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인종학살, 무관심의 엄청난 대가

2015-06-04     비켄 체티리언

 

 1915년 4월 24일 밤부터 25일 사이 이스탄불에서 벌어진 아르메니아 지식인 체포와 처형은 약 130만 명이 몰살된 인종학살의 시작이었다. 몇 달 사이에 오스만제국 내 아르메니아인의 3분의 2가 학살당했다. 100년 전부터 터키는 자국 내 소수민족의 역사를 직시하고 그들이 소멸된 데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13년 11월, 이스탄불. 보스포르 대학 내 400명을 수용하는 홀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헌정된 컨퍼런스가 사흘째 계속되고 있었다. 한 젊은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을 했다. “이틀 동안 인터넷으로 이 강연회를 지켜봤다. 그리고 오늘은 여러분에게 그들 중 한 명이었던 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기로 결심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선조가 강제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뿐 아니라, 그녀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도 이야기했다.
1915~1916년의 학살 이후, 억지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터키 사람’이 된 아르메니아인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줄곧 금기로 남아 있었다. 인권운동가인 터키 여성변호사 파티야 제텐이 자기 할머니의 회고록을 출간하면서 그 침묵을 부수기까지 장장 9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녀의 할머니는 처녀 시절에 온 가족이 강제이주 당한 뒤 학살됐고, 할머니 자신 또한 납치되어 터키 가정에 들어갔다.(1) 회고록 출간 후 할머니와 같은 운명을 겪은 10여 명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글을 보내왔다. 그녀는 그들의 증언을 모아 새로운 책을 펴냈다.(2) 증언자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름이나 생일 같은 개인정보를 밝힐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20~30만 명의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의 후손이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대략 2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세월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출신과 그들의 선조가 겪었던 운명에 대해 침묵을 지켜왔다. 그렇지만 그들 주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웃들은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해관계에 의해서 개종한, 다시 말해 뻔히 눈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을 경멸어린 눈초리로 바라봤다. 터키 사회는 그들을 “검의 잔해”(3)라 부르며 낙인을 찍었다.더욱이 터키 정부는 그들의 출신에 관한 서류를 보관했고, 그들이 특정 직위, 예를 들면 군대나 교육 분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오는 4월 24일 100주년을 맞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기념하는 일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자들의 상황을 보여주고 현대사회와 현대사회의 중대한 실패를 생생하게 조명하는 일이다. 현대사회는 희생자들을 인정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터키가 자국이 저지른 죄를 부인하도록 내버려뒀고, 지켜보는 자들의 무관심을 묵인해왔다. 터키정부는 아직까지도 인종학살을 부인하면서, 사망자들은 공동체 분쟁으로 사망한 것이고 아르메니아 주민 전체의 강제이주는 전시상황에서 군사적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고, 즉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를 위해 일했거나 아니면 그들 스스로 폭도가 되어 대량학살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종학살이라는 범죄가 자행될 때, 중대한 분쟁의 그늘에서 한 민족이 소멸되어 갈 때, 그리고 그 후 세계 정치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정의의 실패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며, 그것이 우리의 정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
 
