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세상에 소리를 내는 세네갈 청년들

2015-06-04     자크 드니

 

3월 16일에서 18일 사이, 이아나마흐(Y en a marre, YEAM/역주 : ‘이제 그만’) 소속의 세네갈 청년 5명이 킨샤사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촉진시키기 위해 킨샤사를 찾았다가 고국으로 추방되었다. YEAM은 이미 세네갈에서 2011년 이후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고, 이웃나라 부르키나파소와 나이지리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의 참패에 큰 기여를 한 이아나마흐. 3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당파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현실과 좀 더 가까운 미래를 그려나가려 하고 있다.
2월 13일 금요일 오후 4시, 다카르 소재 셰이크-안타-디옵 대학교. 모두가 기도를 한 다음 세네갈 국가를 제창했다. 이아나마흐가 주최하는 모든 회의장에서 치러지는 의식이다. 흰색 텐트 아래에 모인 학생과 교수들은 2014년 8월 경찰과의 충돌로 사망한 청년 압두 바씨루 파예 사건 이후 드넓은 캠퍼스를 뒤흔들고 있는 시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청년들은 장학금 지급과 학습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곳곳에 지핀 모닥불, 시위대의 행렬, 도발, 진압…, 폭력이 난무한다. 바바카르 음바예 디옵 철학과 교수는 “행동방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30대의 이 교수는 2000년대 학생운동에 가담했을 때 연단에 서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수많은 참석자들의 질문이 이어지기 전, 힙합그룹 Campus 2H의 래퍼 다섯 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 상황을 말할 겁니다.” 그들의 펀치라인에(1) 리듬을 맞추는 소리들을 들어보라. 그들의 티셔츠에는 이 단체의 로고가 크게 박혀 있다.
사실상 비폭력적인 힙합계 출신의 YEAM은 2012년 대선 당시 투표소에 가서 “표심을 보여주자”고 세네갈 수도 외곽의 청년들에게 호소하면서 유명해졌다. YEAM은 의향서에서 “시민들의 공화국”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세네갈 모델”의 출현을 촉구했었다.
YEAM은 튀니지의 지네 엘-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이 사퇴한 다음날인 2011년 1월 15일에 탄생했다. YEAM의 설립자 중 한 명인 36세의 파델 바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징조”였다고 말한다. 2011년 6월 23일, 며칠 동안의 시위 끝에 이 단체는 압둘라예 대통령이 제의한 헌법개정안의 철회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세네갈 국민들은 대통령이 자신의 아들 카림을 임명하려고 이 개정안을 제안했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회의에 참석하고 단체를 잘 아는 소로 디옵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행위는 비싼 돈을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유를 위한 투쟁입니다. 세상이 텅 빈 소리를 내면 세상을 두드려 소리가 울리게 해야 합니다. YEAM이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깨우고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죠.”
바로는 자발적으로 이웃나라 카보베르데 독립의 영웅인 아밀카르 카브랄이 썼던 것과 같은 모자를 쓰고 범아프리카주의에 나서고 있다. 천으로 된 이 전통 모자는 혁명가의 용기와 결의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어떤 작은 곳이라도 그곳을 쟁취하기 위해 카브랄은 도착하는 즉시 보건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우리에게는 교훈을 준 것이죠! 하지만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유주의자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가치를 찾고 있고, 그러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생각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좌파가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정치 풍경에서 우리는 미확인 비행물체와도 같다.”
 
