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코뮤날레, "자본파괴 지연되고 있을 뿐"

2009-07-03     한광덕 | 본지 국내 편집장
미국 금융권의 물귀신 작전으로 손실의 사회화 진행중
부의 불평등 최고점…경기부양 한계 대대적 파산 불가피

마르크스의 사면과 케인스의 복권을 가져왔던 글로벌 금융위기가 외견상 숨을 고르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해 ‘저강도 전략’으로 선회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사이에 시장주의자들은 ‘블랙스완’을 착시현상으로 돌리고 있으며 일부 비관론자들도 ‘전향’을 위해 몸을 풀고 있다. 마르크시스트들의 대공황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지난 6월25일부터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열린 제4회 ‘맑스코뮤날레’에 물어봤다. 모두 4개 세션으로 나눠 발표된 30여 편의 발제 중에서 금융위기와 관련된 3편을 추려 각각의 방점에서 공통의 접선을 그어봤다. 편집자

주요 발제자/ 조정환(자율평론) ‘금융위기와 다중지성’, 배성인(한신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국민국가’, 양준석(사회실천연구소) ‘자본주의 위기와 제국주의론’

마르크시스트 혹은 좌파가 금융위기를 보는 관점은 신자유주의자 혹은 우파와 어떻게 다를까? 마르크시스트답게 우선 금융위기의 ‘토대’인 금융화에 주목한다. 금융화란 생산과 소비 둘 다 신용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엔 금융기관의 영향력 증대로 인한 빚의 증가가 개입한다. 조정환은 금융이 실물보다, 증시가 은행보다 지배적으로 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생산자본은 투기화해 금융자본의 옷을 입는다. 양준석은 산업자본이 엄청난 유보금으로 금융 부문에 투자하거나 직접 금융업에 뛰어들 정도로 ‘금융화’가 심화됐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386’들이 금과옥조로 외우고 다녔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따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때문이다. 생산활동을 통해서는 더 이상 만족스런 이윤을 얻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래서 산업자본의 요구로 거대 금융자본이 탄생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금산분리 완화를 위한 법안이 집요하게 관철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신용마피아의 ‘뉴딜’


조정환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조성된 조건을 5가지로 정리했다. 먼저, 신용체계에서 배제된 서브프라이머들의 형성이다. 둘째, 서브프라이머 계층을 신용시장으로 흡수할 수 있게 한 위험평가 기술의 발전이다(클린턴의 이른바 ‘신용의 민주화’ 정책). 셋째, 증권화와 세계화를 통한 위험의 분산과 공유의 기술이다. 넷째, 세계의 불균등 발전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제성장은 미국의 서브프라임 대출 증권화 상품(MBS·CDO)의 구매력으로 작용해 위험을 세계화했다. 다섯째, 무디스 등 신용평가기관들의 권력화다. 이들은 금융행위자들의 집단적 이해를 강화하고 특정한 믿음을 조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분석과 흡사하다. 솔직히 말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에게 가르쳐준 교양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종합한 해석은 다를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토양에서 만들어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은 최후의 잉여인 하층 프롤레타리아의 삶까지 삼켰다. 거꾸로 말하면 하층 프롤레타리아들은 배제된 신용체제에 일시적으로나마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의미에서 비우량 담보대출 자체는 새로운 유형의 ‘뉴딜’이며 국가 대신에 신용기관들이 시행한 ‘케인스주의’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복지가 아닌 부채를 통해 가능했다.

양준석은 대공황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대 내내 세계 대공황에 시달리던 자본주의는 2차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 출구를 찾았다. 1945년 이후 자본주의는 그 이전과 사뭇 달랐다. 2차 대전 직후부터 1973년까지 25년 넘게 지속된 ‘전후 호황’의 시기가 있었다. 1973년 이후 장기 불황이 이어졌지만, 2008년까지 35년 동안 대공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양준석은 그 비책을 △금융 거품으로 시장 구매력 확대 △비생산적 부문의 팽창 △노동계급에 대한 공세로 요약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공세는 한동안 ‘이윤율의 장기 하락’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이윤율을 만회하려는 자본의 필사적인 시도는 ‘과잉자본’을 비생산적 부문에 투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투기뿐만 아니라 무기 생산을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 또는 전쟁 위기가 조장됐다. 거침없는 금융 거품에 노동자의 상당수까지 동승하자 결국 거품은 뽀글뽀글 물위로 떠올랐다. 2000년에 주식 거품이 터졌고, 2005년에 부동산 거품이 터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금융 부실을 낳았고, 마침내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양준석은 이번 위기가 주기적이고 부분적인 공황이 아니라, 1945년 이후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 내재된 모순이 폭발하며 세계경제 전체가 휘말려든 ‘대공황’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쯤에서 실증적인 근거와 대안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좌파 진영의 억울함을 풀어보자. 이들은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가 어느 때보다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거대 자본가들이 독점하고 노동자들은 점점 더 극심한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다. 오른쪽의 두 도표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에서 생산력 발전의 성과가 얼마나 공유되지 못하는지를 나타내주는 실증적 자료다. 진보 학계에서 약방의 감초로 인용하는 <그림1>은 미국 상위 10%의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낸다. 최근 이 비율이 50%에 육박하고 있는데, 1929년 대공황 발발 직전에만 볼 수 있었던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림2>는 미국 제조업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추이로, 놀랍게도 1970년대 이후 30년 이상 하락과 정체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이뤄진 기술혁신과 노동생산성 향상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부가 자본가들에게 집중됐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두 도표를 겹쳐서 보면 제조업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하락 또는 정체되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이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실증적 관철

