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지도자의 탐욕이 빚어낸 이란의 비극

2009-07-03     아마드 살라마티안 | 전 이란 국회의원
하메네이, 대통령 뒤에서 실권 휘둘러
국민 민주화 열기 강압으로 막기 급급



시리아 주재 미국대사관이 4년 만에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미국은 또한 이스라엘 정부에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모든 점령지에서의 정착촌 건설 즉시 중단,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평화협상 재개를 촉구하고 나섰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핵,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등 모든 공동 현안에 대해 이란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개표 조작과 시위, 강경 진압과 반대파 탄압으로 얼룩진 이번 이란 대선 사태는 대화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권력 상층부 내부까지 분열시키는 현 이란 위기는 국민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방편으로 서방세계에 맞서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을 안고 있다.



사진설명/ <비행물체 스케치>, 2009-푸야 아랸푸르

“임기를 몇 달 남겨둔 사람들처럼 굴지 말고 다음 5년을 준비하라.” 2009년 6월 12일 대선을 앞두고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 종교지도자는 정부 각료들 앞에서 자신의 측근인 모하메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임기가 연장됐으면 하는 욕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최고 종교지도자에게 이란의 현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권력 내부의 적들을 제거하면서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그에게 2005년 대선은 좋은 기회였다. 모하마드 하타미가 두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쳤을 당시 국민들의 불만은 상당히 높았다. 개혁은 자유를 가져다주었지만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대선 당시 62.8%의 높은 투표율에도 8명의 후보자 중 누구도 당선에 필요한 충분한 표를 얻지 못했다. 사상 처음으로 2차 선거까지 열린 대선에서 테헤란 시장 아마디네자드가 2940만 표 중 570만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성공은 개혁파 내부의 분열과 악바르 라프산자니의 인기 하락에 힘입은 바가 컸다. 최고 종교지도자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군대와 경찰, 자선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아마디네자드는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후보로 나섰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가 팽배해 있던 분위기에서 그는 ‘정의’를 내세우면서 포퓰리즘적 전략을 사용했다.

그 후 4년 동안, 아마디네자드는 모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하는 성가신 존재가 돼버린, 과거 최고 종교지도자인 하메네이의 측근이던 라프산자니를 제거했다. 하지만 그의 호전적인 외교적 발언이나 경제정책 실패에 염증을 느낀 반대세력들이 권력 상층부에서 사회 밑바닥까지 광범위하게 형성됐으며 그의 임기 연장에도 반대했다.

근본주의자들조차 등 돌려

이번 선거에서는 2005년 2차 선거에서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했던 근본주의자 단체들조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하타미가 대통령에 출마해 3월 유세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되자, 친정부 언론들은 그를 매섭게 공격했한다.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의 측근인 <케이한> 편집장은 하타미가 선거 전에 암살당한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위협과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의 방관 속에서 하타미는 정면 공격을 피하기 위해 후보를 사퇴하게 된다.

이때 1981년, 198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낸 적이 있는 무사비가 후보로 나선다. 그는 자신을 “이슬람혁명 정신에 충실한 개혁주의자”라고 내세우며 개혁파뿐 아니라 아마디네자드 임기 연장에 반대하는 근본주의 단체로부터도 지지를 얻어내려 했다. 이라크와의 긴 전쟁 기간에 정부를 이끌었고, 이슬람혁명 세력의 중요한 결정에도 참여한 바 있는 무사비는 친서방 자유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미국은 2003년 240명이 사망한 베이루트 미 해군기지 공격의 책임자로 무사비를 지목한 적이 있다. 그 사이 변화를 겪으면서 그는 1978~79년 이란혁명의 주역들이 그랬듯이 이란 체제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는 그와 의견이 달랐다.

대통령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10명의 위원 중 8명이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하고 나서는 한편,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가 몇 달 동안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의 영향 아래 있는 언론과 단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유세를 펼치는 동안 그들은 다른 후보자들의 유세를 막기 위해 자격심사 결정을 최대한 늦추는 방식을 취했다. 후보 결정 마감일이 돼서야 4명이 최종 후보로 선정됐다(후보 신청자 475명 중 여성은 42명).

모든 게 수순대로 진행되는 듯 보였다.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무사비와 전 국회의장 메디 카루비 두 후보가 선정되고, 보수파 쪽에서는 전 혁명수비대 사령관 모센 레자이 무소속 후보의 입후보가 결정됐다.

