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의 다양한 예측

2015-06-02     이브 디 마노

 

서구세력으로 한정된 정복자 인류가 거칠고 야만적인 외계생명체에 맞서 싸운다. 이러한 단순한 시각에서 출발한 SF소설은 다양한 형태의 독재권력을 효과적으로 비난하며 더욱 성숙하고 비판적인 세계를 재현하는 방향으로 점차 발전했다.

 ‘대중적’임을 자처하는 모든 문학처럼 SF소설 역시 그 시대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반영한다. SF소설의 이야기는 특정한 주장이나 견해의 배경이 되고 등장인물은 현 시대의 인물을 대변하며 소설 속 미래는 현재를 재현한다. 한 시대의 두려움과 욕망, 의문들이 SF소설 내에서 표현될 때 정신세계로 명명되는 어떠한 것의 현실을 해독하는 법칙에 따른다. SF소설은 특히 국가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이는데, 처음에는 확실성을 가지고 임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 더 자세히 분석을 하게 되고 마침내 현재에 이르러서는 다분히 비판적이면서도 모호한 반박을 하는 형태로 국가에 집중된 관심을 표출한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에 속한 작가들의 견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 견해가 권력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 글을 통해 북미 SF소설에 담긴 모든 정치적 함의를 철저하게 정리해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들이 사회로부터 취한 주요 선택을 몇몇 작품으로부터 이끌어내 보고자 한다. 이 작품들이야말로 SF소설 독자들에게 현재를 가장 잘 재해석하여 보여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SF소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기계주의의 신화와 행성 정복의 꿈을 대중화시킨 1940~1950년대의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이다. 미국은 세계대전의 승리자였던 만큼, 문학 속에서 신화화된 미국의 미래가 전쟁을 향한 충동을 끝없이 추구해나가는 형태를 띠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학적 가치에 있어서는 서로 큰 격차를 보이지만 당대의 소설 대부분은 지구의 우주 지배, 그리고 지구의 패권을 잡거나 되찾기 위한 전쟁을 주제로 했다. 여기서 미래의 지구란 전적으로 미국인이라는 인종에만, 사회적으로는 정점에 오른 미국 기술에만 한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자동화와 신기한 제품으로 점철된 일상이라는 기술의 사회적 승리를 보장할 뿐 아니라, 정복 사업을 잘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과학소설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국가, 즉 우리에게 제시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은 염려스럽기 그지없다. 이들이 선호하는 국가란 단일 독재국가, 곧 절대권력을 지닌 수장 혹은 고위관리로 구성된 의회가 지휘하는 ‘제국적 공화국’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SF작가 에드먼드 해밀턴은 “우리는 우리를 통치하는 자들에게 귀족작위를 주며 군주제 사회에서처럼 경의를 표한다. 이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 간에, 그리고 지구인과 행성 원주민 출신들 간에 연계를 유지하기에 최상의 시스템이다”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적었다.
 
