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의 ‘룸펜 극단주의’, 국가분열의 주범

2009-07-03     아실 음벰베 | 역사학자
불평등·빈곤 해소 의지 없이 선동정치에만 의존
백인 체제 완전 극복하는 ‘탈식민지화 혁명’ 난망


‘모든 남아프리카인을 위한 정부’는 2009년 4월 22일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제이컵 주마가 내걸었던 공약이다. 검은 대륙의 가장 큰 경제 강국을 통치하게 된 비밀스럽고도 카리스마 있는 그는 범죄와 불평등으로 얼룩진 이 나라를 이끌게 된다. 또한 그는 현재 내부적으로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위기도 해결해야 한다.

2009년 5월 6일, 남아프리카는 이 나라에서 분명 가장 비밀스럽고도 교활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사하라 이남 국가 중 제1의 경제 강국인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 그는 악당 소설의 주인공 같기도 하며, 대중의 영웅이기도 하다. 주마는 2005년 타보 음베키 정부의 부통령 재직 시절 부패 혐의로 면직된 뒤 줄곧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는 1994년 당시 민주 정부 아래서 무기 구매와 관련한 비리를 비롯해 여러 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남아프리카 최고의 변호사들로 변호팀을 구성한 그는 공격적인 방어로 모든 합법적·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한 끝에 법정에서 기소당한 사건들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세계에서 에이즈에 가장 많이 노출된 이 나라에서 이른바 ‘도덕적인 세대’ 운동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젊은 처녀를 강간한 사건으로 기소됐으나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콰줄루나탈이라는 곳에서 보수적이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주마는 일찍이 학업을 중단하고 해방 투쟁에 참여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연배인 아프리카민족회의(이하 민족회의)의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케이프 근처에 있는 로벤섬의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 석방된 뒤에는 도망을 다니면서 비밀리에 활동을 계속했다. 교양은 보잘것없으나 교활하고 실용적인 인물로 알려진 그는 당 내부에서 빠른 승진을 거쳐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몰락하기 직전에 당내 정보 조직을 담당했다.

권력을 향한 그의 출세 가도는 아프리카의 현대 역사상 가장 음흉한 사례로 꼽힐 것이다. 민족회의 내부 권력 투쟁의 결과다. 그가 2008년 당대표에 출마하면서부터 당은 분열됐다. 예전 음베키 체제 이탈파들이 떨어져나가 민중당을 결성했다. 음베키 지지자와 주마파들은 상대편이 국가의 안보기구와 비밀경찰을 사적인 목적에 이용하고 있다고 서로 비난했다. 실제로 이 대립에서 어느 쪽도 상처 없이 승자가 될 수는 없었다. 양쪽의 대립으로 인해 남아프리카는 오래전부터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이상주의를 포기하게 되었다.

제이컵 주마가 애초 극복하기 힘들었을 법한 여러 약점에도, 2009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매우 복합적이다.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경의를 표하고, 용서하고 화해를 찬양하는 전통이 존재하는 남아공 사회에서, 주마는 이전의 악의적인 권력 아래 박해받고 그 이후에는 음베키 정부 시절 가혹한 형벌 체제에 희생당한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주요 정적의 미숙함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고, 남아프리카에서 오랜 투쟁 역사의 산물인 ‘룸펜 급진주의’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중조직에 접목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음베키 시절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해 소외된 자들의 대변자임을 자처하고, 혁명을 다시 재가동해 모두에게 해방의 배당금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실제로 음베키 임기 마지막엔 하층민과 빈민층 사이에서 음베키의 인기는 바닥을 기고 있었고 상황은 갈수록 악화 일로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하위 계층이 살아남을 가능성을 희박하게 한 두 가지 대재앙인 범죄와 에이즈에 대한 무능한 대처는 관료와 민중 사이에 놓인 골을 더욱 깊게만 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국가의 의무에 관한 소모적인 논쟁의 길을 열었으며, 대다수 빈민층들은 민주주의 자체에 의해 배신당했다고 믿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주마는 당의 고삐를 쥐고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 1990년대 중반 이래 음베키가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빈대하는 공산당과 노조 그리고 원주민 보호주의자들을 한데 모은 요상한 연합 세력을 형성했다. 또한 주마는 민족회의와 공산당의 청년 조직들을 점차 민병대로 둔갑시켜 결국 시민에게 겁을 주고 국가제도, 특히 사법제도의 정당성에 도전하게 했다. 이들은 아파르트헤이트 투쟁 시기에 유행하던 구호들을 되살려, 주마의 도덕성에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세력에게 반혁명 분자라는 낙인이 찍히도록 했다.

