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극우의 발호는 역사교육 부재 탓

2009-07-03     피에르 돔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빈에서 활동하는 현대사 교수로, 루트비히볼츠만 사회역사연구소 소장인 게르하르트 보츠(1)의 말을 들어보면 1960년대부터 독일인들도 다른 유럽인들처럼 나치를 강경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반면 오스트리아인들은 이제야 그러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일부에 불과하다. 과연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이에 대한 답은 1945년 이전과 이후 두 시기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보츠 교수와 그의 연구진은 독일 제3제국의 등장 이전과 집권 기간 중에 “독일보다 오스트리아에서 반유대주의가 더욱 격렬했다”고 밝혔다.(2) 1938년 3, 4월 오스트리아가 독일 제국에 합병되면서 발생한 끔찍한 장면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몇몇 오스트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빈 시내에서 무릎을 꿇고 칫솔로 도로를 닦게 하며 희희낙락했다. 몇 달 뒤 오스트리아 공무원들은 유대인의 주택과 상점을 몰수했다. 이에 감탄한 헤르만 괴링은 이러한 재산 몰수 시스템을 독일에 도입했다.

나치보다 더했던 오스트리아

1938년 11월 유대인 학살 당시 게슈타포의 보고서에는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인들보다 잔혹했음이 드러난다. 또한 보츠 교수의 말을 따르자면 “오스트리아 출신들이 유대인 말살 조직의 요직에 아주 많이 진출했다.” 아돌프 아이히만(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로 8살 때부터 청년기까지 오스트리아 거주), 알로이스 브루너(아이히만의 보좌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하인리히 힘러의 뒤를 이은 게슈타포 수장),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오스트리아 부대와 ‘라인하르트 작전’을 펼쳐 유대인과 집시 200만 명 말살), 프란츠 슈탕글(소비보르 및 트레블린카 말살 수용소 소장) 등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고 들어선 오스트리아 정권이 강요한 모종의 역사 해석 방식은 지금도 효과를 발휘한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활동에 협력한 적이 없고 오히려 독일의 합병으로 나치의 첫 피해자가 됐다는 게 이 역사관의 핵심이다. 부분적이기는 하나 왜곡은 왜곡이다. 아무튼 이러한 해석을 소련과 서구 연합국이 인정했고 오스트리아는 대신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3)

독일과의 또 다른 차이점은 탈나치화 과정이다. 독일에서는 연합국이 이를 주도한 반면 오스트리아는 직접 추진했다. 오스트리아의 탈나치화는 첫해에만 단호히 이뤄졌고(사형선고 43건, 집행 30건, 각종 직위와 시민권 박탈), 이후 급속히 완화됐으며, 1948년에는 자취를 감췄다. 이해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전직 당원 60만 명이 시민권을 회복했다. 총선이 다가오자 오스트리아 국민당(O(움라우트)VP)의 기독민주주의자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O(움라우트)) 지도자들도 전직 나치 당원들의 표를 겨냥한 역겨운 경주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독립연합당’(VdU)이라는 신당도 생겨 60만 표를 세 당이 3분의 1씩 나눠가졌다.(4)

나치 협력을 미화시킨 지도층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첫 피해자라는 주장은 사회 전역에 자리잡았다. 교과서도 수십 년 동안 1938년부터 45년까지 기간에 관해 유럽 전쟁만 다뤘다. 오스트리아가 언급된 유일한 대목조차 몇몇 개별적 저항운동에 초점을 뒀다.

그런 가운데 1986년 대통령에 당선된 쿠르트 발트하임의 전력이 드러나면서 기폭제 구실을 할 수도 있었으나 결국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유대인 발칸반도 유배에 가담하고도 “의무를 이행한 것뿐”이라고 주장한 전직 독일 국방군 장교인 그의 뒤에서 오스트리아인들은 똘똘 뭉쳤다. 2007년 6월 14일 발트하임은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세상을 떴고 오스트리아는 국장을 치러줬다.

에리카 바인치얼, 게르하르트 보츠의 선구적 연구와 그 뒤를 이은 베르트란트 페르츠, 올리비에 라트콜브의 작업 덕분에 10년 전부터는 교과서도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독일의 합병 당시 오스트리아는 무장 항전을 펼쳤어야만 하나?”라는 질문에 2008년 응답자의 절반만 그렇다고 답했다(그렇다 53%, 아니다 41%). 2005년에는 “오스트리아의 국가사회주의 시기는 일장일단이 있나?”라는 질문에 44%가 그렇다고 대답한 반면 단점뿐이라는 대답은 20%에 불과했다.

나치 전력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관용은 유적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빈의 역사 중심지를 둘러싼 도로 ‘링’의 일부에는 여전히 카를 뤼거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빈 시장을 지낸 그가 설립한 기독사회당은 유럽 최초의 반유대주의 정당으로 청년 히틀러에게 본질적 이념 지표가 됐다. 그를 기리는 조각상과 그의 이름을 딴 교회도 있으나 다들 무덤덤하게 바라본다.

클라겐푸르트의 돔 광장에 세워진 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추모비는 애꿎게도 슬로베니아 반나치주의자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외르크 하이더의 텃밭인 이곳에서는 ‘레지스탕’이라는 단어조차 욕설이 된다.

글·피에르 돔

번역·최서연



<각주>

(1) 게르하르트 보츠의 1978년 저서 <빈의 국가사회주의>는 2008년에 보강돼 재출간됐다.
(2) 1938년 오스트리아 거주 유대인은 20만 명으로(오스트리아 총인구 600만 명 중 3%) 대부분 빈에 살았다. 1933년 독일에는 52만 3천 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다(인구의 1%).
(3) 오스트리아가 피해자라는 주장은 1943년 11월 모스크바 선언에서 등장했다. 그 전략적 목적은 오스트리아 내부에 프랑스 모델을 본뜬 저항세력을 태동시키는 것이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4) 독립연합당은 1956년 자유당으로 탈바꿈하고 훗날 하이더를 총재로 추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