공상소설의 권력은 극단적으로 소수에 집중
 
이처럼 미래의 국가는 대다수 군중과 이들을 지배하며 종종 여러 세대에 걸쳐 대물림되는 권력을 독점하는 소수 엘리트로 나뉜다. 가장 고전적인 예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유명한 <파운데이션(Foundation)> 시리즈(1)로, 여기서 지구는 땅과 바다가 강철 아래로 사라진 거대한 도시에 불과하다. 권력은 폐쇄적인 집단 내에서 영원히 대물림되며 사회의 미래는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후 천 년까지 계획된다. 대부분의 SF소설 작품에서 권력은 늘 극단적일 정도로 소수에게 집중된다. 독자를 조금 더 효과적으로 현혹시키고자 친절하게도 작가들은 국민으로부터 국가를 멀리 떨어뜨려 종국에는 신격화하는 주장들을 되풀이하며 국가가 지닌 지위를 자세히 묘사한다.
물론 개인도 이러한 국가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전형적인 영웅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국한된다. SF소설에서 거의 단골처럼 등장하는 이야기 구조를 보면 주인공은 이름 없는 존재로 출발해 기적적으로 권력에 접근한다. 심지어 세계의 운명을 책임지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처음에 주인공은 거대한 관료제 조직의 단순한 공무원에 불과하나 결말에 가서는 매우 폐쇄적인 엘리트 권력 집단의 일원이 된다. 이는 독자가 자기 자신처럼 맨손으로 출발한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같은 구상의 순전히 ‘소설적인’ 성격에 대한 이야기는 도덕적이며 교훈적이다. 우리의 미래 사회에서 각자는 평범한 삶의 운명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갖고 있거나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굳은 희망을 갖는다. 더구나 미국사회를 공상적인 측면이나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국가의 신격화로 인해 개인의 이러한 영웅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논리적인 흐름이다.
또한 이러한 국가에 관한 내부 구상은 전후 개인과 사회에 관한 미국의 전형적인 신화 일부를 매우 잘 반영한다. 대외 정책에 관한 이론들은 패권을 잡고자 하는 미국의 야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폴 앤더슨은 적들이 틀림없이 격파될 것이라는 믿음을 넌지시 들려준다. “이 변방의 부족들은 지구 제국을 성가시게 할 뿐이었지만, 실질적인 위협을 대변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들을 매수하기도, 서로 싸우도록 자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토벌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SF소설을 독파하다 보면, 외부 민족을 합병하기 위해 실행하는 가장 외교적인 전술에서부터 인명살상적인 전술까지 다양한 전술 목록을 맞닥뜨리게 된다.
우주의 패권을 두고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지구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는 예측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인종적인 장애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서 종종 발견되는 인종주의, 백인이 아닌 사람(여기서는 휴머노이드)에 대한 멸시에서 우리는 안타깝게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에서는 머나먼 행성의 문명을 경멸하듯 소개함으로써, 이들 종족을 지구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체이자 추하고 기이하며 비정상적인 것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문화적 제국주의가 만들어진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인류가 맞닥뜨린 문화들은 인류에게 절대로 이해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제일 나은 경우 이들 이종족의 문화는 엑조티즘이라는 의심스러운 특혜를 받아 ‘신비’의 후광을 두르게 되겠지만 말이다.
 
