사는 초기에는 열린 자세로 비행접시 문제에 접근했지만, 1968년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는 비행접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의 보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여러 사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주제가 아무런 과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가 이런 종류의 연구에 재정적 지원을 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 맺었다.

급작스러운 연구 중단은 UFO 연구 문화와 과학계 문화 사이의 간극을 더욱 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과학계 문화와 일반 대중의 문화 사이의 거리도 더욱 멀어지게 됐다. 일부 UFO 연구가들은 과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하지 않게 된 원인에 의문을 품고 이들이 혹시 ‘침묵의 음모’에 동조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같은 시기에 다른 가설을 고안해내는 작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UFO 현상이 본질적으로 증거 논리를 벗어난다고 지적했다. 천문학자이며 컴퓨터 전문가인 자크 발레는 <마고니아행 여권>(1969)에서 외계인과의 만남을 작은 요정이나 꼽추 같은 ‘작은 사람들’과의 만남 같은 판타지풍의 설화와 비교하면서 두 현상이 위장술을 부리면서 인류를 통제하는 시스템처럼 움직인다고 상상한다.(2) 작가 존 킬은 종종 눈부신 현상으로 나타나는 비행접시에 대해 단순한 비행물체가 아니라, 지구가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하나의 생명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3) 이들의 이론대로라면 정보당국의 은폐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현상 자체가 증거 논리를 벗어나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음모론 급속 확산


음모론의 영향력은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한적이었다.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에서 정부 문서에 대한 접근 제한이 완화되면서, 과거 ‘침묵의 공모’에 가담한 기관들이 하나씩 밝혀졌다. 잇따른 비밀 문서 공개에 따라 연방수사국, 중앙정보국, 심지어 국가안보국(NSA)까지 관련 문서를 공개하게 되면서 이들 기관이 과거에 외계인 문제를 조사하지 않았다고 단언한 것이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정부가 외계인과 관련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대중에게 퍼져나갔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미지와의 조우>(1977)는 UFO 관련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영상화해 대중에게 알린 첫 번째 영화였다. 이 영화는 외계인과 접촉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비밀 계획을 다룬다. 3년 뒤 로스웰 사건에 대한 책이 최초로 출간됐다. 이 책은 1947년 7월 뉴멕시코 로스웰에 추락됐다고 추정되는 한 비행접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와 유사한 수많은 이야기가 UFO 주창자인 레너드 스트링필드에 의해 유포됐지만 199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로스웰이라는 낱말은 집단 기억에 뚜렷이 각인됐다.

첫째 사건은 1987년에 일어났다. 워싱턴에서 개최된 UFO 단체 모임에서 관계당국의 극비 문서의 존재가 폭로됐다. MJ-12란 명칭이 붙은 이 극비 문서가 로스웰 사건을 다루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로 1947년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익명으로 전달된 이 문서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격화됐다. 일부 연구가들은 이 문서가 조작됐다는 증거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서로 인해 로스웰 사건은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됐다. 하원을 상대로 UFO 주창자들이 벌인 로비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미국 감사원(GAO)은 공군이 관할했던 로스웰 사건에 대한 감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994년, 미 공군은 로스웰 사건이 실제로는 극비리에 진행된 정찰 기구(氣球) 개발계획에 지나지 않는다는 두툼한 문서를 공개하면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기를 원했다. 같은 시기, 텔레비전 시리즈물 <엑스 파일>은 비행접시에 관한 음모론을 발전시켰고 외계인의 부검을 화면에 담은 한 비디오가 널리 유포됐다.

MJ-12 사건은 UFO 연구자들의 조작으로 판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이야기와 접목되면서 새롭게 유포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한 텔레비전 프로듀서는 홀로만 기지(뉴멕시코)에서 미군과 외계인의 접촉을 담은 비밀 필름의 존재를 주장했다. 또한 커클랜드 기지의 미 공군 특별수사국(AFOSI) 요원의 이상한 행동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지하 외계인 기지, 미군과 외계인 사이에 맺은 계약, 유전자 조작과 인간-외계인 잡종을 만들기 위한 인간 납치 스토리 등을 엮은 풍부한 판타지 스토리를 낳기도 했다.

