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속의 음모론

2015-06-02     에블린 피에예
   
▲ <눈물의 영화>, 2014 - 릴리야 샤바가

[전문]발자크에서 댄 브라운까지, 제임스 본드에서 매트릭스까지 픽션은 요동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음모를 파헤치고 형이상학적 탐구를 하면서 숨겨진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역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허위인 공식 역사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알 수 있는 비밀 역사.” 이 유명한 금언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잃어버린 환상>(1837-1843)에 나온다. 발자크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붉은 말’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동료 문인들과 자신을 문학계에서 중요 인사가 되게 하려고 막후에서 시도했다. 그의 소설에는 음모 주위를 맴돌고 있는 인물들 뿐 아니라(<음침한 사건>, <13인의 비밀결사 이야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멋진 소설 <잃어버린 환상>은 유명하고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고 야심찬 문학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잘생긴 청년 뤼시앙은 자살하기 바로 직전 신비로운 신부에 의해 구조된다. 신부는 메피스토처럼 그에게 소원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보트랭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카를로스 헤레라 신부는 원래 범죄자였고 비밀에 둘러싸인 인물이다. 그리고 아는 사람도 많아 금융이나 언론, 즉 권력 집단을 좌지우지했다. 게다가 그는 경찰 총감이 된다. 그의 인생역정은 죄수에서 경찰의 아버지가 된 으젠-프랑수아 비도크(1775-1857)를 생각나게 한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놀라운 일화가 아니라 많은 것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한 세기 동안의 시간을 배경으로 권력 획득의 시작은 어디이며 숨어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모색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프랑스 혁명이 초래한 충격으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은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지금까지 꿈꾸지 못했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청산당한 혁명의 유산, 7월 혁명(1830), 1848 공화국에 대한 배신당한 기대 등 혁명 후에 일어난 일 역시 혼란스러웠다. 100년 동안 민중의 의지와 자신들은 민중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중산층의 의지는 지속적으로 꺾였다. 그렇다면 누가 역사를 만들고 누가 정치를 하는가? 한 무리의 허구적 인물들이 그때까지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던 형태인 소설(1)에서 자신들의 불안을 말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중적인 면을 강조한, 다시 말해 더 많은 대중을 위한 소설이 ‘고급’ 문학의 규범을 지키지 않고 신문에 연재 형식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설명했다. 사건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바꾸는 것은 어둠속에서 암약하는 음모자들이라고. 프랑스 혁명에 연루된 것으로 유명한 프리메이슨처럼 말이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는 알렉상드르 뒤마이다. 연작 소설 <어느 의사의 기억>(1846-1852)에서 뒤마는 비밀조직인 ‘투명인간’의 수장 칼리오스트로라는 인물에 집착했다. 이 인물은 거의 초인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고 왕정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신처럼 나도 인내할 것이다. 나의 운명, 당신의 운명, 이 세상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렸다.” 조르주 상드 (<뤼돌스타트 백작부인>, 1843), ‘예수파의 음모’를 파헤친 으젠 쉬(<방황하는 유대인>, 1844-1845), 폴 페발 그리고 퐁송 뒤 테라이 역시 비슷한 취향을 가졌다. 작가의 정치적 성향은 중요하지 않다. 왕당파이든 공화주의자이든 간에 최근 역사는 비밀스러운 인물들, 종종 무리의 우두머리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 인물들을 통해 말해진다. 실제로 예가 있다. 생-시몽의 구상은 산업과 종교계의 엘리트들의 주도로 사회를 재구성하자는 것이었다. 음모나 비밀결사도 정말로 존재한다. 카르보나리당은 1820년대에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투쟁했던 비밀결사 조직이고 프랑스에도 친척격인 샤르보느리가 같은 시기에 왕정을 복고하려는 세력과 싸웠다. 뒤마는 이런 내용을 <파리의 모히칸>(1845-55)에서 흥미진진하게 잘 묘사했다. 하지만 허구의 인물들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 ‘공화국’의 유령도 한 역할을 했다.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민중, 대중, 군중에게 목소리를 준 것이다. 가면을 쓴 실제 권력자는 새로운 귀족계급을 상상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초인적인 인물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지배질서가 위협을 받거나 아니면 위협적일 때, 즉 대혼란의 시기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두 개의 낡은 왕조(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가 사라지고, 기절초풍할 만한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파시즘과 나치즘이 부상하는 양차 대전 사이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스파이, 침입자, 체제 전복자, 배후 조정자 혹은 배후 조정당하는 자 등의 주제가 대중 문학과 신생 매체인 영화에서 크게 성공한다. 