<스페이스 오페라>, 미국의 야심 묘사
 
그리고 동일한 구조를 꾸준히 반복하는 SF소설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러한 한계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물론 다소 덜 간략하며 뉘앙스는 더 강한 책들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같이 진부한 구조를 퍼뜨리는 소설이 만연한다는 사실은 레이 브래드버리나 클리포드 시맥의 철학적 공상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2) 왜냐하면 이러한 <스페이스 오페라> 유형의 SF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전 세계를 병합하고자 하는 미국의 야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늘 고독한 영웅을 국민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미국에게 부여된 몫이다. 또한 <스페이스 오페라>는 미국이 늘 승리했던 전투, 피식민지 주민들에 대해 미국이 승리를 경험했던 침략, 오직 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 보이는 행성들의 수많은 세계를 공상적인 독자들의 구미에 맞춰 제공했다.
그러나 미국과 전 세계의 내적인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스페이스 오페라>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1960년대 미국에서 SF소설은 더 이상 도식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SF소설이라는 장르가 분해되어 여러 유파가 생겨나고 SF소설이 낳은 최고의 대가가 10년 만에 탄생하게 되었다.
여기서 ‘영웅 판타지’라는 장르가 우리의 관심 대상은 아니지만 그것이 보여준 과거에의 호소 정도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사시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 장르는 과거의 모델(가장 흔한 예로는 중세시대나 동양의 고대문명)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회를 묘사하면서 실제로는 그 시대를 빈약하게 반영해 보여줄 뿐이다. 또한 영웅 판타지는 미국 문명이 명백히 남긴 ‘빈 공간’과 결핍을 보여준다.
존 로날드 로웰 톨킨이라는 선구자적 영국 작가의 등장 이후, 당시 수많은 작가들이 신화로의 회귀에 매료되었다. 이 장르 덕에 상상력의 다양한 변형이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동양 신화와 유럽 서사시에 힘입어 이 유파의 작가들은 선과 악 사이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대결을 기계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회귀했다. “이는 단연 ‘혼돈’의 작품이다. 이 마을을 파괴한 불은 자연적인 불이 아니다. 마법사여!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규율’과 ‘혼돈’의 신들은 평소처럼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우리 ‘지상’의 일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네.”(영국 작가 마이클 무어콕)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전통의 토대와 설화가 상당 부분 결핍된 미국인들이 외국 문화에서 뿌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불가피해 보이는 열강들의 대립에 대한 강박 관념이 은폐된 형태로 다시 한 번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영웅 판타지’도 ‘스페이스 오페라’와 동일한 반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전보다 한술 더 떠서, 영웅 판타지의 주인공은 자기 종족의 가치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금발의 거인이며, 주인공의 적은 혼돈의 도래를 알리는 야만스럽고 끔찍한 미개 부족이다. 일찍이 노먼 스핀래드는 독일 제3제국의 권력 장악을 서사시적인 형태로 이야기하며 영웅 판타지의 결점을 비난했다.(3)
이제는 ‘정치 소설’ 혹은 ‘사변 소설’이라는 다소 모호한 용어 아래 통합되어 있는 장르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실제로 서로 매우 다른 스타일의 작품들이 한데 묶여 있다. 이 작품들은 제국주의적 SF소설의 영광을 이루어낸 경향들과는 정반대 진영에 속한 다양한 경향들을 보이지만, 이 역시 모호하다.
먼저 주인공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이루어진다. 실제로 반신(半神) 혹은 불굴의 정복자 이미지는 점차 사라지고 애드거 앨런 포우가 ‘군중 속의 사람(The Man of the crowd)’이라고 멋지게 명명한 존재가 그 빈 자리를 차지한다. 주인공은 독자라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에 점차 더 가까워진다. 권력에 의해 부정된 주인공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이러한 일상성으로 인해 독자는 주인공과 하나가 될 수 있다. 필립 K. 딕은 자신의 주인공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얼룩덜룩한 줄무늬 파자마 차림의 조 칩은 식당 식탁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신문발행기에 동전 하나를 넣고 계기판을 조작했다. 숙취가 심한 나머지, 행성 간 뉴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결국 가십난을 골랐다.” 지난 10년간의 슈퍼맨들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이지 않은가!
이와 동시에 미래 국가에 관한 비전은 더 비판적으로 변모한다.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일상적 전제 정치라고 간주하는 시스템에 맞서서 그 독재적 성격을 기꺼이 부각시키고 심지어 직접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오는 사항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대가 우리 현재 시대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더 이상 4000년대가 아니라, 기껏해야 2000~2050년 정도의 시대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처럼 배경으로 하는 시대가 현재에 가까워짐으로써 우리 사회와 작가들이 예측하는 사회는 훨씬 더 유사해진다. 후자는 더 이상 우리 사회를 단순히 옮겨놓은 것이 아니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는 단연코 필립 K. 딕일 것이며, 이는 딕이 국가의 팽창주의를 가장 경계하는 작가 중 하나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딕의 작품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체성의 문제이다. 이 정체성의 문제는 미국 사회 일부의 새로운 열망에 따라 제기된 것이다. 즉, ‘현실’의 개념을 다시 문제 삼으며 다양한 형태의 권력에 대응하는 개인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4)에서 주인공은 명백한 이유 없이 호적이 사라지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실존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이슨 테버너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경력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제게 주어진 임무는 여러분에게 거짓말하는 것뿐”
 