권력 따르는 해바라기성 모험가들

게다가 ‘음모’와 ‘배반’이라는 용어도 다시 사용해 혁명의 적들을 죽이거나 몰살하겠다는 의도를 주저 없이 드러냈으며,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성향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미 프란츠 파농은 백인 지배를 물리치고 권력에 오른 직후부터 아프리카 반식민지화 운동 대다수가 이런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성향에 빠져드는 걸 간파했다. 이와 함께 검은돈을 세탁하고 수입 좋은 명예직을 바라는 정치가, 브로커, 모험가들이 주마의 편에 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부패와 횡령, 독직의 경험을 가졌다. 모두가 이른바 ‘검은 경제력’이라는 ‘긍정적인 차별’ 정책의 혜택을 입은 자들로, ‘부유층으로 가는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2004년의 투표 결과에 비해서 상당히 후퇴한 것이지만 2009년 4~5월 총선에서 주마 세력이 거둔 성적은 이 나라 정치의 각축장에서 그의 당이 장악한 주도권을 확인해준다. 반복되는 추문과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나는 독직 사건, 명백한 무능, 비루한 부패 사건들도 주마로부터 교외 지역과 빈민굴의 흑인 빈민층과 이제는 대도시를 띠처럼 둘러싼 부유층의 지지를 떼어놓지 못했다.

요컨대 지난 15년 동안 수백만 채의 주택이 건축되고, 2200만 명 이상이 토착민에게 부여되는 다양한 구호계획의 직·간접적 혜택을 입었다. 많은 주민들에게 식수 공급도 현실화됐다. 이 가난한 계층에게는 민족회의가 궁핍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량 실업은 만성적인 현상이다. 공식적으로 경제활동 인구 중 34%가 실업 상태에 있다. 적절한 교육이 없는 관계로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구조적으로 고용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돼 있다. 대다수가 흑인인 빈민층과 부유층 사이의 불균형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인구의 60%가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흑인이지만 이들은 한 해에 약 5천 유로의 수입을 올리는 반면, 인구의 2.2%를 차지하는 소수 부유층은 3만7천 유로를 벌어들인다.

교통사고와 온갖 종류의 범죄, 에이즈, 결핵 등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매년 수십만 명을 웃돈다. 일간지를 장식하는 범죄 사건은 너무나 횡행해 그 누구라도 언제, 어느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생명을 빼앗길 수 있다. 매년 수천 명의 부녀자와 소녀들이 온갖 성폭행의 희생자가 된다. 강도와 강간, 기타 다양한 범죄를 포함한 사회폭력은 인구의 일부분이 무장하는 계기가 된다. 현재로서는 이 사회적 폭력이 정치 쟁점화돼 있지 않지만 갈취와 약탈 문화가 상대적으로 일반화할 위험이 있다.

