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시대의 카슈미르, 과연 평화를 찾을까

2009-07-03     드 바샤라 피어 | 작가 겸 수필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60년 분쟁 '변곡점'
또 다른 비극의 시작으로 이어질수도



1947년부터 인도령과 파키스탄령으로 나뉜 카슈미르를 두고 벌어진 분쟁의 해결에 미국이 나서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전에서 파키스탄의 군사 지원을 얻어내려는 것이다. 인도가 외부의 간섭을 거부하고는 있지만, 2009년 3월 중순 리언 파네타 미 중앙정보국장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반면 카슈미르의 인도 정당들은 또다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2009년 2월 21일 저녁, 카슈미르 북부 소푸르 근처 수피교 사원에 수천 명의 카슈미르인들이 모여 있고, 10여 명의 남자들은 상가 앞길을 걸어가며 사원에서 나온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카슈미르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일 수도 있다. 사실 카슈미르인들은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카슈미르 분리독립주의자들과 인도 정부군 사이에서 괴롭힘을 당할까봐, 행여 전투원으로 오인돼 군인들에게 사살될까 두려워서다. 하지만 종교 축일 동안은 그들도 망설이지 않고 저녁에 외출한다. 전투 중인 사람들도 암묵적인 휴전을 지켜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일 저녁, 인도 정부군은 보마이 구역에 모여든 군중 사이를 지나가다가 멈춰섰다. 그리고 갑자기 길가에 있던 젊은이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무하마드 아민 탄트레이와 자비드 아마드 다르 두 젊은이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소식이 퍼져나가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독립을 지지하는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들은 주검을 앞세우고 경찰서까지 행진했다. 이 지역 전체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학교는 휴교했고, 학교 뒤에 있는 인도군 주둔지 이전을 요구했다. 신변 안전을 걱정하는 학생들은 학교 바로 뒤에 군 주둔지가 있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파키스탄과 인도의 양분이 비극 씨앗


1947년, 카슈미르는 영국의 통치를 받던 인도의 500여 토후국(번왕국) 중에서 가장 큰 토후국이었다.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였으나 토후국의 왕후 하리 싱은 힌두교도였다. 1930년대부터 사회주의자인 모하마드 압둘라 족장이 이끌던 카슈미르인들은 강압 통치를 종식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영국 통치 아래의 인도가 인도연방과 파키스탄으로 돌연 분리된 후에도 싱은 카슈미르의 장래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1947년 10월, 파키스탄 북서부 국경에 위치한 주의 부족들이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을 받아 카슈미르를 공격했다. 그러자 싱은 인도에 합류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자와할랄 네루의 친구로, 파키스탄 지도층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던 압둘라 족장은 카슈미르를 지원했다. 1949년 유엔이 정전 라인을 설정했고, 이 통제선에 의해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 아자드카슈미르와 인도령 잠무카슈미르로 분할됐다.

1947년 10월 싱이 서명한 협정을 보면, 국방·외교·통신에 관한 권한은 인도가 가지지만 잠무카슈미르에 많은 자치권이 부여됐다. 잠무카슈미르는 자체 헌법과 국기를 보유하고 자체 대통령과 총리를 선출할 수 있게 돼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치권은 점차 축소됐다. 1953년 내각 책임자가 된 압둘라가 독립을 선포하려 하자 인도는 그를 체포했다. 이후 인도는 꼭두각시 지도자들을 내세웠고, 이들은 카슈미르 자치권의 정당성을 전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1975년, 20년의 수감 생활을 끝낸 압둘라는 인도 정부와 타협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1987년 잠무카슈미르 당국은 부정선거를 치렀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장 폭동이 발생하고, 모든 계층의 젊은이가 이에 동참했다. 파키스탄 군대는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을 전투원으로 양성했다. 아자드카슈미르 캠프에서 1년 동안 훈련받은 전투원들이 잠무카슈미르에 투입돼 전투에 참여했다.(1) 1990년대에는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이 분리주의자들을 이끌었고, 90년대 말에는 인도와 잠무카슈미르에 자폭 테러가 이어졌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각 카슈미르가 자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0년 이래 지속된 분쟁으로 7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들은 대부분 민간인과 전투원이다.

