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트섬의 기구한 역사, 이슬람 지배 벗어나 프랑스 품으로

2009-07-03     티에리 미샬롱 | 정치학자
이슬람 지배 벗어나 프랑스 품으로
갈등빚은 코모로제도와 영원히 결별


마요트섬이 프랑스 해외 도에 편입되려고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이곳 민족의 역사, 즉 프랑스의 이 지역 합병과 관련이 깊다. 원래 합병은 예속 관계가 아니었다. 마요트가 오랜 기간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것에 가까웠다. 주민 대부분이 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계에 물신숭배 문화를 지닌 코모로제도는 그랑드코모르, 앙주앙, 모엘리, 마요트 4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17세기부터 서서히 이슬람화했으며, 특히 18세기 페르시아 시라즈 출신의 몇몇 백인 가문이 유입된 뒤부터는 이슬람화가 가속화했다. 특히 아랍식 이름을 하고 귀족 출신을 자처하던 이들은 코모로제도에서 가장 면적이 큰 그랑드코모르와 앙주앙에 자리를 잡고 지배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모계 중심 문화인 이 지역에 아랍·이슬람계의 부계사회적 질서를 강요하려 했다. 이들의 등장에 따라 현지 주민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순탄치 못한 역사를 거친 코모로제도는 정치적 단일화를 이룬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시라즈에서 온 이 ‘귀족’ 가문들은 나중에 현지인과 혼혈 가정을 이루었으나, 섬마다 자신의 세습 술탄을 심어두었다. 각 세습 군주들 사이의 경쟁은 섬에서 섬으로의 잦은 파병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코모로제도는 그 지역에서 ‘호전적 술탄의 군도’로 알려질 정도였다.

코모로제도의 별종, 마요트


다만 이 가운데 마요트섬은 마다가스카르계가 가장 많았으며, 이슬람 문화의 특색이 비교적 엷었다. 1841년 마요트섬은 당시 술탄이었던 아드리안트술리에 의해 프랑스로 넘어갔다. 마요트 내 유력 인사들이 합병을 비준했고, 이에 따라 마요트섬은 프랑스 식민지가 됐다. 1846년 왕령에 따라 이곳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페르시아 출신의 봉건 가문들은 앙주앙섬과 그랑드코모르섬으로 망명한다. 마요트섬 사람들은 술탄의 손에서 벗어나 저들의 분쟁, 세금 압박에서 헤어났고, 노예제에서 해방됐으며, 식량 재배용 땅을 갖게 됐다. 이 시기부터 마요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준 수호신 프랑스의 이미지가 자리잡았다.

코모로제도에서 마요트섬은 유일하게 반세기 가까이 프랑스의 통치를 받는다. 모엘리는 1886년이 되어서야 프랑스 보호령으로 들어갔고, 이어 앙주앙과 그랑드코모르는 1892년에 프랑스 보호령이 됐다. 그렇게 마요트와 자우지 이하 부속 섬들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됐고, 프랑스로의 병합에 따라 마요트인들은 이슬람 이전 관습, 즉 마다가스카르나 동아프리카의 자신들 본연의 전통적 관습을 한결 수월하게 따를 수 있게 됐다. 이는 특히 관습법에 따른 재판관(카디·이슬람법에 기초해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의 판결에 대해 항소를 할 수 있는 재판 제도의 신설로 가능했다. 마요트 주민들의 눈에 코모로제도 전체의 행정당국은 마요트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912년 마다가스카르 식민지에 코모로제도가 합병됐다고 해서 이런 이미지에 손상이 가지는 않았다. 자우지는 현지 행정본부로 남아 1946년 신설된 코모로제도 해외령 관할청 소재지가 됐다. 하지만 해외령 최고행정관이 있는데 본토보다 더 포괄적인 권한을 갖춘 의회를 설치하는 건 마요트인들에게 위험하게 느껴졌다. 사실 의회 의원들은 각 섬의 인구 비율에 따라 선출됐다. 이에 따라 그랑드코모르의 경우 10명의 의원직이 배속됐고, 앙주앙에는 5명, 마요트에는 3명, 모엘리에는 2명의 의원직이 돌아갔다. 1952년에 이 네 선거구가 통합됐지만, 그렇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956년 드페르 기본법에 따라 공식 코모로 의회가 된) 선출 의회에서 마요트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귀족 가문의 권력은 복원됐다.