소수민족들에 자행된 학살과 폭력
 
있는 그대로 인정되지 않은 범죄는 계속될 수 있다. 1915년 인종학살은 아르메니아인을 중요 대상으로 삼았지만 아르메니아인만 학살된 것이 아니다. 오스만제국 내의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그리고 야지디족(쿠르드계 소수민족) 또한 공동체를 소멸시키려는 목적의 학살과 강제이주 대상이었다.(4) 전쟁이 끝날 무렵 오스만제국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터키를 점령하자 일부 아르메니아 생존자와 아시리아 생존자들은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터키민족주의 세력은 일단 승리를 거두고 나자 그리스와의 주민교환에 몰두했다. 귀향한 사람들을 프랑스 점령 하의 시리아나 영국이 통치하는 이라크로 망명하도록 강요했다. 그렇게 해서 아나톨리아 전체에서 기독교 주민들을 쫓아낸 것이다.
1914년에 이스탄불은 주민의 과반이 기독교인이었고,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대재앙 이후에 계속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약탈자인 국가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한 가지는 그들에게서 경제적 생존 수단을 박탈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 안전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 교회의 수많은 자산과 아르메니아 작품들이 몰수됐다. 그중에는 게지 공원 근처의 판갈티 묘지도 포함돼 있는데, 지금은 고급 호텔들이 들어서 있다. 유럽에 속하는 터키의 부유한 유대인 공동체는 터키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1934년의 트라키아 유대인 박해’(5)가 끝날 무렵 10명 중 1명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소수민족공동체의 경제적 지위를 뒤흔들며 그들을 공격하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투기꾼’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터키 정부는 부유세를 도입했다. 금액은 시 공무원들이 임의로 책정했고 세금은 현금으로만 내야했다. 공동체마다 세율이 달라서 어떤 아르메니아인은 ‘무슬림’의 50배나 되는 세금폭탄을 맞았다.(6) 이 ‘세금’은 소수민족의 부르주아지 제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고, 그들은 원래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자기들의 재산을 무슬림에게 팔았다. 세금을 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우 재산이 몰수됐을 뿐 아니라 터키 동부의 에르즈룸 근처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됐다.
키프로스 분쟁과 관련해 소수공동체는 더욱 박해받았다. 1955년 9월, 그리스의 살로니카에 있는 아타튀르크의 생가를 공격한다는 루머가 퍼진 후 이스탄불에서 터키 정부가 조종하는 유대인박해가 발생했다. 정보당국은 침략자들을 가득 태운 버스들을 페라(현재의 베이올루)로 불러들였고, 이들은 그리스 기업이며 학교, 종교 시설들과 또 다른 소수공동체들을 유린했다. 그동안 경찰들은 지켜보기만 하다가 폭도들이 실수로 이슬람 재산을 공격하자 그때서야 개입했다. 이 수탈로 인해 수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추방됐다.
강제 이주된 주민들의 기억은 아나톨리아에서 지워져버렸다. 아타튀르크는 아랍어 표기를 포기하고 라틴 알파벳 사용을 강요했는데 이것은 수십 년 동안 ‘근대’의 승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식, 아시리아식, 쿠르드 또는 아랍식 지명 수만 개가 터키식 호칭으로 대체됐다.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됐다.(7) 다음의 두 수치를 보면 이 파괴가 어느 정도로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아르메니아 대주교에 따르면 1914년에 오스만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 주민은 전체 주민 1,600만~2,000만 명 중 약 2백만 명이었다. 오늘날 터키 내 아르메니아 주민은 7만 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 2,500개의 아르메니아 교회와 450개의 아르메니아 수도원 중에서 40개의 교회만이 남아있고 그 중에서 34개는 이스탄불에 있다.
수십 년 동안 정의를 찾아 투쟁한 사람들은 만일 인종학살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 새로운 범죄를 부추길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왔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터키군은 독일군의 통제를 받았고 수많은 독일 장교들이 오스만제국 내의 기독교도 제거를 직접 목격하거나 심지어 그 사태에 참여하기까지 했다.(8) 양차대전 동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던 독일은 그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어내지 못했다. 나치는 터키 민족주의자들에게서 영감을 얻기까지 했다.(9)
하지만 더 나쁜 결과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던 터키에서 일어났다. 쿠르드족은 터키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청소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번에는 그들 차례가 된 것이다.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과 청년 튀르크 당, 그리고 케말에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케말은 쿠르드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렸고, 터키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술탄 제도를 폐지했다. 이에 대한 쿠르드족의 항거는 무참히 진압된 후 학살과 강제이주로 이어졌다. 쿠르드족의 정체성마저 거부됐다. 간단히 말하면 쿠르드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감히 그에 거역하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누구든 벌을 받았다.
 
