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실험장’, 공상과학의 미학

2009-07-03     세르주 르망
고급문화에선 ‘과학 빙자한 거짓추리’로 낙인
인간 중심주의에 맞선 ‘또 다른 과학’일수도

정확하게 한 세기 전, <르스펙타퇴르>에 작가 모리스 르나르의 ‘과학적 경이와 그것이 지식의 진보에 끼치는 영향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은 제1, 2차 대전 사이의 프랑스 공상과학(SF) 작가들의 주목을 받았다가 잊혀졌으나, 1990년대 초 재조명되면서 오늘날 공상과학의 최초 이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SF라는 신생 장르의 미학을 분석하면서 르나르는 이렇게 말한다. “공상과학은 딱히 정의하기 힘든 이상한 한 가지 요인, 혹은 여러 가지 요인들을 의도적으로 끄집어내 경이로운 존재, 물체 혹은 사건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학적 가설들을 확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그 가설에서 결과를 추론할 수도 있다. H. G. 웰스의 <우주전쟁>도 화성에 우주 생명체가 산다는 전제 아래 행성 연구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과 예상할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해 만들어진 셈이다.”(1)

과학 연구의 가설로서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20세기 내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 사이에 태양계 밖 행성에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됐고, 이미 확보된 자료들을 토대로 외계인의 존재가 충분히 상상될 수 있었음에도 SF 작품들은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과학이나 문학에서 설 자리가 없는 망상쯤으로 여겨졌다.

협소한 장르라는 인상 고착화

SF 장르의 협소한 이미지는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SF 장르의 작품은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 등 5개국에서 에드거 앨런 포, 쥘 베른, J. H. 로니, 아서 코넌 도일, 쿠르트 라스비츠, 허버트 조지 웰스,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등 극소수 작가들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발표됐다. 이후 영국인들은 웰스를 중심으로 ‘과학적 로맨스’ 학파를 형성했다. 프랑스에서는 르나르가 1909년 ‘과학적 경이’라는 이름으로 그에 필적하는 학파를 구축했다. 그로부터 17년 뒤 미국에서 휴고 건즈백이 최초의 상업적 SF 전문지를 창간했고, 1926~29년에 ‘사이언티픽 픽션’에서 ‘사이언티픽션’으로, 이후 ‘사이언스 픽션’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 뒤 미국에서는 대중문화의 확산과 함께 외계인을 소재로 한 ‘펄프 매거진’(2)들이 등장했으며, 아이작 아시모프, A. E. 반 보그트,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들(모두 1939~45년에 발행됨)이 번역돼 유럽에 소개되면서 유럽 학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3) 휴고 건즈백은 SF계의 세계적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실험 장르로 시작된 SF는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일관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SF는 작가 모리스 르나르가 부여하고 싶어하던 문학적 위상을 얻지는 못했다. 특히 프랑스 문단은 SF를 경멸하거나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가설을 끝까지 끌고 가는 미학

SF는 사실 위주의 신문 사설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SF는 그 출발부터 픽션을 넘어서서 도시공학·철학·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리고 그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화적 현상을 표현한다.

몇 가지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미래 지향적인 ‘그랜드 파리’ 프로젝트, 유전자조작에 의한 인간 복제, 1997년 화성탐사선 호이겐스호 발사, 또는 외계인 숭배 단체인 ‘라엘리안 운동’의 인간복제 지지 등이 바로 그러하다. SF는 이런 모든 현상들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이를 좀더 발전된 형태로 확대 적용해 이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가설을 확실한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에 따른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야말로 SF의 능동적 원칙이다. SF에서는 상당한 지식과 사색, 그리고 작가 모리스 르나르가 ‘경이로움의 단계’라고 표현했던 ‘과학적 가설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몇몇 경우 미진한 부분이 있지만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SF 초창기 선구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인간을 우주에 보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창의적인 가설과 단순한 몽상 사이에 역사적 선별 작업이 이뤄진 것이다.

대중에게 SF는 비주류 버라이어티로, 때로는 ‘그로테스크’나 ‘몽상’과 동의어로 간주된다. SF가 나온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탐정소설이나 만화와 달리 문학사 교과서에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좀더 일반적인 형태로 SF는 현대 문화의 중요 부분에 혈액을 공급하고, 지속적인 믿음을 만들어내며, 문명의 단계에서 계획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시행에 기여한다. 이렇게 완전히 상반된 모순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철학이 포기한 형이상학 추구

철학자 기 라르드로는 <철학적 픽션과 과학적 픽션>(1990)이라는 에세이에서 SF가 20세기 형이상학을 독점하고 있다고 말했다. 형이상학은 서구 사상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학문이다. 예전에는 과학과 철학, 종교와 예술이 교차하는 영역에 있었지만 니체와 프로이트 이후 불가해한 주제로 치부됐다. 실제로 SF는 100년 동안 공간·시간·실재의 속성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불멸성의 문제에 몰두했고 거대한 실체로서의 초인을 양산해냈다. 또 어디에서나 구닥다리로 간주되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제기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SF 특유의 미학을 제시하면서, 그리고 언젠가는 기술과학이 그것을 재활성화하리라는 점을 확신하면서 구체적으로 그 구실을 수행해왔다.