여기에는 분명 카프카적인 무언가가 존재하며, 작가가 형이상학에 대한 이끌림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러한 비유가 약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딕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본성과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 빛을 발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권력의 주체가 시뮬라크르(simulacre, 시늉, 흉내, 모의 등의 뜻. 가상, 거짓 그림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에서 유래-편주), 곧 텅 빈 봉투에 불과하다는 가설을 취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의혹은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사실상 그 어느 것도 현실이 아니며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인간을 가두고 국가가 자신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한 형식적 함정일 뿐이라는 것이다.(5) 이렇듯 딕의 세계는 1960년대 미국을 관통한 의심, 때로는 희망을 완벽하게 반영했다.
이같은 한계적 작품 이외에도 다른 작가들 역시 권력문제를 비롯하여 사회가 개인에게 점점 더 많은 강요를 하는 지배의 문제를 제기한다. 노먼 스핀래드의 <버그 잭 바론(Bug Jack Barron)>(6)에서는 언론의 권력이 치열하게 공격당한다. 이 작품은 TV가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견해가 국가 권력의 가장 은밀한 은신처라는 매우 전통적인 의견을 지지한다.
작품 속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시청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시청자 여러분, 제게 주어진 임무는 여러분에게 거짓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동면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허수아비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여러분에게 꽤나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3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놀라운 작품은 한 편의 소설이 이론적 연설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7)
존 브루너의 <잔지바르에 서다>(8)에서는 사회학적이며 정치적인 분석이 훨씬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아마도 당시 미국 사회 ‘내부’의 가장 완성도 높은 시도였을 것이다. 이 소설은 매우 현대적인 문체를 지닌 동시에 예전 도식에 대한 정확한 안티테제를 제시한다. 다수의 등장인물이 서로 오가고 섞이면서 사회적 모순을 천천히 거의 완벽하게 묘사해 나간다.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면으로도 전혀 이상화하고 있지 않지만 함정과 놀라움, 투쟁 등으로 점철된 우연이 묘사된다. 국가는 ‘돈의 권력’ 그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세밀하게 설명된 돈에 관한 결정은 특정 사회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거나 세계의 특정 지역을 식민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편 오늘날의 SF소설은 국가 내부를 더 염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진보’라는 사회의 구체적인 형태 중 하나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전 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관한 이슈를 여전히 등한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프랭크 허버트의 <듄(Dune)>(9)은 눈부신 예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전적 장편소설이라는 외양 아래 이 작품은 사실 제3세계의 혁명적인 투쟁에 대한 훌륭한 옹호론이다. 물론 이슬람교를 모델로 한 종교적 현상에 관한 호의적인 서술 등 단점이 아예 없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SF소설에서는 매우 드문 주제인 권력과 내부 대립, 혁명, 역사의 의미에 관해 장문의 사색을 펼친다. “화폐와 인척 관계를 조정하라, 하층민이 그 나머지를 즐기게 하려면.” 파디샤 황제는 이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만약 너희가 이익을 바란다면, 너희가 지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말들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으나, 나는 하층민이 어디 있으며 지배당하는 자가 어디에 있느냐고 자문했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예로 우리가 헛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예들은 몇몇 작가들의 은밀한 의지를 표출한 작품이다. 이들은 모두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며 언제나 놀라운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SF소설은 분명 진화를 이루었으나, 그럼에도 시대역행적으로 남아 있으며 적어도 그 의도는 여전히 모호하다. 또한 SF소설은 신비주의에 점차 매료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보로망의 형식주의와 윌리엄 버로스의 테크닉에서 영감을 받은) ‘뉴웨이브’라 불리는 유파가 정치적 현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탐미주의의 함정에 급격히 빠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무의미하지 않다. 이들 유파는 때때로 탁월하지만 여전히 현실에서 거리가 먼, 여전히 현실의 ‘경계’에 있는 신비주의를 선호하는 것이다.
SF소설의 초창기 시절, 이 장르에 완전히 속하지는 않은 두 권의 책이 이미 전체국가라는 주제를 그 한계까지 다룬 바 있다. 물론 이 두 작품은 <멋진 신세계>와 <1984>이다. SF소설이 새로운 가설을 발전시킨 시기는 주로 냉전 시대로, 더 이상 토마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의 것만이 아닌 새로운 가설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세계는 미국과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열강으로 나뉘며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분열된다. 일례로 필립 K. 딕의 모든 소설은 이러한 가설을 배경에 깔고 있으며 다른 수많은 작가들 역시 이를 따랐다.
만약 1970년대에 전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두 개의 열강이라는 아이디어가 단일국가라는 아이디어보다 훨씬 신빙성 있어 보인다면, 이러한 분석에서는 미국적인 전형이 엿보이며 특히 미래의 제3세계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제3세계라는 변방은 지금처럼 초강대국들에 한참 뒤쳐진 채 다시 식민화되어 후방에 영원히 머무를 것이다. 결국 ‘진보주의자’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작가들에게도 아메리칸 드림은 매우 끈질기게 남아 있던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최악의 것이 남아 있다. 1970년대 초, 할리우드 붐과 함께 SF소설 작가군의 일부는 세계 종말과 인류 멸종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듯했다. 이는 SF소설 장르를 탄생시킨 기술적, 과학적 승리주의에 반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또한 오래전부터 서구사회를 사로잡은 이데올로기적 숙명론의 반영이기도 하다.
근래의 SF소설은 우리시대 특유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의혹과 근심으로 가득 차있다. 스핀래드의 <정글 속의 남자>(10)가 그 좋은 예로, 각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차근차근 싸워나가야 하는 도시 정글의 공포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또한 작가를 통해 미국적 사고방식의 변화와 지식인들이 희망을 거의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들이 고개를 들다>(11)에 나타난 존 브루너의 분석은 더 과학적이며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의 증대에 부합하고 있으나, 여기서도 이데올로기적 급변이라 부를 수 있는 경향이 보인다.
이러한 비관적 평가로 마무리를 한다면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1977년의 SF소설은 특정한 함정과 특정한 경향에 굴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작가 중 몇몇은 계속해서 많은 희망을 투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 의미와 중요성이 우리가 볼 때 훨씬 더 흥미로운 유토피아를 작품 속에서 발전시키기도 했다.
 