1994∼2009년에 흑인 공동체의 사회계층이 복잡해졌다. 중간 계층과 소부르주아 계층의 출현은 지난 15년 동안의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이 흑인 부르주아 계층은 1994년 이후 추진돼온 능동적 차별정책의 산물인데, 적지 않은 부분에서 자신들이 사회 기생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정부가 벌인 수많은 공사와 선호하는 메커니즘 덕분에 일련의 흑인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다. 경쟁 입찰 제도를 이용해 민족회의가 자신의 지지층을 교묘하게 형성하고 이것이 부패라는 기계에 윤활유 구실을 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부패는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제 사회의 대립은 비단 백인과 흑인 사이뿐만이 아니라 예전의 ‘아파르트헤이트’ 희생자 계층 내부적으로도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 이전의 인종이라는 경계에 계층이라는 새로운 경계가 더해지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민족회의의 전략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오랫동안 다수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도덕적 우월성을 독점하려는 것이다. 가난을 몰아내고 단기에 대량 실업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1994년 이후 여당은 가장 허약한 계층에 대한 보조정책을 확대 시행하려고 한다. 나아가서 새로운 흑인 중간 계층을 지지층으로 결집하려고 노력한다.

해안 지방으로 백인들의 ‘퇴각’

지속되는 가난, 심화하는 불평등과 인종 문제는 점차 지배세력에게 잠재적 위험 요소가 된다. 이것이 반대세력이 결집하는 교두보로 이용될 것을 두려워해 당 지도자들은 이런 주제의 담론을 선점한다. 민족회의의 기반을 활성화하면서 비판을 잠재우고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이런 주제들을 이용한다. 이런 전략으로 당은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관리 기능과 호민관의 기능을 교묘히 조합할 수 있어 이후로는 권력 자체가 바로 그 권력의 반대파로 자처하게 된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 시기에 유용했던 전통적인 ‘룸펜 급진주의’가 주마가 권력에 오르는 과정과 최근의 선거운동에서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셈이다. 당시 배반자와 적대계급에게 사용됐던 폭력적인 용어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이 전통은 주요 노조인 ‘남아프리카 노동조합 회의’와 민족회의 청년 조직, 공산당들이 점유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단지 반대 정당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일련의 헌법적 기관에까지 확대된다. 또한 투투 주교나 바니 피티아나 남아공대학 총장, 풍자 만평 작가인 조너선 사피로처럼 주마의 도덕적 자질에 회의를 표시하는 개인들과 다양한 단체와 미디어들도 이들의 표적이 된다.

가장 최근의 선거는 남아프리카의 미래에 상당한 충격을 던질 위험성이 농후한 세 가지 장기적 흐름을 보여주었다. 첫째는 백인 가운데 진보적인 소수파가 민족회의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1994년 이래로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고 흑인들 편에서 투표했던 계층이다. 두 번째로는 지방에서 군소 정당이 난립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 유권자들이 상대적으로 구별이 분명하고 속성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블록으로 양극화됐다는 사실이다. 한쪽에는 다수파인 가난한 흑인이 기저를 이루고 있으며, 다른 쪽에는 소수파인 백인과 상대적으로 부유한 토착민과 혼혈로 구성된 블록이 있다.

세 번째로는 국가가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국내외로 새로운 이주 계층이 형성되고 있다. 그 결과 백인 인구 거주 공간이 재배치되고, 백인들이 새롭게 거주하게 된 ‘나라’인 해안 지역과 흑인들의 나라인 내륙 지역 간의 새로운 불균형이 나타난다. 점차 그 수가 증가하는 흑인 빈민층이 자리잡은 도시와 두 종류의 백인 이주민 계층이 대립하는데, 해안 지방, 특히 서부 케이프 지방으로 퇴각한 백인 이주민과 호주나 뉴질랜드, 아일랜드, 캐나다로부터 온 백인 이주민 집단이 있다.