YEAM의 주요 설립자들 중에는 정치적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이 때문에 단체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바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심도 있게 일한다고 대답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며 원망하고 또 다른 이들은 우리의 자리는 영원히 거리 위가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어떤 것에든 해체되는 시간과 다시 재건되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선거에서 우리는 정치단체를 구성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노선을 지키면서 우리와 비슷한 이들을 받아들이려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국회의원 유형의 조건을 세웠습니다, 바로, 자기 정당의 명령에는 따르지 않아도 국민의 요구에는 부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단체는 미확인 비행물체 같은 존재입니다. 전통적인 시민사회 조직도, 정당도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다.”
이처럼 긴장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카림 와데의 부패관련 소송이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전 대통령의 아들은 2008년 다카르에서 개최된 이슬람회의기구 정상회담 비용 일부를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 수장인 마키 살 대통령도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파셀 아쎄니구의 16번 구역에 위치한 방 3칸짜리 바로의 옛 집에 자리한 YEAM의 사무실에서는 단체의 활동가들이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운동은 경쟁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낡은 것’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동네의 모든 사람을 위한 보초입니다. 우리의 기반은 거리입니다.”라고 단체의 일원인 그룹 퍽앤컥의 래퍼 피디 네프가 설명한다. 사무실 벽에는 2011년 당시 시위 사진, 2012년 수도 북부를 강타한 홍수 때 구호활동을 폈던 사진, 2013년 6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세네갈을 방문했을 당시 오바마 대통령과 만났던 사진들이 붙어있다.
푸 말라드(‘미치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말랄 알마미 팔라는 아주 빠르게 YEAM의 “숭고한 대의”에 동조하여 단체의 아트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1990년대 바타이옹 블랑데(‘무장한 전투부대’)라는 그룹과 함께 이름을 날렸던 이 래퍼는 “정치인들에게만 현장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들의 수가 가장 많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많은 비평으로 압박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에게 결정의 메커니즘에 관한 인식을 갖게 할 뿐 아니라, 특히 “잊혀진 동네”에서의 일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바이다. 세네갈 국내에서 약 400개의 YEAM 지부가 “에스프리(‘정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안 찾기”,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만들기”는 다카르의 인구과잉 외곽도시이자 평판이 썩 좋지 않은 게디아와예에 자리 잡은 문화원 G Hip-Hop의 기본방침이다. 이곳에 활동가들이 모여 있다. 젊은이들은 “우리는 짐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 스스로가 수단이다”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이 구호는 일리가 있다. 세네갈 실업자 중 60%가 15~34세의 청년들이기 때문이다.(2)
낡은 시립경기장 앞, 활동가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옛 쓰레기처리장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지원을 얻으러 갔다. 야외무대, 몇 평 안 되는 녹음스튜디오, YEAM이 요리공간으로 활용하길 원하는 바(bar) 등의 건물 건축에 3천만 CFA프랑(45만 유로) 이상을 출자한 에파쥬 기업을 먼저 찾았다. 또 그들은 세네갈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쓰레기통을 주변 거리에 놓기 시작했다. 재활용 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쓰레기통이었다. “감독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국내 14개 지역에 올바른 지역관할권 관측사무실을 설치했습니다. 시민들을 다시 정치적인 것에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푸 말라드는 젊은 옛 재소자들의 사회 복귀를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세네갈 힙합계는, 디디에 아와디의 앨범 <아프리카의 대통령>에서부터 YEAM 설립자 중 한 명인 티아트가 리더로 있는 케르기 그룹의 앨범 <여론>에 이르기까지 세네갈에 군림하고 있는 씨족체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마키 살 대통령은 어떤 다른 정당보다도 힙합계의 움직임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밑에서부터 시작돼야 합니다”라고 래퍼 마타도르는 주장한다. 마타도르는 YEAM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YEAM의 실용적 논리를 공유하며 그들을 지지한다. 마타도르는 2006년, 피킨시 젊은이들에게 정보와 교육을 제공하는 힙합 문화 공간 아프리컬처반을 만들었다.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움직임
 
현재 세네갈에는 3천개 이상의 랩 그룹이 (하마두 폴 바의 표현대로) “아티비스트”의 소명을 불러일으키며 활동을 하고 있다. 마타도르의 동료인 하마두는 역사적 진원지가 다카르인 음악을 소개하는 페스타2H 페스티벌을 맡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인적자원을 길러냈습니다. 바로 도시의 젊은이들입니다. 모든 것을 새로 구축해야 합니다. 피킨과 게디아와예에 사는 사람이 2백만 명이 넘는데도 대학교도 없습니다. 대량실업과 불안정, 이것이 일상입니다.” 기대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스스로를 “이아나마흐인“이라 느끼고 있다. 하마두 폴 바는 “단순히 말해서, 혁명은 명품입니다. 그것을 마련할 방도가 우리에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육적 차원에서 지식전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본분을 잊었을 때 따끔한 충고로 상기 시켜줄 뿐이죠. 하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의 래퍼들은 프란츠 파농이나 마키아벨리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 우리보다 더 잘 준비된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YEAM이 세네갈의 정치에 부담을 주고 있고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에티아메(폰어(3)로 ‘이아나마흐’라는 뜻)의 근원지인 코트디부아르와 토고의 청년들, 말리의 “소파 드 라 레퓌블리크(‘공화국의 소파’)”, 가봉의 “이아나마흐 꼼싸(‘그런 식은 이제 그만’)”, 모리타니의 “뚜슈 빠 마 나쇼날리떼(‘내 국적 건드리지 마’)” 등의 단체들이 그 증거이다. 2014년 10월 블레즈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을 정권에서 쫓아낸 “르 발레 시투아옝(‘시민 빗자루’)”도 빼놓을 수 없다.
 
 
글‧자크 드니Jacques Denis
다양한 분야에서 언론인, 기자,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의 펑크를 찾아가는 워크무비 “Punk Me”를 연출했고, 피에르 메리메Pierre Mérimée와 공동으로 팔레스타인 랩을 조명한 책 <인티파다 랩(INTIFADA RAP)>(L/OA EDITION)을 펴냈으며 아프리카 음악 전문 인터넷 사이트 Superfly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랩에서, 펀치를 맞은 듯 인상적인 구절들을 말함.
2) 국립 인구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국내 실업률은 25%였다.
3) 특히 토고와 베냉에서 사용되는 매개 언어.