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탈의 증후

2015-06-02     프레데리크 로르동 | 경제학자

 [전문]  이슬람국가(IS)의 탄생, 샤를리 앱도 테러, 9‧11 테러, 2008년 금융위기… 언론을 발칵 뒤집은 큰 사건들은 항상 음모론의 대상이 되었다. 영리하게 구성된 음모론은 대중문화와 권모술수로 얼룩진 현대사에 뿌리를 내린다. 음모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특히 아랍세계에서 더 두드러진다. 음모론자들을 비이성적이거나 나아가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취급하기가 쉽다. 하지만 그들의 분석은 비교적 정상적인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공식 발표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들의 주장에는 힘을 실린다.

  
모든 곳에 있지만 아무 곳에도 없다. 음모론과 관련한 논의에서 대칭선상에 있는 이 두 암초는 피하기 힘들다. 2004년 월스트리트의 5개 대형 금융회사가 상업은행의 총 레버리지 계수를 12로 제안한 ‘피카르 규칙’을 폐지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다.(1) 이 회의는 미국 자본시장을 감독하는 증권거래위원회에 오랫동안 비밀로 부쳐졌다. 여기서 매우 강력하고 조직적인 단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합심하고 모의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완전히 귀와 눈을 막았거나 일부러 입을 다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음모는 존재한다. 월스트리트 은행의 경우는 완전히 성공한 음모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금융위기를 부른 원인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모노이데이즘(monoideism)(2), 그러니까 한 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하나의 생각으로 전체를 이해하고, ‘한 번의’ 비밀회의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식의 논리가 바로 음모론의 최대 약점이다. 음모론적인 모노이데이즘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빌더버그 회의(혹은 삼각위원회)(3)이다. 빌더버그 그룹은 존재한다! 삼각위원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단체나 모임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이 단체나 모임에 사건의 원인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다. 즉 빌더버그 회의나 삼각위원회를 신자유주의 경제와 세계화를 실현시킨 유일하고 절대적인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음모론적인 시각의 모노이데이즘을 무너뜨리려면 사실과 다른 생각을 경험하게 하면 된다. 이를 테면, 빌더버그 회의나 삼각위원회가 없는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이 가상의 세계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존재하지 않을까? 답은 물론 ‘그렇지 않다’이다. 그래서 환질환위법(contraposition)으로 비밀회의가 신자유주의의 필수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주체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분명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빌더버그 회의나 삼각위원회에 대해 입을 다물 이유는 아니다.
따라서 음모론을 비음모적으로 생각할 때가 되었다. 즉, 1) 합의되고 감춰진 술책(음모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2) 음모를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유일한 도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찾을 수 있는 모든 도식을 추가해 마지막으로 가장 덜 흥미롭고, 가장 적절하지 않는 도식에 이른다… 어쩌면 그곳이 제자리일 수도 있다!
음모론과 관련해 없는 것이 없다. 유명한 망상적인 음모론에 대한 냉소적인 글(그런 음모론은 매우 많다), 집착하는 주제에 대한 비평, 정통한 정신병리학적 분석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정치적 분석은 찾을 수 없다! 음모론을 불신하게 만들고, 화자를 선택하고, 이 화자를 선택할 때 사회적 특징을 고려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발언권을 금지하고, 어떤 사람은 완전히 배제시킨다. 몇 가지의 실수를 정신착란과 혼동시켜 특정 계층의 발언을 금지하고 나아가 전체 계층의 발언을 금지한다. 이 모든 것은 정치적 연설을 전문가의 조언을 받은 ‘대리자들만’의 독점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매커니즘은 언론에 의해 더 강화된다. 하지만 음모론에 대해 논의를 할 때 순수하게 정치적인 쟁점은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음모론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거나 거짓공포에 대한 외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경우라 할지라도 음모론적 발언은 정치적 박탈의 최고의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박탈. 이 용어는 음모론의 사회적 (정신적이 아닌) 사실에 정치가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음모론을 이유가 없는 망상, 아니 우매한 민중의 특성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망상이라고 보는 대신 비정상적이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정보접근, 투명한 정치이슈, (대중매체가 던져주는 형편없는 잡탕 뉴스가 아닌) 심오한 대중논의 같은 수단을 박탈당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 말이다. 2005년 유럽헌법조약 비준을 위한 국민투표는 지난 20년 동안 치러진 정치 행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정치집단에 생각하고 토론할 시간을 주었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은 무엇인가.