해안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긴 백인들이 혼혈인들과 정치적 연맹을 맺으면서, 예전의 백인 인종 차별주의 정당의 잔재라고 볼 수 있는 ‘민주연합’이 최근 치러진 선거에서 케이프 지방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로서 케이프 지방이 민족회의의 지배권을 벗어난 유일한 지방이 됐다. 그러나 이 승리에 힘입어 민주연합과 그 수장인 헬렌 질 여사가 인종차별주의 이후 민주주의의 진정한 실험의 장이나 차후 정권 교체의 교두보로 변모시키기보다는 이 지방을 이 대륙의 마지막 백인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고 모두가 지적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지금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흑인들의 정치적 위상을 위협한다고는 볼 수 없다.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허약한 나라를 이어받은 것이다. 극심한 빈곤과 불평등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국제적인 흐름은 정치·경제의 전면적인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고용되지 못하는’ 다수에게 합당한 교육을 하는 것이다.

범죄 증가도 다른 어느 요인보다 더 심각하다. 심지어는 사회질서 자체가 범죄화했다고 이해해도 될 정도다. 넘치는 부패와 더불어 합법적인 정치에 가장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 민주화한 국가로의 이행이 전반적으로 진전되지 않고 있는 점도 이 위협을 가중하기만 할 뿐이다. 1994년 이후, 정치체제는 근본적으로 ‘탈인종주의’를 목표로 설정한 것 같지는 않다. 현재로서는 정권 교체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 내부 투쟁으로 분열되기는 했지만 민족회의는 사실상 패권적인 정당이다. 지배 계층과 흑인 중간 계층의 이익이, ‘완력가’라는 신기루에 끌리는 대중 선동 세력의 진정한 토양인 하위 계층의 이익과 서서히 구별되기 시작한다.

정치와 제도에 민족회의가 행사하는 권력은 절대적이다. 게다가 당과 정부 사이의 혼동도 있다. 이는 안정을 가져오는 요소라기보다는 국가의 미래와 민주주의에 잠재적인 위협 요소가 된다. 여당과 야당 사이의 건전한 균형이 바람직하다. 이 균형은 야당이 분열에 종지부를 찍을 때야만 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야만 반대 세력이 하나의 당을 중심으로 결집해 정권 교체를 강요할 것이며, 이 결집은 다인종·다종족을 포괄하는 것이라야만 문이 열릴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아직도 이 나라의 정치에 뿌리 깊게 스며든 ‘인종’ 윤리와 문화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생각하기 힘들다.

한편, 국민이 의원과 국가의 수장을 직접 선출하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남아프라카는 인종차별주의 이후의 민주적 이상을 향해 단 한 걸음의 진보도 이뤄내지 못할 것이다.


글 아실 음벰베 Achille Mbembe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의 정치역사학과 교수로 그가 저술한 <인종 문제, 흑인의 이성에 대한 비판>이 2009년 파리 파이야르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번역 이진홍 memosia@ilemonde.com

[용어설명] ‘룸펜 극단주의’(Lumpen-radicalism)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하층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일컫는 ‘룸펜’과 과격성을 수반한 극단 지향적 정치 행태를 합친 용어다. 카를 마르크스는 저서 <브뤼메르의 18일-Ⅴ부>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랑자·전과자·소매치기·창녀·넝마주이·거지 등으로 이뤄진 ‘분해된 대중’, 즉 ‘모든 계급의 폐품’으로 묘사했다. 흔히 룸펜은 거의 일을 하지 않고 취업할 의사도 없으며,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그날그날 먹고사는 부류를 말한다. 노동 의욕과 능력을 상실했으므로 실업자와 다르며, 장기간에 걸친 실업·질병 등으로 상대적 과잉인구에서도 제외된 층이다. 때때로 권력을 멋대로 행사하려는 정치가가 이들에게 돈이나 음식 등을 제공하고 반동적 운동에 동원해 사회 혼란 상태를 조성하기도 한다.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종 파시즘의 발흥을 설명하기 위해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에 관해 언급했다. 헤겔학파 브루노 바우어는 1차 대전 이후 시민계급적 생활로 복귀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던 낙오자, 중·하위 계급과 가난한 농민 대중 등 많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가 파시스트에 동원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