1990년, 인터넷의 원조인 알파넷을 통해 기존 UFO 연구와는 다른 종류의 메시지들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미국 극우 집단, 그리고 간혹 예비역 장교들과 연결된 이들은 어떤 우주적인 음모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자처했다. 이들로 말미암아 거대한 음모에 관한 더욱 황당한 내용의 글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전 중앙정보국 직원이며 비행기 제작자의 아들인 존 리어, 그리고 극우 민병대와 연결된 예비역 해병 장교 밀턴 윌리엄 쿠버는 적극적으로 이 UFO 신화를 재해석했다. 이들은 비밀스러운 ‘51 지역’(미국 네바다주 소재)에서 비행접시와 관련된 엔지니어와 물리학자로 일했다고 자처하는 로버트 라자르와 함께 음모론을 만들어냈으며 <X파일> 작가들은 여기에서 많은 소재를 찾아냈다. <X파일> 시리즈의 대성공에 힘입어 이들의 이론은 대중적 신화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지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소설-진실> 시리즈를 프랑스에서 발간한 공상과학 소설 작가 지미 귀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UFO 연구자들은 이런 부류의 허황된 ‘폭로’를 단호히 배격한다.

무조건 ‘음모론’ 매도는 곤란

혹자는 UFO와 외계인에 관련된 다양한 관점의 차이를 무시하고 UFO 연구자들과 음모론 애호가들을 모두 한통속으로 몰아 ‘비이성의 대두’에 대해 경종을 울릴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맥락이 없는 대중적 표현 방식으로부터 ‘진정한 과학 문화’를 구별해내려는 태도로서, 오래전 진정한 종교와 미신을 구분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이런 이분법에서 정치 문화이건 과학 문화이건 간에 UFO 연구자들이 낄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원을 들여다보면, 과학 문화도 마찬가지로 ‘원초적’ 음모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이 부상하려면 종교재판에 대항하는 갈릴레이처럼 반이성 집단의 세력, 곧 전능한 교회의 세력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입어, 객관적 인식이란 이에 반대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힌 세력의 연합에 맞서서 쟁취된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주의 음모론에 기초한 담론도 이런 대중적인 관점, 곧 권력은 민중이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민중을 무지 속에 가두려 한다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따른다. 과학에 대한 우리의 기본 관점도 ‘이성에 대항하는 암흑 세력의 음모론’과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상기해보자. 이를 오스트리아 철학자 카를 포퍼는 자신의 책 <추측과 논박>(1953)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비행접시에 관한 음모론을 믿는 대중에게 과학 문화가 결여돼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대중은 종교재판에 대항하는 과학의 투쟁 담론에 너무 잘 동화된 것이 아닐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조르주 샤르파크가 저술한 <마녀와 학자>(2003)의 엄청난 판매 기록이 보여주듯, 학자와 대중 모두 지식이란 권력과 싸워 획득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마술적이고 은밀하거나 비정상적인 일들이 희한하게도 빠르게 유행하고 있다. 너무 빠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이 이러한 필요성을 만들고 확대하며 조장하는 것일까?” 샤르파크는 이렇게 질문하면서 유전학자 알베르 자카르의 말을 인용한다. “시민을 순한 양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모든 권력의 꿈이다. 이를 위한 수단은 많다. 이들을 사이비 과학에 중독시키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과학 숭배’도 따져볼 문제

우리가 ‘합리주의 문화’와 ‘초자연 현상 문화’를 계속 분리해 사고하려 한다면 왜 샤르파크의 책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많은 독자들은 갈릴레이 시절 과학적 지식에 반대하는 교회권력, 그리고 비행접시의 진실을 은폐하는 어떤 현대적 음모, 이 두 사안을 동일한 구도로 파악한다.  대중에게 이제 과학은 전능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중은 과거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한 교회와 마찬가지의 의구심을 갖고 과학을 바라보게 됐다.

갈릴레이 전문가로 유명한 역사학자 스틸만 드레이크는 “만약 갈릴레이가 종교적 암흑주의에 대항하는 과학적 진리의 수호자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4)라고 자문한다. 이럴 경우, 이 물리학자에 관한 역사는 교회 권력의 음모와 구도에서 이해되지 않고, 과학적 비판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는 한 인간의 행동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양자 간에 존재하는 엄연한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비행접시에 관한 음모론의 역사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을까? 음모론에 내재하는 신앙적 요소를 들추어내서 꼬집기 보다는 오히려 합리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교회권력의) 음모론에 그토록 근접한 음모론에 경도된 대중이 바로 그 근접성 때문에 과학에 대한 합리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 시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는 없을까? 


글·피에르 라르그랑주 Pierre Largrange
<우주전쟁은 일어났을까?>(2005), <비행접시: 그들은 당신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2007) 등의 저자.
번역·김태수 asticot@ilemonde.com

<각주>

(1) 미확인 비행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
(2) Jacques Vallée, Le Collège invisible, 1975.
(3) John Keel, <그늘의 예언>(La Prophétie des ombres), 2002.
(4) <갈릴레이>(Galilée),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