시민단체들 인도 병력 철수 요구

인권단체, 비폭력 분리주의 단체, 심지어 친인도계 정당들까지 끊임없이 민간인 주거지역 내의 군사기지와 유사 군사기지의 무장해제 또는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카슈미르에 주둔하는 수많은 인도 병력은 주민들에게는 귀찮고 성가신 존재다. 이 단체들은 불안구역법(Disturbed Areas Act)과 군사특별권한법(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 특별법들은 치안을 위협한다고 의심되는 모든 개인에 대한 인도군의 발포권과 법적 면책권을 보장해주고 있다.(2)

분리독립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비폭력을 지지하는 미르와이즈 오마르 파루크(APHC·자유후리야트정당연합)는 유럽연합 대표단과 만난 뒤, “군의 무한 권력에 즉각 종지부를 찍고 카슈미르를 무장해제해야 할 필요성”(3)을 강조했다. 2008년 11~12월 선거 보이콧 운동을 전개한 바 있는 이 단체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지만, 친인도계 정당인 국민연합과 민중민주당(PDP)과 달리 인도의 카슈미르 지배를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세 단체는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음에도 모두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자유후리야트정당연합 총재이자 잠무카슈미르의 신임 총리인 오마르 압둘라는 2월 27일자로 보마이에서 발생한 두 젊은이 사망 사건 수사에 착수했고, 인도군 주둔 관련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바람일 뿐, 최종 결정은 인도의 내무부 장관이 내리게 된다.

2006년 만모한 싱 인도 총리가 구성하고 모하마드 하미드 안사리 부통령을 단장으로 한 심의단은 “시민 기본권을 침해하고 주민들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이 법의 폐지를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인도 총선이 치러지는 시점에서 나약해 보일 것을 우려해 결정이 미뤄졌다.

인도의 폭력이 과격 이슬람 세력 불러

1990년 분쟁 시작 이후 가장 규모가 컸던 2008년 7월 중순~9월의 시위에서 비무장 시위대원 50명이 사망한 뒤 무장해제는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 시위는 영토 분쟁에서 시작했지만, “인도는 가라”는 슬로건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집결했다. 10여 년 전부터 격렬한 대치 상황 때마다 이슬람 지지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됐다. 평화적 저항으로 이행하는 데 성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평화적 시위가 인도 군경의 발포를 막지는 못했다. 스리나가르병원 응급센터의 살림 이크발 과장은 “15명을 수술했지만 5명의 목숨밖에 구하지 못했다. 이 사건 뒤 나는 인도를 증오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10월 중순, 인도 당국은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이슬람 단체들은 중간 지휘자들을 가입시키기 위해 억압받은 이야기들을 즐겨 사용한다. 무장단체 라슈카르 에 타이바의 대장 무하마드 사에드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이 지역은 ‘최고의 명분’이며 성전을 위한 결집의 함성이다. 그는 파키스탄의 라호르에 있으면서 카슈미르와 인도의 여러 도시들에 대한 테러(일례로 2008년 뭄바이 테러)를 조직했다. 8월 말에 그는 “이슬람 사원으로 가는 카슈미르인들에게 사람들이 총을 쏜다. 거리에는 주검들이 넘쳐난다. 분연히 일어나 카슈미르의 이슬람 형제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죽음과 폭력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인도군에게 상당수 지도자들이 살해된 분리독립 운동단체들은 전투원 모집을 중단했다. 카슈미르 경찰의 말을 따르자면 현재 활동 중인 전투원은 500명 정도다. 향후에는 비폭력이 반란보다 더 득이 될 것이다. 잠무카슈미르 해방전선(JKLF) 내에서 비종교 민족주의 단체를 이끌고 간디식 투쟁을 벌였던 야신 말리크는 “우리가 장악한 단 하나의 지역에서조차 주민들은 충돌을 피하고 평화 정책을 채택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11~12월 선거 직전 체포됐다.

