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소수 위한 독점 자본주의로 전락

2009-07-03     라민 모타메드 네자드 | 경제학자

민영화와 무역 자유화가 경제 특권층 형성

특혜, 탈법, 무책임 난무… ‘보수파’도 수수방관

이란 정국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이란 대선의 개혁파 후보였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의 지지자들이 최근 치러진 대통령 선거의 부정 의혹을 제기하면서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시위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4년 전 대선 때도 개혁파 후보들은 사회·경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 패배했다. 반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서민의 테이블에 올려놓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서민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1988년 이라크전이 끝나면서 이란 정계와 돈, 사회와 돈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도덕적 가치, 특히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종교적 가치는 확연히 퇴보했다. 사회학자 파라마즈 라피푸르는 1998년에 출간된 저서에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소수 집단의 부상이 이런 변화를 가져온 첫 번째 이유”라고 설명한다.(1)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대통령이 1990년 재외 이란인 사업가들에게 “이란으로 돌아와 이란의 재건에 기여해줄 것”을 호소하면서 이런 태도는 더욱 심해졌다.

이들과 정반대 사회계층인 대다수 서민들은 10여 년 동안의 경제위기로 심한 타격을 입었다. 구매력은 줄고 재정 상태도 나빠졌다. 자신의 부를 “무대에 올려놓으려는” 일부 계층의 욕망과 다른 일부의 가중된 빈곤은 “물질적 가치와 부라는 가치가 승리를 거뒀다”는 저자의 결론을 뒷받침해준다.

부에 대한 욕망은 라프산자니 정부가 1990년 1월부터 시행한 경제개혁, 곧 공기업 민영화와 무역 자유화 덕분에 겉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20년 전부터 공기업 민영화 과정을 둘러싼 불투명과 부정을 고발하는 언론 기사와 공식 보고서들이 끊이지 않는다. ‘소유권 이전’의 수혜자 중 일부는 예전의 공기업체 사주들, 곧 새로운 경제 엘리트들이다. 1994년의 국회 보고서를 보면 50개 이상의 공기업들이 자격 미달의 민간 기업에 헐값에 넘어갔다. 더욱이 주식 인수 대금은 국가산업투자회사의 대출, 곧 공적자금으로 지급됐다. 이런 행태는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과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시절에도 계속됐다.

무역 자유화는 또 다른 이익 창출의 보고다. 공식적 경로뿐만 아니라 밀무역 경로를 통해 상당한 수입을 올린다. 언론에서는 이런 수혜자 집단을 ‘마피아’라고 부른다. 이들 집단은 식품·공산품·의약품의 수입과 유통을 통제하며, 이란국영석유공사(NIOC)의 독점 사업인 에너지 제품 일부를 수출하고 횡령하기까지 한다.

파리바 아델하흐가 지적한 대로 시장을 주름잡는 큰손들, 정계 인사 심지어 여러 정부 기관들이 돈벌이와 투자를 위해 직접적으로 이런 마피아식 경제에 참여한다.(2) 1980년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장 엘리트들은 이처럼 새롭게 등장한 이들 경제 집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제, 이란 사회를 지배한 경제 집단들은 거칠 것이 없다. 그들은 금융 관련 특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조직 내부에 자금 조달원을 거느리고서 산업·금융·무역 분야에까지 거대 지배 세력을 형성했다. 공공기관 혹은 유사 공공기관들은 기꺼이 그들의 파행적인 행동을 용인하고 있다. 그들은 확실한 이익이 보장된 공공 조달 시장을 독점하고 있고, 때로는 자신들의 채무 면제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비영리에서 영리로 초점 옮겨