현재 SF가 다루는 문제는 포스트휴먼, 사이버 세계, 외계 문화와의 접촉이다. 이것이야말로 아주 옛날의 문제를 다시 다루는 것이 아닌가? 르나르는 일찍이 1909년부터 그 점을 느끼고 있었다. “과학적 경이는 우리에게 우리의 즉각적인 평온함을 넘어서 탐험해야 할 무한한 우주공간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것은 과학의 이념으로부터 일상의 관습 밑에 숨은 저의와 인간 중심주의적 감정들을 무자비하리만치 낱낱이 끄집어낸다. 그것은 우리의 습관을 깨부수고 우리를 스스로를 넘어선 또 다른 관점 위로 옮겨놓는다.”

라르드로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왜 고급문화가 SF를 통해 발전된 극단적인 가설들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거부했는지 설명해줄 수 있다. 고급문화에서 그런 가설들은 퇴보이거나 거짓 추리, 심하면 과학성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실속 없는 주제로 여겨졌다. 서구의 후기 형이상학 사상가, 후기 가톨릭 사상가들의 눈에 거의 80여 년간 SF 장르의 소중한 주제였던 외계 생명체는 천사와 악마의 귀환으로 여겨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결국 이 주제가 과학적으로 그 자질을 인정받고, 수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이상한 것’이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니었고, 바로 이 점에서 SF는 ‘본의 아닌 과학’이 되는 것이다.

이런 방향 전환은 주제에서 환상적 부분을 상실하게 하고, 작가들도 흥미를 상실하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한 세기 동안 중요한 영역을 차지했던 미래 세계에 얽힌 주제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SF 장르는 곧 이런 장애를 두 가지 대책으로 보완했다. 앞날이 보이지 않게 되자 과거를 공략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다시 말해 “만일 이러이러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점을 탐색하는 대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예전 황금시대의 장인들이 꿈꾸던 우주의 미래만큼이나 풍요로운, 무수히 많은 상상의 세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2차 대전 후 안드로이드들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가상의 세계를 그린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와 로버트 실버버그의 <해골의 서>가 성공한 사례다.

과거를 재창조, 미래를 예고

두 번째 대책은 더 눈부시다. 미래의 획일성을 새로운 약속의 원천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이자 수학자인 버너 빈지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 향후 몇십 년 동안 현재의 모든 기술들이 결집된 교차 지점에서 슈퍼 인공지능이 출현해 미래를 예측하는 모든 생각을 없앤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죽을 운명, 개체성, 환경에 종속되는 유한한 존재 등 우리가 아는 인류의 근본 바탕이 문제시될 때, 그 이후의 세계를 예측하는 것은 헛수고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환멸에 의해 ‘미래를 죽이’는 대신 과학과 기술은 예전에 없었던 규모의 형이상학적 사건의 동력이 되고, 인류의 새로운 모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미셸 우엘벡이 <소립자>라는 작품을 통해 이런 예언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종말론의 부활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실현될 과학인가? 상상 속 과거의 확장과 향후 반세기에 도래할 중요한 변화의 예고 사이에서 우리 시대는 새로운 사상의 밑그림을 힘들게 그려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글 세르주 르망 Serge Lehman
저서로 <저 높은 곳과 사람이 살 수 없는 우주공간>(2008), <수평선으로의 귀환>(2009년 10월 출간 예정)이 있다.

번역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 모리스 르나르, <르스펙타퇴르> 6호, 1909년 10월. <모리스 르나르, 소설과 환상 콩트>, ‘Bouquin’ 시리즈, 1990년판에 다시 실림.
(2) 20세기 초 미국에서 발행된 싸구려 잡지들은 특히 환상적인 이야기들이나 SF를 게재했다.
(3) 쥘 베른의 <환상여행> 시리즈가 시작된 해인 1863년부터 미국 작품의 번역이 시작된 1950년 사이 프랑스에서 간행된 SF 작품 수는 3천 편 정도로 추정된다. 존 앙투안 노의 <에너미 포스>는 환상문학 작품 중 최초로 2003년 공쿠르상을 받았다. 최초의 SF 시리즈 역시 프랑스에서 시작됐다(레지 메삭의 하이퍼월드 시리즈). 탐정소설 영역에 걸쳐 있는 SF의 전통은 팡토마, 룰타비유, 아르센 뤼팽과 매그레 경감 등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잃어버린 세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9년 7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