이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안쪽에 진실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가 반동이냐 아니면 좌파이냐에 따라 진실도 달라진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수많은 소설에서는 민중에 대한 경시를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927년의 작품 <빅포>는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뭉친 4명의 천재 이야기다. “전 세계적인 저항, 노동자들의 폭동(…), 이 모든 것 뒤에는 문명의 붕괴를 원하는 힘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4명의 천재는 정부의 힘이 아닌 또 다른 천재 에르퀼 푸아로에게 패배해 결국 실패하고 만다. 소설이 영화로 많이 각색된 그레이엄 그린(<권총을 팝니다>, 1936)과 위대한 도발자 에릭 앰블러 (<어두운 국경>, 1936,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 1938)(2)는 반대로 질서를 대표하는 자들의 음모를 다루고 있다. 이 질서는 부패했고,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고, 공산주의보다는 극우를 선호한다. 이제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조작된 진실에 허우적거리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음모는 민주주의가 부패하면 어떤 선택을 하는지 폭로한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올더스 헉스리의 <멋진 신세계>(1932)의 세계는 특히 어둡다.
스파이 소설은 순수한 시대의 종말을 알린다. 민주주의는 환영 위에 세워졌다. 순진한 사람들만이 민주주의를 믿는다. 순진한 사람들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주체는 대중 위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대중이 주장하는 가치가 (정치적) 해방과 (사회적) 지배 사이의 긴장을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냉전, 매카시즘, 해방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민주주의는 환영이라는 비전은 냉소와 엘리트주의가 더해져 더 강화된다. <OSS 117>(1949), <제임스 본드>(1953), <S.A.S> (1965) 등의 작품에서는 모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특별한 재능을 가진 직업 스파이들이 주인공이다. 진정한 정치가는 직업인이고 진정한 정치계는 배신, 이중게임, 살인이 난무한다.(3) 사건의 진실은 단순한 영혼들의 몫이 아니다. 자유세계든 아니면 어떤 형태의 다른 세계든 간에 모두 동일한 술책과 범죄에 의지한다. 이상주의자들의 세계가 아니다.
시대가 복잡해졌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겠다. 매우 세련된 캠브리지 출신의 젊은 스파이는 소련과 영국비밀정보국을 위해 동시에 일하면서 워터게이트, 케네디 암살사건, 여러 스탈린식 재판까지 종횡무진 활약한다. 선/악, 민주주의/전체주의 같은 양극적인 세계에 머물기에는 너무 복잡한 인물이다. 존 르 카레가 우울하고 우수에 찬 확신 없는 스파이 (<죽은자에게 걸려온 전화>, 1963)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그리고 훨씬 전 1948년에 조지 오웰이 <1984>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국가의 음모였다. 그리고 미래가 그것을 증명했다.
핵에너지, 우주정복, 환각제, 현실지각을 왜곡시키는 과학… 1950-1970년대에 현대성이 감추고 있는 음모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장르는 공상과학이다. 공상과학은 사람들이 정치에서 소외되는 현상을 다소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여줄 뿐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가능성 자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TV에서는 외계인 침공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가 쏟아졌다.(4) 미국 TV 미니시리즈 <인베이더>(1967-1968)는 지구를 식민지화하려는 외계인의 음모에 관한 것으로, 이를 눈치 챈 유일한 지구인은 미친 사람으로 몰린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 방송된 <프리즈너>는 비밀 첩보요원이었던 주인공이 강제로 아름다운 마을에 갇혀 자신의 기억과 신분을 지우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과 싸운다. 비인간화에 대항해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려는 주인공의 싸움은 반문화와 저항이 절정에 이른 시대에 음모는 더 이상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0년 후 위의 시나리오와 가설들은 모두 열정적으로 다시 표방되고 거대한 유행이 된다. 그중에서도 성공도를 봤을 때 철학적 도식과 세계 지배자 모임이라는 두 시나리오가 시대적 고민과 맞아 떨어진다. 우리는 이제 쏟아지는 데이터, 눈에 안 보이는 돈의 흐름,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 글로벌 정보 네트워크에 갇혀서 “구체적인 경험을 세계화된 자본의 이성적인 이해력에 일치시키는 데 어려움(5)”을 겪고 있다.
