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쇼’로 끝난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

2009-07-03     수키 김 | 재미 소설가
“미국에서는 카메라 한 대에 얼마나 하지요? 난 여행도 하고 사진도 찍고 싶은데 카메라가 없습니다.”

“혹시 당신 컴퓨터와 카메라를 제게 기념으로 주고 갈 수는 없나요?”


북한 핵실험 이후 경색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각국이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의 이행을 구체화하는 가운데 북한의 반발도 거세지는 양상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뉴욕 필하모닉의 깜짝 평양 공연으로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이 점쳐지지 않았던가? 최근 소설 <통역사>(Interpreter)로 미국 언론의 각광을 받고 있는 재미작가 수키 김이 기자가 아닌 작가의 자유분방한 시선으로 뉴욕 필하모닉 공연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7월호는 지난 2008년 12월 <하퍼스 매거진>에 ‘진짜 대단한 쇼’(A really Big show)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김씨의 글에서 발췌·요약했다. 1년 전의 북한 모습을 실은 '르디플로'는 북한의 시간이 여전히 멈춰서있다는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2008년 2월 25일 정오, 베이징 국제공항에서 70여 명의 기자들이 ‘금지된’ 목적지로 떠나기 전 마지막 준비를 했다. 어떤 기자들은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을 시도했고, 어떤 기자들은 플로어를 오가면서 휴대전화에 대고 누군가와 통화했다. 다음 여행의 48시간 동안, 그들은 외부와의 통신이 단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특파원들은 잠시 후 평양을 방문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한 번도 그곳을 가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방문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뉴욕 필하모닉의 단원 110명이 게이트에 들어서자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연주자들은 손가방 대신 악기를 짊어지고 있었다. 필하모닉이 북한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1인당 5만 달러를 기부한 후원자 그룹 25명도 합류했다.

나는 이미 필하모닉의 아시아 투어를 거의 일주일 동안 쫓아다녔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필하모닉 홍보 담당 책임자 에릭 라츠키는 나에게 ‘특권’이 주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오로지 그가 허락한 연주자들에게만 말을 걸 수 있으며, 인터뷰 약속도 그가 정해준 사람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북한 여행 기간 중 나는 내내 기다림에 지쳤으며, 혹시나 지나치는 바이올린 연주자나 첼로 연주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싶어 호텔 로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라츠키의 말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걱정할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연주자들은 모두 한결같은 답변만을 했다.

“음악이죠, 정치적인 것은 아닙니다.”
“음악이 없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문화 대사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연주자들의 확고한 신념은 뉴욕 필 지휘자가 앞서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밝힌 그대로였다. “예술가들이 대중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은 꽤 넓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완전히 비정치적이어야 하고, 정파를 초월하며 어떤 특별한 목적과는 무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술가의 가장 최고의 덕목이죠.” 39년간 필하모닉과 함께한 더블베이스 연주자 존 딕이 부연 설명했다. “레니는 이미 그렇게 했어요.” 레니는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필하모닉 음악감독인 그는 1959년에 소련으로 오케스트라단을 이끌고 갔고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당시인 1989년에는 베를린으로 이들을 데려갔다. 필하모닉의 사장 자린 메타는 평양 초연에 대한 소회를 묻자 ‘오웨리안’ 사회(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도시 유형)인 평양이란 도시에서의 공연은 넘어야 할 ‘새로운 국경’이라고 말했다. 뭄바이 출신인 그는 필하모닉의 최장기 음악감독을 지낸 주빈 메타의 동생이다.

베이징에서 평양까지 2시간의 비행에 남한 기자들도 몇 명 합류했다. 아시아나항공이 이번 공연에 약 70만 달러를 들여 전세기를 제공했지만 기자들은 좌석당 400달러를 필하모닉에 지불해야 했다.