코모로 의회에 실질적인 타격이 있었던 건 1958년 5월 14일이었다. 의회는 자우지에 있던 관할청 소재지를 그랑드코모르의 모로니로 이전하길 요구하는 발의안을 채택했다. 마요트로서 이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고, 코모로제도 최고행정관과 프랑스 해외령 장관에게 각각 항의서가 전달됐다. 마요트는 배신과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믿을 만한 현지 소식통과 1958년 코모로제도에서 일하던 본토 공무원들의 말을 들으면, 1958년 9월 28일 국민투표에서 5공화국 헌법에 유권자 대다수가 반대표를 던져 항의 의사를 표시했을 수도 있단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행정관들은 투표함에 찬성표를 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코모르제도와 갈등 고조

하지만 마요트인들은 울분을 신속히 전략화했다. 코모로제도의 다른 섬과 관계를 끊는 모든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 내에 확실히 내릴 수 있는 닻을 얻는다. 1958년 10월 4일 헌법 차원에서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될 전망이 서자 조르주 나후다의 제안으로 마요트 현지 실세들이 1958년 11월 2일 회의장에 집결했다.(1) 해외령 지위 유지에 대한 모로니의 의향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은 마요트의 지위를 해외 도로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다. 12월 11일 코모로 의회가 실질적으로 해외령 유지 결정을 내렸을 때, 마요트 대표 의원 네 명만이 ‘해외 도’ 지위를 주장했다. 그에 따라 결성된 마요트 권익수호연합은 파리 행정당국에 사절단과 청원서를 수차례 보냈다. 마요트가 대놓고 특이한 행보를 보이자 그때부터 모로니 쪽의 보복이 시작된다. 설비 대출금도 간신히 받는 상황이었고, 마요트 공무원들은 무조건 다른 지역으로 전출됐으며, (차기 코모로 대통령 아메드 압달라를 포함한) 앙주앙섬 지배 계급은 (앙주앙섬의 배출구로 이용되던) 마요트의 인구가 밀집된 드넓은 영지들을 거의 주기적으로 매입했다. 뿐만 아니라 모로니는 마요트 실세들을 분열시키려 하면서도 (사이드 모하메드 셰이크가 주재하는) 코모로제도 정부 각의에는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1962년 행정 서비스가 실질적으로 자우지에서 모로니로 옮겨가게 됐으며, 이는 사태 악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섬의 경제를 걱정하는 마요트 여성들은 특히 1966년 8월 (이슬람 원로) 셰이크의 관저에 돌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고, 셰이크는 도주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처럼 마요트섬은 해외령 당국에 대해 간헐적으로 항거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유수프 사빌리의 지도에 따라 이번에도 여성 주도로 1967년 2월, 어느 셰이크의 연설을 방송한 라디오 방송사에 대한 공격이 감행됐다. 이 셰이크는 코모로 의회의 마요트 소속 의원 네 명의 임기를 중단하는 걸로 반격했다.

마다가스카르섬 혼혈 출신 마르셀 앙리가 들어오면서 형세는 더욱 과격해지고, 운동의 조직화도 이루어져 마요트대중운동(MPM)이라는 이름의 협회가 만들어진다. 해임된 의원의 공석을 채우기 위해 마르셀 앙리는 명단을 구성해 95%의 득표율로 당선시켰다. 이어 이 협회가 정치를 반독점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투표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함을 설치하고 쓰지 않은 용지를 수거하는 등) 투표 당시 선거권을 엄격히 관리하고, 코모로제도 통합에 호의적인 화해 세력에게 온갖 압력을 행사하며, 과격한 노선의 제나 데레와 자이나 메레스 두 여성 혁명운동가를 활용해 여성들을 동원했던 것이다. 결국 ‘친프랑스’에 중점을 두고, 특히 “프랑스인으로 남아 자유를 누리게 해달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는 온갖 탄압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질서 유지는 본토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모로니와의 관계 악화는 해가 갈수록 구체적인 양상을 띠었다. 마요트는 공공시설 접근권을 박탈당했고, 이에 맞서 코모로 행정당국의 마요트 현지 대표들을 무시했다. 이들이 아예 섬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때로는 소수의 ‘화해’ 세력이 활동을 벌이는 걸 차단하는 강경책을 펴기도 했다.