결과적으로 공상과학 소설가 필립 K 딕이 승리한 것이다. 그는 이미 <타임 아웃 오브 조인트>(1959)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실제 세계가 아니고 다른 것, 반현실, 환상”이라고 썼다. 외부 현실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고 내부 현실 역시 의심스럽다. 딕의 많은 소설이 영화화되었다. 그의 작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영화도 많다. <블레이드 러너>(1982), <토탈 리콜>(1990),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페이첵>(2003)… 하지만 비디오게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엑시스텐즈>(1999)와 와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1999)가 ‘음모론적인’ 비전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일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가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고 있다. 몇몇 저항가들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 ‘실제’ 세계는 황폐화되었고 ‘기계’가 통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프로그램이 제안하는 ‘진실’일 수 있다. 어쩌면 환영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알렝 바디우가 말한 것처럼 매트릭스 때문에 플라톤이 다시 등장했다…
형이상학적인 의심을 품는 것과 더불어 국가의 무능력을 이해하기 위해 진정한 권력이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 많아진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글을 읽는 현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런 내용의 글에서는 권력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감춰져 있고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일루미나티라고 불린다. 신기하게도 19세기 소설에서도 막후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일루미나티를 만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루미나티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일한다. 하지만 악의를 가진 일루미나티는 완전한 지배, 자신들만을 위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원한다. 몇몇 랩퍼들이 노래한 것처럼 권력의 현장 뒤에는 항상 그들이 있다. “오바마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인형이다.”(프로페서 그리프, 그룹 퍼블릭 에너미의 멤버), “존 케리, 조지 부시, 토니 블레어, 엘리자베스 여왕 모두 비밀조직 멤버이다.”(락킹 스쿠와트), “그들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해왔다고 생각해봐, 아주 오래 전부터/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방법을 알고 있어/ 인생의 비밀, 우리에게는 알려주지 않지”(케니 아카나)
일루미나티에 대한 열광은 판타지 장르의 부상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2003), 특히 <천사와 악마>(2000)의 성공과 더불어 더욱 확산되었다. 노래나 비디오 게임(GTA)에 일루미나티가 살짝 암시되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표현의 장(場)은 SNS이다. SNS에서는 일루미나티 ‘회원들’의 명단과 삼각형, ‘뿔모양’ 손가락 표시 등 일루미나티의 상징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돈, 셀러브리티, 빌더버그 회의 등이 뒤섞인, 그리고 종종 반유대주의 정서가 깔린 완전히 비이성적인 가설들이다.
프랑스 구글에서 ‘일루미나티’를 검색하면 49만 1000개의 결과가 나오고 (‘그리스 부채’는 28만 1000개다.), 밀교에 관한 책의 판매가 50%나 증가하고(2013년 전국출판조합 통계), 형편없는 댄 브라운의 소설들이 20만부나 팔린 것은 솔직히 달갑지 않다. 하지만 이 같은 광적인 해독 작업이 한심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런 작업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광기를 설명해주는 진실을 찾고 싶어 하고, 중요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대한 이야기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욕망은 희생양을 찾게 하기도 하고 아니면 몇몇 사람이 집단의 부(富)를 탈취하는 것을 거부하게도 한다.
 
 
 
글․에블린 피에예Evelyne Pieiller
 
번역․임명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Aude Déruelle, Jean-Marie Roulin (sous la dir. de), <Les Romans de la Révolution, 1790-1912(혁명의 소설)>, Armand Colin, Paris, 2014.
(2) Cf. Luc Boltanski, <Enquêtes et complots. Une enquête à propos d’enquêtes(조사와 음모. 조사에 관한 조사>, Gallimard, Paris, 2012.
(3) Gordon B. Arnold, <Conspiracy Theory in Film, Television and Politics>, Praeger, Wesport (Connecticut) – London, 2008. 미국에 중점을 둔 연구서.
(4) Cf. André-François Ruaud, Raphaël Colson, <Science-fiction. Les frontières de la modernité(공상과학. 현대성의 경계)>, Mnémos, Saint-Laurent-d’Oingt, 2014.
(5) Fredric Jameson, <La Totalité comme complot. Conspiration et paranoïa dans l’imaginaire contemporain>, Les Prairies ordinaires, Paris,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