한민족의 비극, 불행한 나의 가족사


오후 4시, 평양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승객들은 숨을 죽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를 껐다. 창밖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봤다. 전에 평양에 가본 적이 있는 몇 명의 사람들에게도 이곳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장소다. 나는 이곳을 처음 방문한 지 6년이 지나서 지금 다시 이 땅, 한민족의 비극이자 열망의 본원지인 이곳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탱크가 서울로 밀고 들어올 때 나의 할머니는 피난 보따리와 당시 4살이던 나의 어머니를 포함해 자식들 5명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열차는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었지만 짐을 든 사람들은 그래도 열차에 오르려고 부대끼고 있었다. 이때 젊은 남자들은 어린아이와 여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누군가 소리쳤고 덕분에 할머니는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17살이던 장남은 다음 기차를 타겠다는 말과 함께 이 마지막 열차에서 내려야 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아들이 손이 묶인 채 북한군에게 끌려가는 것을 할머니 친구분이 보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들을 찾아 서울 근처를 헤매고 다녔지만 결국 평양 어딘가에 아들이 살아 있다는 점쟁이의 말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20년간이나 할머니는 언제든지 38선이 무너지고 아들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북쪽을 계속 바라보셨다.

한국전쟁은 3년간 계속됐고 사망자와 부상자, 실종자를 모두 포함해서 300만 명의 시민이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략 당시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수다. 북한군과 중국군 사상자는 약 150만 명으로 추정되며 남한군은 41만5천 명이 사망하고 42만9천 명이 부상당했으며 미군은 사망자가 3만3천 명, 부상자가 1만3천 명이었다.

평양에는 눈이 간간이 내리고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 배지를 달고 포장도로에 나와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보였다. 사진기자들이 지휘자 로린 마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둘러싸고 있을 때 나는 권순호라는 북한 <조선중앙TV> 기자와 재빨리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카키색 재킷과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분이 도착하기를 2개월 전부터 기다렸습니다. 국민들이 TV에서 공연을 보게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권순호는 오케스트라가 지금 막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하고 오는 길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좀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그가 바로 말을 끊었다. “우리는 미국인들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습니다. 동방예의지국답게 손님을 잘 대접할 것입니다. 통일이 곧 이루어지기를 다 같이 기원합시다. ”

로린 마젤과 수행원들이 벤츠에 타고 숙소로 간 후 나머지 사람들은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안내자와 통역관이 할당됐다. 후원자 그룹은 보통강호텔에 예약돼 있었다. 호텔 소유주는 최근 북한에 대폭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이북 출신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다. 남한 기자들 대부분은 고려호텔로 안내됐다. 나머지 기자들과 연주자들은 양각도국제호텔로 갔다. 양각도호텔은 대동강 한가운데 있는 양각섬에 뚝 떨어져 위치했다는 이유로, 일명 ‘알카트라즈 호텔’이라고 불린다. 실제로 그곳은 평양과 단절된 곳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의 행동반경은 우리가 속한 그룹에만 국한됐다. 버스 또한 지정된 번호를 이용하도록 전달받았다. 나는 8번 버스였다.

거리는 한산했지만 확실히 6년 전보다는 차량이 눈에 띄게 많았다. 반짝반짝하는 스포츠실용차(SUV)가 우리 옆을 스쳐갔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장군 김정일’과 ‘21세기의 태양, 우리의 위대한 동지 김정일’이라는 두 개의 플래카드 사이에 평화자동차사의 ‘쿠쿠’ 자동차 광고판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두 번째 플래카드 내용이 좀 혼돈스러웠다. 북한 달력으로 하면 21세기가 아니라 1세기이고 ‘태양의 날’은 김정일이 아닌 김일성이어야 한다. 길을 따라 듬성듬성 자라기 시작하는 나무들 사이로 연한 자주색과 녹색으로 칠해진 3층 또는 4층 정도의 건물들이 보였다. 아파트 단지로 보이는 다른 회색 시멘트 건물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 보였다. 거리의 사람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고 어느 누구도 외투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잠깐이긴 했지만 지난해의 홍수로 식량난을 겪고 있고 게다가 식량 배급 중단으로 2300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최근의 보도는 거짓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전에 평양에 와봤던 한 영국 기자의 말이다. “이렇게 차가 많이 다니는 것은 처음 봅니다.” 버스는 만수대 앞에서 멈췄다. 방문객이면 누구나 김일성 동상에 경배해야 한다.