이것은 여러 경제 분야에서 이미 후퇴해버린 국가 자본주의도 아니고, 시장 자본주의도 아니다. 이 집단들은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방해하면서 세제·무역·금융 규제들을 교묘히 빠져나간다. 가히 독점 자본주의라 할 만하다.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그 한 가지가 대규모 재단들이다. 이 재단들 상당수는 1979년 이란혁명 뒤, 공식적으로는 비영리 활동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란-이라크 전쟁 부상자들과 장애인들을 위한 재단이 대표적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무역 분야(특히 무기 거래)에서 활약했던 이 재단은 전후 근본적인 활동의 변화를 보였다. 이 재단 아래에는 수많은 산업·상업·농업·관광, 심지어 항공 관련 기업들이 있다. 게다가 막강한 자금 조달 능력을 가진 재단 소유의 대출 금융기구를 설립해 거대 재벌의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이 기구는 ‘은행’으로 분류되지 않기에 중앙은행이 정해놓은 규제를 빠져나가게 된다. 또한 이 재단은 채무 상환 의무를 회피한다. 1997~2005년 행정부 수반이었던 모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은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이 의무를 지키게 만들려 했으나 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경제 권력으로 상승한 두 번째 사례는 근동 최대 자동차 회사인 이란 호드로다. 지분의 40%가 국가 소유인 이 기업이 또 다른 기업 사이파와 함께 자동차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이란 호드로가 시장의 55%, 사이파가 35% 점유). 자동차 분야가 개방되자 이란 호드로는 확대 일로를 걷고 있는 이란 시장에 관심을 보이는 외국 업체들과 제휴 계약을 맺었다. 2004년 이란에서 판매된 자동차는 70만 대, 2006년에는 110만 대, 2008년에는 120만 대였다.

이란 호드로 처지에서 이 계약들은 생산품의 품질 개선과 국제 판매를 보장해주고, 신기술을 획득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도권을 보존 내지 상승시키기 위한 것이다. PSA 푸조 시트로엥은 1992년부터 이란 호드로와 협력해 푸조 405를 생산(현지 조립률 60% 이상)하고 있고, 2001년에는 푸조 206과 307의 조립 생산을 위한 라이선스 계약(현재까지 현지 조립률은 상당히 낮다)을 체결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르노는 로간(페르시아어로는 톤다르)의 조립 생산을 위해 이란의 두 대기업과 제휴해 합작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가 바로 르노 파스인데, 르노가 지분의 51%를, 이란 호드로와 사이파가 지분의 49%를 보유하고 있다.

이란 호드로는 세계 시장에서 미래의 주역으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얼마 전 알제리의 파모발사와 공동으로 알제리 현지에서 버스를 조립하기로 합의했고, 푸조 405의 변형 버전인 사만드를 생산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세네갈, 시리아, 벨라루스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이란은 알제리,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아르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지에 사만드를 수출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2000년부터 민간 은행 설립이 제도적으로 보장됐는데, 호드로는 이 제도를 이용해 심각해지는 자금 조달과 유동성 문제에 대처했다. 2000~2001년에 (다른 기관들과 함께) 자사 소유 금융기관 파르시안을 설립한 것이다. 이란 호드로의 지분은 30%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취임 초기인 2005년 6~7월에 일부 민간 은행들을 “불명확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출”의 책임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은행들의 후한 인심으로 혜택을 본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그저 말에 그쳤을 뿐 현재까지도 그 명단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파르시안 은행이 주요 조사 대상이 됐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 은행들이 채무 비율을 낮추는 걸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수익률 저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6년에 갈등은 절정에 달했고, 정부와 중앙은행은 파르시안 은행 총재를 면직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민간 은행 전체가 이 조처에 반대했고, 결국 이 결정은 취소됐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확실한 패배였다.

한편으로는 신용 대출을 실물경제로 돌리기 위한 정부의 끈질긴 노력, 다른 한편으로는 투자(특히 부동산 투자)의 매력이, 민간 은행들과 국영 은행들로 하여금 산업체에 돈을 투여하게 만들었다. 은행들은 담보 대출과 부동산 투자에 상당액을 쏟아부었고, 2005년부터 유례없는 부동산 거품(3)이 시작됐다. 그렇게 해서 ‘부동산 부르주아지’(4)들이 등장한 것이다.

