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봉의 독재자 오마르 봉고의 죽음

2009-07-03     부바카르 보리스 디옵 | 세네갈 작가·저널리스트
프랑스에 뇌물 바치며 국민을 빈곤에 내몰아
아프리카의 민주 열망 짓밟는 프랑스도 ‘공범’





브라자빌의 무명 우체국 직원이 어떻게 아프리카 정계의 중요 인물이 되고 세계 최장기 집권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을까? 오마르 봉고의 찬양자들은 그의 명석한 판단과 실용주의를 강조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우아하게 돌려 말하는 셈이다. 그가 한평생 여러 가지 인생을 살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자신의 동료들보다 더 능숙하게 프랑스 대통령들과 의견 일치를 보았고, 특별한 정신을 강조하지 않은 채 시대의 필요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종도 개명(그는 두 번이나 이름을 바꿨다)도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인생 말년이 복잡해진 것도 그의 운명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사망설과 생존설이 차례로 터져나왔고, 그의 사망일도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소문과 측근들의 부인으로 점철된 그의 최후는 그의 통치가 매우 불투명한 것이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순박한 이미지로 잔인함 숨겨

모든 증언들은 그가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우호적이며, 관대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봉고 대통령은 위협적이고 상식을 벗어난 개인 숭배를 조장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조금은 무뚝뚝하지만 친절한 마을 촌장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순박함을 강조했다. 정부 수반의 이미지가 때로는 정부 프로그램 구실을 하는 현 시대에 이런 직관은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이디 아민 우간다 대통령이나 모부투 자이르 대통령과 같은 잔혹성을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늘 무던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유순해 보이는 그의 모습 뒤에는, 1993년 대선 뒤 일어난 폭동을 강경 진압하고, 몇몇 정치적 타살을 미해결로 남겨두는 무자비한 모습이 숨어 있다.

프랑스와의 잊지 못할 불화는 그에게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이라는 명성을 쌓아줬다. 두 명의 장관(1982년에는 장피에르 코트, 최근에는 장마리 보켈)을 물러나게 했지만, 봉고는 어쨌든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귀염둥이였다. 가봉의 대통령으로서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킬 줄도 알았다. 많은 프랑스 정치가들에 관한 서류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로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마주한 사람들이 자기에게 결정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니고 있음을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아프리카 지도자들 중 프랑스의 지원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었다. 이드리스 데비 차드 대통령, 드니 사수 응궤소 콩고 대통령, 블레즈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은 정치적·군사적으로 험난한 전투를 치른 뒤에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봉고는 공군 정보국 장교였던 젊은 나이에 벌써 그의 운명을 정할 수 있는 킹메이커들의 마음에 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느 프랑스 언론인의 신랄한 표현처럼, 드골 장군과의 한 차례 회담과 자크 포카르(1)와의 한 차례 저녁 식사가 그에 대한 ‘면접 인터뷰’ 구실을 한 셈이다. 말하자면 프랑스는 변덕스러운 레옹 음바 전 가봉 대통령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봉고를 임명했고, 그 후 음바 대통령의 후계자로 만들었다. 이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포카르는 파리의 병원에서 죽어가는 음바 당시 대통령에게 부통령직을 신설하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하게 했고, 그 부통령 자리에는 봉고가 내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토록 오랜 기간 가봉을 ‘쥐고 흔들게’ 될 독재자가, 거의 무(無)의 상태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정치 협약의 조항들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언제라도 그를 대통령직에서 면직할 수 있는 프랑스가 그를 전폭 지원해주는 대가로 봉고는 가봉의 자원, 특히 드골 장군이 보기에 프랑스의 자립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전략 자원인 석유와 우라늄을 프랑스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유엔에서 가봉은 프랑스의 전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찬성표를 더해줬다.