47층 건물인 양각도국제호텔은 난방이 완벽했다. 내 방은 33층에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창문 쪽을 살폈다. 창문은 완전히 잠겨 있었고 그 위로 스팀이 나오고 있었다. 복도 쪽 창문을 통해 대동강의 곡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음울한 회색 건물들이 보였다. 버스에서 안내원은 대동강을 “서울에 있는 한강보다 더 높은 곳에서 흘러내려오는 수심이 깊은 강”이라고 설명했다. 오후 5시30분이었다. 만수대 예술단 환영 쇼가 30분 후에 모란봉에서 있을 예정이다. 나는 경치를 좀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필하모닉이 제공한 여정은 생각에 잠기면서 꾸물거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만수대 예술단은 장구와 부채를 이용한 한국 전통춤을 보여줬다. 공연은 별로 신기하지 않았다. 옆에서 남한 기자가 졸고 있었다. 민속음악은 ‘위대한 지도자’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북한 안내원과 통역관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나자 지휘자 로린 마젤이 무대 위에 있는 수석 무용수에게 꽃다발을 직접 주었고 카메라를 향해 포즈도 취했다. 공연장 밖으로 나가면서 바이올린 연주자 미셸 킴을 보았다. 부모님이 평양에서 출생한 재미동포다. 그녀에게 이곳의 첫인상을 물었다. 그녀는 “근사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정확히 북한의 무엇이 근사하다고 느끼는지 다시 물었다. “경치가 아름다워요. 사람들도 멋있고요.”

“좋게 써야, 다음에 초대받을 수 있어!”

우리는 곧바로 공연장 옆에 있는 연회장으로 안내됐다. 번쩍이는 샹들리에와 하얀 식탁보, 재킷을 갖춰입은 도우미들이 있었다. 중앙에는 ‘영원한 위대한 지도자’를 상징하는 ‘김일성좌’라는 심홍색 난초 부케가 있고 그 둘레에 대동강 맥주와 인삼주 그리고 들쑥주가 놓여 있었다. 실내가 너무 밝아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또렷이 보였다. 비올라 연주자인 피터 케노트가 중얼거렸다. “정말 난처하네요. 밖에서 사람들은 굶고 있는데, 난 여기 있는 음식을 하나도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내 옆자리에는 김철이 있었다. 그는 이번 공연의 북한 공식 주체기관인 북한예술교류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이고 나서 내게 충고를 한마디 던졌다. “우리에 대해 좋게 써야 할 겁니다. 그래야 당신을 다시 초청하지요.” 식사가 진행될수록 그는 점점 말이 많아졌다. “글 한 편 쓰는 데 얼마나 받나요?” “당신 컴퓨터는 인터넷이 됩니까?” “미국에서는 카메라 한 대에 얼마나 하지요? 난 여행도 하고 사진도 찍고 싶은데 카메라가 없습니다.” 그는 해외라고는 딱 한 번 독일 라히프치히에 교환학생으로 가본 적이 있고 앞으로 또 여행을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말도 했다. 남한에 관해 아는 것은 노조 투쟁에 관한 TV뉴스 멘트가 전부이며 북한이 접근 제한을 둔 인터넷 또는 인트라넷이라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그다지 많이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소유하기 힘든 자동차는 값이 1만 유로에서 2만 유로 사이고 컴퓨터는 400유로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북한 돈으로 얼마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기 머무는 동안 이곳 사람들이 외국인과의 화폐 거래에 모두 유로를 사용했기에 확인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월급이 얼마인지 묻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주의자입니다”라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이 디저트로 나왔을 때 그가 말했다. “혹시 당신 컴퓨터와 카메라를 제게 기념으로 주고 갈 수는 없나요?”

5분간 차를 타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마치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환한 불빛의 조형물들로 이어졌다. 그런데 옆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빛이라든지 광고판의 불빛 또는 반짝이는 장식과 같은 그런 불빛은 전혀 없었다.