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내용을 독점해서 자기들의 것만으로 만들어버렸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민중은 자신을 괴롭히는 역사적 힘을 이해하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으로부터 차단되었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지적한 것처럼, 관망자적인 태도에선 아무 것도 멈추지 않는다. “그 무엇도 인간의 판단능력을 없애지 못한다.”(정치론) 인간은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판단력을 발휘하며 생각을 하고, 자신이 매우 불행할 때에는 더욱 절망적으로 격렬하게 판단한다. 음모론은 정신 나간 정신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박탈당했을 때, 공론이 불가능해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사고를 할 수 있는 도구를 철저하고 조직적으로 박탈하고 사고활동을 할 수 없는 곳으로 쫓아내면서 민중의 사고에 오류가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스피노자가 이를 정확하게 꼬집었다. “민중이 진실을 모르고 판단력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다. 국정은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국가가 숨기는 데 실패해서 알게 된 아주 적은 정보만으로 의견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판단중지는 매우 귀한 덕목이다. 시민 모르게 문제를 처리하면서 시민이 판단을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시민이 자제를 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고, 가지고 있는 소량의 정보로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다스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정치론, VII, 27)
엘리트들이 거의 관여를 않는 음모론이 박탈보다도 민중이 다수가 되었다는 것을 더 잘 말해주는 역설적인 신호이다. 민중은 권력이 하는 말에 더 이상 귀기울이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스스로 깨달으려고 한다. 하지만 음모론 같은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꼭 필요하다. 연습, 반복, 습관이다. 모든 박탈 기관(대리인, 언론, 전문가)이 그들에게 거부했던 것을 주변 활동(단체 결성, 대중 교육, 대안 언론, 대중 모임)을 통해 얻어내기 위해 반복과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연습을 통해서만 개인과 집단의 지성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재정적자에 대한 자금조달을 금지한 ‘1973년 법(프랑스 중앙은행에 관한 법)’에 대한 논의는 몇 가지 시도와 실수의 과정이 포함된 전형적인 연습의 한 단계로 보아야 한다. 물론 ‘1973년 법’은 몇몇 지역의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으며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내용이 비약되기도 했다. 돈에 대한 거대한 음모를 밝힌 폴 그리뇽의 매우 음모론적인 분위기를 띤 동영상 <빚과 돈(Money as Debt)>은 돈을 만들어내는 것은 민간은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고등학교 경제교과서에 나오는 기본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법의 이름을 ‘퐁피두 법’ 나중에는 ‘로칠드 법’ 바꾸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주장도 있었다. 여기서 정치권과 금융권의 담합 한 가지만 읽을 수 있겠지만 수많은 다른 암시들을 읽은 사람들도 있다.
여러 잘못된 정보 속에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요소 몇 가지를 찾아낼 수 있다. 1) 소수의 비전문가 집단이 기술적 문제들을 기적적으로 연구해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화, 은행과 같은 매우 광범위한 주제로 확장시킨다. 2) 이자에 대한 정당성, 공공적자에 대한 자금조달 문제, 자국통화에 사용할 인물들, 민주사회에서 차지하는 통화발행기관의 적절한 위치 등 중구난방의 주제가 아무 때나 제기되지만 결과적으로 유익한 주제들이다. 3) 음모론자들은 지칠 줄 모르게 글쓰기를 하거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운영하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논란 기록을 통해 좋은 의미에서 지속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정보에 대한 무지, 명백한 오류, 허위 사실이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973년 법을 가장 강력하게 비난했던 사람들 가운데 유령토끼를 쫓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집단이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 것은 불완전하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고 다수가 되는 훈련을 하는 한 과정이다. 고위 엘리트들은 훈련의 실패를 훈련 자체를 부정하는 구실로 이용한다. 이해할 수 있다. 박탈을 한 사람들이 박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Frédéric Lordon
저서로 <유럽 통화와 민주적 주권(La Malfaçon. Monnaie européenne et souveraineté démocratique)>(2014)이 있다.
 
번역‧임명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자산에 대한 부채의 비율.
(2) 한 가지만 병적으로 생각하는 것.
(3) 1973년 창립된 삼각위원회는 권력 중심에 있는 인사(지식인, 정치인, 경제인)들이 모여 유럽, 북미, 아시아 국가 사이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비공식 모임인 비더버그 회의는 1954년 냉전 시대에 결성된 것으로 취지는 삼각위원회와 동일하지만 주로 미국과 유럽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4)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총리가 되기 전에 로스칠드 은행에서 일했다. 하지만 드골 내각의 총리가 되기 위해 은행을 그만 둔 때는 1958년이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법은 1973년에 제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