과학소설의 전기를 마련한 <빼앗긴 자들>
 
그에 관해 여기서는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바로 어슐러 르 귄의 위대한 작품인 <빼앗긴 자들>(12)이다. 작가는 세계 정치 상황에 관한 매우 엄밀한 분석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미래는 우리가 사는 현재의 충실한 메타포이다. 작품은 각각 미국과 소비에트 공화국을 닮은 두 개의 전제국가로 나뉜 하나의 행성을 가정한다. 그리고 이 행성 휘하에는 완전한 자급자족 체계로 살아가는 위성이 있다. 모행성(母行星)을 떠난 이주민들은 위성에 정착해 150년에 걸쳐 사회주의 사회를 이룩했는데, 이는 중국식 모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각자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서로 다른 사회들에 관해 기나긴 논고를 펼치는 기회로 작용한다. 논증은 모든 관념론을 포기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위성에서 건설된 ‘무정부’ 사회는 근면해야지 살 수 있는 힘든 사회이지만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유지한다. 이 사회는 자체를 되돌아보며 태만함에 맞서 싸운다. 반면 모행성의 두 세계는 자유주의 체제인데, 그곳의 삶은 훨씬 ‘쉽다.’ 그러나 모행성의 개인들은 훨씬 더 은밀한 속박에 사로잡혀 있다. “‘니오’의 혁명가들은 그저 더 높은 임금을 받고자 파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이다. 그들은 권력에 대항하여 파업을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의 행성, 나의 지구는 폐허일 뿐이다. 인류에 의해 소모된 행성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번식하고 서로 싸우고 난 뒤 죽는다.”
<빼앗긴 자들>은 SF소설의 귀결인 동시에 일종의 전기를 마련한 작품이다. 이는 태초부터 SF소설이 이러한 작품들을 낳기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스며든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알았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동시에 SF소설이라는 장르가 그 의미를 바꾸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SF소설이 다른 열망을 느낀다면 이 장르는 더 이상 ‘도피’ 문학임을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의 관심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필요하다면 지배적인 질서를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대중문학의 커다란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대중문학은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국가는 대중문학이 너무 전복적이지 않도록 경계하기 때문이다.
 
글·이브 디 마노 Yves Di Manno
<누가 헨리 무어를 죽였는가?>(1977), <자오선>(1987), <제식의 산>(1998) 등의 작품이 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77년 11월호에 실린 것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김혜경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아이작 아시모프, <파운데이션 시리즈>, 전 5권, Gallimard, 파리, 2000~2009년
(2) 브래드버리의 최고 걸작이 갈리마르에서 출판되었다. (‘폴리오 SF’ 컬렉션) 시맥에 관해서는 특히 <정거장>(2002)과 <도시>(1999)를 참조할 것이다.
(3) 노먼 스핀래드, <강철의 꿈>, Gallimard, 2006년
(4) 필립 K. 딕,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 Librairie des Champs-Elysée, Paris, 1975년.
(5) 필립 K. 딕 작품의 풍요로움을 몇 줄로 요약하길 바라는 것은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이에 그의 주요 소설들을 소개한다. <높은 성의 사나이>(2001), <유빅>(1999), <시뮬라크라>(2006),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2002)
(6) 노먼 스핀래드, <버그 잭 바론>, J’ai lu, 2002년
(7) 이러한 의미에서, 종종 그러하듯 대중문학이 가장 시대역행적인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면, 대중문학이 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8) 존 브루너, <잔지바르에 서다>, Le Livre de poche, Paris, 1995년.
(9) 프랭크 허버트, <듄>(전 7권), Pocket, Paris, 2005년.
(10) 노먼 스핀래드, <정글 속의 남자>, Presses Pocket, Paris, 1990년.
(11) 존 브루너, <The Sheep Look Up>, Le Livre de poche, 1998년.
(12) 어슐러 르 귄, <빼앗긴 자들>, Le Livre de poche,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