아침 식사에는 간단히 캐비아를 먹는 것이 나의 마지막 기대였으나 분명히 아침 7시가 안 됐는데도 화려한 뷔페가 차려져 있었고 산책을 좀 하려 해도 호텔 도어맨이 “밖에는 별로 볼 게 없습니다”라며 막아섰다 호텔 로비는 지구와 독수리 얼음 조각으로 장식돼 있었고 김정일의 탄생 장소라는 백두산의 정일봉 벽화가 있었다. 가사 없이 낮게 흐르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내게 카푸치노를 서빙한 사람은 이 음악이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는 노래이며, ‘우리를 위해 일하시느라 피곤에 지친 위대한 장군님이 편히 쉬시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6면짜리 일간지 <노동신문>을 몇 부 들고 오자 다른 기자들이 내 자리에 몰려들었다. 도처에 통역사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내게 무슨 내용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문에 있는 기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음악 아니면 일주일간 계속되고 있는 ‘2·16’ 김정일 생일 기념 축제를 다루고 있었는데, 절정인 2월 16일에는 팔레스타인과 방글라데시, 라오스, 쿠바, 우즈베키스탄의 사절단 방문이 있었다. 2월 24일자에는 ‘주체는 우리 음악의 전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음악 분야에 미치는 김정일의 위력을 자세히 설명했고, 2월 25일자 1면에는 ‘남쪽 사람들도 위대한 김정일 장군의 예술적 재능에 감탄하다’라는 기사와 함께 드라마 예술, 춤 예술, 영화 예술, 음악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김정일 저서 목록을 나열했다. 그날 아침은 2월 26일이었고 북한 주민의 애창곡인 <김정일 장군의 노래>와 <당신 없이는 국가도 없다>라는 노래가 해외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기사와 함께 4면에 ‘우리의 음악, 우리의 나갈 길’이라는 제목의 칼럼과 그 밑에 필하모닉이 도착하는 사진과 서너 줄에 걸친 사진 설명이 있었다.

필하모니의 공연은 북한 주민과는 무관?

공연을 앞둔 필하모닉의 기자회견장에서 나는 이번 공연이 ‘2·16’ 축제와 연관되어 특별한 외국 예술가들이 그저 ‘위대한 지도자’를 위해 하는 그런 공연은 아닌지 물어보았다. 날짜가 임박해지자 모든 행사는 한꺼번에 이뤄지고 있었다. 자린 메타는 강하게 부정했고, 이어서 로린 마젤이 그 이유를 1959년 필하모닉의 소련 공연으로 돌렸다. “소련 정부는 그것이 양날의 칼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죠. 공연을 통해 자국민은 나라 밖 사람들과 소통하고 영향을 받게 됩니다. 물론 권력자들이 힘을 잃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죠.” 북한에서도 그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로린 마젤은 “역사에는 똑같은 상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비슷한 상황이 있을 뿐이죠. 우리는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곳에 음악을 하러 온 것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내가 이용하는 8번 버스의 모습이 많이 익숙해졌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오케스트라가 리허설을 하는 동안 기자들은 2시간의 시내 관광에 나섰다. 내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통역관 한 명이 옆에 와서 앉으며 <국경의 아침>이라는 소설을 펼쳐 보였다.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그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리고 소설에 관한 대화를 하면서 잠시나마 정보를 캐내기 위해 계속 부딪혀야 하는 상황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의 임무는 나를 감시하고 내 어긋난 행동을 기록하는 일이었고 나의 임무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소설이 무척 궁금해서 소설이 재미있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책을 건네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첫 단락을 한번 읽어보세요. 우리를 향한 우리의 영원하고 위대한 지도자님의 용기와 희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 장소는 ‘인민대학습당’이었다. 나는 거기서 우리와 분리되어 시내 관광을 하고 있던 후원자 몇 명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달려갔다. 우리는 서로 다른 호텔에 묵었고 전적으로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지정된 버스를 이용해야 했으며 더욱이 이메일이나 전화도 없기 때문에 같은 그룹에 속하지 않는 한 다른 일행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는 것이란 정말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인사도 채 건네기 전에 안내원들은 후원자들을 벌써 멀리 데리고 가버렸다. 인민대학습당 내부의 중앙에는 12대의 컴퓨터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젊은이들이 여럿 있었다. 벽면을 뒤덮고 있는 김정일의 친필 문구를 제외하면 이곳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공 도서관이었다. ‘위대한 지도자’의 친필을 올려다보고 있던 김일성대학 학생 백향란에게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고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여기는 모든 교육 시설이 무료입니다. 이곳도 그냥 이용할 수 있어요. 정말 행운이죠.” 외국 기자들이 드문 이 나라를 생각한다면 아마도 수줍음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고 오히려 거침없이 말했다. “당신네 나라에서도 무료로 이용하나요?” 하지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갑자기 당황했다. 그 순간 인민대학습당 책임자 김성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소립니까! 필요하면 인터넷에 당연히 접속할 수 있죠. 하지만 인터넷으로 통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내 질문이 정도를 벗어난다 싶으면 항상 대화는 ‘통일’로 마무리됐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한 가지 답밖에 없는 안전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남한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비록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는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하나의 민족’에 대한 열망은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때로는 한국인 대부분이 미국 때문에 38선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에 종종 민족주의를 자극해 ‘통일’을 부추기기도 한다.