앞서 말한 ‘이윤율 저하 경향’에 관한 근거도 있다. 1949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일본·독일 등의 제조업 순이윤율을 보면 1960년대 후반 이후부터 실제로 저하하는 경향이 관찰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기는 왜 정체되고 있는 것일까? 조정환은 자본의 위기 극복 방식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은행들은 말한다. “우리가 파산하기에는 우리의 부채가 너무 크다. 우리가 파산하면 국민 전체가 파산할 것이다.” 실제로 은행들의 파산은 그들이 운용한 자금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저축, 연기금, 보험금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피해는 사회 전체의 것으로 돌아간다. 파산에 직면한 은행을 국유화 방식으로 구제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은 아시아와 유럽에 말한다. “당신들이 우리를 파산시키기에는 우리의 적자가 너무 크다. 우리가 침몰하면 세계 전체가 침몰할 것이다.” 이것 역시 사실이다. 아시아의 수출 주도 경제는 미국의 과소비와 무역적자에 의존하고 있으며 유럽의 경제는 미국의 군사적 케인스주의와 재정적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발 위기의 해법은 실추하는 미국 헤게모니의 인위적 유지와 달러 기축성의 보수(補修)에서 찾아진다. 이렇게 미국이 국제적 합의에 의해 부양되고 은행들이 국유화를 통해 회생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전세계의 다중들에게 부담지워진다.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을 사회화(세계화)하는 것, 이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자본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최근 각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는 경기부양책을 사용함에 따라 세계경제의 하강 속도가 다소 완만해졌다. 양준석은 이것을 마약에 비유했다. 인위적인 유효수요 창출은 일시적으로 공황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기운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공황의 깊이를 고려할 때 경기부양책의 한계가 곧 드러날 것으로 본다. 유효수요 창출은 정부 재정을 통해 미래의 소비능력을 당겨서 사용하는 것으로, 길게 보면 잉여가치 실현에 더 큰 위기를 안긴다. 공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과잉자본과 과잉축적을 해소(파괴)하는 것이다. 대대적인 파산과 구조조정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과잉자본의 규모는 지금의 ‘과잉’ 수준을 고려할 때 ‘시장의 부족’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랄 것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더 많은 임금삭감·복지축소·정리해고로 노동자를 압박해올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장의 구매력 축소로 돌아와 잉여가치 실현의 위기를 다시 심화시킨다.

양준석의 전망은 심각하다. 이 모든 것으로 도저히 공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면, 자본가들은 과잉자본을 대대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대규모 전쟁을 선택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핵전쟁에 따른 공멸의 부담 때문에 전면전보다는 제한적인 국지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조정환도 신용이 실추하면 전쟁 상태가 도래한다고 말한다. 신용자본주의에서 전쟁자본주의로의 이행이다.

반세계화에서 대안 세계화로 전환 필요

정부의 개입과 기업의 국유화로 신자유주의가 기로에 섰다. 그런데 배성인은 이 과정이 지역적으로 단선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라틴아메리카는 확실히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는 추세다. 중국도 다른 시스템으로 가고 있다. 유럽은 프랑스와 독일의 정권이 정책 전환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완만하게 탈신자유주의의 길을 갈 것으로 본다. 과감한 신자유주의화를 추진했던 뉴질랜드마저 2000년대에 들어 유럽형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로의 전환을 기대할 정도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미국과 한국을 벗어나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예외적인’ 자본주의 유형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미국 역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거대한 변화를 시작할 것으로 관측된다.

배성인은 ‘반’세계화 운동에서 ‘대안적’ 세계화 운동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진지한 대안의 고민과 제시 없이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기대로만 그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해도 여전히 영악한 자본은 자기 조절 능력에 의해서 전진하고 증식하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금융적 축적의 종말로 보면서 개혁을 통한 실물 중심의 산업 재편을 제안하는 시각에 대해 조정환은 이의를 제기한다. 금융자본 대 생산자본의 차이에 천착한 나머지 자본 대 노동의 관계를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준석도 여기에 동의한다. ‘나쁜’ 금융적 자본을 규제해 ‘좋은’ 산업자본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재편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상이며, 노동자의 상상력을 자본주의 틀 안으로 가두는 해악이라는 것이다. 조정환이 내놓은 대안은 다중지성의 구축이다.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금융을 신용으로, 다시 신용을 인간들 사이의 협력으로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 한광덕 국내 편집장 k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