결국 정부가 은행권의 대출을 중단시키면서(여기에는 기존 대출 신청자들에게 약속된 부동산 담보 대출까지 포함됐고, 현재 대출 동결 해제 신청이 진행되고 있다) 2008년 5~6월에 부동산 거품이 빠졌다. 이후 주택 수요는 급격히 감소했고, 가격은 붕괴됐으며, 공공 은행과 민간 은행들이 사들인 부동산 자산 가치는 부분적으로나마 하락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위기 상황이 비롯됐다. 첫째로, 2007년 12월~2008년 12월에 은행 대출의 67%가 붕괴되면서(5) 은행들의 신규 투자 능력이 고갈된 것이다. 이런 긴축이 소비재 수요와 투자 수요 감소를 부채질하고, 산업 생산과 기업 수익성을 약화시키면서 생산력 감퇴를 불러왔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사회

두 번째로, 자산 가치가 하락한 결과 은행들은 더 이상 중앙은행에 채무를 변제할 수 없게 됐다. 아니면 변제하려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2007년 9월~2008년 9월에 중앙은행의 채권(따라서 국채)은 106% 증가했다.(6)

민영화는 일부에게 큰돈을 벌게 해준 반면, 대다수 노동자들을 실업 상태로 내몰아(7) 점점 더 열악한 재정 상황에 몰아넣었다. 민영화된 많은 기업의 경영주들이 파산선고를 하기 전 자기 회사의 설비를 멋대로 매각하고, 직원들의 임금을 체불하거나 전원 해고하기도 했다.(8)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또다시 대출은 2008년 공식적으로 25% 증가했고(다른 평가를 보면 50% 상승했다고 함), 2009년 1/4분기에는 60% 늘어났다.

서민층과 중산층의 실질임금이 감소하자 정부는 2005년 9월부터 소비를 유지시키고 기업의 활로 모색을 위해 대출 재분배를 골자로 한 경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당국이 퇴직연금 생활자, 학생, 농민 등에 대한 대출을 공식적으로 보장하고, 젊은 커플의 결혼과 주거 마련을 위해 다양한 대출 상품을 내놓은 것은 이런 정책이 폭넓게 시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20여 년 전부터 수입이 감소하면서 사회의 대부분이 이미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다. ‘채무로 인한 수감자’들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것이 그 증거다. 현재 1만2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만, 지난 10년 동안 채무 불이행으로 벌써 2만 명이 감옥을 다녀왔다. 주로 경제적 강자들에게 돈을 빌려준 뒤 회수할 능력이 없거나 회수 의지가 부족한 공권력 때문에 이슬람 혁명의 평등 이상과 어긋나게, 사회적 약자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글·라민 모타메드 네자드 Ramine Motamed-Nejad

파리 1대학 및 소르본 경제학센터 교수

번역· 김계영canari62@ilemonde.com

 


 

<각주>

(1) 파라마르즈 라피 푸르, <발전과 대조: 이란 혁명과 이란 사회문제 분석>, 1998.

 

 

 

 

 

 

(2) 아랑 케샤바르지안의 저서 <이란의 시장과 국가: 테헤란 마켓 광장 정책>(2007)에 삽입된 보고서, <정치사회 비교연구> 2호, 2008년 2월.

(3) 지난 2년 동안 테헤란시의 부동산 자산 가격은 200% 상승했고, 18개월 동안의 부동산 거래액은 60억 달러에 달했다(월간지 <고자레시>, 204호, 2009년 1월, 27쪽 참조).

(4) 카말 아트 하리, ‘부동산 부르주아지’, <Tchechme And?z-e Iran>, 47호, 2008년 1~2월.

(5) 일간지 <사르마예>, 2009년 4월 23일.

(6) <사르마예>, 2009년 1월 10일.

(7) 공식 자료를 보면, 2008년 실업률은 15%다.

(8) <잠-에 잠>, 2008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