인민대학습당 책임자 김씨에 따르면 김일성이 기획하고 김정일이 완성한 이 건물은 3천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중에 60 %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시드니 셸던 시리즈 등과 같은 외국 서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다고 알려진 미국 국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은 2100만 권이다. 하루에 1만 명 이상이 학습을 하거나 건물을 구경하러 이곳을 찾는다.

영어 수업을 하는 교실은 카메라 셔터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열성적인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시되고 있는 북한인들을 보면서 나는 잠시 우리가 마치 동물원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활기찬 수업을 진행하고 있던 이 영어 교사가 바로 2004년 <북한의 하루>라는 공익 다큐멘터리에서 지금과 거의 동일한 수업을 했던 최향미라는 인물임을 알아보는 기자도 있었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태권도 사범인 박철수는 외국인 제자들이 너무 많아서 영어회화가 필요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40대 중반쯤으로 짧게 자른 머리에 단단한 체구를 한 그에게 그가 말한 평양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나 역시 책임자 김씨가 끼어들어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마지막 관광은 텅 빈 지하철을 타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흥역에서 출발하려고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녹음된 노랫소리는 계속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였는데 ‘위대한 지도자’의 요람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지난번 평양 방문 때도 지금과 똑같은 지하철 관광을 했었다. 마치 누군가 어디에서 스위치를 한 단계 올려놓은 것처럼 예전보다는 더 환하고 따뜻하긴 했지만 다시 찾은 평양은 그저 모든 것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풍경도 똑같았다. 사진들은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이었고 노래도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색깔이라고는 김일성 벽화만이 유일한 이 지하철역에서 잠깐 서 있는 동안에도 혐오감을 느꼈다.

열차가 영광역에 도착하자 개찰구는 군중으로 붐볐다. 그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도착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멋진 핑크빛 파카와 청바지를 차려입은 한 아가씨 뒤를 따라갔고 안내원은 왠지 나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김책공대 학생이며 19살이고 이름은 이은주라고 스스로 밝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어깨 정도 내려오는 머리를 흰색 머리띠로 깔끔하게 뒤로 넘긴 그야말로 이상적인 젊은이상이었다. 그녀는 지하철 출구에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만나서 어디로 갈 예정인지 물었는데 대답은 없었다. 평양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는지 계속되는 나의 질문에 수줍은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여유를 좀 두고 나서 필하모닉의 평양 방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즉각 반응이 왔다. “저는 미국인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습니다. TV에서 빨리 공연을 보고 싶습니다.” 전공이 뭐냐고 묻자 ‘음악’이라고 말했다. 그 많은 군중 틈에서 내가 고른 한 사람이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니 과연 우연일 수 있을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건너편에 평양 기차역이 있는 복잡한 사거리가 나왔다. 사람들을 가득 실은 전차가 지나갔다. 공항에서 오는 길에 보았던 평화자동차사 광고판도 보였다. 우리가 타는 8번 버스는 바로 옆에 주차돼 있었고 안내원이 우리를 보고 신호를 했다. 조금 전에 나와 대화했던 아가씨는 어느새 사라졌다.

공연 당일, 저녁 6시가 되기 전부터 검은 정장을 한 남자들과 유행에 뒤떨어진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하얀 대리석이 깔린 ‘평양동양대극장’ 로비로 들어오고 있었다. 북한인들은 극장으로 들어갈 때 절대로 머뭇거리는 법이 없지만 나는 그들 중 5명과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내가 무슨 질문을 꺼내든지, 이들은 1990년 중반 2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 기아 사태를 ‘노동자 축제’라고 둘러대면서, ‘고난의 3월’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나이 지긋한 음악 교수의 말이다. “우리는 위대한 힘으로 ‘고난의 3월’을 이겨냈습니다. 여기는 동방예의지국이고 우리의 손님들을 잘 대접할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의 안내 아래 우리나라는 곧 힘있는 강력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내가 티켓은 어디서 구입했으며 값은 얼마를 지급했는지 묻자 교수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아는 사람한테 얻었습니다.” 한복을 차려입은 한 여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더니 “누가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연주자나 음악 전공 학생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은 답변을 거절했다. 북한예술교류단 대표가 나를 막았기 때문에 결국 나는 반응 없는 대화를 여기서 끝내야 했다. 그의 말이다. “우리 국민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면 직접 사람을 골라주겠습니다.”