예상을 깬 국민들의 대선 열기


그러나 22일간의 짧은 유세 동안 그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체제를 내부에서부터 뒤흔드는 상황이 진행됐다. 공식적인 유세가 시작되기 전에 라디오와 국영 텔레비전은 개혁파 후보자들에게 전혀 방송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연일 후보자들의 자질을 문제 삼거나 확인되지도 않은 후보 진영의 내부 분열에 대한 보도를 내보낼 뿐이었으며, 해당 후보들은 해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국영 ㅤㅌㅔㅌ레비전에서 주최한 후보자 토론회에서 추첨을 통해 무사비에게 TV 로고 색깔로 녹색이 배정됐는데, 이것이 바로 ‘녹색혁명’의 시작이 된다. 대선토론은 시작부터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전례 없는 토론의 열풍이 이슬람 공화국을 휩쓸었다. 수천만 명의 유권자들은 밤늦게까지 TV 앞에 앉아 토론을 지켜봤다. 최고위층 간부들의 부정부패가 폭로됐고 대통령 자신도 비난을 받았다.

이번 대선토론 열풍은 이란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이란 사회 전체가 갑자기 민주화의 길목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호전적이고 교조적인 발언들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아마디네자드는 궁여지책으로 통계자료나 경제지표들을 들먹였지만 곧 상대 후보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예상되는 경제파탄 같은 문제들을 쟁점화하는 데 성공했다.(1) 대선토론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으로 높은 투표율이 예상됐고, 이는 최고 종교지도자의 계획이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이란 체제의 이중적 정통성이라는 근본 모순이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6월 24일치에는 최고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두 유권자 앞에 서 있는 그림 밑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신정(神政)에 대한 설명은 끝났습니다. 투표는 당신들이 하고 선택은 신이 하실 겁니다.”

1979년 첫 제헌의회에 제출된 헌법 초안은 민의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슬람 성직자로 이뤄진 제헌의회는 이슬람법학자통치론(Velayat-e faqih)이라는 신권정치를 주장했다. 공화국 대통령의 주요 권한들은 입법·행정·사법권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 종교지도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최고 종교지도자의 뒤틀린 탐욕


최고 종교지도자가 공화국의 주요 정책들을 결정한다. 그는 군 최고통수권자이며, 개전과 종전 선포, 국민투표를 실시할 권한을 가진다. 헌법수호위원회 위원, 사법부 최고책임자, 국영방송사 사장, 군 총사령관, 혁명수비대 사령관, 군대와 경찰 지휘관들에 대한 임명권도 모두 그에게 있다. 또한 입법·사법·행정기관을 감독하고 분쟁시 개입할 권한도 가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헌법이나 샤리아(이슬람법)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최고 종교지도자는 땅 위의 ‘숨겨진 이맘’(2)으로서,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공화국 대통령은 권력 2인자로서 사회·경제적 현안들을 처리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최고 종교지도자와 그의 영향력 아래 있는 기구들의 끊임없는 압력에 시달려야 한다. 그럼에도 직접·보통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은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갖는다. 그래서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선은 대통령 선출이라는 본래 목적뿐 아니라 국민들이 비록 통제와 억압 속에서이긴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 장이 돼왔다. 보통선거로 선출된 권력과 종교통치 권력 간의 정통성 투쟁이 국가권력 상층부의 긴 반목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란혁명 직후, 1979년 2월 바니사드르가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때 입후보자가 95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현 이란 사태와 유사한 상황에서 그는 최고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와 대립하게 되고 ,결국 1981년 6월 대통령직에서 해임되고 만다. 현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이라크와의 전쟁 기간 중 1981년과 1989년 두 차례 대통령을 지낸 바 있는데 이 기간에도 비슷한 양상의 체제 내 갈등이 계속됐다. 호메이니는 무사비를 총리 자리에 앉혀 하메네이를 견제하려 했다.

1989년 확고부동한 신정권을 행사하던 호메이니가 사망하고 새로운 후계자를 선정하는 과정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호자톨레슬람 하메네이가 아야톨라가 되어 최고 종교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평범한 신부가 하루아침에 교황의 자리에 오른 것과도 같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직을 맡기로 한 덕분이기도 했다.

라프산자니의 두 번의 대통령 재임 기간(1989∼97)에도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지만 심각한 위기로 치닫지는 않았다. 상당수 대선 입후보자들의 출마가 저지되고, 출마자들은 단지 들러리 역할을 하기만 하는 분위기에서 투표율은 저조했다.