과거의 범죄를 기억하려는 노력
 
터키공화국은 인종학살의 비극적 유산을 청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학살에 책임이 있는 조직이 오스만제국의 폐허 위에서 탄생한 케말 공화국의 중추가 되었던 것이다. ‘테스킬라티 마흐수사’라 불리던 그 특수조직(OS)은 오스만제국 집권당이었던 통일진보위원회(CUP) 내의 비밀결사대였다. 이 조직은 러시아와 영국 내 이슬람 주민소요를 조장하려는 목적으로 창설됐다. 그들은 국외 전선에서는 실패했지만 국내에서 학살과 강제이주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전직 OS 장교들은 케말이 그리스군, 프랑스군, 영국군에 대항해 일으킨 독립전쟁(1920~1922)에 결정적으로 개입했고, ‘국가 안의 국가’를 형성했다. 터키공화국 내에서 장교단은 무한대의 권력을 누리며 모든 법의 틀을 벗어났다. 그들은 정적을 암살하고 쿠르드족과 좌파 게릴라와 전투를 벌이며 사회 내의 민주적 발전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또한 국가의 비호 아래 엄청난 마약밀매에도 가담했다.(10)
과거의 폭력은 폭력을 키운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동안 터키는 재빨리 아제르바이잔 편을 들었고, 1993년부터는 아르메니아와 사실상 아르메니아 자치공화국이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봉쇄를 실시하고 있다.(11) 터키-아르메니아 국경은 냉전시대 때처럼 완전히 차단되어 엄중하게 감시되고 있다. 압둘라 귈 대통령이 예레반을 방문하고 2009년 10월 취리히에서 터키-아르메니아 수교의정서가 채택되면서 터키가 긍정적으로 개입하고 평화적 해결책에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됐다.(12) 그러나 의정서는 여전히 비준되지 않고 있고, 세르지 사르키샨 아르메니아 대통령은 지난 2월 16일 “터키 정부가 정치적 의지가 없고”, “의정서의 기한과 정신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아르메니아는 평화협상을 포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터키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정기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에서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극단적 입장을 견지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십 년 간 침묵을 지켜오던 터키는 소수의 의인들 덕분에 별안간 아르메니아인들의 기억을 되찾게 됐다. 인권운동가이자 출판인이기도 한 라깁 자라콜루는 아르메니아 인종학살에 관한 저서들을 터키어로 번역했는데, 이미 고인이 된 자신의 부인과 마찬가지로 이 일로 인해 수차례 박해받으며 투옥되기도 했다. 타네르 아캄은 터키에서의 가혹행위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 19세기 말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발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인종학살을 폭로했다. 그는 저명한 아르메니아 역사가인 바하큰 다드리언과 공동 작업을 펼쳐 상당수의 역사서를 펴냈고,(13) 덕분에 인종학살로 중단된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지식인들 사이의 우호관계도 상당히 회복됐다. 미시간대학의 소규모 교수모임은 학제 간 연구의 일환으로 터키-아르메니아 역사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그들이 개최한 7회의 국제강연회를 통해 학계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아르메니아인 인종 학살이 오스만 연구와 인종학살 관련 연구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됐다.(14)
하지만 터키 여론이 아르메니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든 사람은 바로 터키-아르메니아계 언론인이자 주간지 <아고스> 편집장이기도 한 흐란트 딘크다. 그는 ‘이 땅에 아르메니아인이라 불리던 민족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대단히 단순한 표현으로 터키인의 양심을 파고들었다. 딘크는 터키 정부의 박해를 받았고, 법정을 전전하다 자신의 신문사 앞에서 대낮에 암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대중시위가 일어났고, 10만 명의 인파가 그의 관을 뒤따르며 노래했다. “우리는 모두 흐란트 딘크다! 우리는 모두 아르메니아인이다.” 언젠가 딘크는 두 민족이 모두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트라우마로 고통 받고, 터키인들은 과대망상으로 고통 받는다.” 진실이 치유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도 좋을까?
 
 
글‧비켄 체티리언Vicken Cheterian
언론인이자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고 있고, 웹스터 제네바 학교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Open Wounds: Armenians, Turks, and a Century of Genocide>(2015), <From Perestroika to Rainbow Revolutions : Reform and Revolution after Communism>(2013)가 있다.
 
 
번역·김계영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 <르몽드 세계사3>(2013),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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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티야 제텐(Fethiyé Cetin), <내 할머니의 책>, L'Aube, 파리, 2006.
(2) 아이세 굴 알티나이(Ayse Gül Altinay) & 파티야 제텐, <손자들>, Actes Sud, 아를, 2011.
(3) 로랑스 리테르 & 막스 시바슬리앙, <검의 잔해. 터키 내의 숨겨진 이슬람 개종 아르메니아인들>, Thaddée, 파리, 2012.
(4) 조셉 야쿱, <누가 기억할 것인가? 1915년. 아시리아-칼데아-시리아 인종 학살>, Editions du Cerf, 파리, 2014년 참조.
(5) 리파트 N. 발리, <국가의 시민모델. 다당제 시기 터키의 유대인>, Fairleigh Dickinson, 메디슨, 2012.
(6) 스탠포드 J. 쇼 & 에젤 쿠랄 쇼, <오스만제국과 근대 터키의 역사>, 2권, 캠브리지대학 출판부, 1977년 참조.
(7) 더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레몽 케보르키앙, <아르메니아 인종 학살>, Odile Jacob, 파리, 2006년, 레몽 케보르키앙 & 이브 테르농, <아르메니아 인종 학살 회고록>, Seuil, 파리, 2014년 참조.
(8) 바하큰 다드리언, <아르메니아인 인종 학살에서 독일의 책임 : 독일 공모의 역사적 증거에 대한 고찰>, Blue Crane Books, 워터타운, 1998.
(9) 스테판 이히리히, <나치 상상력에서의 아타르튀크>, 하버드대학 출판부, 캠브리지, 2014.
(10) 켄달 니잔, ‘터키, 마약밀매의 요충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8년 7월호 참조. Cf. 라이언 진저러스, <헤로인, 조직범죄, 그리고 근대 터키 만들기>,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뉴욕, 2014.
(11) 필립 데캉,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상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2월호.
(12) <카프카스의 전쟁과 평화 : 러시아의 불안한 국경> 3장, Hurst & Company, 2009.
(13) 바하큰 다드리언 & 타네르 아캄, <이스탄불의 심판 : 아르메니아 인종 학살 재판>, Berghahn Books, 뉴욕, 2011.
(14) 그들의 몇몇 작업은 로널드 그리고르 수니, 파트마 뮈게 고제크 & 노먼 M. 네이마크 엮음, <인종 학살 문제. 오스만제국 말기의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2013년에 들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