나는 깔끔한 정장을 하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20대 중반 남성 두 명과 통역관 사이에 앉았다. 그들은 마치 시험장에 온 것처럼 뻣뻣한 자세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 사람이 몸을 구부려 다른 사람에게 속삭였지만 그것은 단지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다른 관중의 얼굴도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도저히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가만히 쳐다보니 불편한 미소를 보이며 금방 시선을 돌려버렸다. “미국에서도 공연할 때 지금처럼 TV가 뒤를 비춥니까?” 통역관이 내게 물었다. 장성들과 유력 인사들 그리고 무대 양쪽에 걸려 있는 북한 인공기를 잡으려는 TV 카메라를 힐끗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여기도 안 그래요. 우리도 보통 당신네들이 하는 대로 하죠.”

진열장 풍경 같은 북한 사람들의 얼굴

양쪽 국가가 연주될 때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한에서는 보통 애국가는 잘 사용하지 않고 <김정일 장군의 노래>가 실질적인 국가를 대신한다. 지휘자 로린 마젤이 오늘 공연의 주제이자 필하모닉이 초연하는 드보르자크와 거슈윈, 번스타인의 작품 설명을 했고 관중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들었다. 로린 마젤이 한국말로 “좋은 시간 되십시오”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예상했던 웃음이 나왔다. 앙코르 요청은 형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뤄졌다. 로린 마젤이 재빨리 뒤로 가고 오케스트라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캔디드 서곡>을 연주하자 관객들은 이제 긴장을 푸는 듯했다.

로린 마젤은 캔디드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한 방을 만드는 이상한 예식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오케스트라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는 죽은 지휘자에 대한 찬사와 ‘영원한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숭배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청중은 그렇게 점잖은 미소로 박수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린 마젤이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을 소개할 때 “언젠가 작곡가가 ‘평양의 미국인’이란 제목의 곡을 쓸 수도 있겠죠”라고 단언하는 순간 나는 내 옆자리에 앉은 청년이 잠깐 움칠하는 것을 보았다.

<캔디드 서곡>이 끝나자 필하모닉은 프로그램에도 없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내 양옆에 앉은 사람들은 그 곡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듯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멜로디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역관이 속삭였다. “무슨 곡인지 아세요?” 무슨 곡인지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아리랑>은 언제나 전통적인 ‘창’ 형식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배우는 전통 민요이며 지역마다 특색 있는 가락이 있다. 그런데 지금 연주하는 이 곡은 주한미군 제7보병연대의 공식 행진곡으로 채택된 곡과 같은 곡조였다.

나중에 나는 이 순간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는 청중을 보도한 것을 기사화한 글을 읽었다. <CNN>의 헤드라인은 ‘음악 외교가 눈물을 자아내다’였고, <뉴욕타임스> 1면은 어떻게 ‘조용한 청중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됐는지 설명했다. 한국의 문화방송 뉴스는 필름 조작이 분명하다며 나중에 나에게 계속 증인이 돼달라고 했다. 나는 또 VIP석에 앉아 있던 남한 여배우 손숙이 울었다는 기사도 읽었다. 그녀는 나중에 여러 인터뷰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나는 한국에서 장관을 지낸 한 재미동포를 만났는데, 그는 실제로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2·16’ 축제에 참석차 평양을 방문했고 주최 기관이 초대한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일정을 마친다고 했다.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는 남한 기자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리랑> 때문이 아니라 드보르자크의 곡 때문이었다고 했다. 내 자신은 실제로 어떠한 눈물에 대해서도 목격하지 못했고 나중에 물어본 외국 취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미셸 김을 포함한 연주자들이 기자회견장에서 자신들만의 감동적인 눈물 축제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보통 오케스트라 공연이 그렇듯이 재빨리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떴고 기자들이 그들에게 달려갔다. 나는 왜 우리가 그렇게 계속 질문을 해대는 것일까 생각했다. 우리의 태도는 마치 디즈니랜드에 가서 신데렐라를 연기하는 여배우에게 잃어버린 구두 한 짝 외에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말해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질문을 했다면 결국엔 그들도 진심을 말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뉴욕 필하모닉은 홍보 책임자 에릭 라츠키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오케스트라’라고 주장해왔던 그 오케스트라였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드보르자크와 거슈윈, 번스타인을 연주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고 청중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드보르자크와 거슈윈, 번스타인에 전혀 감동받지 않으리라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으며 <김정일 장군의 노래>가 우리 귀에 어색한 것처럼 이곳 ‘위대한 지도자’의 땅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드보르자크와 거슈윈, 번스타인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가장 전통적인 미국 오케스트라 사절단이었던 것이다.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부터 청중들의 박수갈채 그리고 평양의 환한 불빛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연출됐다. 바로 북한 정권뿐만 아니라 뉴욕 필하모닉에 의해서 말이다. 결국 진짜 청중은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역할을 담당한 언론이었던 것이다.