1970년 셰이크가 사망하고 좀더 타협적인 성향의 사이드 이브라임 왕자가 그 뒤를 잇자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며 마요트-모로니 사이의 교류가 재개됐다. 하지만 모로니에서 독립 조짐이 보였던 만큼 ‘마요트대중운동’은 쉽사리 무장해제를 할 수 없었다. 상황이 확실해진 건 1972년 1월 해외 도·해외령을 담당하는 피에르 메스메르 국무장관이 방문했을 때였다. 그가 한 약속은 이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130년 전부터 프랑스령으로 속해 있는 마요트섬은 원할 때까지 프랑스령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목적에서 대국민 의사를 묻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섬별 국민투표가 실시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프랑스와 분리되고 싶지 않다면, 프랑스 또한 여러분과 분리되고 싶지 않다.”(2) 물론 이 발언은 마요트 쪽에선 환호를 이끌어냈지만, 반대로 모로니를 심히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마요트족 배제한 분리운동


1974년 10월 3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정부는 ‘코모로제도 전체에 관한 투표를 포괄적으로 계산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식민지 주체의 국경만을 (식민 지배국의 국경과 분리해) 인정하는 국제법에 부합되는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당시 파리에서 창설된 마요트 국민지지위원회와 ‘개별 섬 단위 계산’을 찬성하는 의원들이 특히 상원을 필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리 출신의 메스메르와 당시 (마다가스카르 동쪽 섬인) 레위니옹을 대표하는 의원이던 미셸 드브레의 주도로, 상원은 코모로제도 주민이 아닌 각 섬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즉, 섬별로 의견 수렴을 하겠다는 것이다. 상원의원들이 이처럼 정부의 의지를 막고 나서자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10월 24일 “코모로제도의 섬들은 나눠질 수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코모로제도에 독립을 부여하려는 이때, 늘 코모로제도의 특징이던 단일성에 종지부를 찍으라고 제안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고 주장했다.

1974년 12월 22일, 선거관리위원회가 적발한 코모로 행정부 쪽 공작이 있었음에도 투표에 임한 마요트 국민의 64%가 독립안에 반대했고, 나머지 섬 주민들은 99%가 독립을 찬성했다. 당시 ‘해외 도·해외령’ 국무장관이던 올리비에 스티른은 마요트의 분리에 대해 정부 차원의 거부 의사를 표시했고, 차기 정부에 연방제를 제안했다. 하지만 새로이 코모로제도의 행정부 수반에 오른 아메드 압달라가 이를 거부했다.

1975년 7월 6일 파리를 제치고 모로니 국회가 한목소리로 독립을 선포했다. 만장일치였으나, 마요트 의원들은 자리에 없는 상태였다. 파리로 보낸 전보에서 마요트 소속 의원들은 이런 ‘불법 결정’을 비난하고, 마요트의 해외 도 지위를 거듭 요구했다. 17년 동안 마요트 권력층이 공들인 결과, 마요트섬은 코모로제도의 다른 세 섬과 완전히 갈라서게 됐다. 하지만 이 섬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마요트족이 아니다.

글·티에리 미샬롱 Thierry Michalon

앤틸리스 및 기아나대학 명예 전임강사. <프랑스 해외 영토, 제도적 변천 및 정체성 확인>(L‘Harmattan·2009)의 저자.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각주>

(1) 5공화국 헌법 제76조에 따라 해외령에 속하는 지역들은 4개월의 유예 기간에 각 해외령 국회 표결을 통해 현 지위의 유지, 좀더 중앙집권적인 성격의 ‘해외 도’ 지위 채택, 반대로 주권이 강해지는 ‘프랑스 공동체’ 회원국 지위 채택이라는 세 가지 안 가운데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 안을 선택할 경우, 프랑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나, 독립을 하는 건 아니었다. 헌법을 수용한 마다가스카르와 모든 프랑스령 아프리카 지역들이 마지막 안을 선택했으며, 지부티와 코모로제도는 해외령 지위 유지안을 채택했다.

(2) 아마도 이 시기부터 프랑스 정부가 ‘마요트대중운동’ 지도부에 매월 비밀리에 재정 지원금을 지급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