카슈미르 분리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항상 선거에 불참해왔다. 지난 선거에 주민들이 대폭 참여한 것을 보더라도, 이런 보이콧 전략이 더는 그들에게 득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중도 성향의 분리독립주의자 사자드 론은 그들의 전략 실패를 시인하면서 “우리는 일상생활 개선을 목표로 하는 선거와 카슈미르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더 큰 투쟁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투표자들이 투표소 앞에 줄지어 서 있던 스리나가르의 바타말루 구역에서 만난 44세의 영세 자영업자 아이자즈 바트는 쓰레기가 뒤덮인 황폐한 거리를 가리킨다. “이곳이 카슈미르의 주도 스리나가르다. 이 도시가 어떤 꼴인지 한번 바라보라. 우리가 다닐 도로가 재건되어야 하기에 나는 투표했다. 우리는 전기가 필요하고, 우리 아이들은 일거리가 필요하다.” 2002년 5%였던 주거 밀집지역의 투표율은 2008년에는 20%를 넘어섰다. 잠무카슈미르 전 지역의 투표율은 62%로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 파키스탄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 지역 이슬람주의자들의 전투에 제동을 걸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은 전투 그룹에 대한 지원을 부분적으로 중단했고, 이것이 폭력을 감소시킨 것이다.(4)

오바마, 캬슈미르 평화 위해 특사 파견

뭄바이 테러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에 긴장이 고조되었음에도, 분쟁 해결은 진척을 보이고 있다. 2005년 4월부터 통제선 사이에 버스 노선 1개가 운행되고 있고, 지난해 가을에는 새로운 통행로가 열렸다. 물론 이런 것들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인도나 파키스탄 두 쪽 모두 카슈미르 전체를 포기하라고 주민들을 설득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두 나라는 느리지만 진지한 협상을 시도했다. 외교관들은 협정의 초안을 마련했다. <뉴요커>의 남아시아 전문 저널리스트 스티브 콜은 “카슈미르인들은 통제선 양편을 자유롭게 이동하고 교역할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예전 토후국이었던 양 카슈미르는 자치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폭력이 감소하면 인도·파키스탄 두 쪽은 이 지역 내의 군대를 점진적으로 철수할 것이다”(5)라고 썼다. 융통성 있는 국경에, 자치권을 보유한 단일 카슈미르라는 안은 카슈미르인들, 인도인들, 그리고 파키스탄인들 모두가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평화가 정착되면 파키스탄이 북서 국경에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협상 재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인도가 ‘외부 개입’ 거부 태도를 재확인하기는 했지만, 뭄바이 테러 관련 수사를 비롯해 파키스탄과의 대부분의 정보 교환에 미국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담당 특보로 임명한 리처드 홀브룩은 아마도 다음번 파키스탄·인도 지도자들과의 회합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카슈미르인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글·바샤라 피어 Basharat Peer
주요 저서로 <통행금지의 밤>(랜덤하우스·뉴델리·2008)이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 롤랑 피에르 파리뇨, ‘역사가 없는 주민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1월호.
(2) 국제앰네스티, ‘주검 안치소에 수천 구의 주검이 쌓여 있었다’, 2008년 4월 18일, www.amnesty.org.
(3) <그레이터 카슈미르>, 스리나가르, 20009년 3월 2일.
(4) 장 뤼크 라신의 ‘워싱턴과 탈레반 사이에서, 파키스탄의 모호성’과 그라함 어셔의 ‘남아시아의 위험한 관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2월호와 2009년 1월호 참조.
(5) 스티브 콜, ‘블랙 채널’, <뉴요커>, 2009년 3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