당장 경제와 인도주의적 원조가 시급한 북한 사람들, 그들이 혹시 정말로 눈물을 흘렸다면 그 눈물은 고마운 마음이 아니라 모욕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필하모닉의 별난 미국인들은 이런 북한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북한인들은 생존하기 위해 미국인들의 출현을 점잖게 참아내고 비위를 맞추기까지 했지만 미국인 책임자의 짧은 외교정책으로는 북한인들이 지난 55년간 미국과 미국의 정책을 증오해왔다는 사실에 어떠한 변화도 줄 수 없었다. 로린 마젤이 가볍게 언급한 ‘평양의 미국인’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과거 식민지 시절의 한국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다. 어쨌든 그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달에 착륙했고 전세계에 북한 사람들을 보여주는 주최자가 되었다. 국제 언론도 단지 하나의 공연을 취재하기 위해 75명의 기자단을 보내면서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그날 밤 연회장에서 필하모닉 사장 자린 메타는 “나는 달을 넘었어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도 역시 달을 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수많은 토크쇼에 출연하고 북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연을 보았거나 들었으며 남한 사람들은 그의 블로그에 ‘7천만 한국인들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했다. <CNN>은 앵커가 미리 선별된 북한의 한 가정에서 함께 TV로 공연을 보는 장면을 보여줬다. 가정에서도 공연 실황을 시청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세계에 내보내는 것이다. 나중에 북한 라디오 방송국 국장인 김성민은 필하모닉의 <아리랑> 연주가 김일성 생일을 기념하는 북한 <아리랑 축제> 다큐멘터리에 삽입됐다고 내게 말했다. <아리랑 축제>는 필하모닉이 평양을 출발한 후 7주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런데 미국 국제 정보국이 밝힌 바로는 공연 시간대에 평양 라디오 방송사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위험한 전쟁 전략’과 ‘한반도 긴장을 증대시키는 주범은 누구인가?’라는 두 편의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공연 후에 이어진 연회에서 자린 메타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건배를 권했다. “최고를 위하여!” 북한 문화부 차관인 송석환은 필하모닉이 “한민족의 마음을 열었다”고 말했다. 홍보 책임자 라츠키는 공연 DVD가 24.99달러에 곧 나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누구도 ‘위대한 지도자’의 부재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외신기자들은 호텔 선물 코너에서 영어로 된 김정일의 <언론인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책을 구입하려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38층에서 빠르게 어두워지는 평양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마커스 로튼 모음곡>으로 연회를 계속 이어갔다.

글·수키 김 Suki Kim
서울에서 태어나 13살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길에 올랐다. 컬럼비아대학 바너드 칼리지를 졸업하고 런던대학에서 동양학을 공부했다. 첫 작품인 <통역사>로 2004년 헤밍웨이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경계문학상, 구스타프 마이어 우수도서상을 받았다. 또한 이 작품으로 미국 반스앤드노블에서 선정한 ’올해의 작가 10인‘으로 선정되었다. <뉴욕타임스> <보스턴 글로브> <뉴스위크> 등에 글을 기고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 현재 풀브라이트 연구 장학생으로 남한을 여행 중이다.

번역·박혜란 hearan94@naver.com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교육학을 전공한 고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영어와 프랑스어 전문 번역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