드골 정권의 앞잡이 노릇도


냉전 기간에 가봉은 드골 정권의 사주를 받아 1968년의 비아프라 분리독립의 병참기지가 됐다. 아프리카와 아랍의 수많은 전쟁에 참가한 봅 드나르의 용병들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하던 베냉을 공격할 때의 거점도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 봉고는 차드와 중앙아프리카의 분쟁 해결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열의에 가득 찬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1997년 콩고 내전의 중재자를 자처하던 봉고 대통령은 파스칼 리수바 대통령을 실각시키려는 사수 응궤소(봉고의 장인이자 엘프 쪽 사람)를 은밀히 지원했고, 이것은 그 역할의 한계를 보여준다.

봉고는 이른바 아프리카 민주화의 봄이 가봉에 찾아들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봉고 체제는 1990년 라 볼 연설이 종식시킨 체제(2)에 속했지만 미테랑 대통령을 잘 알던 봉고 대통령은 결코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이런 연극을 보면서 슬며시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오랜 공범은 어떤 것이 되었건 도덕적 교훈을 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가봉의 독립을 반대했던 음바 대통령이 프랑스에 가봉을 해외 영토로 삼을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드골은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주권국가의 외양을 가진 아프리카 국가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 뒤, 드골의 도박이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다. 이 뻔뻔한 성공을 거울 삼아, 프랑스 국회의원들은 언젠가는 식민지 해방의 긍정적 측면에 대한 법을 가결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 그의 죽음에 무관심

봉고 대통령의 죽음이 아프리카(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를 거의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에서보다 프랑스에서 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프랑스 언론들은 특히 봉고 대통령이 좌파와 우파 정치인들에게 상당한 자금을 나눠줬다는 사실을 폭로했다.(3) 하지만 수백만 달러를 ‘사탕 나눠주듯’ 분배한 것으로 밝혀진 엘프 스캔들(4)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석유, 망간, 우라늄, 고급 목재 등 막대한 자원을 보유한 아주 작은 나라가 자국의 국민들을 더 잘살게 만들지 못한 사실에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 봉고와 그의 가족들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했다. 도로와 무료 진료소, 학교에 투자하는 대신, 이 돈은 사치로 탕진됐다. 그리고 국민적 열망은 한낱 무위로 돌아갔다. 2008년 12월 봉고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됐지만, 이런 법적 고소는 불법 축재 시스템의 수혜를 본 프랑스 정치인들에게까지 확대돼야 하지 않을까? 이런 행동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는 사실을 프랑스 사람들에게 확실히 알게 해줄 것이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그들 혼자서 아프리카 경제를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그들의 완벽한 공범이다. 그들 모두가 가봉이나 차드의 어린이들이 치료를 받고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개입 정책’ 계속될 것

자신의 지도자들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다른 지도자를 세우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봉인들은 여러 차례, 선거를 통해서 혹은 좀 덜 평화적인 방법으로 지도자 교체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프랑스의 강력한 의지와 마주쳤다. 직접적인 개입의 전통은 1964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데타로 축출됐던 음바 대통령이 프랑스 군대의 힘으로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한 것이다. 또한 1990년 한 야당 지도자가 사망한 뒤 리브르빌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을 때 미테랑 대통령은 공수부대를 파견해 가봉의 치안을 회복했다. 더 심한 것은, 1998년 봉고 대통령이 대선에서 패할 위기에 처하자 대부분 법관들로 구성된 프랑스 옵서버들이 현금을 받고 부정 개표를 눈감아준 사실이다.

비록 프랑스어권 아프리카가 감시하에 있고, 특히 아프리카 젊은이들 사이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유명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사망증명서’가 리브르빌에서 서명됐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일이다. 더욱이 이것이 과도기를 매우 미묘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억눌려 있던 에너지가 해방되려면 아주 조그만 것으로도 충분하다.

글 부바카르 보리스 디옵 Boubacar Boris Diop
저서로 <긴 꼬리 원숭이의 아이들>(2009)이 있다.

번역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1960년부터 1974년까지 아프리카 담당 대통령 자문위원.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2) 1990년 프랑스 서안 라 볼에서 개최된 프랑스-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아프리카의 비민주 정권을 더는 지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3) <카나르 앙셰네>, 2009년 6월 17일치 참조.
(4) 올리비에 발레, ‘프랑스를 위해 봉사하는 엘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0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