최고 종교지도자, 사익 위해 대통령 지지

그러나 1997년 79.9%라는 높은 투표율 속에서 치러진 대선에서 개혁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하타미가 최고 종교지도자의 지지를 받던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특정 후보의 당선만이 가능한 다른 중동 국가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하타미의 승리는 두 개의 정통성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두 번의 임기 동안 하타미가 추진한 개혁정책들은 번번이 최고 종교지도자의 반대에 부딪혔다. 최고 종교지도자는 갈수록 높아지는 반대 여론에서 자신의 권력마저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 2005년 그는 자신의 측근인 아마디네자드를 후보로 내세우게 된다.

아마디네자드는 사상 처음으로 2차 선거까지 치러진 2005년 대선에서 분열된 개혁파와 라프산자니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4년 뒤 하메네이 최고 종교지도자는 측근들의 만류에도 그를 다시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2009년 6월 12일 대선, 투표 초반에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투표 마감 시간도 되기 전 오후 5시 테헤란 치안 책임자가 방송에 나와 경찰병력이 투입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들은 투표소와 개표소에서 각 후보 쪽 대표들을 끌어냈다. 반대 후보 진영의 3명이 함께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영 <파스통신>과 웹사이트 ‘라자뉴스’가 상식을 벗어난 득표 수를 발표하는 동안 침묵을 지키던 내무부 선거본부가 뒤늦게 그 수치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자 유권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200만 표 단위로 발표되다가 다음날 6월 13일 오전부터는 500만 표 단위로 결과가 발표됐다. 투표소나 투표 지역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아마디네자드에 호의적인 방송사들이 수치를 발표하면 내무부가 뒤따르는 식이었다.

3900만 표(투표율 85%)의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밤늦게까지 각 후보의 득표율은 변함이 없었다. 각 후보자들이 모든 도시와 지방에서 똑같은 득표율을 기록한 셈이었다. 각 지방별 득표율은 투표 후 열흘이 지나서야 발표됐다.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아마디네자드는 2452만7516표를 얻어 62.63%를 득표했다. 4년 임기 동안의 낡은 정치와 경제 부진에도 2005년 1차 대선 때 얻은 575만1천 표보다 무려 5배에 가까운 표를 얻은 것이다. 반대로 카루비 후보는 2005년에 비해 15배나 적은 33만3635표를 얻었을 뿐이다.

집단적인 득표 수 조작을 의심할 만한 다양한 증거가 있다. 이란 정부조차도 문제의 300만 표에 의문을 나타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Chatham house)(3)의 조사에 따르면, 두 개 지역에서 투표율이 100%를 넘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발표된 득표율대로라면 아마디네자드는 전체 3분의 1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보수파와 중도파의 표뿐만 아니라 개혁파 성향의 유권자들 표의 반 이상을 얻었어야 한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1997년, 2001년, 2005년 대선 때 보수파 후보들은 지방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왕립국제문제연구소는 중앙정부에 비호의적인 소수민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보수파들이 최악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전례를 제시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적이 아니라면 아마디네자드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민주주의의 향배 가를 이란 위기

더욱이 아마디네자드의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20%를 웃돌고 대량해고 사태가 빚어지는 상황에서 첫 피해자는 바로 이란 민중, 특히 노동자 계급이었던 것이다.

아마디네자드가 최고 종교지도자의 축하를 받으며 ‘승리의 축제’를 벌인 다음날 테헤란과 각 지역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자신들의 표를 훔친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란에 적대적이고 이스라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던 부시가 여전히 미국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주로 중산층에 의해 주도된 이 시위는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의 대화 의지는 부분적으로 이란인들에게 미국과 외부 세력의 간섭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었다. 유럽의 정상들과는 달리 오바마는 다른 나라의 국내 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부당한 탄압을 비난할 줄 아는 균형을 유지했다.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이란의 현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따라 이슬람 공화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이란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면, 서방세계에 대한 적대감이 증폭되고 미국과의 대화가 더욱 힘들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번역 정기헌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라민 모타메드-네자드, <돈에 의해 지배되는 이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6월호 참조.

(2) 이슬람 시아파의 이론에 따르면 874년 12대 이맘이 사라졌다. 호메이니에 따르면 최고 종교지도자는 땅 위에서 이 ‘숨겨진 이맘’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무제한의 권력을 갖는다. 이러한 이슬람법학자통치론(Velayat-e faqih)은 다른 아야톨라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3) www.chathamhouse.org.uk/files/14234_iranelection0609.pdf.
글 아마드 살라마티안 Ahmad Salamat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